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누아르물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라이트노벨

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9.07 23:28
최근연재일 :
2023.09.16 18:43
연재수 :
24 회
조회수 :
737
추천수 :
15
글자수 :
241,626

작성
23.09.07 23:32
조회
35
추천
1
글자
20쪽

2. 오발

DUMMY

끼익.


하고 어둔 실내의 문이 열렸다.


육중한 문은 몇 겹의 잠금장치가 설정되어 있어 열리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린다. 애초에 그 문에 도달하기까지 여러 개의 ID카드가 필요하기도 했다.


‘조직’은 여러가지 사업에 손을 대고 있었다. 한국에서 가장 거대한 단일화 조직, 비령 그룹 말이다.


고작해야 남의 등쳐먹고 더러운 짓거리나 하던 범죄 조직이었지만, 지나치게 덩치가 비대해졌다. 그들이 상대하는 고객들 중에는 유력자들도 몇인가 있었고, 또 그들을 통해 만나게 된 어느 거대한 사업체들 중에는 범죄 조직과도 고리가 닿길 원하는 양심 없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 중, 제약 계열의 회사 또한 있었다.


비령 제약이라는 이름으로 최근 이름을 바꾼 그룹의 한 계열사는 외국 계열의 어느 제약사와 내통하며 그들의 약을 한국에서 팔아주고, 또 관련한 일을 도맡아 하는 회사였다. 독자적인 기술력은 없었고, 외국계의 한 제약사와 한국계의 어느 정치인이 뒷배로 있는 회사와 협약을 맺어 다양한 실험을 하기도 하는 집단이 되었다.


제약사라는 이름답게 그럴싸한 설비나 약품류, 화학물들이 고층 빌딩 안에 빼곡히 들어찼고, 구실을 갖춘 회사 내부에는 회사의 비밀을 아는 연구원이나, 혹은 모르는 자들이 들어와 여러가지 업무와 연구를 진행했다.


그런 비령 제약의 한 지하 공간, 어느 내밀한 약품 보관함의 둔중한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끼익, 하고 운 것은.


철문이 열리며 들어온 몇 명의 사내가 있다. 들어오지 않은 자들은 바깥에서 기다린다. 문 안으로 발을 들인 두 사내는 어깨에 도수 운반법으로 걸쳐 매고 있던 인형 하나를 거칠게 내던졌다.


쿵!


하고 사람의 신형이 연구실의 밑바닥에 그대로 던져졌다.


던져진 인형人形은 실제 사람의 것이었고, 그는 살아있었는데- 의식은 없는 듯 조금의 미동도 없이 차가운 실험실 바닥에 몸을 부딪히며 바닥을 굴렀다.


다행히 그대로 후두부에 충격을 받아 목숨을 잃지는 않은 듯, 가느다란 숨을 쉬고는 있었다.


김영석이었다.


*


영석은 느리게 눈을 떴다.


처음 그가 느끼는 것은 지독한 고통이었다.


‘끄으으으···.’


성대로 새어나오지 못하는 고통이 그의 온 몸을 덮고 있었다. 열이 오르는 듯도 했지만 땀이 나지는 않았다. 그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이한 감각에 몸을 떨며 바닥에서 뒤척거렸다.


아무도 오지 않고, 또 불조차 없는 어둠 속. 그는 비척거리면서 신음을 냈고 한참동안 바닥을 구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를 정도가 되었을 때, 그는 정신을 잃었다가 차렸다가를 반복하다 다시금 눈을 떴다.


고통이 조금인가 사라지고 그래도 정상적인 사고를 돌릴 정도의 의식이 있었다.


그는 어둔 가운데 찢겨진 양복을 입은 채였다. 품에 든 것은 별다른 물건이 없었다. 그는 얼얼한 몸뚱이를 간신히 가누면서 바닥을 짚는다.


손으로 짚은 바닥은 차가운 감촉이었다. 그가 있는 곳은 춥다. 약간은 건조하고.


