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백랑쿤의 서재

혈마비록(血魔悲錄)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판타지

백랑쿤
작품등록일 :
2016.10.26 09:10
최근연재일 :
2017.01.17 17:13
연재수 :
43 회
조회수 :
52,159
추천수 :
491
글자수 :
218,029

작성
16.12.22 13:50
조회
544
추천
5
글자
12쪽

인간을 버리다. (2)

오늘도 좋은 하루되셨길 OR 되시길~




DUMMY

흉착귀의 죽음.


그 소식은 사람들의 입과 강호의 정보망을 타고 빠르게 퍼졌다.


사건이 벌어지고 한참이 지나도록 제대로 쫓지도 못하던 놈이 스스로 처음 범행을 저지른 합비에 출몰해서 척살당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보다 놀라운 것은 살인귀를 잡은 사람이었다.


남궁세가의 가주, 혈검 적류의 주인, 하지만 존재감이 이상하도록 옅었던 남궁후, 운뢰대협이라는 칭호도 남궁세가의 상징과 높은 사람이라는 단어였던 자.


반쯤은 놀림감이었던 이름이고, 그럴만한 성격의 인물이었다.


하지만, 숱한 고수들을 살해한 흉착귀와 남궁후의 직접적인 충돌은 고작 세 합이라고 했다.


결과는 강호에 알려진 바와 같았다.


요행수 하나 없이 정직한 힘의 압도, 그야말로 구름 속에 숨어있던 용이 강호에 나타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남궁후와 흉착귀의 대결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를 섬전검왕(晱電劍王)이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았다.


남궁세가의 정보망과 상권의 확장에만 온 신경을 쏟고 있던 무림 대파들의 관심은 일거에 가주 남궁후의 존재로 넘어갔다.


전보다 더한 견제에 시달리게 된 현운대가 증강되었고 남궁가를 제외한 다섯 세가를 중심으로 남궁후를 차기 맹주로 만들려는 움직임까지 일어났다.


남궁세가가 비밀리에 남궁후에게 죽은 자가 흉착귀 본인이 아닐 가능성에 대해 확신에 가까운 조사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은 강호에 흘러가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와 동시에 장강이남에서 의문의 살인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 마을에 한명, 각자 다른 살해 방식, 노인부터 사내아이까지 가리지 않는 대상.


살인은 점차 남쪽으로 내려가며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것의 연관성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정파는 사파의 세력이 월등한 강남의 정보에 정통하지 못했고, 사파는 자신들끼리의 다툼에 골몰하느라 민생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던 탓이다.


두 달여, 중원을 넘어 남쪽의 아직 이름이 없는 대 산맥에 이르기까지 서른 곳의 마을에서 한 사람씩의 주검이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앞으로 벌어질 일을 사람들 앞에서 예측하는 자는 없었다.


단지, 한 무리의 왈패 떼가 살인이 벌어진 마을들을 쫓아다니며 수소문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


합비에서 흉착귀가 퇴치 당하고 두 달 뒤. 중원 이남의 이름 없는 대 산맥.


끝도 없이 이어진 수천, 수만 개의 봉우리가 장엄하게 펼쳐진 숲속의 오솔길.


그간 어디에서도 눈에 띄지 않던 적명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 이제는 갈 때가 된 듯 닳아빠진 옷.


신원을 특정하게 하는 것은 언제 가져왔는지 알 수 없는 혈수갑과 아예 붉게 변해버린 눈동자였다.


제대로 식사조차 하지 않고 다닌 것인지 퀭하게 꺼져버린 눈두덩, 피처럼 새빨간 눈동자만이 요사스러운 광채를 내며 선명하게 빛나고 있다.


“지도라도 가지고 가는 건데 더럽게 오래 걸렸네요.”


혼잣말 하듯 내뱉은 말이지만 그렇지 않다.


적명의 눈앞에는 백의를 곱게 차려입은 신선과 같은 노인이, 그와 같은 적색 안광을 안으로 깊게 감추고 있는 은혈이 있었다.


