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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랑쿤의 서재

혈마비록(血魔悲錄)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판타지

백랑쿤
작품등록일 :
2016.10.26 09:10
최근연재일 :
2017.01.17 17:13
연재수 :
43 회
조회수 :
52,186
추천수 :
491
글자수 :
218,029

작성
16.10.28 00:56
조회
1,865
추천
19
글자
9쪽

이른 아침, 침대 위에 포개진 남녀.

오늘도 좋은 하루되셨길 OR 되시길~




DUMMY

짙은 안개가 깔리고, 비까지 내렸던 밤이 지났다.


유난히 이른 아침에 일어난 취몽루 기생 설매(雪梅)는 요란하게 기지개를 키며 침대를 정리했다.


잠도 푹 잤고 몸도 개운 한 것이, 적명에게 억지를 써서 이른 퇴근을 한 것이 아주 주효했던 것 같다.


정씨상회의 돼지와 웃으며 술잔을 기울이느라, 일하기 싫었던 걸 적명이 제대로 긁어줬던 덕뿐이다.


설매의 방은 그녀가 차지한 취몽루의 그것과 달리 썰렁할 정도로 검소했다.


그녀는 자신이 버는 돈의 상당수를 고향의 가족들에게 보내주고 있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기녀들 중에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 어제는 안 왔네. 적명."


설매를 일찍 들여보내거나 뭔가 좀 봐준 날이면, 적명은 자신의 일이 끝난 후에 설매의 방에 들렀다.


말로는 다시 이렇게 하지 말라는 훈계를 하러 왔다지만, 루주(樓主)가 무서워서 제 발이 저린 거라는 걸 설매도 알고 있었다.


매번 그럴 때는 귀찮았는데, 이렇게 한번 빠지고 나니 서운하다.


"흥, 그러면 내가 가서 혼을 내주면 되지."


잠옷 차림으로 문을 여는 설매의 움직임이 경쾌하다.


"어? 이게 무슨 냄새야?"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찐득하고 비릿한 냄새에 코를 움켜쥔 설매의 눈에 누군가 문 앞에 쓰러져 있는 것이 보인다.


"적명!"


옅은 신음 소리를 내며 문 앞에 누워 있는 사람은 간밤에 찾아오지 않은 적명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검은 야행의와 붉은 수갑을 끼고 있었지만, 틀림없다.


설매는 깜짝 놀라면서도 후다닥 달려가 적명의 몸을 끌고 방으로 옮겼다.


그녀도 하오문(下汚門)의 사람, 기녀의 일을 하기 위한 미용의 목적이었지만 무공도 익혔고 이런 상황에서 침착해야 한다는 것도 안다.


무엇보다 시체를 한두 번 본 것도 아니다.


기아에 시달리던 그녀의 고향에는 차라리 칼 맞고 죽는 게 덜 흉할 꼴로 죽은 사람들이 널려있었다.


적명을 눕히고 사람들을 부르러 가려는 설매의 옷을 적명이 잡아 끌었다.


"다른 사람은 안돼."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주제에 겨우 입을 열어서 헐떡이며 한다는 소리가 사람을 부르지 말라는 말, 하지만 어쩐지 묘한 말이다.


설매는 갑작스러운 말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고 놀랐다.


'아픈 놈 헛소리에 가슴이 설레다니. 진서화(進曙華)! 너도 기녀 실격이구나.'


1년전 취몽루에 오고, 담당 점소이로 허구한 날 만났으니 정이 안 들리도 없겠지만, 적명은 취몽루주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여자가 봐도 아름다운 여자.


거기다 자신은 하오문의 일개 기녀, 취몽루주라면 이미 하오문의 간부다.


자기가 어리다고 해봐야, 제대로 무공을 익힌 여류고수들은 오십이 넘어도 20대의 미모라는데 당해먹을 방법이 없다.


고향에 묻어두고 온 오빠처럼 생각하려고 애써 마음을 접어두었는데, 이 망할 작자가 떠드는 꼴을 보더니 이놈의 가슴이 또 말썽이다.


그래도 다른 사람은 안 된다는 말에 기분이 나쁠 리가 없었다.


"심하게 다쳤잖아. 얼른 가서 주경(宙瓊)선생 불러올게."


그리 말을 하고 돌아서봐도 옷자락을 쥔 적명의 손은 놓아줄 생각을 안한다.


눈에 초점도 제대로 잡히는 않는데 이럴 정신은 어디에 있는지.


"여기 있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사코 사람을 부르는 것을 말리는 적명.


어느 틈에 소매를 잡았던 손이 손목을 잡아 끈다.


아픈 몸으로 무슨 힘이 그리 좋은지, 설매는 적명을 누인 침상에 쓰러져 버렸다.


이른 아침, 침대 위에 포개진 남녀.


야릇한 생각이 들고만 설매가 얼른 일어나려 했지만, 적명의 손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왜 그래."


차마 큰소리를 내지 못하고 일어나려는 그녀의 허리를 감아오는 차가운 감촉의 수갑.


자신의 얼굴에 가까워지는 적명의 얼굴에 버둥거리던 설매가 결국 눈을 감았다.


피 냄새, 그리고 설매의 분 내음이 섞인 묘한 향이 방안을 뒹군다.


제법 긴 입맞춤이 끝나고 적명의 위에 있던 설매의 상체가 올라간다.


그 움직임을 따라서 설매의 가슴으로 향하는 적명의 수갑이다.


설매의 얼굴이 놀라 붉어진다.


푸욱...


설매의 입에서 나온 것은, 야릇한 신음소리도, 거부의 말도 아닌 흐르는 피였다.


