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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누아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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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9.07 23:28
최근연재일 :
2023.09.16 18:43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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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7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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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8쪽

1. 기억

DUMMY

삐-.


시끄러운 알람 소리가 귓전에 울리


“······.”


는 건 착각이었다.


마지막으로 맴돌던 기억이 뇌리에 박혀서, 환청이 들린 것 뿐이다.


김영석은 눈을 떴다.


8월 9일.


오늘의 날짜였다.


그는 어느 맨션의 거실에서 눈을 뜬 참이다. 소파에 대충 구겨져서 잠을 잔 터라, 뒷목이 심하게 뻐근했다. 허리며 목이며, 결리지 않은 곳이 없다.


벌써 그도 30대 후반이다. 서른 일곱은 애매한 나이이기는 했다. 인식에 따라 중반이라고 볼 때도 있는 것 같다.


켜둔 채 잤던 형광등의 백색광이 눈을 따갑게 찌르고 있었다. 영석은 피곤한 안구를 문질러 풀었다. 쏟아지는 피로감은 물리적인 것보다도, 정신적인 게 크다.


그는 잠시간 멍을 때리듯 누워서 있다가, 한 일 분 정도 가만히 있은 후에야 자리서 일어났다.


천천히 걸어 찾는 것은 한 구석에 있는 작은 냉장고다. 그리 큰 것을 사두지도 않았다. 맨션의 구조는 단순했다. 방 두 개, 화장실 하나. 넓은 거실과 부엌, 식탁 등.


방 하나하나가 그리 작지 않았다. 거실이 무엇보다 넓었고. 다용도실 따위의 공간들이 있으나 굳이 방으로 세지는 않았다. 팔 때의 부동산업자도, 살 때의 그도.


여기저기 널브러진 잔해가 있다. 즉석식품 따위를 먹고 대충 씻어 용기를 쌓아둔 것들이다. 쓰레기 봉투에 모아 종류별로 갖가지 물건을 넣어두었다. 입고 빨지 않은 옷가지가 바닥 여기저기에 널려 있기도 하다.


그는 어젯밤 양복을 입고 그대로 잠들었다가, 일어났다.


고단한 삶이다.


XX.


그는 속으로 욕지기를 뱉었다. 입에 달라붙는 말이다. 그만큼 최근의 생활은 지독했다.


진형이 죽었다.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심장은 내려앉는다. 그리고 머릿속엔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돌덩이가 하나 들어차 있었다.

다만 다행인 것은, 그가 무섭도록 냉정해진다는 것이다.


그 진한 사실은 현실이었다.


그가 몸담고 있는 조직은 쉬운 곳이 아니었고, 그의 위에 있는 목진형 사장이 죽으면서 사내의 정쟁은 더욱더 가속화되었다.


목진형 계열의, 비령 물산이라 이름을 두고 있는 회사 내의 조직원들과 그 식구들을 보전하기 위해서 부던히 애를 써야 했다.

이해 관계가 맞는 자들과 만났고,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비령 금융을 맡은 어느 간부였다. 기세가 좋은 전투조 애들을 데리고 있었고, 그 윗대가리 역시 무투파의 일원인 데다가 손속이 거칠었다.

손속만큼 대가리 또한 거칠었다면 대화가 되지 않았겠지만, 아수라장 같은 파벌 싸움 내에서 그나마 말이 통하는 인간이었다.


그도 이야기가 가능한 조력자를 찾고 있었고, 영석 역시 마찬가지였다.


개새끼들, 쓰레기들. 그리고 인간 말종과, 탐욕으로만 굴러가는 엔진을 가진 작자들.

그런 인간들이 즐비한 조직이었다. 결국 범죄 조직이라는 건 그런 법이었다. 야비하고 더러운, 비열하고 치사한.


영석은 조직이 넌더리가 났다. 가능하다면 전부 쓸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조직이 비대화되면서, ‘현대식’에 맞는 ‘현대화 범죄 조직’의 형상을 추구한다면서 사업을 확장하고 번듯한 회사같은 겉 껍데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눈뜨고 봐주기 힘든 정도가 되었다.

그럴싸한 이름을 내걸고 돈을 번다고 하지만, 양아치들이 운영하는 회사의 방식은 그리 깨끗한 게 아니었다.


