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누아르물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라이트노벨

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9.07 23:28
최근연재일 :
2023.09.16 18:43
연재수 :
24 회
조회수 :
734
추천수 :
15
글자수 :
241,626

작성
23.09.16 18:42
조회
18
추천
1
글자
24쪽

21. 테이크 아웃

DUMMY

김영석은 PC앞에 앉아 있었다. 쉽게 묵을 수 있는 모텔 중에는 프린터 기가 있는 곳도 있었다. PC는 값싼 물건을 중고로 사들였다. 노트북만으로도 그가 하려는 일은 대강 가능했다.


일단, 그가 차곡차곡 챙겨 놓은 자료를 종이 문서로 뽑으려는 셈이었다.


아무래도 디지털 데이터로 어딘가에 넘겨주는 것도 괜찮지만, 실물 자료가 있는 것도 일하기 편하리라.


적당한 관할 경찰서 본부나 지부에 급편으로 보내기라도 하면 좋을 테다.


그는 불 하나 켜지 않은 모텔 방에서, 꺼지지 않는 은은한 조명과 PC의 불빛만을 보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인쇄를 눌렀고, 모텔의 오래된 프린터기는 신음을 토하듯 낑낑대며 수 백장 이상의 문서들을 뽑아낸다.


당장 그가 알고 있는 경찰쪽 인사도 몇 있었다. 전혀 뒷배로 쓸만큼의 지위들은 아니었고, 어디 파출소의 말단이나 경찰서의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말단직들이었지만.

그래도 경찰 쪽 인물이라는 게 중요했고, 그들을 통해서 이메일로 데이터를 건네주면 그것으로 족하리라.

보내는 이의 이름은 굳이 적지 않겠지만 그들이 추론을 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영석은 그가 알고 있는 비령 그룹의 모든 뒷거리의 사업과 범죄, 비리, 또 그에 관련된 인명 장부들을 모조리 공권력에 넘겨버렸다.


*


김경묵 경위는 말단이라고 할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최근 경사에서 경위로 진급을 하기도 했고, 그가 일하고 있는 서초 경찰서 전체에서 따지자면 말단이라고 하지 않기도 애매했다.

어쨌건 그는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앞서서 나서야 하는 인물이기도 했으니.

나름대로 간부 직위를 갖고 있었지만 조직내에서 아직 큰 힘까지는 없었다. 앞으로 그가 어떤 커리어를 쌓아 나가느냐에 따라 달라지기는 할 테였다.


그런 그에게 이메일 한 통이 왔다.


발신자는 누가 보아도 대강 지어낸 듯한 의미 없는 알파벳과 숫자의 나열로 주소가 적혀져 있었다.

경찰서의 직무용 PC로 함부로 파일 따위를 열었다가 내부 전산망이나 중요 파일이 털릴 위험도 있기는 했다.


그는 고민하며 몇 번의 백신 프로그램으로 점검을 하고 난 뒤에 의문의 압축 프로그램을 받아 내부 문서를 확인했다.


별다른 특이 사항이 터지지는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게 감염되는 바이러스나 해커들의 수작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 보이지는 않는다.


하릴없이 앉아 있던 오후 무렵 경찰서. 그는 얼핏 보아도 심상찮은 내용으로 가득 찬 문서 파일을 열었고, 그 내부 상세를 살피다가 소름이 돋았다.


지독하게 잘 만들고 정교한 비리에 관한 기록건이었다. 누군가 일부러 장난질이라도 치려는 것인가, 싶었지만 실제의 그것이라고 보지 않기에도 애매할 정도의 자세함이 있었다.

실물 문서에 관한 사진 자료나 녹음 파일까지 몇 종이 있었고, 그는 이게 혼자 처리할만한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상관에게 상의를 하기에 이른다.


*


유종진은 김영석의 뒤를 쫓았다.


여태껏 사건이 벌어졌던 근처를 전부 찾았고,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사적인 수사를 감행했다.


