9화
9화
거의 무관심에 가깝게 자식을 키우는 아버지.
그러나 물질적으로 아이들을 풍족하게 만들어 주는 아버지.
나야 신경 안 쓰고, 터치도 안 하고 돈만 따박따박 채워 주는 아버지라면 내 입장에서는 그보다 좋은 아버지가 또 있겠는가.
하지만 이유나의 상태 개선을 위해서라면 바뀌어야 한다.
단순히 물질적 풍요만 주는 아버지로는 이유나의 정신을 치유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유나와 이천호의 중간 역할을 하고자 먼저 그와 친해질 방법을 모색했다.
그리고 첫 만남부터 가타부타 하기 보다는 정면 승부를 보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런 반응은 예상 못 했는데?’
내가 생각했던 반응과 완전히 딴판이었다.
내 시나리오에는 이천호가 포옹을 거절하거나, 혹은 포옹을 해도 무덤덤하게 받아 들이는 것, 그것도 아니면 화를 내는 것 등등.
부정적인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얼마나 떨고 있는지, 얼마나 심장이 쿵쾅 대며 뛰고 있는지.
나는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지금 기뻐하고 있다.
이천호는 원래 자식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사랑도 없는 아버지가 아니었나?
‘이천호도 나쁜 아버지는 아니었구나.’
내가 오해하고 있었다.
그 역시 자식들의 사랑을 원하는 한 아버지였던 것이다.
‘결국 이유나도, 이천호도 각자의 아픔 때문에 가까워지지 못 한 거였구나.’
치료가 필요한 건 이유나 뿐만이 아니었다.
이천호, 이 세계적인 마에스트로도 가슴 안에 깊이 숨겨 둔 상처가 있었다.
* * *
“······.”
아빠는 원래 집에만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엄마 아빠가 함께 있는 날 동안 단 한번도 집이 조용한 적이 없었다.
원래 아빠는 과묵한 사람이라 주로 엄마 혼자 열심히 떠들었다.
그러다 아빠도 그 밝은 에너지에 동화되어 주저리주저리 떠들곤 했다.
그런 집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죽고 나서 아빠는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그때부터 집에서 밝은 웃음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라 생각했다.
“호호. 우리 유성이 정말 말 재밌게 하지 않아요, 여보?”
그런데 식탁 위에서 모두가 웃고 있다.
“······.”
이유나는 열심히 혼자 떠들며 분위기를 맑게 만드는 동생을 쳐다보았다.
지금 보니 유성이는 엄마를 참 많이 닮았다.
얼굴도 그렇고, 주변에 행복 바이러스를 뿌리는 것도 똑같다.
솔직히 동생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아빠에게 안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동생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본 것은 아니지만, 아빠를 무척 싫어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동생은 전혀 그런 낌새가 없었다.
그걸 보고 이유나는 다시 한번 느꼈다.
엄마가 죽고 나서 우리를 여기다 놔두고 비겁하게 도망쳐 버린 아빠.
혼자 슬픔에 젖어서 동생을 챙기지도 못 한 누나.
이런 망가진 사람들을 품고 살며 가끔씩 혼자 방에서 울고 있던 새엄마.
동생은 이 모두를 받아 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동생의 그런 어른스러운 마음가짐이 칙칙한 이 집안을 밝게 만들고 있었다.
“아빠. 이번에 영국에서 크게 연주회 하신 거 봤어요. 풀영상이 없어서 아쉬웠지만, 영국 국왕까지 와서 들었다면서요? 아주 극찬을 했다고 하던데.”
“크흠. 그, 그거야······.”
“그거 보고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몰라요. 우리 반 애들도 늘 아빠처럼 되고 싶다고 하고요. 제가 아빠의 절반만 따라가도 참 좋으려만.”
“허허. 녀석.”
아빠의 잔잔하면서 푸근한 미소도 정말 오랜만에 보게 되었다.
동생의 기습 숭배에 정신을 못 차리는 듯보였다.
씰룩이는 입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아빠도, 엄마도, 동생도.
모두가 웃고 있다.
‘섞이지 못 하는 건 나 혼자구나.’
너무 어둠에 오래 머물러 있었던 탓일까.
이 자리가 자기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자기 때문에 더 밝아야 하는 분위기가 축 내려지는 것 같달까.
‘하지만······.’
나도 여기 있고 싶다.
그 옛날 그때처럼 다 함께 웃으며 떠들고 싶다.
그런데 지금은 잠깐 자리를 벗어나야 할 것 같다.
덥석-!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동생이 이유나의 팔을 붙잡았다.
이유나가 일어나려 하는 것을 눈치챘던 것일까.