고작 사채 대부업이었고, 용역들을 동원한 일감 가로채기였으며, 더러운 정치인이나 재력가와 손을 잡은 뒤 그들의 뒤를 봐주고 후원을 받는다. 마약 역시 쏠쏠한 사업 아이템이었으며 관계 없는 이들의 인생까지 파탄으로 끌고 들어가고 있었다.


원래 그렇던 놈들이야, 그 구더기 들끓는 곳에서 산다지만. 멀쩡하게 살 수 있는 이들의 인생까지 비틀고자 한다면 상리를 넘은 짓거리였다.

영석은 조직이 더 이상 커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조용하게, 더러운 놈들끼리 치고 박으면서 얼마 안되는 돈으로 제 놈들 입가에 풀칠이나 하던 때가 그나마 나으리라. 쓰레기들은 쓰레기답게, 조용하게 숨죽이고 사는 것이 사회를 위한 일이었다.


영석 역시 그런 쓰레기들 틈에 몸담고 있는 한 명이었다.


진형은 유일하게 말이 통한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인간이었으나, 그의 인생 말미에는 비겁한 꼴을 많이 보였다. 상종 못할 부류의 간부들 앞에서 입을 다물었고, 계파의 보신을 위해서 넘어간 일들이 많았다.

돈은 없어도 곧 죽어도 가오かお(얼굴의 일본말. 한국에서 체면과 자존심을 이르는 속된말)는 있다던 인간답지 않은 모습에 영석은 많은 고민을 했다.


그를 끝까지 따라도 될 지, 아닌지에 대해서.


어쨌든 거대한 조직의 흐름과 변화의 물결 속에서 목진형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건 인정한다. 괜히 튀어 나갔다가 돌을 맞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가만히 버티고 있었는데도, 결국 칼과 총을 맞았다.


그렇게 먼저 간 못난 형님은, 더 못난 아우에게 당부의 말들을 전했다. 별 것 아닌 말들이었다.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말들. 그러나 이 더럽고 어두운 조직의 세계에서는 쉽게 꺼내기 힘든 이야기였다. ‘신뢰’에 관한 것이었으니까.


더러운 조직은 상관 말고, 네 목숨 챙겨라. 설령 경찰에게 가서 빌빌거리는 한이 있더라도, 살 길 모색해서 새 삶 살아라.


영석은 그제서야 알맹이가 뒤진 줄 알았던 형님이 여전한 인간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마지막 순간에 그와 함께 해주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고, 미친놈처럼 울다가 실의에 빠졌다.


결국은 그의 말대로 움직여야 했다.


복수,


를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자신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다. 일단은 도생이었다. 삶을 도모하고, 그 다음에 조직을 정리할 수 있다면 해야 하리라.


경찰에게 가서 그들의 협력을 구하는 것도 좋다. 당장 밑바탕을 만들어야 한다고 느꼈다. 법보다 칼과 총이 가까웠으므로, 적어도 적당한 대치 상태를 만들만큼 체급을 키워야만 했다.

진형을 비롯해서 계파의 간부들이 많이 갔다.

영석은 비열하게 보일 정도로, 별다른 상처가 없었지만 그를 제외한 간부들이 많이 죽은 것이다. 갑작스러운 습격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머리가 좋은 영석을 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 자들도 있으리라.


그는 진형과 함께 밑바닥에서 조직의 머리까지 올라온 입지전적인 인물이었고, 싸움에 능했으며 머리 회전이 빨랐다, 늘. 영석의 대가리에 도움을 받지 않은 인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가급적이면 그를 살려서 자신들의 편에 두고 싶어하는 계산도 있으리라.


영석은 자신이 일단 안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거기서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누구를 믿어야 할 지 가늠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까닭도 있다. 지금은 멈춰설 수 없는 상황이었고, 곧 죽을 판국이었으므로 적극적으로 뛰어 연합을 구성했다.


비령 금융사 계열의 간부, ‘최기욱’은 그래도 손을 잡았다면 믿을만한 인간이었다. 그는 망나니였고 또라이같은 짓을 많이 했지만, 적어도 뒷말은 안했다. 영석의 제안과 손을 뿌리쳤다면 뿌리쳤지, 다른 말을 하지는 않으리라.

그가 비교적 적은 세를 가지고도 살아남는 건 그 지독한 성정과 휘하 충성스러운 무투파 조직원들 때문이었다.


최기욱 파를 없앨 수는 있지만 먼저 건드리는 자들이 가장 손해가 크리라. 몇 개 계열이 정쟁을 벌이고 있는 형국에서 상처를 입는 건 다른 녀석들의 먹잇감이 되기 좋은 꼴이다.