“혈랑대주를 시켜 며칠이 걸린다고 전하고 기다리라 하고는 기별도 없이, 석 달이나 돌아오지 않다니. 뭐하는 짓이냐?”

“그럴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노야하고 아주 관련이 없는 일은 아니었네요.”


씩하고 미소를 짓고는 부드럽게 대꾸하는 적명, 그 웃음에서 확실한 위화감을 느낀 은혈이다.


“네놈, 무슨 짓을 했느냐?”


그 말에 적명의 미소가 더욱 짙어진다. 이질적이다. 은혈은 그렇게 느꼈다. 아니, 은혈에게는 익숙하지만 그건 적명에게서 나올 것이 아니다.


동족과 같은 느낌을, 단지 모사품에 불과한 무공을 익힌 자가 풍기고 있다.


“저를 처음 만나고 성혈공을 제대로 익히라고 말하셨지요? 그렇게 했습니다.”


제대로 익혔다. 은혈이 상상하던 모습과 전혀 다르다. 인간의 정신을 온전하게 유지하고 자신들의 힘을 적당히 끌어 쓰는 안정적인 혈인을 생각했다.


하지만 적명의 지금 모습은 그렇지 않다.


‘이건 갓 성년이 된 우리 일족과 비슷하지 않은가?’


인간의 피를 마시는 자들의 능력을 모사한 무공, 그래서 대인(對人) 한정으로 갖게 되는 통제력이나 은폐력은 성혈공으로 재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을 벗어나 있는 그들의 태생이 가져오는 차이는 모사되지 않았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했건만 적명은 성혈공이 사실은 그들 일족의 재건을 위해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인간의 범주를 이탈한 기도를 내뿜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이해하지 못하는 은혈, 그가 지켜본 수백 년, 몇 명의 성혈교주 아무도 비슷은커녕 이러한 모습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하물며 불완전한 비급으로 난잡하게 성혈공을 익힌 적명이 그들을 추월한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성혈공, 고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고 하셨지요? 그게 아니었습니다.”


파스스.


혈영을 남기며 흩어지는 잔상, 어느새 은혈을 지나쳐 성혈교 총단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성혈공은 너무 완벽해서 고칠 데가 ‘없는’ 거였어요.”


은혈이 다급하게 그를 따라간다.


“하지만 그러하다면 어째서 다른 이들이 그렇게 되고만 것이냐?”


자리에 우뚝 멈춰선 적명, 환하게 웃으며 대꾸하는데, 은혈의 등골이 서늘하다.


“인간이 아닌 존재의 힘을 얻었으면, 인간이길 포기해야지요.”

“... 그게 무슨?”


적명은 대답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안개를 불러일으키며 쾌속하게 나아간다. 은혈은 움직이는 그를 쫓았다.


“이놈! 제대로 말을 해야 할게 아니냐!”


뒤에서 짜증스럽게 호통을 치는 은혈, 적명이 그를 돌아보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한다.


“사냥꾼이 사냥감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정신이 온전하겠냐는 말입니다.”

“뭐라?”


은혈이 적명과 속도를 맞춰 옆으로 치고 나온다.


“인간성을 버리지 않고 인간이 아닌 힘을 얻으려고 했으니 심마(心魔)에 든다는 말입니다. 죄책감도 오락가락하고 자기 행동에 대해서도 잣대가 왔다갔다 거리니, 어찌 멀쩡한 정신으로 살 수가 있겠습니까.”


은혈이 멍한 얼굴이 된다.


말이야 그럴듯하다. 하지만 그 말이 결코 ‘멀쩡한’ 소리는 아니다.


인간성은 한가지로 특정 지을 수 없지만 인간이기에 갖는 기본적인 방향성이다. 무리를 짓는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이 자연히 가지고 태어나는 도덕적인 잣대다.


