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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누아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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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9.07 23:28
최근연재일 :
2023.09.16 18:43
연재수 :
2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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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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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글자수 :
241,626

작성
23.09.09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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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4. 숨 좀 쉬자

DUMMY

퍽, 하고 민준의 턱을 갈긴 영석은 아주 느리고 천천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의 앞에 있는 건, 문을 열고 들어와 보였던 평범한 체구의 여성 하나, 한국인 남성 하나, 그리고 백인 남성 하나였다.


가장 먼저 앞서 들어왔던 한국인 남성은 불이 켜짐과 동시에 영석의 몸이 움직여 가 닿았다. 그의 시선에서 번뜩, 하고 시야가 밝아졌을 때 곧바로 그 앞에 낯선 낯짝이 있는 것으로 느꼈으리라. 놀랄 만도 하다.

아무도 없다, 시체 뿐이다라고 생각했던 자리에서 사람의 얼굴을 보았으니까. 귀신이나 유령, 그런 류도 인식한다면 뒤집어질 만하다.


그런 상황에서 영석이 민준에게 깔끔한 주먹질을 날린 것이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무방비 상태의 일반인이 기절할 정도의 충격만 준 영석은 나머지 사람들을 향해 움직였다.


여자나, 건장한 체격의 백인 남성 또한 황망한 눈깔로 현실을 인지하기 위해 애쓸 뿐이었다. 놀라 쓰러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고작해야 몇 초, 또 한 순간, 숨 한 번 몰아쉴 시간 가운데 일어나는 일이었고 뇌리 속의 생각이다.


영석은 자신의 동체 신경과 신체의 운동 반응, 그리고 사고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져 있음을 계속해서 체감할 수 있었다.

비정상적인 속도였다. 어떤 인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곤 하는 사람들도 이렇게 움직이지는 못한다. 대략적인 가늠만으로도 어지간한 기초 종목들의 기록을 전부 갈아 치울 수 있다, 고 스스로의 몸을 느끼며 생각했다.


사람의 몸은 기본적으로 그 정도의 에너지를 발산하도록 지어져 있지 않았다. 물론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사례들이야 있었지만, 그런 일이 지속적인 경우는 현대에는 사례가 없었다. 어느 전설 속에, 삼손이니 하는 이름들로 전해져 오기는 하지만 현대의 연구자들이 볼 수 있는 실증 사례로는 전무하다.


영석이 겪고 있는 변화와 능력은 여러 가지 우연이 기적처럼 겹쳐서 일어난 것이었고, 그건 지독한 농담이나 비슷한 것처럼도 느껴진다.


조직 생활을 하다가, 다른 계파원에게 얻어 맞고 끌려오고, 비령 그룹의 제약사 건물 내부에서 독살 시도를 당했더니, 죽지 않고 도리어 살아나서 히어로 무비의 주인공같은 능력을 얻게 되었다라니.


영석은 평소 즐기는 취미 몇 가지 중에 소설이 있었다. 제대로 배워먹지 못한 놈이었지만 따분하지 않은 이야기를 볼 때의 몰입감은 그의 인생에서 몇 없는 정적과 평안을 선물해주는 시간이었는데,


만약 이대로 모든 일이 잘 풀려서 그에게 평온한 자유가 주어진다면 소설로 써볼만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워낙 어이가 없는 내용이라 개연성이 없다며 누군가에게 욕을 들어먹을 지도 모를 줄거리이기는 했다.


어쨌든, 영석은 눈 앞의 두 사람을 보았다. 백인 남성은 기어코 눈을 질끈 감았고 여성은 자신을 보고 있으나 눈깔에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표독스러워 보이는 듯도 했다, 여성의 표정은.


일단 적이라고 인식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가 비몽사몽간에 당했던 많은 일들이 또렷한 정신 속에 정리되어 기억났다. 자신이 이 방에 끌려 들어오고 나서, 그가 겪었던 격통의 원인은 분명 이들이었고, 개중에서도 여자였다. 그 때 어렴풋이 보았던 어둠 속 희미한 각도의 인형은 아마 이 여자일 테다.


영석은 순간 괘씸함이 치밀어올라서, 민준과 마찬가지로 여자의 턱을 갈겼다. 조금 과하게 쳤고, 순간 목뼈가 덜그럭거리며 흔들렸다. 세정의 두개골 속 뇌가 가차 없이 흔들렸고, 그대로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버티고 서 있기 힘든 심정이었으니, 그녀의 독살스런 마음으로도 말이다.


