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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랑쿤의 서재

혈마비록(血魔悲錄)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판타지

백랑쿤
작품등록일 :
2016.10.26 09:10
최근연재일 :
2017.01.17 17:13
연재수 :
43 회
조회수 :
52,175
추천수 :
491
글자수 :
218,029

작성
16.10.26 09:12
조회
4,337
추천
26
글자
11쪽

합비제일루

오늘도 좋은 하루되셨길 OR 되시길~




DUMMY

-프롤로그-


여동생의 비명소리, 아버지의 고함소리.


누군가의 웃음.


잦아드는 소음, 폐로 들어오는 연기에 조금씩 흐려지는 시야.


잊으리라 생각했다.


내 곁에 그녀를 위해서, 새롭게 찾은 가족을 위해서.


[사랑해.]


당당한 그녀의 말에 부끄러워 하는 역할이 나인 것처럼, 대답하지 못하고 맞이한 입맞춤도, 함께 그려보았던 많은 날들도.


취몽루의 일층에서, 술에 취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흥청거리는 그자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모두 뇌리에서 사라지고, 아버지와 여동생의 비명만 남았다.


내 손에 들린 첫번째 심장,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세상이 지옥이라면, 모두가 야차가 되어야 하잖아."


나는 그렇게 되돌릴 수 없는 첫경험을 납득시켰다.



****



삼국지의 배경인 위진남북조시대, 유복이라는 단 한사람이 일궈 놓은 투박한 성시인 합비는 본래 볼것이 많지 않았다.


전란의 한 가운데 일구어진 도시.


위장 장료가 800의 기마로 10만의 오군을 꿰뚫고 승리를 거두었다는 과거의 최전선은 이제 밤을 맞이하고 있다.


본디 전쟁을 위해 세워진 마을과 성읍이다 보니 합비에는 오랫동안 제대로 놀 것이 마땅치 않았다.


적당히 낮은 건물과 조그마한 규모의 술집과 기방이 전부.


커다란 건물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거대세가인 남궁가의 본가와 그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의 관청이 다였다.


10여년 전까지는 그랬다.


합비제일루, 안휘제일루, 호사가들 사이에서 중원 10대 기루로 손꼽히는 취몽루가 세워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당최 주인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으며 층별로 철저히 손님을 가려 받는 상술.


층이 올라갈수록 정신 없이 뛰어오르는 입이 돌아가게 비싼 술값과 화대, 중원 곳곳에서 데려온 아름다운 기녀들.


유흥과는 좀처럼 이어지지 않았던 합비는 취몽루가 장사를 시작한지 불과 몇 년 만에 중원에서도 손꼽히는 유흥의 도시가 되었다.


여자를 찾아온 자들은 술을 마시게 마련이고, 술을 마신 자들은 도박을 하고 싶어하며 그런 자들은 소매치기들의 목표가 되어 취몽루를 중심으로 거대한 유흥의 거리가 생겨났다.


고요하기만 했던 합비의 밤은 이제 낮보다 휘황찬란한 빛을 뿜으며 움직인다.


10년이 넘게 장사를 하면서도 소유자가 누군지 밝혀지지 않는 취몽루의 음습함은 거리 가득한 기방과 도박장, 술집들이 걸어놓은 등불에 가려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갔다.


****


취몽루의 1층은 기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객잔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곳에는 이름 높은 취몽루의 기녀들에게 술시중이라도 한번 받아보려 왔다가 위층으로 올라갈 돈이 없어 술만 푸고 있는 어중이떠중이들과 지명하려는 기녀의 순번을 기다리며 술잔을 기울이는 위층 손님들이 있었다.


1층이라도 술과 음식은 비쌌지만 위층에 비할 바는 아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이곳에서 진을 치고 있다.


남궁세가 외당 10번대 대주, 세운검(細雲劍) 이필(李筆)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그놈의 돼지새끼 더럽게 오래도 있네."


이필은 초저녁부터 벌써 한 시진째 설매(雪梅)라는 기녀를 만나기 위해 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설매는 미리 예약되어있던 정씨 상회의 돼지 놈에게 붙들려 있다고 했다.


그가 외당의 회식자리에서 그녀를 처음 본지도 벌써 반년.