앞서 나가 그런 부담을 지고 싶어하는 자는 없었고, 이 뒷세계에서 가장 희박한 단어가 바로 신뢰라는 말이었으므로 아이러니하게 최기욱 파는 살아남았다.


“습.”


마른 침을 삼켰다.


영석은 냉장고에서 작은 물병 하나를 꺼내 따서 마셨다. 간밤에 목이 말랐던 모양인지 벌컥대면서 반을 단숨에 비운다.


푸후,


물기 섞인 한숨을 뱉어내면서 고개를 젓는다. 대강은 씻고, 다시 나가봐야 하리라. 그의 행적을 아는 자가 많지 않다. 지금은 조직원들에 대한 연락도 따로 숨겨 놓은 핸드폰으로 간접적으로 통하고 있었다. 만나야 할 사람에게, 만나야 할 때에만 자신의 동선을 알리고 나머지는 몰래 움직이고 있다.


당장 영석을 없앨 유인이 없다고 하더라도, 결국 언제 미친 놈들 중 하나가 머리가 돌아버리면 칼이 날아올 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최근에 막나가기 시작한 새끼들은 총을 잘 이용했으므로, 정말 영화처럼 저격이라도 당할 지 모르는 상황이라 주의를 각별히 기울여야 한다.

노상에서 넋놓고 있다가 한 순간에 당하는 게 꿈같은 일이 아닌 것이다.


“······.”


삐리리리.


무미건조한 착신음이 울렸다. 핸드폰에 설정해 둔 소리가 그것이었다. 잘 튀지도 않고, 시끄러운 자리라면 묻힐 법도 하다. 영석은 소파 근처의 탁상에 놓아둔 핸드폰을 향해 걸어 열었다.


폴더 형의 터치 핸드폰이었다. 제법 비싼 기종이지만 손 안에 들어오는 감각이 좋아서 골랐던 물건이다. 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이 달리 없는 비상 연락용이었다.


영석은 전화를 건 사람의 이름을 보고 큰 고민 없이 받았다.


터치 패널을 건드리는 손가락이 몇 번 움직인다.


“···예.”


물을 마셔서, 간신히 갈라지지 않은 목소리가 나온다. 최근은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한 날이 많았다. 과한 피로는 사람을 죽인다.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극도에 달하면 정말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을 때가 많았다.


영석은 생각해야 할 일들이 너무 여러가지라, 최근 괴로웠다. 그런 고단함을 간신히 한 겹 아래에 감춘 채 건네는 말이었다.


[여, 살아있네. 김 상무. 난 또, 연락이 안돼서 먼저 가신 줄 알았잖아.]

“······그게 XX 인삿말로 적당하다고 봅니까, 최 사장님?”


영석은 다소 날카로웠다. 원래 도움되지 않는 언행은 하는 법이 없는 편인 인간이었다. 다른 계열의 간부라면 날을 세워봤자 좋을 일도 없고, 더군다나 지금은 그가 손을 벌리는 입장이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령 금융, 최기욱의 말이 그의 신경 한 구석을 찔렀다. 빵빵하게 부풀어오른 풍선의 한 군데를 누르면 다른 곳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한계에 달했던 영석은 사납게 말을 뱉는다.


[하하, 아, 난 또. 혹시나 한 거지. 다행이야, 다행. 그래, 보기로 한 건 12시인데 준비 다 됐나? 준다고 한 게 바로 그렇게 처리 가능한 종류인지 모르겠어.]


능글맞게 말하는 최기욱이다. 어지간해서는 뒷말이 없는 놈이지만 최근의 대화 중에 느낀 바로는 속이 좀 구린 듯도 하다. 못보던 새에 죽을 고비라도 넘겼나, 사람이 바뀐 모양이다. 그런 이상함 때문에 영석은 더욱 더 속으로 위기감과 함께 스트레스를 느꼈다.

자연스레 말투는 날카롭다.


“···에, XX. 다 됐습니다. 내가 비령 물산 대가린데 그럼 뭐 누구 허락 받고 준비해가겠습니까? 있다가 약속한 때 장소에서 군말 없이 봅시다.”


꼭 욕을 넣어 뱉는 그의 말에 최기욱은 별 반응이 없었다. [······.] 잠시간 뜸을 들이더니 그가 통화기 너머로 말했다.


