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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랑쿤의 서재

혈마비록(血魔悲錄)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판타지

백랑쿤
작품등록일 :
2016.10.26 09:10
최근연재일 :
2017.01.17 17:13
연재수 :
43 회
조회수 :
52,163
추천수 :
491
글자수 :
218,029

작성
16.12.16 22:37
조회
615
추천
6
글자
11쪽

죽는다면, 당신의 품 안에서. 下

오늘도 좋은 하루되셨길 OR 되시길~




DUMMY

은혈과 내려온 길을 되짚어 북쪽으로 올라가는 적명의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속도를 높이자면 서두를 수 있었을 길이지만, 그는 조금 여유를 두고 있었다.


가진 돈이랄 게 별로 없어서 여유롭게 숙식을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그럭저럭 사람 몰골로 움직인 적명이었다.


그리하여 합비성이 멀리서 보이는 곳까지 도달하는데 걸린 시간은 한 달 남짓, 해가 높이 떠오른 시간이다.


자지도 먹지도 않았다고는 하지만 은혈과의 여정이 얼마나 강행군이었는지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미친 노인네, 진짜 사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안 봐줬네.”


당장이라도 퍼져버릴 것 같았던 당시와 지금을 비교하며 적명이 있지도 않은 은혈에게 욕을 했다.


“자, 줄을 서요. 줄을.”


적명은 성문을 지키는 관병들의 인도를 따라서 길게 늘어선 행렬에 끼어들었다. 눈에 띄는 혈수갑은 장강의 동굴에 들러 숨기고 오는 길이다.


거리낄 것이 없으니 굳이 어둠을 기다려 성벽을 넘을 필요도 없다. 흉착귀라는 이름을 얻고 나서는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 틈에 섞인 게 처음이다.


적명은 괜히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호패와 방문 목적을 제시하쇼.”


방금 식사를 마치고 온 듯 입가에 밥풀을 묻히고 졸음에 겨운 얼굴을 하고 있는 병사가 적명에게 말했다.


적명이 선줄은 성을 방문하는 장사꾼이나 여행객들이 서는 줄이다. 성 주민들이 서는 줄에 서볼까 싶었지만 설매의 일로 버젓이 쪽에 서기가 망설여졌기 때문이다.


“아, 그거 없는데요?”


사람을 죽이고 돌아다니는 놈이 호패를 챙겼을 리가 없다. 그렇지만 너무도 태연자약하게 그 사실을 까발리는 적명, 병사의 표정이 험악하게 구겨진다.


“뭐? 호패가 없는데 어딜 돌아다녀? 저리 꺼져.”


병사의 말에도 적명은 줄에서 비키지 않는다.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이 적명과 실랑이를 벌이는 병사를 보며 불만스러운 기색을 보인다.


게다가 적명의 입가에 띄운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그 모습에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는 생각을 굳힌 병사가 난폭하게 적명을 밀치려 했다.


“이 자식이 지금 나랑 장난치자는 거야? 혼 좀 나볼 테냐?"

“그러지 말고 저 좀 보세요.”

“보긴 뭘...”


적명의 눈이 희미한 붉은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눈을 바라본 병사의 동공이 풀리며, 굳어졌던 표정도 멍청하게 바뀐다.


“호패가 없어도 괜찮아요.”

“호패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적명의 말을 병사가 그대로 따라 한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니 저는 그냥 보내줘도 되요.”

“당신은 그냥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병사가 그 말까지 따라하자 적명의 눈에서 붉은 기운이 사라졌다.


“고마워요.”


적명은 빠른 걸음으로 성문 검색대를 지나 익숙한 합비성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병사가 멍하니 적명을 보고 있자, 적명의 다음차례로 기다리던 상인이 우렁찬 소리로 그를 부른다.


“이보쇼. 관병! 우리 안 들여보내 줄 거요?”


그와 동시에 줄의 뒤에 있던 사람들도 아우성을 친다. 장사꾼이고 여행객이고 오늘 중으로 합비에 들어가서 할 일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 소란에 관병이 정신을 차린다.


“어? 내가 뭘 하고 있었지?”


하고는 주위를 둘러보는 병사, 적명을 보내준 것이 기억나지 않는 모양이다.


“뭘하고 있기는! 지금 나 들여보내줘야 할 것 아니오! 빨리 물건 넘기고 떠나야 하는데 뭣하는 게요?”

“아, 저, 미안하게 되었소.”


병사는 얼결에 사과를 하고 상인의 호패를 받아들고 짐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호패 없이 성에 들어가려했던 젊은 남자의 일 따위는 금방 잊어버렸다.


****


“아, 그러지 말고 우길 도사! 딱 한번만 점을 좀 쳐달라니까요!”


남궁세가의 저택에 마련된 우길의 처소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가주 남궁후의 것이다.


“가주 몇 번이나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저희가 치는 점은 단순히 점이 아니라 천기를 누설하는 것이라 사사로이 볼 수가 없다고요.”