한눈에 사로잡혀 평소에는 거들떠도 안보던 기루를 드나든 시간도 그만큼이었다.


무림에서 이름도 높고 안휘성에서는 안 먹히는 곳이 없는 남궁세가의 외당사람이지만, 설매는 고관대작쯤이나 되어야 바로 만날 수 있다는 취몽루 3층의 기녀였고, 남궁가의 직전도 아닌 외당 출신 이필이 한 달을 뻔질나게 드나들어야 겨우 얼굴을 몇 번 볼까 말까 했다.


그래도 좋았다.


그의 동료들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라며 그가 취몽루를 들락거리는 것을 걱정했지만,

설매는 정말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비싼 노리개를 사달라는 말도 못하고 그저 다른 기녀의 것을 부러운 듯 바라보기만 하는 그런 여자다.


이필이 그 노리개를 선물로 내밀자 눈물을 흘리며 다시는 이런 걸 사오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하는 그런 마음씨 고운 사람이었다.


이곳을 드나들기만 해도 금전적으로 쪼들렸지만, 그건 그녀 때문이 아니었다.


"어이 점소이."


선물을 받고 고마워 하던 그녀의 얼굴이 생각나 마음이 급해진 이필이 점소이를 불렀다.


대체 그 정씨 놈은 언제 나오는 지 못 견디게 궁금했다.


아주 고급스러운 옷감으로 만든 옷을 걸친 점소이가 그의 부름에 쪼르르 달려왔다.


이필은 이곳 점소이들의 옷을 볼 때마다 불쾌했다.


아마 저 옷만으로도 자신의 몇달치 월급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예에 뭘 도와드릴까요. 대주님?"


젊은 점소이의 얼굴에 떠있는 영업용의 미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벗겨지지 않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부잣집 공자들이야 저 웃음이 진짜이고 대접이라고 믿겠지만 칼밥을 먹는 이필은 이미 오래 전에 그 웃음이 자신을 먹이로 여기는 것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그래 봐야 변하는 것은 없었다.


이필은 여기서 큰 손님도 아니었고, 위층과 아래층을 이어주는 것은 오로지 점소이들 뿐이었다.


그들에게 밉보여서는 한 달에 고작 몇 번 겨우 보는 설매의 얼굴도 못 보게 될 수 있었다.


그래서 항상 웃는 낯으로 대해주려고 하지만, 오늘은 그리 좋은 표정을 지어줄 수 없었다.


되면 된다. 아니면 안된다.


말이라도 해줘야 할 것이 아닌가.


벌써 한시진이 넘었다.


일이 파하자마자 쏜살같이 달려온 사람을 선약이 있다며 기다리라더니 기별조차 없는 건 대체 무슨 영문이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점소이 놈들이 무슨 농간을 부리는 것이 틀림없었다.


저번에 왔을 때 찔러준 돈의 액수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설매는 아직인가?"


조금은 짜증스러운 이필의 물음에 점소이가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저어, 그것이 저희도 최대한 빨리 올려드리려고는 하고 있습니다만, 정대인께서 밤새 계시겠다고 말씀하시며 안 가시려 하는 터라..."


"이런 발정난 돼지 같은 놈이."


행여 남이 들을 세라 목소리를 낮추고 욕지기를 내뱉은 이필은 한숨을 쉬었다.


이건 돈을 몇푼 찔러준다고 될 일이 아니구나 싶다.


아직 반년을 드나든 자신도 설매와 동침을 하지 못했건만 그 돼지놈은 아주 날로 먹을 심산이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올라가서 멱살을 잡고 끌어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설매도 그렇고 저희도 그렇고 적당히 달래서 돌려보내려고 애쓰고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심이 어떨지요?"


하고 말하며 이필의 앞에 놓인 빈 접시와 반쯤 남은 술잔을 넌지시 훑어보는 점소이.


이필은 그것이 불편해서 돌아가는 점소이에게 술과 안주를 더 시켰다.


그를 뒤로하고 주방으로 들어가는 점소이가 묘하게 웃고 있는 것을 이필은 보지 못했다.


"자네들 그거 들었나?"


"뭐, 또 무림인이 죽었다는 거? 이번에는 남궁세가 사람이라지?"


