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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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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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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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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기(5)

DUMMY

벼락이었다. 잠시나마 그렇게 생각할법 했다.


이 순간 악가 묵천암뢰신공(墨天暗雷神功)의 내공 진기가 인지를 뛰어넘은 속도로 악예린의 손을 휘감았다. 흑단목 창대부터 만년한철로 된 날까지 전부 진기에 뒤덮여 허공을 가르는데 시리게 빛나는 것이 숫제 뇌전으로 이루어진 창과 다를바가 없다.


동시에.


그 창법 구결이 더없이 독특했다. 일전과 다르다. 사십구식 연환창식은 란나찰(攔拿扎)을 기반으로 한 기본적인 창의 묘리에 충실한 무공. 그 자체로도 섬전같은 강력함을 지니고 있다. 허나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무공은 무언가 뒤틀려 있었다.


‘구결이 난해하다 했던가.’


그 말을 이해할 듯 했다. 희끗하게 빛나는 창끝이 사선에서 시야를 베어낸다. 찰나지간 일곱개의 잔영으로 분열하는 것과 같은 감각을 주면서.


암천화광창(暗天火光槍).


본디 어두운 하늘을 밝히는 빛살같은 창이라는 뜻이라고 이해했었다. 이제보니 아니었다. 단지 압도적인 화광(火光) 앞에 다른 모든것의 빛이 짓눌려 어두워질 뿐.


찰나지간 빛살을 손아귀에 쥔 악예린이 창을 휘둘렀고.


파바바바박!


거친 소리와 함께 눈앞에 일곱 줄기의 투로가 전진했다. 바위의 면을 따라서 거칠게 베어낸 자국. 시야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거대한 바위의 표면을 따라 사방으로 굵직한 자국이 움푹 패여들어갔다.


악예린이 서 있는 바위의 앞부터, 그 면 전체를 따라서.


직후 악예린이 창의 파지법(把指法:쥐는 자세)을 바꾸며 꿈결처럼 회전했고, 어느새 그녀는 회전하는 기파가 휘감긴 창끝을 일직선으로 내뻗고 있었다. 칠절(七絶:일곱번 베어냄)의 일격에 이어지는 찌르기였다.


콰아앙!


굉음이 울린 직후 다시 주변의 밝기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느껴졌을때 악예린은 창을 뻗은 자세 그대로 호흡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어깨선부터 곧게 뻗어나간 창끝은 바위의 한중간 코앞에서 멈춰서 있었다. 날과 바위의 거리가 채 한치도 되지 않았는데, 놀라운 것은 그런점이 아니었다.


창날의 앞.


바위의 한중간을 따라 굵직한 구멍이 나 있었다. 지름이 손가락 두 마디나 될까 싶은 원형의 구멍이었다. 모위진이 사일검법으로 뚫어낸 자국을 흔적도 없이 삼켜버린 일격.


백연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완전히 꿰뚫었다.’


일곱번의 참격에 이은 마지막 찌르기가, 거대한 바위의 중앙을 깨끗하게 관통했다고.


“......후우.”


옅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숨을 탁 내쉰 악예린이 창을 거두며 고개를 들때까지도 그러했다. 지켜보던 능운검절도 적지않게 놀란 표정이었다.


‘또 발전했는가. 어찌 저런......’


한걸음 따라갔다 생각했을때 두발짝 앞서 가는 천재였다. 능운은 무영을 슬쩍 바라보곤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저 뇌룡의 위에 검룡이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어쩌면 암화도 존재한다. 조급하지 말아야 한다고 되뇌어도 마음이 착잡해지는 것은 어쩔수가 없는 수순인 것이다.


“봤어?”

“과연 뇌룡이다.”

“일전보다 더욱 강해진 모양인데, 그렇다면 검룡과 견주어도......?”


수군거리는 소리가 많았다. 악예린은 그리 귀담아 듣지 않는 모습이었다. 곧바로 백연을 돌아본 그녀가 물어왔다.


“약속, 지켰어요.”


그녀의 말에 백연이 피식 웃었다.


일전 천주산에서 헤어질때 암천화광창에 관심을 가졌던 일을 입에 담는다. 그때는 그녀 스스로도 익힐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보였는데.