왠지 지친 목소리로 남궁후의 요구를 거절하는 우길, 제법 시달린 것 같다.


“아니! 그 궁합 한번 보는 게 뭐라고 그렇게 짜게 구십니까!”


이제는 우길을 쪼잔한 사람 취급하며 인신공격으로 돌입한 남궁후, 우길의 표정이 가관이다.


“궁합 한번 보실 거라면 그냥 용한 점쟁이라도 찾아가시라고 제가 몇 번이나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타당한 주장이다. 하지만 남궁후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아, 외부인한테 발설하면 안 된다니까요. 그러니까 우 도사에게 부탁하는 것 아닙니까!”


막무가내다 쓸데없이 비장하게 우길의 손을 맞잡아오는데 도저히 떨쳐낼 방법이 없다.


‘이거 참, 벌써 한 시진 째!’


우길이 남궁세가에 머문 지 한 달이 넘었다. 그간 살펴본 바로 남궁세가는 아주 묘하게 굴러가는 곳이다.


가주는 명명백백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공수련을 제외한 다른 시간을 유유자적하고 있고, 가신들이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이며 이 커다란 세가를 꾸려 간다.


하지만 명백히 직무유기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의 권위에는 흔들림이 없다. 존재만으로도 남궁세가라는 거함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이 눈앞의 애어른의 정체라는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애 같을 수 있는가?’


묘한 존재감이야 그렇다고 치지만, 이렇게 점을 봐달라고 쫓아다니기 시작한 게 벌써 보름전이다. 계속 거부의사를 밝히며 도망 다녔지만, 결국 이렇게 되었다.


“네? 네? 네? 우 도사 부탁합니다. 따악! 한번! 한번만 궁합을 봐주는 거라면 하늘에 계신 분들도 정성이 갸륵해서 봐주지 않겠습니까?”

“그게 말이 됩니까? 아니 애초에 주희 대주를 연모하고 있는 게 뭐 그리 큰 비밀... 읍읍!”


순식간에 우길의 입을 막아버린 남궁후가 부릅뜬 그의 눈앞으로 손가락을 들어 좌우로 흔들어 말하지 말라는 뜻을 전달한다.


“그걸 들키면 안 되니까 이렇게 부탁하는 게 아닙니까.”


우길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겨우 그를 놓아준 남궁후가 한숨을 쉰다.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벌써 7년입니다. 가신들에 장로들에 눈치를 보느라 말도 못하고 낑낑 거리고 있는 게 말입니다. 하다못해 궁합이라도 한번 알아보자는데 이리도 야박하게 구시다니.”


심지어 울먹거리고 있다. 천기누설은 금기 중의 금기, 하물며 이런 쓸데없는 일에 그런 무리를 하고 싶지 않다는 게 당연하지만.


‘이거 한번 봐줄까? 저리도 간절하다는데... 진짜 하늘이 감복해서 봐줄 지도 모르고(?)...’


보름에 걸친 끈질긴 부탁에, 장장 한 시진에 걸친 설득, 거기에 이제는 처량한 신세 한탄의 연계를 당하는 중인 우길이 마음을 바꾸었다.


“좋습니다. 가주. 그럼 여...”

“우와아아아악!”


남궁후의 비명이 우길의 말을 자른다.


“이 신기한 건 대체 뭡니까 도사!”


남궁후가 가리킨 것은 우길이 책상에 펼쳐놓은 지도 한 장이다. 합비성의 모습이 골목길까지 정교하게 그려진 그것은 남궁세가가 합비를 순찰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 남궁세가의 주인인 남궁후가 지도 자체가 신기해서 난리를 칠 리가 없다.


“어, 어디.”


지도에 표시된 합비성 남문에서부터 새빨간 발자국이 어디론가 움직이고 있었다.


“흉착귀가 나타났습니다. 가주!”

“그런가! 당장 모두에게 알리겠습니다!”


남궁후가 그렇게 말하고 급히 나가다 방문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우길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까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여기서 사실대로 말해주면 당장 궁합을 봐달라고 할 게 빤했다.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어서 놈을 잡으러 갈 채비를 갖추시지요.”

“그렇습니까? 그럼 이만.”


하고는 다시 황급히 나서는 남궁후, 어찌 보면 불운이랄까.


‘이게 다 자기 팔자인 것을, 천기를 누설하지 않아서 다행이구만.’


****


“오랜만이네.”


취몽루(取夢樓)의 현판 앞에 선 적명의 혼잣말이다. 고작 몇 달이 흘렀을 뿐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적명에는 아주 오래 전의 그것처럼 희미하기만 하다.


“그렇지 않아요? 아저씨?”


적명이 말한 상대는 어느새 그의 등에 단검을 들이밀고 있는 차가운 인상의 중년인, 이시명이다.


“자네와 한담을 나눌 수 있는 입장이면 좋겠지만, 자네의 입장을 생각하면 이럴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겠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취몽루에서 행패를 부리는 불한당들을 처리하는 속칭 ‘어깨’들의 두목일 뿐인 이시명이다. 하지만 그는 하오문도로 이곳의 경비를 책임지는 일을 하고 있다.