벗어나려고 해도 동생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화장실 갔다 오려고 한 건데······.’
하지만 차마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 * *
즐거운 식사 시간이 끝났다.
아니. 즐거운 게 맞았나.
나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떠드느라 입이 아팠다.
원래 난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직업 특성상 나는 주로 듣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쉬지 않고 떠들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밥만 먹어야 했을 테니까.
타다닥-.
식사가 끝나자마자 이유나는 어디론가 뛰어가 버렸다.
아까 자리가 불편했는지, 억지로 일어나려는 것을 내가 막았다.
이런 자리를 한번 피하기 시작하면 영원히 함께 어울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저렇게 뛰어가는 것을 보면 거부감이 조금 심했을 수도.
이건 차차 적응할 수 있게 도와줘야겠지.
“그래도 오늘 한 스텝 나간 건가?”
이유나, 이천호.
두 사람 모두 마음의 병이 있다.
이유나만 치료를 하면 될 줄 알았더니, 이천호도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 모두 마음의 짐을 덜고 시작해야 깨졌던 관계를 복구할 수 있으리라.
똑똑-.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어머니가 또 과일을 들고 오신 건가?
“네.”
“······잠깐 들어가도 되겠니?”
하지만 들어온 건 어머니가 아니라 이천호였다.
그것도 한 손에는 과일이 담긴 접시를 들고!
아마 어머니가 일부러 쥐여 준 거겠지만, 오늘 사람 여러 번 놀라게 만든다.
“네 엄마가 이걸 챙겨 주라고 하더구나.”
“아, 넵. 감사해요.”
과일 주고 나서도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니, 어른한테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지만 좀 귀여운 구석이 있으시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그게 말이다. 저······ 내가 우연히 네가 쓴 악보를 봤거든.”
악보?
아. 설마 김국영 선생님이 준 과제로 쓴 곡을 말하는 건가?
‘하필 봐도 그걸 보다니.’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휘갈겨 쓴 악보.
다음에는 이런 특별 과제를 받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실하게 담겨 있는, 그런 악보였다.
그런데 그걸 이천호가 보고 말았다.
세계적인 마에스트로인 그의 눈으로 봤을 때 얼마나 그 악보가 형편 없었을까.
이놈이 정말 내 아들이 맞나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열심히 쓴 거 같더구나.”
······애써 위로해 주는 건가.
착한 아버지구나.
“죄송해요. 제가 너무 대충 만들었죠?”
“아, 아니다. 구성도 좋았고, 대위법에 위배되지 않게 정말 잘 만들었어.”
그거야 화성학 하나는 내가 끝내 주게 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 그뿐이다.
나는 기계처럼 수식에 맞춰 곡을 뽑아낼 뿐.
심지어 이 곡은 그냥 떠오르는 악상을 마구잡이로 휘갈긴 거라 더 형편 없었다.
그걸 이천호도 분명 알고 있을 터.
그럼에도 이렇게 말해 준다는 건 역시 아들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늘 좋았던 분위기를 망치기 싫어서일까.
“다음에는 더 열심히 만들게요.”
“그······ 그래. 넌 재능이 있는 것 같더구나. 열심히 해보렴.”
“넵.”
이천호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본인 눈에 쓰레기 같은 악보였겠으나, 그래도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을 보면 역시 그는 좋은 아버지였다.
‘아니면 조언을 해줘봤자 돌이키기에는 이미 늦은 놈이라서 그런 걸수도.’
나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전환시키고자 다른 주제를 꺼냈다.
“아빠. 스케줄 때문에 많이 바쁘시죠? 외국도 나가셔야 하고.”
세계적인 마에스트로이지 않은가.
스케줄이 아주 꽉 차 있을 것이다.
“월드 투어가 끝나서 일단 한국에 있긴 할 거다. 물론, 스케줄이야 소속사에서 짜주겠지.”
“아······.”
“왜 그러니?”
“그냥요. 또 스케줄 때문에 바쁘게 움직이시다 보면 얼굴 볼 일이 많이 없을 것 같아서요.”
그럼 많아야 일주일에 한번, 아니면 한 달에 한번 보는 것도 감지덕지라는 거구나.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있다.
충격 완화를 위해서라도 조금씩 텀을 두고 이유나와 이천호가 마주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다음에 가족끼리 여행도 가고 그래요. 그동안 우리 가족끼리 모여서 뭔가를 한 적이 없었잖아요?”
“······그래. 꼭 그러자꾸나.”
2주에 한번.
아마 이것이 최대치일 거다.