[다행이네. 우리 다른 수작은 벌이지 말자고. 어차피 그룹 내에서 가장 쳐지는 게 자네랑 난데. 다른 놈들 좋은 일 시켜줄 것 없지, 안 그런가. 나도 자네 믿으니까, 서로 그렇게 하자고.]

“······누가 할 말씀을.”


영석이 퉁명스럽게 받았고, 곧이어 별 영양가 없는 헛소리 몇 마디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영석은 마른 세수를 했다. 아주 살짝 열어둔 커튼 사이로 햇살이 비쳤다. 늦은 아침이었다. 준비하고, 서류를 챙겨서 약속 장소에 가면 될 것 같았다.


서류는 미리 다른 곳에 챙겨 두었다. 지하철 역의 공용 락커룸이었다. 허술하고 멍청한 은폐 장소였지만, 다른 인간들이 생각하지 못할 곳이라는 점에서 도리어 쓸만한 곳이었다. 1호선 역사 내 어느 곳에 어지간한 중견 기업에 비견되는 회사의 내부 자료가 통째로 들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자가 많이 없을 것이다.


동선은 늘 어지럽게 가진다. 일반적인 통행 시간보다 더 걸려서 목적지에 도달하고는 하는 것이다. 바보같은 짓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언제나 미행이 따라 붙는다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게 마음이 편했다. 자가용도 잘 이용하지 않는다. 차에다 무슨 짓거리를 해둘 지 모르고.


완벽하게 믿을 수 있는 심복과 함께 장갑차 수준의 방비를 해둘 수 있는 의전 차량이 준비되어 있다면 모르겠는데, 불행히도 그런 차량은 조직의 보스조차 탈 수 없었다. 선대 회장이 죽고 2대 째의 회장은 다른 계열사의 사장들과 나이대가 비슷했고, 발언권도 그다지 세지 않았다.


조직의 암투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 일이었다. 선대가 지병으로 맥없이 급사를 하고, 그 아래의 대가 약한 아들이 덜컥 회장직에 앉게 된 사연도 말이다.


그룹 계열사의 사장들은 곧이어 으르렁대기 시작했고, 각기 자신의 몫을 전체 지분에서 더 챙기기 위해 애를 썼다.

일반적인 회사와 그룹이라면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가 몸담은 비령 그룹은 이름만 그럴싸하지 결국 범죄 조직의 다른 말이었다. 무력적인 정쟁과 암살, 암투 따위로 자신의 지위가 얼마든지 변동될 수 있는 곳 말이다.


지금 비령 그룹을 제외하면 이 정도로 단일화가 되어 거대한 조직을 이룬 범죄 조직이 달리 없었다. 비령은 지금 너무 몸뚱이가 커졌기에, 경찰 조직 쪽에서도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하는 수준에 와 있었다.

한 번에 통으로 먹으려는 시도를 할 법도 한데, 아직까지는 그의 정보망에 들어온 시도들이 달리 없다. 영화에서처럼, 밑바닥부터 이 그룹이 성장하기 시작했을 즈음에 조직원 하나를 위장 투입해서 속에서 치려는 경찰이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 정도는 몰라도, 실제 신원이 그리 확실치 않은 최근에 들어온 놈들 중에서는 분명 형사 류의 인간들이 있을 것이다.

차라리 그들이 더 믿을만 하다는 점이 우스웠다. 범죄 조직의 적은 범죄 조직이었다. 경찰 조직은 두 팔 들고 백기를 들면 아마 굳이 목숨을 취하지는 않을 테였으니까. 돈에 대한 욕망으로 움직이는 놈들은 상대가 어떤 꼴을 하고 있든 아마 믿지 못하고 기어코 목줄을 끊을 것이었다.


당장 영석의 계열사 조직원들 중에서도 의심가는 놈들은 몇 있었다. 심성이 깔끔해 보이는 새끼들이라 놔두고는 있었다. 말했듯 차라리 경찰 조직의 스파이라면 더 안전한 상황이었으니까.


개같다,


라는 말이 저도 모르게 튀어 나오는 상황이다.


영석은 대충 샤워를 하고 씻고, 깔끔하며 그리 튀지 않는 정장으로 갈아입고 신문지와 가방 하나를 챙겨 밖으로 나섰다.