“아 뭐, 그렇겠네요. 역시 제가 무단으로 없어진 게 문제겠죠?”


태연하게 대꾸하는 적명, 별다른 감정이 없던 이시명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모른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 아이의 죽음에 대해서?”


설매의 죽음과 동시에 합비에서 사라진 적명, 그 연관성을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오문이 내부적으로 적명을 범인으로 보고 있었다고 해도 이상할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 아이의 죽음’이라는 말을 듣는 적명의 표정은 부인하기엔 지나치게 정직했다.


“그렇지요. 하지만 적어도 그녀를 만나서 이야기 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 말과 동시에 등 뒤에 단검의 감촉이 사라진다. 이시명은 ‘엇?’하는 표정의 적명을 놔두고 성큼성큼 취몽루로 향한다.


“이건 너무 무른 거 아닌가요? 그래도 용의자인데?”


뒤를 따라가며 하는 적명의 물음에 이시명이 코웃음이라도 칠 것처럼 대꾸했다.


“도망치려면 애초에 오지도 않았을 테지. 그리고 지금 자네에게 내가 위협이라도 될까 모르겠군.”


하오문은 강호상에서 정보에 가장 정통한 곳 중 하나다. 합비는 외부에 숨겨진 하오문의 본거지다.


즉, 강호 안에 떠도는 정보의 대부분은 이곳 취몽루로 흘러든다. 이시명 정도로 하오문에 오래 몸담은 자가 흉착귀의 정체를 유추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그와 안면이 있었던 자가 범인이라면 더더욱.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


적명의 말에 다시 처음대로 냉랭한 표정으로 되돌아간 이시명, 하지만 말에는 약간 가시가 돋쳐 있다.


“결과적으로 자네가 한 행동은 나에 대한 조롱이다. 삼가주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옮기는 이시명의 뒤를 따라간 적명, 이시명은 말없이 사람들이 많은 길을 피해 기녀들과 일꾼들이 다니는 통로로 적명을 안내했다.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취몽루의 최상층, 어떤 권력자도 부자도 손님으로는 발을 들일 수 없는 장소다. 취몽루주의 방인 것이다.


“이시명입니다. 아가씨.”


이시명은 문을 두드리고 응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적명이 기다리던 목소리가 닫힌 문으로부터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죠?”

“그가, 찾아왔습니다.”

“...”


문 건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녀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적명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들여보내세요.”




잘 읽고 계신가요? 맞춤법이나 오타관련 사항은 알려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즐겁게 읽으셨다면, 선작과 추천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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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계획. 사과. 부탁. 16.12.19 575 0 -
43 귀마전(鬼魔殿)의 비밀스런 대화. 17.01.17 481 4 16쪽
42 검은 전갈, 움직이다. 17.01.05 392 6 16쪽
41 목을 내놔라. 16.12.30 441 5 13쪽
40 본능에 충실한 전쟁. 16.12.29 497 5 12쪽
39 박쥐 날개를 단, 마(魔). 16.12.26 535 4 15쪽
38 (외전) 그 남자의 회고. 16.12.24 538 7 9쪽
37 인간을 버리다. (3) 16.12.24 538 7 8쪽
36 인간을 버리다. (2) 16.12.22 545 5 12쪽
35 인간을 버리다. (1) 16.12.21 512 6 10쪽
34 누군가를 위해 죽는 다는 것. 下 +2 16.12.19 654 6 15쪽
33 누군가를 위해 죽는 다는 것. 中 16.12.18 640 6 8쪽
32 누군가를 위해 죽는 다는 것. 上 16.12.17 585 6 12쪽
» 죽는다면, 당신의 품 안에서. 下 16.12.16 616 6 11쪽
30 죽는다면, 당신의 품 안에서. 上 16.12.10 710 7 10쪽
29 생존자 下 16.12.01 736 7 11쪽
28 생존자 上 16.11.25 743 8 10쪽
27 인적없는 산 속으로 下 16.11.24 760 9 9쪽
26 인적없는 산 속으로 上 16.11.23 881 9 11쪽
25 악마가 하지 않을 일. 16.11.21 851 9 11쪽
24 도사 우길(于吉). 참전(參戰) 下 +2 16.11.20 1,015 10 18쪽
23 도사 우길(于吉). 참전(參戰) 中 16.11.19 889 10 8쪽
22 도사 우길(于吉). 참전(參戰) 上 16.11.19 943 9 8쪽
21 흉착귀(胸鑿鬼). 개시(開始) 下 16.11.18 1,068 11 11쪽
20 흉착귀(胸鑿鬼). 개시(開始) 上 16.11.18 1,109 11 12쪽
19 반백년만의 재회. 16.11.17 1,129 10 9쪽
18 동방의 민간요법 16.11.17 1,221 8 14쪽
17 동굴 안의 살인자들 下 16.11.14 1,132 11 12쪽
16 동굴 안의 살인자들 上 16.11.13 1,170 1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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