은혈의 일족과 인간들이 가지는 가장 큰 차이점도 거기에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의 일족은 인간을 사냥하기 위해 인간의 형상으로 의태(擬態)한 포식자다. 무리를 짓지도 않으며 자신과 같은 모습의 인간을 잡아먹기에 살인에 대한 죄책감도 태생적으로 희미하다.


“인간이기를 버려야 완성되는 무공이었다는 것이냐?”


은혈의 물음에 적명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한다. 여전히 발은 쾌속하게 움직이는 그대로다.


“무공 자체는 한계에 가까운 생령을 먹어치우는 순간에 가득차고, 싸우며 완성됩니다. 헌데 사람이라는 잣대가 그 발현을 가로막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뭐 그렇습니다. 가령...”


‘먹어?’


분명히 먹는다는 표현으로 성혈공의 수련을 설명할 때 마뜩찮은 반응을 보였던 적명이 스스럼없이 그 말을 사용하는 것을 듣고 은혈이 움찔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흐리는 적명의 눈에 마침 산을 오르는 이족(異族)의 사냥꾼이 눈에 띈다. 이 근처는 성혈교의 영역이라 잘 보이지 않는데 사냥감을 찾지 못해 예까지 온 모양이다.


적명의 신형이 급작스럽게 가속하며 그에게로 날아간다.


“?!...^%$%!!”

“뭐래?”


갑자기 자신에게 날아드는 괴인을 보며 공포에 질린 이족 사냥꾼이 뭐라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는 동안 지척에 접근한 적명이 허공으로 뛰어 몸을 회전시키며 발차기를 내지른다.


퍼억!


상승의 영역에 들어야 겨우 반응이 가능할 움직임, 평범한 사냥꾼이 그것을 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머리에 적중한 일각(一脚)에 그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나간다.


머리를 잃은 몸체가 공격의 여파로 멀찍이 나가떨어진다.


다급하게 뒤를 쫓아온 은혈이 그의 행동을 보고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밑도 끝도 없이 말하다 말고 사람을 죽였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 무슨 짓이냐 이게?”

“설명 드리고 있잖습니까.”

“... 이걸로 설명을 해?”


적명은 파편이 묻은 자신의 바지가 신경 쓰이는 듯 살짝 내려 보고는 말을 이었다.


“이런 짓을 하라고 본능이 시키는데 인간성이 계속 거부하며 안에서 싸움이 인다는 말입니다.”


고칠 수 없는 게 아니라 고칠게 없었다는 말, 은혈은 그제야 그 말뜻을 제대로 이해했다. 성혈공은 단순히 모작 수준에 이르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의 완성된 인간 사냥꾼으로, 피식자인 인간을 바꾸는 무공이었던 것이다. 사냥감으로 태어난 본능까지 포기해야 끝을 볼 수 있는 무공.


그래서 무의식중에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평범한 인간은 그 재능에 관계없이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 네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는 잘 알아먹었다.”

“알아들으셨으면 됐습니다. 얼른 성혈교로 가죠. 할 일이 많습니다.”

“아니, 그래서 아직 들어야 할 게 있을 것 같다.”


‘아, 또 뭐야?’ 하는 표정으로 은혈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적명.


“날 때부터 부여된 성질을 내버리기 쉬울 리가 없다. 그랬으면 그리도 많은 전대 성혈교주들이 광인으로 삶을 끝마쳤을 리가 없지. 무슨 일이 있었느냐?”

“이것저것 일이야 많았지요.”


굳이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듯 말을 돌린다. 하지만 은혈은 포기하지 않았다.


“네 사부놈, 그놈이... 죽었느냐?”


잠시 굳었던 적명의 얼굴이 다시 풀린다. 그러고는 웃는다.


“안 어울리게 연민이라도 할 생각입니까? 사부님은 죽었습니다. 추적자에게 걸린 저를 대신해서 말이지요.”

“... 그러냐. 대충 알았다. 성혈교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은혈이 먼저 움직인다. 완전히 자기 마음대로다. 적명이 불만스러운 기색을 비치다가 ‘뭐하냐?’는 듯이 돌아보는 은혈을 보고는 퍼뜩 그를 따라 움직였다.