양화는 대기업이었고, 그들 자체적으로 과학 수사를 진행할 정도의 장비를 갖추는 게 가능했다. 애초에 공산업, 화학, 의학 쪽의 분야에도 발을 걸치고 있는 그룹이었으니 그 정도의 사적 장비를 만드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유종진의 명령에 의해 특무를 명령받은 수사팀이 꾸려졌고, 수십 여 명에 달하는 인원들이 한 팀으로 부지런히 움직였다.


가명, ‘김영석’이라는 인물의 뒤를 쫓는 그들이다. 그들은 김영석이 일을 벌였다고 여겨지는 여러 현장을 돌면서 그의 인적 파편과 흔적을 찾기 위해 애썼다. DNA따위가 어딘가에 흩뿌려져 있으리라는 생각이었으나, 김영석은 여러 일을 처리하며 큰 상처를 입은 적이 없었다.


거기다 그가 돌아다니는 곳은 늘 김영석 그 자신보다는 다른 이들의 상처와 체액 따위가 흩어진 곳이 많았기에 어려움을 겪었다.


김영석이 직접적으로 손을 대어 누군가를 잡은 ‘최기욱’ 전 사장의 차량을 조사하다가 일단 지문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다. 지문을 근거로 독자적인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한 양화 사에서 추적을 이어나갔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사건이 일어난 현장과 목격자들의 증언은 참담한 수준이었고,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에 대한 무수한 의심이 들었으나 유종진 회장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추적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


유종진 회장이 김영석의 뒤를 쫓고,

김영석은 비령 그룹의 수뇌부들을 모조리 소탕하고,

또 그가 비령의 비리 장부 데이터를 전부 검경에 넘겨 그룹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되는 시기.


김영석은 아직도 자취를 드러내지 않고 잘 숨어 있었다. 경찰 쪽은 비령 그룹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났던 살인 사건 역시 조사에 착수하고 있었지만, 그룹의 내밀한 범죄 이력에 대한 제보를 받게 되자 수사의 주안점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경찰이라 할지라도 인력은 한정되어 있었고,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시기별로 선택을 해야만 했으니 말이다.


비령 그룹의 간부진을 연속으로 무참히 살해한 살인범 역시 경찰이 쫓아야 할 인물이었지만, 막상 그 피해자가 된 비령 그룹도 선의의 희생양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결국 더 큰 먹잇감을 물기 위해서 경찰은 비령 그룹 무너뜨리기, 에 나선다.


*


“선생님.”

“어, 왔나.”


유종진 회장은 작은 책방에 앉아 있었다. 그가 자주 가는 단골의 책방이었고, 낡고 오래된 책들과 신간 서적 중에서 주인장의 안목에 따라 골라지는 몇 종류의 책들이 신간으로 늘 들어온다.

책방과 다방을 겸하고 있는 곳이었고, 맛이 그리 세지 않은 은은한 차 종류나 직접 내린 커피 종류를 조금 마실 수 있었다.


유종진은 이따금씩 들르는 곳이었고, 서울 시내 한적한 곳에 위치했다. 가끔 사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만날 떄 약속 장소로 쓰는 곳이기도 하다.


선생님, 이라고 불린 유종진은 자리에 앉아 작은 책을 펼쳐놓고 읽다가 그를 맞았다.


양화 그룹에서 예전부터 장학생으로 지원을 해서 인재로 키운 한 사내였다. 어린 시절 불우한 가정 환경에 가진 바 재능과 지적 능력을 꽃피우지 못하던 걸, 양화 그룹에서 정책적으로 실시한 장학 제도에 의해서 많은 혜택을 받은 남자였다.


이후 자연스럽게 양화 계열사에 취직을 하게 되었고, 이공계열의 박사 학위를 따서 연구소 쪽에서 재직을 했다.

양화와 비령 그룹 간에 모종의 밀약들이 성립되었고, 유종진의 필요에 의해서 비령 제약에 파견되어 일을 하고 있던 차이기도 하다.


비령 그룹이 휘청거리고 개중 제약사 역시도 마찬가지여서, 내부적으로 구조 조정과 개혁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던 시기에도 그는 비령 제약을 떠나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다.