나 역시도 매일 이천호를 보면서 둘 사이를 조정하기 보다는 텀을 두고 만나는 것이 훨씬 나았다.
정신적 피로도 덜할 테고.
그렇게 사이클을 정하고 이유나와 이천호의 관계를 천천히 좁혀 보자.
* * *
탁-.
아들 방에서 나온 이천호는 자기 머리를 한 대 쥐어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으이구 이 멍청이.
조금 더 아들을 칭찬해 줘도 될 판에, 그거 하나 못 해주냐?
이천호는 아들이 쓴 곡을 보고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 녀석은 작곡의 엄청난 재능이 있는 천재라는 것을.
넌 천재다.
아마 천일고에서 너만한 천재는 없을 거다.
너의 곡에는 사람의 감정을 건드는 무언가가 있다.
그러니 자신감을 가져라!
하루종일 칭찬을 해도 모자를 판에, 그게 뭐가 힘들다고 이러는 것인지 원.
사람들은 이천호가 과묵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마에스트로라 칭송하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냥 그는 소심한 것이었다.
그저 얼굴이 좀 무섭게 생겨서 사람들이 그런 착각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좀 더 곡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아들은 악보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부었다.
딱 보면 티가 났다.
보통 그 나이대에 쓰는 곡은 완전 자기 마음대로 써버린다.
말 그대로 그냥 휘갈긴다는 것이다.
이천호도 저 나이대는 곡을 정말 날림으로 썼다.
하지만 아들의 곡을 보면 프로가 쓰는 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화성학에 어긋나는 음표가 하나도 없었달까.
저 나이에 화성학을 통달하여 기승전결을 완벽하게 넣는 작곡가가 세상에 얼마나 있겠는가.
그리고 그 정도 경지에 이르려면 제 아무리 천재라도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천호도 아들과 같은 길을 걸었기에 알고 있는 것이다.
‘내 무관심 속에서 정말 열심히 노력했구나.’
그래서 기특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애초에 방으로 들어간 이유가 아들에게 그 곡을 무슨 뜻으로 썼는지, 어떤 스토리가 있는지를 묻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왠지 아들이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 같았다.
집에 들어오지도 않다가 갑자기 뜬금 없이 찾아와서는 제 방을 뒤지고 악보까지 봤다.
아들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쁠 수밖에.
거기다 예술이라는 것이 그렇다.
예술가는 본인의 작품으로 마음을 드러낸다.
즉, 그것에 대해 누군가와 편히 말한다는 건 자신의 속내를 함께 밝히는 것과 같았다.
아직 아들과 자신 사이에 그 정도의 친밀감은 쌓지 못한 것이다.
‘내가 너무 가정에 소홀하긴 했지.’
그래서 아들이 서운함을 드러낸 것 같았다.
일부러 스케줄까지 물어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아들이 저렇게까지 노력해 주는데.’
오늘 아들 녀석은 본인 스스로가 앞으로 먼저 나와 이 겁 많고 멍청하기만 한 아버지를 꼭 끌어 안아주었다.
사실 그때 눈물을 흘릴 뻔한 걸 정말 간신히 참았다.
그래. 아들은 지금 마땅히 아비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해 주고 있는 것이다.
먼저 앞으로 다가가 줘야 할 사람은 아버지이거늘.
아들이 정말 큰 마음을 먹고 다가와 주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아버지라는 녀석이 어떻게 아들의 노고를 외면할 수 있을까.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하자.’
고민은 길지 않았다.
[예, 마에스트로. 어쩐 일이십니까?]
“저······ 황 대표님. 죄송한 말씀이지만, 당분간 제 스케줄은 안 잡아 주셨으면 합니다.”
[네?]
황 대표는 꽤 당황한 눈치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소처럼 일만 하던 놈이 갑자기 쉰다는 말을 하니까 말이다.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있고 싶어서 말입니다. 괜찮을까요?”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잔잔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이죠. 그렇지 않아도 너무 열심히 일하셨어요. 당분간 푹 쉬십시오. 안식년이라 생각하시고요. 안 그래도 스케줄은 따로 잡지 않고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옙. 마에스트로. 편안히 쉬십시오.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 주시고요!]
소속사를 참 잘 만난 것 같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하곤 했었다.
황 대표는 돈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먼저 챙겨 주는 느낌을 줬다.
“그럼 당분간 집에만 있는 건가.”
갑자기 백수가 되었다.
단 한시도 쉬지 않고 일했던 이천호이기에 당장 내일부터 할 일이 없다는 것이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왠지 싫지가 않다.
더 이상 이 집이 차갑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드디어 집이, 정말로 편안히 쉴 수 있는 보금자리가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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