자신이 죽였다고 생각한 원한 없는 대상이 도리어 살아나서 멀쩡히 움직이는 꼴은, 어떤 공포 영화에 갖다 대어도 비견하기 어려운 공포감을 살인 미수자에게 자아내는 광경이다.


영석은 그대로 픽 쓰러지는 두 명의 신형 사이로 제 몸을 욱여 넣었고, 시선을 피하고 찡그리던 백인 남성, 가장 뒤에 있던 스티브에게 다가갔다. 그대로 밀치듯이 나가면서 스티브의 발을 걸었다. 뒤로 저항 없이 넘어가는 그다. 그대로 후두부를 감싸 안으면서 거구를 바닥에 넘어뜨렸다. 쿵!


그의 몸이 연구실 바닥에 드러누웠다. 아직 정신은 남아 있었다. 안타깝지만, 영석은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했다. 영문도 모르는 이 공간 속에서 그의 편은 없다고 생각하는 게 좋았고, 멋대로 움직일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두었다가는 위험만 늘어날 뿐이다.


세 명이 각기 다른 방향과 자세로 무너지듯 바닥에 제 몸들을 댔다. 민준과 세정은 문틈 사이에서 넘어진 것이라서 그대로 바닥에 대가리를 박지는 않았다. 좁은 틈에 그 몸들이 끼어 천천히 무너지듯 떨어졌고, 스티브는 영석이 보호했다.


물론 보호한 것으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영석은 곱게 넘어간 스티브의 뒤에서 가볍게 두 손으로 그 목을 눌렀다. 경동맥 부위였고, 원래 이렇게 하는 일은 아니었다. 초크, 라고 불리는 자세와 기술은 깨나 많은 힘이 들어갔고 한 번에 확실한 부하를 혈류에 주어서 상대를 기절시키는 것이었으니.


그러나 영석은 그저 손바닥 면을 그 목의 양쪽 경동맥 부위에 잘 가져다 대고 한 번에 누르는 것만으로 가능할 듯싶었고, 그래서 그 손으로 온전히 목을 감싸 쥐며 강하게 순간 압박했다.


몇 초가 지나지 않아서 ‘그륵’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스티브의 눈알이 뒤집히는 것을 보았다. 후유증이 있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마저 걱정할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고, 또 그런 상대들도 아니었다.


비령과 어찌저찌 연이 닿아 있는 연구원들일 확률이 높았다. 알고 그러했든 모르고 그러했든, 범죄 조직에 연루되고 또 직접적으로 영성 자신의 목숨을 노린 인간들이다. 죽이지 않은 것을 고마워해야 하리라.


영석은 그렇게 몇 명을 처리했다. 밝은 복도. 가뿐한 몸.


마지막으로 쓰러진 스티브의 몸께를 적당한 손길로 더듬어 짚었다. 혹시 어떤 특별한 도구 따위가 있어 그의 신변에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잠시간 그러던 영성이 손을 털고 일어섰다.


그는 지저분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닦고, 넥타이를 똑바로 맸다.


“크흠.”


걸려 있던 뭔가를 뱉어내듯, 힘주어 헛기침을 하고 숨을 쉰다. 머리가 조금 돌아가는 것 같았다. 기능은 깨어난 이후로 과도할 정도로 좋기는 했는데, 그런 것 말고. 그냥 기분이 말이다.


어둠 가운데서도 사물을 정확히 꿰뚫어보던 비정상적인 시력은 밝은 곳을 당연히 더 잘 보았다. 연구동 복도의 저 끝까지, 평소라면 도저히 보이지 않았을 작은 지점까지 확대경으로 보듯 확인이 가능하다.

여전히 이상한 점이 많았지만 어쨌든 살아남았다.


살아남아라,


형이 마지막으로 하던 말이 메아리처럼 귓가에 있었다. 그래, 살아야지. 살아서 뭐든 해야지. 개같은 조직을 어떤 식으로든 처리한다면 더 좋을 것이다. 그 살아남는 과정에 있어서.


점차 정이 떨어져가던 곳이었고, 구더기같은 자들이 들끓던 판이었다. 한 번 죽다 살아났다면, 못 할 것이 딱히 없다.