붉은 수갑은 그녀의 가슴을 관통하고 갈비뼈를 헤집어 심장을 움켜쥐었다.


설매의 눈에서 서서히 초점이 꺼져간다.


얼굴 위로 떨어지는 그녀의 피를 보면서도 적명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돌아오지 않았다.


****


'멈출 수 없다. 1년 안에 강제로 멈추면 네 사제는 죽는다. 이건 그런 마공이다.'


천미연은 한숨을 쉬었다.


새벽에 적명과의 대화 이후 찾아간, 그녀와 적명의 사부 입에서 나온 말이다.


대체 무슨 무공이 이 따위란 말인가.


인간의 심장을 공양하지 않는 수준까지는 얼마든 수련하다 멈춰도 괜찮지만, 한번 인간의 심장을 쓰게 되면 1년간 점점 더 잦은 주기로 심장을 요구하게 되는 무공.


이딴 것을 처음 만든 작자가 멀쩡히 살아서 비급을 후대에 남길 수 있을 만큼 장수했단 사실이 더 놀랍다.


'문제가 생기면 하오문은 빠져야 해. 하지만 이대로 방치하면 그 아이는 죽어.'


애초에 알고 있던 적명의 무공이고, 그래서 수련을 말렸었다.


지난 반년 동안 적당한 시점에서 적명이 멈추지 않을까 기대하며 가슴을 졸여왔지만, 알고 보니 그 무공의 수련을 멈추면 죽는다는 것이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깊은 수심이 드리운다.


사부와 만난 뒤, 한숨도 자지 않고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해 보았지만, 방법이 없다.


적명은 인간의 심장으로 수련을 한지 반년이 넘었다.


그녀가 배운 그 무공의 특성대로라면, 벌써 미쳐 날뛰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적명은 아직 이성이 있었다.


적어도 오늘 새벽까지는...


그래서 적명이 멈출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걸었던 것이지만, 결국 방법은 없단다.


최악의 경우 감금까지 생각했지만, 그래서 죽을 바에는 잡자마자 죽이는 게 낫다.


"버려야 해. 그 아이가 문제를 일으키면... 버려야 해..."


천미연이 자신을 설득하듯 소리 내어 되뇐다.


합비는 남궁세가의 앞마당이다.


지금까지처럼 어느 정도 이성이 남아 있다면 하오문의 그늘이 남궁세가의 이목을 흐려줄 수 있지만, 미쳐 날뛰는 살인마를 감싸주려다간 하오문까지 남궁세가의 칼날에 도륙 당할 것이다.


적명이 하오문 문주의 제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강호의 공적으로 낙인 찍혀, 알려져 있는 모든 지부가 모조리 잿더미가 될 것이다.


하오문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의 보루다.


자신의 복수를 위해 저주받은 미친 마공을 익히려는 자를 위해서 그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


그녀는 그걸 막아야 하는 책임이 있다.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잘라야 할지, 선택의 무게추는 분명하게 한쪽으로 기울었다.


망설이게 하는 것은 그저, 서로 주고 받았던 마음.


"사부님은 이제 정말 모든 걸 놓아 버리신 걸까?"


그녀가 면전에서 하오문은 적명을 숨길 수 없다고 말했을 때, 사부는 흔쾌히 그러라고 말했다.


하오문이 적명을 잘라야 하는 날이 오면 하오문의 문주는 그녀가 될 것이라는 말도 함께.


대체 무슨 의도로 그 마공을 적명에게 전해주었는지도 알 수 없고,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지도 말해주지 않았다.


원래부터 속을 알 수 없는 기행을 일삼기는 했지만, 이건 기행의 수준을 넘어서는 짓이었다.


"꺄아악!"


그녀의 장고를 멈추게 하는, 높은 음색의 비명소리가 몽환장에 울려 퍼진다.


그녀가 나가봐야 하는 지 고민하고 있을 때, 그녀의 방 앞으로 문도들이 달려왔다.


"아가씨!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설매가, 설매가..."


서둘러 설매의 방으로 향하며, 천미연은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틀리기를 빌었다.


설매는 아니, 고향을 떠나 기녀로 힘들게 살면서도 항상 밝게 웃을 줄 알았던 열일곱의 '진 서화'는 왼쪽가슴에 휑한 구멍만 남긴 시신이 되어 자신의 침상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참혹한 광경은 결국 천미연의 마음을 완전히 굳게 만들었다.


'적명을 버려야 해...'




잘 읽고 계신가요? 맞춤법이나 오타관련 사항은 알려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즐겁게 읽으셨다면, 선작과 추천 부탁드려요.


작가의말

내일 올릴 글을 쓰다가 문득 조회수를 확인하니 이것만 기형적으로 높군요...

낚시 당하고 화가 나서 그만 보시는 분이 없기를 ㅎㅎ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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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고전적인 해결 방법 上 16.11.02 1,294 9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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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장강의 귀신 16.10.28 1,605 17 12쪽
» 이른 아침, 침대 위에 포개진 남녀. +4 16.10.28 1,866 19 9쪽
9 마공(魔孔) 16.10.28 2,020 20 16쪽
8 오방대주(五方隊主) 16.10.28 1,842 19 9쪽
7 불청객(不請客) 16.10.27 1,926 17 10쪽
6 잠 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 16.10.27 1,956 23 8쪽
5 대장간(下) +1 16.10.27 2,074 19 7쪽
4 대장간(上) 16.10.27 2,277 19 10쪽
3 흉착귀(胸鑿鬼) +4 16.10.26 2,499 25 11쪽
2 점소이 16.10.26 2,873 26 11쪽
1 합비제일루 16.10.26 4,338 26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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