그의 인상은 평범한 편이다. 일부러 티내지 않는다면, 지나치는 그를 알아볼 자들이 그리 많지 않다. 조직 내에서 자주 보던 익숙한 놈들도 그가 슬쩍 다가갔을 때 나중에야 그를 알아보는 때가 많았다.


영석의 인상에 관한 건 악명이 높아서, 아랫 놈들 중에는 그를 알아보지 못해서 바로 윗선에게 갈굼을 당하는 일이 빈번하다고도 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놈들을 위해서 일부러 티를 내며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영석은 나가기 전, 현관 근처에 걸린 거울에 시선을 멈추었다.


회색 정장. 흰 와이셔츠. 넥타이는 어두운 갈색에 대각선 줄무늬가 검게 그어져 있다.


자신의 표정을 살핀다.


무감정한 낯을 하고 있는 사내 하나가 거울 속에서 스스로를 응시한다. 짧고 단정하게 자른 검은 머리칼. 약간의 젤을 발라 스타일을 잡았다. 어느새 슬쩍 주름 진 얼굴이다. 체력은 반감기라고 봐도 좋았다. 호흡 역시 여전하고, 순발력도 남아 있었지만 장기적인 운동이 되면 스테미나가 달릴 때가 많다.


여차하면 낼 수 있는 전력이 조금 적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었다. 숨이 딸려 죽는 일은 없어야 하는데.


그래도 깔끔하게 차려 입은 꼴을 잠시 살피다가, 그가 맨션의 문을 열고 나섰다. 그가 나가면서 자동화된 실내등 시스템이 불을 껐다. 철컥.


그가 묵직한 문을 닫았다.


*


“아, 그러니까 먼저 확증을 줘야 우리도 일을 할 거 아냐.”


최기욱은 덩치가 큰 사내였다. 건장한 체격. 두터운 하관. 목 역시 제법 두께감이 있어 적당히 쳐서는 부러질 것 같지도 않다.

최악의 경우에, 그와 드잡이질을 한다고 하면 승산이 얼마나 있을까. 목진형과 김영석은 그래도 알아주는 공격조였다. 맨손이 아니라 도구를 쓸 수 있다고 한다면 질 자신까진 없었다.


“······거 말은 다 했지 않습니까. 물산이랑 금융이랑 합친다고. 자리는 그쪽이 드시고, 지분만 넉넉히 주십시오. 적어도 이쪽이 소리를 낼 만큼은 챙겨 줘야 의미가 있는 합병 아닙니까.”

“아, 의미. 의미 좋지.”


짧게 깎은 머리. 회사원으로 보이는 인상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가 하는 일도 그런 게 아니었고. 이름은 비령 금융이라고는 하지만 온갖 종류의 사채를 운용하고 있는 회사이다. 조직원들이 맡은 일들도 비참한 인생들 근처를 떠돌다가 그들을 더 구렁텅이로 빠트리고는 하는 그런 것이었고.


그럼에도, 조직의 색깔이나 분위기를 말하자면 물산을 제외하고 그나마 가장 온건한 쪽에 속했다. 더러운 놈들끼리 그냥 일하고, 어지간해서 피해 주지 말자, 는 입장이었으니.

최기욱은 그래도 사내다운 면이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저 능글거리는 표정을 보면 그것도 맞는 평가였는지 의문이 가긴 했으나.


“그래도 상황은 잘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 김 상무님께서 그렇게 머리 좋으신데 말야.”


그가 뜸들인다.


그는 어느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번듯한 건물이었다. 물산 계열의 건물도 아니고, 금융 계열의 건물도 아니다. 그냥 개인적으로 영석이 알고 있는 어느 부동산 업자를 통해서 비어 있는 상가 건물의 공실을 얼마 주고 이따금씩 가끔 이용하는 것이다.

건물의 주인이 그 대여비를 받는지, 혹은 얼마를 받는지 따위는 모른다. 업자가 전부 먹는다고 해도 나쁘지는 않다. 깨나 많은 돈이었고, 어쨌건 영석은 안전하고 비밀스런 장소를 제공 받으면 될 뿐이다. 당장 사는 게 중요하다.


그의 곁에도 몇 명인가가 있다. 영석의 뒤 편으로 선 자가 물산 쪽 사원들, 곧 비령 그룹의 조직원들이었다. 젊고 또렷한 눈빛을 가진 놈들이었고, 그나마 최근 가장 그를 많이 보필한 녀석들이었다. 위기 시에 그래도 아주 도움이 안 되지는 않으리라. 최악의 경우를 위해 총기마저 품에 넣어두었다. 피를 흘린다면 우리의 것만 보지 않을 정도는 된다, 영석을 포함해 세 장정의 전력과 각오가.