영석은 옷 매무새를 툭툭 털어 정돈하면서 흰 복도를 걸어갔다.


*


연구동 내부에는 분명 CCTV따위가 즐비하게 깔려 있을 것이다,


라는 게 그가 가장 처음 든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렇잖아도 제약 계열 등 물리 화학 연구소는 기밀이 많을 테인데, 비령 그룹과 관련이 있다면 불법적인 일에도 어렵잖게 손을 대는 곳일 가능성이 높았다.


뒤가 구린 놈들, 속내가 시커먼 놈들은 늘 자신들의 비밀을 감추기 원하기 마련이고, 그에 따라 보안이 철저해질 것이다. 과도할 정도로 말이다.


비령 제약에 소속되어 있는 연구원들은 어느 정도 도청이나 감시, 미행 등 불법적인 인권 침해를 당하고 있었다. 모든 연구직원들을 그렇게 하기에는 제약사나 그룹 내에서도 인원이 그리 많지는 않았고, 특정 프로젝트를 진행중이거나 혹은 눈에 띄는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번갈아가면서 하고 있는 짓거리였다.


개중에서 민준이나 스티브 같은 경우에는 상부의 지시에 달가워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인 바가 많았으므로, 근래 직접 감시를 당한 바가 있었고.


어쨌든 그가 걷는 건물 내부에서 영석의 움직임을 보고 있는 자들이 많을 가능성이 높았다. 깔끔한 실내의 복도를 또각거리면서 걷는다. 갈색의 구두는 많이 닳아 있었다. 운동용으로도 움직일 수 있게끔 특수하게 나온 종류였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구두였지만 신어보면 재질의 착용감이 좋고 신축성이 있었다. 반쯤 운동화라고 해도 좋았다.


영석이 자주 애용하는 브랜드의 물건이었다. 보가트Voggate, 라는 이름이었다. 가격도 그다지 비싸지 않았고, 오래 신을 수 있는 데 반해 말이다. 평범한 운동화 정도의 값이니 구두 종류를 사는 돈이라고 생각한다면 훨씬 아끼는 일이리라.


그가 있는 연구소의 내부 구조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저 쭉 뻗은 흰 길을 따라 걷다가, 벽면과 골목이 인도하는 대로 방향을 틀어서 어딘가로 가고 있을 뿐이다.


적당한 걸음은 뛰지 않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속력이 제법 빨랐다. 전체적으로 신체 능력이 향상된 덕분이다.


여기저기를 살피는 눈동자가 찾는 것은 CCTV처럼 보이는 물건이다. 연구소 복도의 벽과 천장이 교차하는 꼭짓점 자리, 모서리 따위, 길목 전체를 시야에 담을 수 있는 적당한 각도의 자리에 무언가 있는가 해서.


영석의 걱정과 달리 그를 직접 지켜보고 있는 사람의 눈길은 없었다. 제약사 건물에서 당직을 서는 경비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가 보는 곳은 연구동 쪽이 아니라 지상층의 본사 건물 부근이었고, 그마저도 나태한 근무로 화면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커피를 마시고도 밀려오는 잠을 이기지 못해 눈을 돌린 상태였다.


연구동 내부 연구실이나 개인실 등에 영석이 기절시킨 세 명의 말단 연구원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영석이 일어났으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하지 못했다. 애초에 죽을 지도 모르는 양의 신경성 약물을 투입했고, 그 다음에 실험의 일환이라면서 극독을 넣도록 지시했으니까 말이다.


직접 영석의 죽음을 명령한 부장, 이라는 인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부족한 잠에 밤 가운데 쪽잠을 자면서, 눈을 뜬 뒤 어떻게 되었느냐고 스티브에게 물을 작정이었지 지금 영석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영석은 그렇게 자유롭게 움직였고, 누구의 방해나 감시를 받지 않았다.


연구동 내부의 길이 그리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가 갇혀 있던 1027의약품실 자체가 그리 삼엄한 경계 속의 시설도 아니었고 말이다. 연구동 내부의 여러 시설들 중에서.


또한 잠금장치 따위가 길목에 있다고 하더라도, 기밀 시설 안쪽에서 보다 낮은 레벨의 장소로 ‘나가’는 데는 그다지 ID카드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고도 혹시 몰라, 스티브의 가운의 안팎을 뒤져 신분증 처럼 보이는 종류의 물건들 몇 개를 챙겼다.