‘성혈공은 애초에 인간으로는 완성이 불가능에 가까운 결함품이었군.’


은혈은 적명과 거리를 두고 움직이며 생각했다. 인간성을 버린다. 그건 은혈에게 사냥꾼으로의 본능을 버리라는 말과 같다.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일이다.


결국 성혈공을 만든 인간들은 은혈의 일족을 닮겠다는 강박에 시달린 나머지, 인간이 익힐 것이라는 기본적인 전제마저 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불가능한 가능성을 뚫고 나온 완성품이 생각보다 더 괜찮지 않은가?’


아직 어린 맹수가 흔히 보이는 사냥감에 대한 잔인함, 공격성, 살생에 대한 무감각함. 인간성을 버림으로서 적명은 그것을 손에 넣었다.


‘저놈이라면 분명 세상에 큰 흉터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있었다는 증거를!’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은혈의 얼굴에 살벌한 웃음이 핀다.


인간이 가지는 다종다양의 가능성. 그 가능성에 기대어 일족의 흔적을 남기려는 수백 년의 시도, 그 결실이 그의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잘 읽고 계신가요? 맞춤법이나 오타관련 사항은 알려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즐겁게 읽으셨다면, 선작과 추천 부탁드려요.


작가의말

이걸로 주 3회. 크리스마스 전에 한편 정도 더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혈마비록(血魔悲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제목변경 공지 16.12.20 398 0 -
공지 계획. 사과. 부탁. 16.12.19 574 0 -
43 귀마전(鬼魔殿)의 비밀스런 대화. 17.01.17 481 4 16쪽
42 검은 전갈, 움직이다. 17.01.05 392 6 16쪽
41 목을 내놔라. 16.12.30 441 5 13쪽
40 본능에 충실한 전쟁. 16.12.29 497 5 12쪽
39 박쥐 날개를 단, 마(魔). 16.12.26 535 4 15쪽
38 (외전) 그 남자의 회고. 16.12.24 538 7 9쪽
37 인간을 버리다. (3) 16.12.24 538 7 8쪽
» 인간을 버리다. (2) 16.12.22 545 5 12쪽
35 인간을 버리다. (1) 16.12.21 512 6 10쪽
34 누군가를 위해 죽는 다는 것. 下 +2 16.12.19 654 6 15쪽
33 누군가를 위해 죽는 다는 것. 中 16.12.18 640 6 8쪽
32 누군가를 위해 죽는 다는 것. 上 16.12.17 585 6 12쪽
31 죽는다면, 당신의 품 안에서. 下 16.12.16 615 6 11쪽
30 죽는다면, 당신의 품 안에서. 上 16.12.10 710 7 10쪽
29 생존자 下 16.12.01 736 7 11쪽
28 생존자 上 16.11.25 743 8 10쪽
27 인적없는 산 속으로 下 16.11.24 760 9 9쪽
26 인적없는 산 속으로 上 16.11.23 881 9 11쪽
25 악마가 하지 않을 일. 16.11.21 851 9 11쪽
24 도사 우길(于吉). 참전(參戰) 下 +2 16.11.20 1,015 10 18쪽
23 도사 우길(于吉). 참전(參戰) 中 16.11.19 888 10 8쪽
22 도사 우길(于吉). 참전(參戰) 上 16.11.19 943 9 8쪽
21 흉착귀(胸鑿鬼). 개시(開始) 下 16.11.18 1,067 11 11쪽
20 흉착귀(胸鑿鬼). 개시(開始) 上 16.11.18 1,109 11 12쪽
19 반백년만의 재회. 16.11.17 1,129 10 9쪽
18 동방의 민간요법 16.11.17 1,220 8 14쪽
17 동굴 안의 살인자들 下 16.11.14 1,132 11 12쪽
16 동굴 안의 살인자들 上 16.11.13 1,170 10 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