가을부터 지금까지의 그 짧은 기간 사이에 사십구식을 완성하고 악가주에게 암천화광창을 전수받은 것이다. 언제나 무표정에 가까운 평정을 유지하는 악예린임에도 눈에 묘한 뿌듯함과 열기가 깃들어 있는 것이 당연하다 할만 했다.


“인상적이었습니다. 남은 초식들을 꼭 견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심을 말했다. 그에 악예린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 백연 차례에요. 보여줘요.”

“무엇을 말입니까? 저 무식한 바위덩이를 어떻게 해보려면 선천진기까지 끌어써야 할 판인데.”


씩 웃으며 말하자 악예린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언제나 선명하게 기억해요. 금원......그때 보여줬던걸요.”


금원방주를 입에 담으려다 황급히 말을 돌린다. 주변을 흘깃 쳐다본 그녀가 백연의 어깨를 가볍게 쓸었다. 속삭이듯 덧붙이는 말이 간지러웠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다 죽었을테니까요. 그곳에서.”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 말한 악예린이 미소를 지으며 한걸음 물러섰다.


그때 목소리가 울렸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인고?”


날선 능운의 음성에 백연이 시선을 들어올렸다.


“지금 하지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다른 칠룡들이 제각기의 걸음으로 바위 앞에 선것과 다르게. 아무런 보법 기파도 일으키지 않고 동혈의 앞에 다다른 백연이 고개를 꺾어올렸다.


‘더럽게 크네.’


백연이 생각했다.


벨 수 있을지에 대한 가벼운 의문이 스쳤다. 그가 보법을 일으키지 않고 걸어온 것은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아직도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았던 탓이었다. 검격을 펼치기 전에 굳이 보법 기파를 낭비할 이유도 없었다.


‘회복이 느려.’


평소였다면 운연동공의 공능으로 쉬이 몸이 회복되었을 것이다. 단순한 외상이었다면 더욱. 하지만 그는 석려려의 절맥증을 완화시켜주기 위해 언제나 유지하고 있던 적양공과 현음공의 균형을 깨트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 전투까지 연속해 치뤘다.


내상이라 할법했다. 진기의 불균형이 초래한 여파가 가시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적어도 한나절 정도는.


‘그래도.’


검을 휘두르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바위 표면을 손으로 쓸어낸 백연이 그 위에 새겨진 무공 흔적들을 가늠했다.


수많은 무인들이 펼친 무공 초식.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악예린이 내지른 절세의 창법까지. 어느것도 바위를 제거해내지 못했다. 그나마 악예린의 창격만이 유의미한 결과를 남겼을 뿐.


‘겨우 소청단은 수지에 안맞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검을 뽑아들었다.


검신이 부드럽게 스치는 소리와 함께 여휘가 풀려났다. 잠깐 몇몇 무인들이 흐리게 빛나는 검을 보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복잡한 초식. 검법. 투로. 여러가지가 머리를 스쳤지만 백연은 그런것을 간단히 배제했다.


대신 백연은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바위를 보며 문득 신강의 기억을 떠올렸다.


‘빛살을 갈라내는.’


소년의 손이 천천히 위로 치솟았다. 검끝이 하늘을 향했다. 삼원검(三元劍)의 천검(天劍) 기수식. 복잡한 검로가 존재하지 않는 지극히 단순한 상단세 종격.


스윽.


생각에 앞서 몸이 움직였다. 많은것을 뇌리에 담지 않았다. 성화방주에게 부탁했던 일전에서 그는 검법을 탐구하기 시작했었다. 태청신공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무공.


그 검은 분명 신강 무덤에 진입하며 얻었던 심상이 기반이다. 그 이후 사천에서 당가주와 대면하며 그때의 심득을 다듬었다. 아직 미완의 심상에 불과한 그의 검법을 보고 성화방주는 그리 평했었다.


피하는 것 외에는 막을 수가 없는 극공의 검법이 탄생할지 모른다고.


‘검법 구결을 확인해야 한다.’


이 자리에서는 검법의 파괴력이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의 몸 상태로는 그가 본래 낼 수 있는 파괴력의 절반도 내기 어려울 터. 하지만 그가 보고자 하는 것은 검법의 공능 그 자체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 대상을 상대로도 통하는지.