유종진의 명령 때문이기도 했는데, 그는 오랜 연을 맺어온 유종진의 부탁에 의해서 한 물건에 관한 기밀 문서를 빼돌린 상태였다.


애초에 양화와 비령은 전략적으로 제휴를 맺은 것이나 다름 없었고, 또 제이스 사와의 연결 고리가 되어준 것도 애초에 양화 제약 쪽이라 대단한 배신까지는 아니었지만, 남몰래 그런 일을 한다는게 나름의 부담이기도 했다.


유종진은 그가 하고 있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고, 그러기에 마치 손자와 같이 늘 대우를 해주고 친밀한 관계를 다져오던 사내, 박수용은 적합한 대상이었다.


박수용은 깨나 큼지막한 스마트폰 하나를 유종진에게 건넸다.


“아, 뭐 시켜야 하는 곳이었죠.”


박수용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미 특정 페이지를 켜둔 물건을 유종진에게 보여주고 너스레를 떨며 일어섰다. 좁은 책방 내부의 공간이었다. 다방처럼 이용할 수 있는 곳이, 마치 도서관의 빈 자리처럼 이곳저곳 테이블과 함께 배치되어 있어 책장 사이 좁은 길을 지나 주인장에게 가야 했다.


수용이 카운터처럼 보이는 곳에 선 주인, 장년인 사내에게 ‘아메리카노 하나요.’ ‘오랜만이네.’ ‘어르신이 부르셔서요. 요즘 참 바쁩니다.’ 따위의 대화를 하며 주문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다.


유종진은 박수용이 그러는 사이 휴대폰 화면에 뜬 것을, 책을 읽던 돋보기 안경을 낀 그대로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연배에 맞지 않게 그는 스마트폰 종류를 쓰는 것에 아주 익숙한 사내였고, 능숙하게 화면을 키우고 드래그 등을 하면서 내부 파일을 살핀다.


Fa-1123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Fa시리즈, 프로젝트 전반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고. 다만 Fa-1123은 아직까지 임상실험에 대한 데이터가 없다는 것으로 나와 있었는데, 김영석에게 투여한 그 건은 데이터를 얻지 못한 일이기에 그러했다.


이전 시리즈들에 대한 내용도 대략적으로 나와있었다. 그 결론들을 나열해 주욱 읽다보면, 사람이 어떤 종류로 고통스럽게 죽어나갔는지를 이어 적어 둔 악취미적인 문서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한 신체적 변화를 이끌어내고, 특히 뇌 기관 전체에 있어서 순간적인 변모를 만들어냈다는 데 Fa시리즈의 아주 희미한 가능성이 있었다.

유종진은 모든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박수용이 건네준 데이터를 읽을만한 지식은 갖고 있었다.


그는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그가 건네준 데이터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일전에 이형석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기대감, 기적을 바라지 않고 과학자가 무엇을 하겠느냐, 사업자가 무엇을 하겠느냐 따위의 이야기를 한 그다.

그럼에도 직접적으로 데이터와 그 세부 내용을 바라보니 도저히 믿고 투약할만한 물건임을 알았다.


초인약은 불가능한 것인가.


현대 의학이나 과학의 한계로는 미싱 링크라고 불릴만한 구간이 너무나도 많았다. 몇 개의 기적이 연달아 일어나야 그가 가설로 삼은 ‘김영석’같은 존재가 튀어나올런지, 알 수 없었다.

고작해야 약물을 투입한 것으로 외과 의술을 한 것마냥 신체 내부 구조가 바뀌고, 그 변화가 때마침 인간에게 초인적인 힘을 부여하는 쪽으로의 변화라니.

거기다가 어떤 부작용도 없고, 그 직전에 얻었던 치명적인 내부 장기의 손상 등 상처 또한 회복시키고 막강한 회복력을 부여한다니.


만화에나 나올법한 일이었다. 유종진은 욕망으로 인해 들떴던 마음이 조금 식는 것을 느꼈다.