그런 각오를 아는지 기욱과 그의 뒤켠에 선 자들도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다. 조직 내에서의 대화라는 건 늘 이런 법이다. 언제나 이빨이나 칼을 들이밀고 있어야, 신사적인 대화가 되곤 한다.

신뢰라는 게 부재한 세상에서의 일상이었다.


“······.”


김 상무, 영석은 표정을 슬쩍 찌푸렸다. 기욱이 창가 쪽에 앉았다. 그가 사무실의 문과 연결된 곳 쪽 소파에 앉아 있고. 단출한 일인용 소파가 두 개 놓여 있고, 그 사이에 티 따위를 놓는 유리 테이블이 있었다. 검은 재떨이와 서류 봉투 몇 개가 늘어져 있다.


최기욱의 뒤편으로는 집무용의 데스크와 의자가 있었고, 그 뒤로 큰 유리창이 있다. 커텐은 쳐져 있었다. 희미한 햇빛이 바깥에서 들어온다.


상가 건물의 복도로 바로 이어지는 문이었다. 영석이 앉은 자리는. 기욱의 뒤쪽으로 건장한 놈들이 네 명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두 놈은 창가 근처에 있고, 두 놈은 기욱의 앉은 의자 뒤편에 바로 서 있다. 인상이 험상궂고 체격이 큰 놈들이나. 덩치가 있는 놈들. 살집이 있지만 기세를 보면 그리 느려 보이지도 않는다.


기욱과 영성의 의견은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순서의 문제였고. 물산과 금융 두 계열사를 하나로 합친다. 자연스럽게 지분을 갖고 있던 임원진들의 역할 역시 재분배가 된다. 현재 물산 쪽에 남은 임원들은 영석을 포함해 서넛 정도가 끝이었다. 원래는 더 있지만 중병으로 병실에 입원해 있었고, 언제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날 지 모르는 꼴이었다.

금융 쪽은 열댓명 정도 있다. 기욱이 개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였고.


그러나 물산이 금융보다 회사 규모가 더 크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결국 회사 내 유보금이니, 자본금이니, 매출이니 하는 것들이 더 컸고 조직원들의 수도 보다 많았다.


물산은 영석과 진형, 비령 그룹 내에서도 이름 난 두 인간이 키워 온 계열사였고, 큰 위험 없이 여태까지 그 덩치를 불려왔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일정 수준 이상부터 영석은 회사의 규모가 커지면서 용인해야 할 더러운 짓거리들 때문에 탐탁찮아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래도 주변으로부터의 보호막이 되어주고 있었다. 이런 점 때문에 진형이 별다른 소리를 내지 않고 조직에서 자리 잡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임원진들의 세는 약하고 진형이 죽은 이상, 영석이 혼자 이끌어가기도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임원진들은 곧 조직의 간부들이었고 말단 조직원들을 다루는 가장 강력한 카리스마다. 리더를 잃은 집단은 공중분해 되기 쉬웠다.

그래서 먼저 정적들이 진형을 비롯해서 임원들을 친 것이고.


세력은 남아 있지만 다른 계파 중 두 곳만 손을 잡더라도 그 습격을 당해내기가 어려웠다. 결국 작은 편이라지만 그래도 속내가 투명한 쪽인 기욱과 말을 해서 합치는 것이 가장 쉬운 생존법이다.

지분을 합친 뒤 다시 분배하는 과정에서 영석은 자기 계파의 임원들에게 확약을 주기를 원했다. 상무이사 자리라거나, 적어도 대등한 입장에서 의견 공유가 가능한 정도의 지분이 있어야 동맹이 원활하게 움직일 것이다.


기욱은 여러가지 상황을 판단해서, 자신의 목숨 또한 사실 영석과 그리 다르지는 않을텐데 본인이 조금 더 안정적인 위치라고 생각하는지 뻗대고 있는 중이었고 말이다.


“······결국 결론은 나와 있다는 걸 알지 않습니까.”


먼저 누그러진 톤으로 말을 한 것은 영석이었다. 답 없는 기세 싸움을 계속해봐야 늘어나는 건 스트레스와, 시간낭비 뿐이다. 영석은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합치기로 했다면 빨리 합치자, 는 말이다. 당신들이 원하는 것들은 좋을 대로 들어줄 테니까.