저 거대한 바윗덩이가 무인들이 장포마냥 몸에 덧대어 두르는 대부분의 호신기나 호신강기보단 단단할 것이니. 이것은 그의 무공을 시험할 기회였다.


‘지금.’


이제 태청신공 진기를 끌어올리는 것에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상단세로 치켜든 검을 자연스레 그어내리는 순간이었다. 반보 뻗어나간 걸음이 발끝부터 여휘검을 감아쥔 손끝까지 완벽한 균형을 엮어내고.


찰나지간 숨쉬듯 발출된 뇌기가 여휘를 시린 백광(白光)으로 물들였다. 지켜보던 이들의 눈에는 문득 소년의 손에 벼락이 현현한듯한 착각이 일었다. 직전 뇌룡이 펼쳐낸 암천화광창의 빛살과도 달랐다.


분분히 튀어오르는 순백의 뇌기가 주변의 대기를 저릿한 감각으로 물들인다. 찰나지간 검격을 바라본 모두의 시야가 새하얗게 명멸했는데, 안법을 일으킨 상태에서도 그 검로를 인지할 수가 없었다.


서걱.


직후 아주 옅은 소리가 사람들의 귓가를 스쳤다. 극히 미미한 소음은 그 자리에 있었는지도 모르게 지나갔다. 이윽고 사람들의 시야가 정상적으로 돌아왔을때, 백연의 검끝은 땅을 향하고 있었다.


직후.


“음......?”


먼저 미간을 좁히며 당황한 듯한 음성을 낸 것은 팽악이었다. 팔짱을 풀고 막 달려나가기라도 할 듯 한걸음을 내딛은 그가 눈을 깜빡였다.


“어째서?”


당황과 의문이 섞인 목소리였다. 그의 눈앞에서 일어난 광경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이윽고 잠시 고요해졌던 주변에서도 천천히 술렁이는 반응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감탄이나 경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외려 의문의 음성들.


바위가 부서졌거나 베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진 까닭이다.


“흐음. 뭐지? 저놈이 실수를 했을리가......”


당소하도 미간을 좁혔다.


검을 거둔채 바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백연. 여상한 태도로 바위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행색이 침착했다. 허나 소년의 앞에 자리한 바위에는 어떠한 흔적도 더해지지 않았다.


다른 칠룡들 마냥 큼직한 자국이나 상해가 남은것도, 일전의 무인들처럼 자그마한 흠집을 낸것도 아니었다.


“호오. 이건 예상외군. 암화의 무위에 대한 소문이 그리 자자했는데.”


나직한 기쁨이 섞인 목소리는 능운의 것이었다.


“헛손질이라도 한 것인고......하하. 아무렴, 실수할때도 있는 법 아니겠나. 너무 상심하지 말게.”


동혈을 틀어막은 바위는 그저 악예린의 순서가 끝났을때와 똑같은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


“뭐냐. 몸이 안좋아 보이기는 했다만. 방금 검격은 충분히 예리했는데.”


당소하가 나직히 중얼거렸다. 그가 날카로운 눈매를 좁혔다. 반면 옆에 서 있던 악예린은 잠자코 백연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듯이.


“헛손질? 그럴리가.”


당소하의 말에 답한것은 팽악이었다. 그가 어처구니 없다는 투로 말했다.


“저놈이 간격을 잘못 잴리가 없잖나. 독룡 네놈도 아니고.”

“그런데 저게 말이 되나? 바위에 검흔이 없다.”

“젠장. 그건 나도 모르지.”

“고민이란걸 좀 해보고 답해라. 멍청한 놈.”


두 칠룡의 말싸움이 나직히 이어졌다. 그 사이 주변은 조금씩 소란해지고 있었다. 암화의 무위를 의심하는 이들부터, 실수한 것이 아니겠냐는 이야기까지.


허나 그 중 몇몇은 다른것을 말하고 있었다.


“헌데, 이렇게 되었으면 결과가 안난 것 아닌가.”

“소청단을 건다 했는데, 그것은 어찌되지?”

“우열을 제대로 가리지 못했으니. 어쩌면 다시......”


바위를 부수면 영약을 준다 했다. 그 일이 지극히 어렵다는 것은 방금의 경험으로 깨달았을테지만, 동시에 욕심도 이는 모양이었다.