실제 자료와 그 실패의 과정들을 보니 그가 바랐던 ‘기적’이라는 현상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돌연변이인 것인지 알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김영석’이라는 인간이 실물로 존재한다면 잡아볼만은 하다. 유종진은 가라앉은 마음으로 수용이 건넨 자료를 읽는 와중,


수용이 자리로 돌아와 말을 건넨다.


“말씀하신 게 맞지요?”


당돌한 말이었다. 자신이 틀릴 리가 없다는 뜻이었으니. 유종진은 크게 개의치 않으면서, 마치 손주처럼 돌봐주고 있는 사내의 웃음에 화답했다. 고갤 끄덕인다.


“맞지. 그런데 영······.”


말투를 조금 흐렸다. 그 끝을 말이다. 수용은 유종진의 대꾸에 심기가 불편한가, 싶어 물었다.


“생각하시던 게 아닙니까?”

“아니, 자료는 잘 줬네. 그런데··· 이렇다 할 근거가 없군. 내가 생각했던 일과는 말야. 아무래도 노인네가 헛것을 꿈꿨는지 모르겠어.”


유종진은 허탈하다는 투로 이야기했다. 선생의 저의에 대해서 그가 다 알고 있지는 않았다. 박수용이 말이다. 때마침 주인장 사내가 그에게 아메리카노를 가져다 주었고, 수용은 그것을 받아들어 먼저 입가로 가져갔다.


뜨거운 것이었지만 후룹, 하면서 몇 입을 먼저 마시고 내려 놓는다. 그가 동그란 눈으로 유종진을 바라보았다.


“Fa시리즈라면 저도 관할이 아니라서 자세한 이야기는 모릅니다만··· 그 이상의 정보를 원한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오시마 부장이랑 직접 논의를 해봐야 하는 부분이라···.”

“허허허.”


박수용은 종진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유종진은 허허, 일부러 소리내어 웃으면서 그의 말을 잘라먹었고.

이런 자리에서 고유 명사를 쓰며 말을 하는 건 그리 좋은 판단이 아니다. 유종진은 박수용에게 가르쳐야 할 게 많다고 생각했다. 오래도록 잘 써먹으려면 말이다.


“아니네. 뭐··· 내 따로 연락하지. 아무튼 그래, 요즘 어디 괜찮은가? 딱히 불편한 데는 없고. 생활이나, 일하는 환경이나···.”

“아···. 아닙니다. 제약사 환경도 괜찮고 사람들도 그다지 모난 구석은 없기도 하고요. 프로젝트 간에 독립성이 지나치게 부각되기는 하지만 제 일만 잘하면 되니 큰 문제도 아닙니다.”


종진은 화제를 돌려 수용이 최근 어떤지, 근황 따위를 물으며 친절하고 따뜻한 할아버지인 양 한참이나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 한참 옆에서 듣고 있던 주인장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오를만치 따스한 염려로 이루어진 대화들이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장학생, 그룹이 지원하고 있는 인재였고 이제는 그에게 환원받고 있는 사내에게 이야기를 건네다 헤어졌다.

유종진은 자리에 앉아 있었고, 박수용만이 다른 일정이 있다며 먼저 일어난 것이다.


대기업의 회장으로서 유종진이 갖고 있는 스케쥴이 언제나 약속 대상들보다는 바쁜 면이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대기업 회장이기에, 또 자신만의 독단적인 주관이 있는 그이기에 스케쥴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는 면도 많이 있었다.


대등 이상의 관계로 양화에 도움을 주는 조력자를 기다리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면 유종진은 모든 사업 상의 스케쥴로부터 자유롭다. 이미 상당한 부분은 출중한 간부진들에게 맡겨둔 상태였고.

그가 모든 일에 일부러 관여하지 않아도 기업과 그 연합체인 그룹은 현상 유지 정도는 충분히 해내고도 남았다.


유종진은 다소 헛헛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그저 그 여유를 즐기고 싶었을 뿐인지. 가게 안에 한참을 조용히 앉아 있었다.


딸랑.