개중에 쓸만한 물건이 있다면 일이 수월할 테다.


영석은 약 십 몇 분간 연구동 내의 길목을 헤매다가, 어렵잖게 바깥으로 나가는 연구동의 출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지하1층에서 지상층, 비령 제약의 본사 건물로 나가는 데는 스티브의 ID카드가 필요했고, 마침 쥔 물건들 중 하나가 그것이라 자연스럽게 사용했다.


영석은, 초인은 제약사 건물의 비밀스런 지하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8월 10일 새벽.


비령 제약사의 본사 건물 지하에서 한 명이 바깥으로 나왔다.


어둔 밤 텅 빈 로비를 통해서 시가지에 위치한 빌딩 출입구로 자연스럽게 나가는 인형을 막는 사람은 달리 없었다. 제약사 내부 시설을 지키는 가드들도 그날은 딱히 없었고, 비령 그룹은 내부의 조직원들을 무력이 필요한 곳에 배치해 이용하지 외부 용병을 고용하지도 않았다.


특별한 프로젝트가 있다거나, 중요한 행사가 있다거나, 특별히 삼엄한 경계를 해야 하는 날에는 조직원들이 철통같이 지키고는 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비령 그룹의 간부랄 수 있는 김영석이 뒤통수를 맞고 연구 시설 내부로 들여보내졌지만, 이미 그 시점에서 김영석은 죽은 자나 크게 다름이 없는 상황이었다.


비령 금융의 최기욱과 제약 쪽의 민형석이 손을 잡았고, 그들은 계획의 상세에 대해서 공유를 했다. 민형석은 비령 그룹 내에서 정쟁 중 독극물을 통한 암살을 할 때 아주 요긴한 도움이 되는 인간이었다.


그룹 내 여러 계파의 간부들은 살아남은 김영석을 골칫덩이로 규정했고, 그를 회유해서 자신들의 휘하 간부로 삼는 것보다 제거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다.

진형과의 관계를 아는 자들이, 그의 친형제 같던 목진형이 죽은 이상 김영석이 비령 그룹의 다른 파벌에게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으리라 확신한 탓이었다.


회유되지 않는 김영석은 다룰 수 없으며 언제 목덜미를 노릴지 모르는 날카로운 칼이나 다름이 없었고, 곧이어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대상으로 그 처지가 바뀌게 된다.


민형석이 최기욱에게 도움을 준 건 수많은 휘하의 전투 조원들과 치명적인 용량의 신경독이었고, 그것이 투입된 순간에 최기욱은 김영석이 거진 끝났다고 생각을 했다.

아마 운이 조금만 따라주지 않으면 죽을 테고, 살아남더라도 온전치 못한 병신으로 살아가던가, 어쨌든 복수를 꿈꿀 수는 없는 처지가 되리라고 말이다.


악독하며 치밀한 비령 그룹 내의 여러 지모들도 죽은 자에 대해서 더 이상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김영석은 최기욱과 민형석이 판 구덩이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갔고, 그 마지막은 그저 제약사 계열의 어떤 실험에 희생되는 더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김영석이 살아서 걸어 나온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그런 일이 벌어졌으므로 의외로 큰 어려움 없이 그는 다시금 서울 시내의 공기를 맡을 수 있게 되었다.


“후, 하.”


숨을 자주 쉬는 것 같다.


새벽녘, 비령 제약의 본사 건물이 있는 한 시가지 근처의 도로변을 걸으면서 김영석은 바깥의 공기로 마음껏 숨을 쉬었다.


그가 멀쩡히 다시 서울의 거리 위를 걷고 있고, 돌아왔다.


신의 안배인지, 무엇인지는 그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덤으로 초인적인 수준의 신체 능력까지 얻어서 왔다.


김영석은 잘못 쏘아진 오발탄같은 처지였다.

그 오발탄은 제법 위력이 굉장한 것이었고, 잘 돌아가는 머리로 자신이 쏘일 과녁을 고르고 있다. 비령 그룹은 무너지는 편이 대한민국 사회를 위해서도 더 나은 집단이었다. 내부에서도 그렇게 생각했고, 이렇게 그 속에서 밀려나온 이후에도 변함없는 생각이다.