“···결론? 아, 합병. 그렇지. ······.”


기욱은 슬쩍, 눈알을 굴린다. 데굴 굴리면서 입을 여는 톤이 마뜩찮다. 영석의 입장에서 말이다. 언제나 사내다운 투로 자신의 행색을 가꾸던 인간이었다.

각 계파의 세력도와 상관 없이 할 말은 하던 작자였고, 그래도 조직원들 중에서 일부러 사회악을 자처하지 않는 놈이라고 봤기에 손을 잡으려던 것이었다.

지금 그가 보여주는 뚱한 꼴은 평소에 그가 알던 기욱의 모습과는 약간 달랐다.


그것은 약간의 의심이 되었다. 곧 불안이 되었고. 영석은 인상을 조금 더 구겼다.


“······뭐, 다른 수라도 있습니까?”


“······. 내가 뭐 다른 수가 있겠나. 영석 씨께서 비령의 장자방 아니야. 그대가 그렇게 결론 내렸다면 그런 것이겠지.”


빙빙 쓸 데 없는 말로 대화를 돌리는 폼이 영석의 불안감을 고조시켰다.


“······.”


영석은 자기 품 안에 들어 있는 리볼버를 떠올렸다.


······여기가 그리 인적이 많은 곳은 아니었다. 상가 건물은 공실이 많았고, 지금 이 시간에 건물에 들어와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도 또 모를 일이다. 더군다나 건물 내측 깊은 곳에 위치한 사무실에, 방음 처리도 약간이나마 해두어서 다소 소음이 나더라도 주변에 크게 들리지는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한 발 정도는, 그래 한 발 쯤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주변에 듣는 이가 있더라도 지나칠 지 모른다.


그 외에 칼이나 삼단봉 따위를 뒤에 두 녀석이 여러 개 챙겨왔다. 개중 하나를 들면 덩치 중 둘 정도는 확실하게 처리할 자신은 있었다. 최선의 경우는 그럴 일을 애초에 만들지 않는 것이기는 했다만. 그게 마음처럼 되지만은 않는 것이 늘 인생이었다.


끼익.


그렇게 복잡한 생각으로 머릿속의 상상을 진행시키고 있을 무렵이었다. 영석은 기욱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가 슬쩍 웃는 것도 같았다, 고 느낀 순간 뒤에 있는 문이 열렸다.


“뭐.”


뭐야, 라고 말하며 영석이 뒤를 돌아보려 했다. 한 순간 늦은 것은, 기욱의 눈빛을 살피는 것을 멈추지 못해서였다. 무슨 수작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다. 그가 알기로 기욱은 복잡한 심계를 꾸미는 작자가 아니었다.

그에게 미리 접촉한 다른 자가 있다면 혹시 모른다. 다른 자라,


생각 나는 이름이 몇 개 있었다.


“미안하게 됐네.”


기욱이 말했다. 영석이 뒤를 봤고, 들어오고 있는 검은 정장의 사내들이 여럿이었다. 문 뒤로 미어지게 제 몸뚱이들로 장벽을 치고서, 밀리듯 들어오는 자들이다. 하나같이 낯선 놈들이었고, 지금 상황에서 그 말은 결국 다른 계파의 조직원들이라는 뜻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씹!”

“야이 개새끼들아!”


뒤에 있던 두 놈, 민수와 철식이 쌍욕을 내뱉으면서 거칠게 움직였다. 민수의 품에는 영석처럼 총이 한 정 있었다. 영석은 순간 머리를 굴렸다. 결국 최기욱의 목숨을 인질 삼으면 벗어날 수 있을까?

저 놈들이 최기욱의 조직원들이라면 혹시 모른다. 그는 벌떡 일어나 철식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허벅지 춤에 있을 곳으로 손을 넣어 재킷 아래서 회칼을 하나 뽑아 들었다.


스릉, 하고 뽑혔고 마침 그와 함께 철식 역시 회칼과 삼단봉을 꺼내 들었다. 민수는 총을 택한 모양이었다. 철컥, 하고 쇳덩이가 움직이면서 발사 준비를 마치는 소리가 들렸다.


“야이 XX! 잡아!”


사내들은 아주 지독하게 훈련된 놈들처럼 움직였다. 회칼과 삼단봉, 심지어 권총까지 든 셋을 상대로 별다른 기합도 없이 덮쳐 들어왔다. 그 인파에 밀리면서 쑤욱, 하고 철식은 몇 번인가 칼로 누군가의 몸뚱이를 찔렀다.