하고 햇살이 비치는 오후 무렵 낡은 책방을 누군가가 찾아왔다. 골목 어귀에 존재하는 책방이다. 이렇다할 간판도 제대로 없었고. 오래된 것이 달려 있기는 했지만 길을 지나면서 알아보기는 힘들었고 일부러 골목에 들어와 그 외관을 찬찬히 살피고 나서야, 아 책방과 다방이 합쳐진 곳이구나 알고 들어올만했다.


그럼에도 단골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입소문이 퍼져 영업이 유지되는 곳이었다. 새로운 손님이 방문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주인장은 카운터에 앉아 커피용 기구를 마른 천으로 닦고 있다가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어서오세요.”라며 작은 말소리로 이야기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한 명의 사내였는데, 캐쥬얼한 옷차림에 모자를 푹 눌러쓴 청년이 그 말을 잘 들었는지 카운터에 선 장년인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대로 다가가 테이크 아웃용으로 커피 한 잔을 시킨 청년은 앉을 자리를 찾아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또 책 몇 종류를 뽑아서 읽어보려는 듯 챙기기도 했다.


덜컥.


유종진은 그 와중에도 창가 자리에 앉아 바깥의 햇살과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가 많으니 소회만 늘고 마음의 평안과 여유에 대한 갈망만이 늘어난다. 그에 덧붙여 계속해서 증가하는 건 삶에 대한 끝없는 집착이었다.

그 집착이 한 차례 물거품이 된 반향인지 탈력감을 느끼면서 바깥을 바라보던 그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그의 맞은 편 자리. 박수용이 앉았던 곳의 나무 의자를 건드리면서 새롭게 들어온 청년이 합석을 하려는 것이다.


유종진은 말도 없이 앉는 사내의 의문스런 행동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별다른 대단한 차림새도 없이 다니고는 있지만 근처에 비서나 그의 호위를 맡는 인력들이 있었다. 주머니에 있는 호출기의 버튼 한 번을 누르면 금세 달려와 사내를 끌어낼 수도 있으리라.


종진은 그런 사내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어디서 본듯한 인상이기도 하다.


어디서 보았지.


유종진이, 비령 그룹의 모든 간부진들을 익히고 있는 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김도건 회장과 전전대 회장이었던 김도형 회장, 그리고 그를 필두로 사업적으로 연락을 하는데 꼭 필요한 몇 명의 얼굴 정도만이 그가 익히고 있는 얼굴이었지.


비령 그룹을 지원한다고는 하지만 쓸 데 없는 인연이 많이 생겨봐야 그다지 좋을 것이 없다는 이유에서, 그는 만남과 또 연결 고리가 생기는 걸 극도로 경계하고 자제했다.


거기다가 그다지 튀지 않는 인상에 마찬가지로 이유 없는 만남을 지양하며 숨어 살기를 원하다시피 했던 김영석이라, 유종진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유종진의 앞자리에 갑자기 찾아와 앉은 사내, 김영석은 유종진의 눈빛을 처다보았다. 아래로 내려 쓴 마스크와 깊게 눌러쓴 모자가 의문스럽다. 그 사이에 드러나는 눈빛과 인상이 평범한 것이었다. 유종진은 평범하지 않은 분위기에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김영석을 마주 관찰했다. 생김새와 달리 움직이는 기색이나 사내의 근처에서 풍기는 묘한 기류는 흔한 게 아니었다.


차분한 눈빛으로 김영석은 유종진을 바라다보다가 먼저 입을 뗐다.


“유종진 씨 되십니까.”


영석의 목소리를 들은 유종진은 그게 어디서 들어본듯한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자네는.”


반문이었지만 그것으로 대답이었다. 나는 맞는데, 너는 누구냐는 말이다.


“김영석이라고 합니다.”


그는 감추지 않고 대답했고, 유종진은 심장이 멎을 뻔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인물을 눈 앞에서 본 셈이었으니. 그 즈음해서 주인장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테이블에 다가왔다. 어르신이 연달아서 약속을 잡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가 이야기를 하는 듯해서 별다른 말 없이 아메리카노를 내려 놓고 갔다.


영석은 쯥, 하고 플라스틱 컵에 담긴 그것을 의심도 없이 빨아 마시더니 이야기했다.