이미 칠룡의 손을 거치며 조금씩 훼손된 바위다. 조금 더 노력하면 부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에 스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소청단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고, 그만한 욕심은 객관적인 시선을 가렸다.


그것은 능운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외려 무영에게 기회가 있다.’


무영의 무위 또한 결코 낮지 않다. 순서를 잘 조절해 가면 무당의 제자가 저것을 부수게 만들 수 있을지 몰랐다. 능운으로써도 욕심이 생기는 일이었다. 소청단은 분명 귀한것이나,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명예는 상당히 높았기에.


이윽고 헛기침을 한 능운이 입을 열었다.


“흠흠. 허면 아직 소청단의 주인이 결정 나지 않았으니, 다시 한번 모두에게 기회를......”


그때였다.


“이곳이 북녘 하늘이로다.”


바람이 불었다. 가을 낙엽마냥 마른 목소리가 흐르는 미풍에 실려 사람들의 귓가를 스치는데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동혈의 앞에 자리한 큼직한 나무등걸에 웬 노인이 걸터앉아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백발이 인상적이었는데, 턱에 짧게 붙여 자른 수염과 길게 늘어진 흰 눈썹이 도드라진다.


“강호 무림의 미래가 은하수마냥 모여있구나. 빛나는 별들이 이리 가득한 것을.”


문득 백연은 섬짓함을 느꼈다.


어느 순간 그들의 앞에 나타나 앉아 있었는데, 그 누구도 그가 입을 열기 전까지 인지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는지.


“이 노구(老軀)가 쉬어도 될 날이 머지않았어.”


말하며 부드럽게 웃는다. 수염을 왼손으로 매만지는 모습. 그 순간 백연은 또다시 깨달았다. 눈앞의 노인은 우수(右手)가 어깻죽지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머리칼과 수염만큼이나 새하얀 장포가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그 형태가 왼쪽만 온전하다.


전부.


인지를 벗어나 있었다. 눈앞의 노인이 어떤 행동을 취하기 전까지 그랬다. 말을 하기 전까지는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고, 손을 움직이기 전까지는 외팔이임을 몰랐다.


명백히 상리를 벗어났다.


‘아득할 정도의 고수......?’


허나 이상했다. 노인에게서는 그 어떤 내공기파도 느껴지지 않았다. 반박귀진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일까. 하지만 백연은 노인에게서 미묘한 어긋남을 읽었다. 반박귀진을 이룬 무인은 평범한 사람처럼 느껴지기 마련인데, 노인은 그런 존재감을 풍기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외려 자연이 사람의 형상을 취했다거나 하는 감각.


무언가 비어있는 듯 하면서도 그 자리에 존재한다. 언제나 세상 천지에 휘도는 바람결처럼.


‘대체......’


백연이 고민에 빠져드는 그 순간이었다.


“어, 어찌 장문인께서 이곳에......?”


당황이 잔뜩 섞인 목소리가 울렸다.


얼굴이 희게 질린 능운이 곧바로 예를 취했다. 동시에 백연의 주변을 따라 칠룡이 일제히 노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본 듯이.


“무당의 장문인을 뵙습니다!”


그제서야 백연도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외팔 노인의 정체.


그는 바로 천하오대검수(天下五代劍手)의 일좌를 차지하고 있는 검객이자 무당파의 장문인인 선극(仙極)이었던 것이다.


뒤이어 그가 누구인지 깨달은 다른 무인들도 속속이 예를 취했다. 우렁찬 목소리들이 연이어 울렸다. 백연만이 가만히 서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무당의 장문인께 인사올립니다!”

“그만들 하거라. 이리 인사를 받으려고 온것이 아니거늘.”


가벼운 목소리가 바람처럼 주변을 쓸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고개를 숙인 무인들의 모습을 보며 노인이 허허 웃었다. 바람결 같은 웃음이 섞인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서로간에 무위를 선보이는 것을 잘 보았다. 별들이 제각기 빛을 더하려 노력하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구나.”


말하는 선극의 시선이 스치듯 움직였다. 그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사방에서 포권을 올리고 있는 무인들을 훑듯이 지나친 노인의 눈길이 문득 자신에게 닿아있다는 것을 깨달은 백연이 시선을 마주했다.