쇠봉을 짧게 휘두르며 누구의 대가리를 밀고 치려 했지만 녹록치 않았다. 한 둘 정도가 힘없이 쓰러졌고, 민수와 철식이 가진 역량만큼 수월하게 상대했지만 그 뒤로 계속 밀고 들어오는 인간들은 좁은 사무실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의 인파였다.


“이런 썅!”


영석이 외쳤다. 그가 어쩔 수 없이 회칼을 들고 기욱에게 달려들었다. 유리 테이블을 밟고 그대로 점프해 날아가려 했다. 아쉽게도 옆에 섰던 놈들이 덩치에 걸맞지 않게 재빨랐다.


캉, 하고 거칠게 연약한 탁자를 밟았고, 그 신발 밑창에 재떨이가 밀리고 서류 봉투들이 짖밟혀 구겨졌다. 영석은 기욱의 왼쪽 편에 있던 덩치의 목덜미를 칼날로 그었다. 미안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명이 무너졌다. 오른 편에 있던 덩치가 같이 덤볐고, 영석은 그 놈의 면상을 회칼을 든 팔의 팔꿈치로 가격하고는 그대로 밀고 들어가 테이블 위에서 점프하며 무릎으로 한 번 더 찍었다. 거구가 쿠당탕! 하고 집무실 뒤쪽으로 쓰러졌다. 그 전에 이미 움직이고 있던 창가의 덩치 둘이 날았다. “으아아!” 놈들은 미련하게 소리를 질렀고, 놈들의 덩치에 밀려 영석이 뒤로 넘어지려 했다. 회칼을 휘두를 각도가 나오지 않았다. 총은 아직 꺼내들지도 못했다.


미련한 짓거리였다, 다.


영석은 그대로 다른 놈의 몸통에 깔려 팔을 움직이지도 못했고,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쿠당탕!


집무실의 집기나 책장에 꽂혀 있던 책 따위가 널브러졌다. 요란스러운 가운데, 사무실 문쪽에서 들어오는 다른 조직원들은 지독한 눈빛으로 침묵을 지키면서 영석과 그 부하들을 밀어댔다.


철식이 먼저 넘어졌고,


“야이 씹. 저 새끼 빨리 꽂아!”


콱!


이런저런 소리가 들리는 와중에 영석의 목덜미에 뭐가 꽂혔다. 한 놈이 다가와서 주삿바늘을 그의 동맥에 꽂아 넣었다. 약물이 들어 있던 것이었고, 영석은 곧바로 눈 앞이 흐려지며 청각 역시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아득한 정신 너머로,


탕!


하는 거친 총성 한 발만이 메아리처럼 울려 들렸다.


*


작가의말


정신을 잃는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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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작가의 말 23.09.16 22 2 1쪽
23 22. (完) 파스타 23.09.16 16 1 7쪽
22 21. 테이크 아웃 23.09.16 19 1 24쪽
21 20. 퇴장 23.09.16 17 1 16쪽
20 19. 콜트 +2 23.09.15 21 1 22쪽
19 18. 지지支持 23.09.15 22 1 29쪽
18 17. 조직 내 간부 총회 23.09.14 19 1 16쪽
17 16. 도주 23.09.14 19 0 16쪽
16 15. 파리지옥 23.09.14 22 0 15쪽
15 14. 손님 왔습니다. 23.09.13 24 0 20쪽
14 13. 짧은 재회 23.09.13 29 0 24쪽
13 12. 제인 메리어트 23.09.13 29 0 27쪽
12 11. 탕! 23.09.12 30 0 33쪽
11 10. 빠른 퇴장 23.09.11 38 0 25쪽
10 9. 스티브 블레어 23.09.11 30 0 26쪽
9 8. 김도건 23.09.10 36 0 31쪽
8 7. 민형석 23.09.09 38 0 30쪽
7 6. 떨어지다 23.09.09 36 0 25쪽
6 5. 회복 23.09.09 36 0 23쪽
5 4. 숨 좀 쉬자 23.09.09 32 1 22쪽
4 3. 초인 23.09.08 42 1 30쪽
3 2. 오발 23.09.07 36 1 20쪽
» 1. 기억 23.09.07 43 2 28쪽
1 0. Prologue. 23.09.07 83 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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