“비령과 관계가 깊으시다고요.”


지난 한 달간, 김영석은 그를 쫓기 위해 애를 쓰는 양화 기업의 수색팀과 경찰 조직의 인력들에 의해 제법 고생을 해야 했다. 경찰 쪽은 먹이로 던져준 비령 그룹의 건에 대해 집중하느라 별로 압박이 심하지는 않았는데,

괜찮아지나 싶나 했더니 양화 그룹 쪽의 수사팀이 문제였다.


집요하게 현장 증거들만을 가지고 그의 동선을 파악하고 다니고 있었다. 가상의 인물이라는 추리에서 시작했지만 대강 그의 신원들을 파악하고 실제 그가 서울 시내에서 옮겨 다니는 거처 중 몇 곳을 찾기도 한 것이다.


김영석은 비령 그룹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키워주었던 여러 투자처 중에 양화 그룹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유종진 회장과는 별다른 연이 없었고 단순히 비령 그룹의 간부로서만 아는 사실이었다.


유종진이 구체적으로 어떤 계열사에 얼마만큼 깊이 관여가 되어 있는지는 모른다. 일단 비령 물산 쪽은 양화 그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쪽이었으니 말이다.


간부들이 모여있고, 또 투자자들이 함께 면을 맞대는 합석 자리가 있었다면 지나치다 본 적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자세히 얼굴을 보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런 여러 사연이 담긴, 너스레의 일종이었다. 이미 다 알고 찾아온 뒤에 유종진에 대해서 묻는 것들은 말이다.


“···.”


유종진은 곧바로 대답하지는 못했고, 않았다. 떠듬거리며 할 말을 찾는 마음이 반쯤 있었고 눈 앞의 사내가 위험한지 살피는 생각이 반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김영석이라는 자에게 무엇을 말해야 그가 초인약을 얻을 수 있을까. 겉에 걸쳐 입은 얇은 재킷의 주머니 오른쪽, 호위의 호출용 버튼이 유종진에게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낌새가 이상하면 버튼을 누를 작정이었다. 바로 근처에 있으라고 대기시켰고, 멀어봐야 2, 30m 안팎의 자리일 것이다. 호위들이 달려와서 가게를 포위하고 사내를 끌고가는 것이 어떤 수작을 부리던 먼저이리라.


비록 골목 어귀라고는 하지만 도심 지역에서 시끄러운 소음의 무언가를 쓰리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창가 바깥은 오후의 햇살이 잡초 따위를 비추는 평화로운 거리다. 그 거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곧바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가도였고.


“저를 찾으셨습니까.”


김영석이 본론을 말했다. 번거롭고 귀찮으니까, 건드리지는 뜻도 내포된 말이었다. 유종진은 조용히 고갤 끄덕인다.


“······자네는······. 정말 죽었다 살아난 건가.”


아, 그 얘기인가.


영석은 비령 그룹의 조직원들, 혹은 간부들 사이에 알음알음 퍼져 있는 소문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가 얼굴을 내보이며 기행을 저질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제약사 쪽의 인원들이 조금 흘리고, 금융사 쪽의 놈들이 조금 흘리고, 하는 식으로 뜬소문이 돌다가 합쳐지기라도 했는지.


혹은 그가 직접 대면했던 비령 물산의 부하들이 입이 싸게 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건 그제서야 김영석은 유종진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았다.

그리고 그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


“···예 뭐. 그 말씀이시라면 궁금증이야 풀어드리죠. 죽었다, 살아난 적은 없습니다. 죽을 뻔했으나 되살아난 적은 있죠.”

“호오···.”


유종진의 눈빛이 다시 생기가 돌았다. 욕망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번들거림이었다. 그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눈 앞의 사내를 본다. 초인약이라고 했던가. 유종진은 눈 앞의 인간을 잡아야 한다고 느낀다. 그의 손이 버튼 쪽으로 다가갔다.


퍽.