영석은 먼저 그 과녁으로, 목진형을 죽이는 일에 가세한 모든 계열사들을 골랐다.


*


비령 그룹은 덩치가 큰 사업체 연합이었다.


범죄 조직으로 시작해서 어떻게 이 정도 규모를 일구어냈는지 알 수 없는 수준이었고, 현재 그들이 있는 대한민국 사회는 비정상이라고 하는 게 옳고 또 납득하기 쉬운 설명이었다.


비령 그룹이 돈을 많이 벌수록,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이 크게 망가진다.


그런 사업 구조를 갖고 있는 집단이 어지간한 대기업같은 모양새가 되었으니, 그들이 지어 올린 건물이나 그 내부의 시설, 인적 자원에 대한 급여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인생을 구렁텅이로 빠트렸고, 또 지금도 현재 진행형으로 그러고 있었다.


사회 전체의 건전성을 해치는 일이라고 해도 좋았다. 경찰 조직들은 지나치게 비대해진 조직의 몸뚱이를 보고, 어디서부터 갈라 쳐내야 가장 소모와 소란이 적을지 간을 보고 있는 와중이었다.

함부로 건드렸다가 그 거대한 몸뚱이를 멋대로 비틀어대면, 더한 사고가 날 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당장 비령 그룹에 속해 있는 조직원들의 숫자만 하더라도 천 단위였다.


당장 칼이니 뭐니 하는 무기들을 들고 설칠 수 있는 장정들의 숫자가 그 정도라면, 말이 좋아 비령 그룹이고 조직 폭력배지 사회 전체의 위험도를 높이고 있는 반 테러집단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비령 그룹이 거기까지 커지고 또 단시간 내에 덩치를 불릴 수 있었던 데는, 그들의 더러운 손이 필요한 몇몇 위정자들의 도움이 있었던 탓이었다.


모든 위정자가 악하지는 않고, 능력이 없지도 않았다. 지혜롭거나 또 혹은 공익을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이들도 분명 있으리라. 그런 행정 직함의 요원들이 나라를 위해 애를 쓰고 있기에 행정부는 돌아가고, 국민들의 삶이라는 것도 유지되게 마련이었다. 그건 ‘실제’적인 일이었고, 어떤 일이나 현상의 실제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노력과 애씀이 필요했다.


실제로 일을 하는 사람과, 그것을 자신의 일인양 선전하며 거들먹거리는 이들은 분명 다른 종류였다.

비리를 위해 자신의 능력을 쓰는 인간들도 있었고, 개중에는 죄질이 악하거나 성질이 지독한 자들도 있었다. 반쯤, 혹은 온전히 사이코패스라고 봐도 좋은 인간들 또한 몇몇이 있었고.


나라는 위기였고, 어쩌면 비령 그룹이 커지기 이전부터도 그랬는지 모른다. 비령은 단지 이미 있었던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집어 삼켜 커진 벌레에 불과했고, 애초에 그들이 커질 단초를 제공한 ‘상황’은 대한민국에 미리 존재를 했던 것이니까 말이다.


범죄 조직의 암살 실행조니, 뭐니 하는 것들이 필요한 자들이 권력자들 중에 몇이 있었다. 유난히 썩었고 또 직접 그 짓거리를 시행할 자들이 개중에 다시 몇이 있었고. 영화에나 나올 법한 더러운 비리와 범죄 행위를 일삼는 미치광이들.


정계나, 혹은 가장 거대한 부류에는 속하지 못하지만 나름대로 이름 없는 돈을 많이 모아온 부유한 자들이 비령의 뒤를 봐주었다. 다시 그들의 가려운 부분을 비령 그룹이 긁어주었고.


악착같은 공생 관계로 인해서 비령은 그럴싸한 크기와 규모, 내부 내용을 지닌 단체가 되었다.


대한민국의 정재계를 비롯해서 여기저기에 발을 걸치고 있는 괴물, 혼합 폐기물, 뭐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영석은 그런 그룹의 내부에 있던 인물이었다. 변변찮은, 그저 그런 일개 조직이 어떻게 성장하고 변모하는지 옆에서 계속해서 지켜보았다. 그와 진형이 맡은 임무들 따위를 성공적으로 해내고 살아남을수록 비령 역시 커져갔다.