한없이 깊은 눈동자였다. 노인의 눈이 백연을 지그시 담았다. 이윽고 주름진 미소와 함께 선극이 말했다.


“네 검이더냐?”

“......예?”

“맞구나. 정진하라.”


그 말이 모호했으나 백연은 바로 이해했다.


여휘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엮어내고 있는 검법을 논하는 음성.


‘언제부터 보고 있던거지?’


알기 어려웠다. 한없이 비어있는 듯한 노인의 기척. 그만한 힘을 지닌 초월자라면 응당 느껴져야 할 압도적인 존재감이 없었다.


천주산 일대부터 회녕까지 뒤덮던 검왕의 초월적인 격도, 따스한 바람을 옷자락 마냥 두르고 다니는 이검(二劍)의 검성이 선보이던 압도적인 검로(劍路)도, 겨울을 가르고 노을을 피워내던 운하검신의 막대한 기파도.


그 어느것도 없다. 그럼에도 백연은 확신했다.


그가 지금까지 만난 어느 누구보다도 눈앞의 노인이 위험한 사람이라고.


“도위야.”


백연에게서 시선을 뗀 노인이 입을 열었다.


“예, 장문인.”


능운검절의 답이었다.


무당파 일대제자가 허자 배이니 허도위가 그의 도명인 모양. 능운의 목소리에는 옅은 긴장감이 묻어있었다. 가벼이 하늘을 응시한 선극이 나직히 중얼거렸다.


“해가 기울었다. 밤이 차지 않겠느냐.”

“......예?”

“이만하거라.”

“......”


선극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가 모여있는 무인들을 응시했다.


“각자의 무위가 빛나니 이 또한 좋은 광경이다. 다시 보아도 좋을 일이지만 오늘은 이만 그 빛을 아끼어 갈무리하는 것이 좋겠구나. 비무제전이 코앞이니. 그곳에서 우승하는 이에게는 소청단과도 비교가 되질 않는 상이 준비되어 있음을 노부의 이름 아래 약속하겠노라.”


나직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에 반발하거나 하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상이 걸려있는 내기를 끝내버렸음에도 그랬다. 오히려 선극을 마주한 무인들의 얼굴에는 숨길수 없는 경외심만이 가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각기 선극에게 예를 취한 무인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도위는 저녁에 옥청각으로 오거라. 잠시 할말이 있다.”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레 빠져나가려던 능운이 그 말에 표정이 굳어드는 것은 묘한 장면이었다.


가장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던 칠룡과 백연도 선극에게 인사를 올리고 물러섰다.


그렇게.


무인들이 모여있던 동혈의 앞은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바람과 자연만을 남긴채.


직전까지 소란이 일었던 증거라고는 바위에 남은 수많은 흔적밖에 없었다. 검흔, 장흔, 도흔, 창흔......


제각기 펼쳐진 무공 초식과 투로가 새겨진 바위 앞에 선 노인이 그것을 지그시 응시했다. 참으로 다채로운 초식들의 흔적이었다. 당금 정파 무림의 흔적과도 같다 할 수 있을지 몰랐다.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바위를 가만히 응시하던 선극이 주름진 손을 들어 표면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순간.


쩌억.


바위의 정중앙을 따라 거대한 금이 새겨졌다. 바위의 저 위끝에서부터 밑바닥까지 이어진, 단 한줄의 검로(劍路).


극도로 예리한 선을 따라서였다.


동혈을 틀어막고 있던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쿠구구구궁-!


천천히 반으로 갈라져 내리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굉음과 함께 자욱한 분진이 일었다. 이윽고 모든 소란이 멈췄을때, 무너져 내린 바위 틈 너머로는 동혈의 입구가 드러나 있었다. 그 앞에 선 선극이 수염을 쓸며 바위를 응시했다.


반으로 잘린 바위의 단면은 단 하나의 거친 면도 없이 매끈하게 잘려나가 있었다. 상리를 뛰어넘은 검흔(劍痕)이었다.


“남궁가주의 말이 맞았구나. 대종사의 자질이라 하더니.”


선극이 나직히 뇌까렸다.


“이곳에서 새로운 신공절학이 탄생하겠도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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