하는 충격이 그의 가슴팍에 느껴졌다. 유종진은 자신의 가슴께에 무언가 날아와 박혔음을 깨달았다. 김영석은 테이블보다 위에, 검은 쇠뭉치를 올려놓고 손가락을 움직였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영석은 그의 아래에 등에 메고 온 백팩을 두었었는데, 거기서 꺼낸 물건이었다.


완제품이었다.


소음기를 달고, 화약량을 줄이고 탄알의 모양을 바꾸는 등 특이한 공정을 거친 특제탄을 사용했다. 그것을 사용하는 권총 역시 소음을 극소화하기 위해서 총열에 변형을 가한 물건이었다.


지난 시간동안 김만수를 만나 여러 총기 밀수업자 따위등을 만났다. 개중에는 외부로부터 총기를 들여와 파는 놈도 있었고, 물건을 떼다가 직접 자신의 공장에서 완제품을 만들어 파는 제조 장인도 있었다.


제조 장인에게 돈을 주고 만든 특제의 물건이다. 근처에 있어도 그저 바람 소리 정도만 날 뿐인, 일상적인 소음에 충분히 덮일 수 있는 소리만 나는 권총이다.


대신 명중률이 극악하게 떨어지고 그 위력도 사람의 몸을 완전히 관통하지 못한다만, 근거리에서 노인의 가슴팍을 열기엔 충분했다. 수술실이 아닌, 책방의 한 구석 자리에서 물리적으로 열려버린 가슴은 곧 벌겋게 그 주위를 물들였다.


“크업.”


유종진은 저도 모르게 수염 근처로 피를 흘렸다. 책방의 주인은 구석 자리가 바로 보이지는 않는, 다른 열에 시야를 둔 뒤 카운터에 앉아 자신의 소일거리를 보고 있다. 말소리가 점차 작아지고 있다고 느끼기는 했으나, 크게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


영석은 몇 발을 연달아 쏴서 유종진의 마지막을 보게 되었다.


그는 그대로 배낭을 들고, 천천히 걸어 아무렇지 않게 다방을 나섰다.


딸랑, 하는 문 근처의 소리가 나고도 주인장은 그저 가는가보다, 하고 잠시 앉아있었다. 애초에 김영석이 받은 것이 테이크 아웃 잔이라 그렇다.


영감님이 오늘따라 오래 계시네, 라는 생각을 잠시 스쳐 하면서 다방은 김영석이 나가고도 잠시간 평화와 고요를 유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골목 어귀에 비명과 소란, 그리고 유종진을 지키는 호위들이 외치는 다급한 고성이 자리를 채웠다.


*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누아르물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4 작가의 말 23.09.16 22 2 1쪽
23 22. (完) 파스타 23.09.16 16 1 7쪽
» 21. 테이크 아웃 23.09.16 19 1 24쪽
21 20. 퇴장 23.09.16 17 1 16쪽
20 19. 콜트 +2 23.09.15 21 1 22쪽
19 18. 지지支持 23.09.15 21 1 29쪽
18 17. 조직 내 간부 총회 23.09.14 19 1 16쪽
17 16. 도주 23.09.14 19 0 16쪽
16 15. 파리지옥 23.09.14 22 0 15쪽
15 14. 손님 왔습니다. 23.09.13 24 0 20쪽
14 13. 짧은 재회 23.09.13 29 0 24쪽
13 12. 제인 메리어트 23.09.13 29 0 27쪽
12 11. 탕! 23.09.12 30 0 33쪽
11 10. 빠른 퇴장 23.09.11 38 0 25쪽
10 9. 스티브 블레어 23.09.11 30 0 26쪽
9 8. 김도건 23.09.10 36 0 31쪽
8 7. 민형석 23.09.09 38 0 30쪽
7 6. 떨어지다 23.09.09 36 0 25쪽
6 5. 회복 23.09.09 36 0 23쪽
5 4. 숨 좀 쉬자 23.09.09 31 1 22쪽
4 3. 초인 23.09.08 42 1 30쪽
3 2. 오발 23.09.07 35 1 20쪽
2 1. 기억 23.09.07 42 2 28쪽
1 0. Prologue. 23.09.07 83 2 1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