종래에는 이해할 수 없는 덩치가 되었고, 못배운 양아치로 시작한 그의 조직 생활이 말미에 팔자에도 없는 감투와 함께 수북한 돈을 쌓아 건네주기에 이르렀다.


안락한 생활을 싫다고 할 자가 없겠지만, 양심에 찔리는 일이 있다면 그 삶이 결코 평화로울 수는 없었다.

지금 당장 편안한 이기들이 생활 속에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게 언제 무너질 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스트레스가 더 크다. 언제 뒤통수에 총구가 겨눠진 뒤 총알을 맞을 지 모른다면.


영석은 비령이 점차 커지는 게 그런 일이라고 생각했다. 뒷골목 양아치들은, 답게 사는 게 옳다. 썩어빠진 쓰레기나 더듬으면서 저들끼리 치고박고 말이다. 그 사이에 낭만도 뭣도 없고 비열함 속에 살아가는 과정이었지만, 차라리 그 안에서 인간적인 정이 있던 사내를 만났었다.


노는 물이 커졌다고 들떠 있지만, 사회 전체에 악영향을 끼치면서 뭐라도 되는 양 거들먹거리는 꼴은 영석의 눈에 언제 어디서 넘어질 지 모르는 불안한 삶이었다.


비령의 다른 간부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형인 목진형이 그런 길을 걷지를 않길 바랐고, 진형은 그의 의심과는 달리 그런 길에 욕심이 없었던 듯 하다. 식구들, 혹, 개중에서 또 자신을 지키려는 의지가 올곧은 사내였다.


비령이고 뭐고 다 때려 치우고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농사나 짓고 살거나, 물건 떼다가 파는 작은 사업이라도 하자고 했으면 웃으면서 그러자고 했을 지도 모른다.


영석은 그게 참 아쉬웠다.


그런 말을 못 한 자신이 못내 견디기 어려운 머저리로 느껴졌고.


그리고 그래서, 그런 아쉬움의 크기만큼 비령을 부수기로 했다.


비령 제약, 금융, 물산, IT, 엔터, 공업, 그 외 여러 회사들이 있었다. 큰 계열사도 있고 작은 쪽도 있었다. 대부분은 불법적인 방법으로 도산 위기에 처해 있던 여러 회사들을 거두어들인 뒤 시설과 인력을 그대로 고용하고, 다시 불법적인 유착으로 일감을 따와서 규모를 불리는 식으로 만든 회사들이다.


한 번 망했던 회사들은 다른 살 길이 없었기에 비령 그룹 산하로 들어왔고, 고용자들은 이전과 그래도 비슷한 환경에, 연봉들은 그럭저럭 잘 챙겨주었기에 불만없이 일했다.

그러나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은 사실 비령 그룹의 목적에 따라 언제든지 엎어질 수 있는 것들이었고, 당장 그 다음 날 회사의 문을 닫고 어느 내전 중인 국가에 몰래 싸구려 무기 설계도와 그 부품을 양산해서 팔아 먹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수뇌부의 머리속이었다.


여러 계열사들 중에서 각 업계에서 1위를 차지하는 회사는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의 저력으로 중간 정도의 위치는 차지하면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 업계에서 응용할 수 있는 다양한 불법 사업들에도 뛰어들면서 가외적인 수입은 대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에 비해 훨씬 많았고 말이다.


불법적인 자금을 모으고, 그 돈으로 조직원들을 불리고, 다시 그 조직원들을 사용해 다양한 암투에 써먹는다. 비령이 커질수록 한국의 치안은 개판이 될 것이다.


영석은 우선, 자신의 후두부를 세게 후려쳤던 기억이 남아 있는 얼굴을 찾아가기로 했다. 금융 쪽의 최기욱은 그래도 심지가 굳은 양반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접선을 시도한 시점에서 이미 다른 작자와 손을 잡았던 것 같다.

거짓말에는 능숙한 줄 몰랐는데, 속에 구렁이가 들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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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6. 떨어지다 23.09.09 36 0 25쪽
6 5. 회복 23.09.09 36 0 23쪽
» 4. 숨 좀 쉬자 23.09.09 32 1 22쪽
4 3. 초인 23.09.08 42 1 30쪽
3 2. 오발 23.09.07 35 1 20쪽
2 1. 기억 23.09.07 42 2 28쪽
1 0. Prologue. 23.09.07 83 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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