먼저 나온 술을 마시며 기다림을 달래고 있는 이필의 귀에 근처에 앉은 남정네들의 수근거림이 들렸다.


평소라면 신경 쓰지도 않을 내용이었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남궁세가라는 말이 그의 귀를 잡아당겼다.


"내당 사람은 아니고 외당 선인검이라던데 자세한 이야기는 도무지 들을 수가 없네그려."


"심장이 파헤쳐져서는 남궁세가 담벼락에 버려져 있었다는데 당최 어떤 간큰 귀신인지."


"귀신은 무슨 귀신이야. 웬 미친놈의 짓이겠지. 그 주화 뭐시기 당하면 헤까닥 돌기도 한다면서?"


주화입마(走火入魔)를 말하는 것인가 보다.


이필은 안주도 나오기 전에 한 병을 다 마실 기세로 연거푸 술잔을 들었다.


흉착귀(胸鑿鬼)


가슴 뚫는 귀신이라는 뜻이다.


이필이 취몽루를 드나들 무렵부터 시작된 엽기적 연쇄살인이었다.


"주화입마 말이지? 운기인지 뭔지 잘못하면 그렇게 미칠 수도 있다지만, 대체 사람이 어떻게 미쳐야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사람이 못하는 짓이 어디 있나. 굶으면 제 자식도 잡아먹는다는데."


자기들 딴에는 쉬쉬하며 한다는 소리가 유독 이필에게만 크게 들리는 것인지 그들의 대화가 가뜩이나 불편한 이필의 마음을 더 어지럽히고 있었다.


처음 일이 일어났을 때는 원한에 의한 복수극인줄 알았다.


죽은자가 어디서 왔는지도 또 언제 가는지도 모를 떠돌이 차력사였으니까.


심장을 적출한다는 살인 방식 또한 어지간히 원한이 있는 게 아니라면 번거로워서라도 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래서 관부도, 관부만큼 합비의 치안에 들이는 공이 많은 남궁세가도 크게 잡으려 애를 쓰지 않았다.


그게 시작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


처음에는 무림인인지조차 의문스러운 삼류들.


그 다음에는 세가나 관부에 들어가려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무공이 낮은 무인들이 지속적으로 살해당했다.


증거와 물증은 고사하고 그 근처에서 귀신을 봤다는 증인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알 수 있는 거라고는 그 악귀가 노리는 대상이 점점 더 실력 있는 무림인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어코 어제 안휘성 제일가인 남궁세가의 사람 중에서도 피해자가 나왔다.


선인검(善仁劍) 정욱(程昱).


그의 남궁세가 입가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칼솜씨와는 하등 관계없는 별호만 봐도 알 수 있듯 근방에서 인성이라면 알아주는 친구였다.


이필이 취몽루를 드나드는 것을 가장 염려하면서도 그가 속상할까 여러 번 돌려 충고를 건네기도 했었다.


그제 저녁을 함께하고 헤어진 뒤, 이필은 10년지기 친구를 심장이 뜯겨나간 사늘한 시신으로 다시 만나야 했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음에도 설매를 찾아온 이유도 그 얼굴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잠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빌어먹을."


설매를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화가 나는데 저런 소리까지 들려대니, 참을 수 없었다.


이필은 품에서 몇 푼을 꺼내어 던지듯 내려놓고 남은 술을 병째 들이키고는 취몽루를 나섰다.


점소이가 황급이 따라오며 뭐라고 말을 하지만 이필은 들을 기분이 아니었다.


이필은 홍루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대낮처럼 환한 거리로 나섰다.


씩씩거리며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점소이가 묘하게 웃고 있는 것을 이필은 보지 못했다.




잘 읽고 계신가요? 맞춤법이나 오타관련 사항은 알려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즐겁게 읽으셨다면, 선작과 추천 부탁드려요.


작가의말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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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장간(下) +1 16.10.27 2,073 19 7쪽
4 대장간(上) 16.10.27 2,277 19 10쪽
3 흉착귀(胸鑿鬼) +4 16.10.26 2,499 25 11쪽
2 점소이 16.10.26 2,873 26 11쪽
» 합비제일루 16.10.26 4,338 26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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