목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갈증을 느꼈다. 어둡다. 눈을 떴지만 제대로 보이는 게 없다. 오래도록 어둠 속에 있어서 암순응을 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시야가 희미했다. 제대로 눈을 뜨고 있던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런 그를 인도하는 불빛이 있었다. 그는 바닥을 기고 있었고, 그 바닥 근처에서 희미하게 나는 푸른 불빛이 있다.


환상을 보는 것은 아니었다. 실재하는 불빛이다.


연구실, 의약품실로 쓰이고 있는 지하의 한 공간은 바닥 즈음에 희미한 비상등이 켜져 있다. 시야를 확보하기에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시선을 똑같은 높이에 둔다면 무언가 볼 수는 있었다.


연구실의 바닥 재질이나 타일 모양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비상등 근처의 작은 반경에서 말이다.


영석은 천천히 기어서, 불빛이 더 많은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 몸은 간신히 누워서 움직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끄으.”


간헐적인 신음같은 게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희미한 소리였고, 다 죽어가는 인간의 그것마냥 가느다란 음색이다. 숨소리에 음성이 조금씩 섞여 나온다고 하는 게 정확하리라.


지이익, 하고 양복 차림의 몸뚱이를 팔로 천천히 끌어 연구실의 바닥, 벽면 근처까지 이동한다. 자신의 눈을 퍼렇게 물들이는 비상등을 바라보면서, 다시 영석은 정신을 잃었다.


*


“······예 알겠습니다.”


“······이래도 되는 거야?”

“씨발, 이게 뭐하는 짓거린지······.”


몇 명의 사람들이 말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고액의 연봉에 낚여서 비령 그룹의 제약사에 들어온 연구원들이었다.


비령 제약에 속해 있는 사원들은 여러 방법으로 나눌 수 있겠지만, 가장 특징적인 구분법을 설명하자면 비령 그룹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이었다.


그들은 속물같은 근성을 가진 부류였고, 별다른 조건에 대한 의구심 없이 높은 보상만을 바라보고 회사에 입사한 자들이다. 본디 연구원 즈음 되는 직책이라면 제약사에서 하게 될 연구에 관한 이야기라던가, 사회 속에서 그들이 취해야 할 다양한 처신들에 대해서라던가, 뭐 여러가지 말들을 듣고 들어오는 게 일반적이었다.


별다른 역사는 없는 비령 그룹 소속의 제약사는, 갑작스럽게 규모가 커진 신생 회사였다. 제약사에 자본을 투입한 여러 투자자들 중 그래도 이름을 들어본 외국 계열 제약사와, 한국의 어느 중견 기업에 대한 신뢰감으로 들어온 그들이었다.


일반적인 연구원 직의 계약서 내용보다 훨씬 빈약한 계약서에, 다소 의문스런 조항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꺼이 사인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회사 내부의 심상찮은 분위기 탓에 여러 번 놀라고, 진지하게 이직이나 퇴사에 대해 고민을 한 전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당 따위를 두둑하게 챙겨주는 회사였고, 솔직히 그들이 업계의 다른 회사에 가서 받을 연봉의 두 배 이상을 보장하는 곳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다소의 의구심은 덮어둘 수 있었고, 평온한 직장 생활을 영위할 근거가 되어주었다.


그래, 의도가 의심스러운 약물 연구를 한다던가, 심지어 그 치명적인 독성을 지닌 약물 실험에 사람을 임상 실험의 대상으로 쓴다던가, 뭐 그런 흉흉한 소문이 들려오더라도 대충 눈을 가리고 귀를 덮은 채 지내왔다.


지금까지는 어찌저찌 넘어갔다. 제약사 소속 연구소의 직책 상, 하급자이며 말단 실무진인 그들에게 윗선의 직접적인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일반적인 오더라면 딱히 꺼릴 일은 없었다. 이 회사의 정체나 그 목표성에 대한 의구심이 끊임없이 들더라도 당장 자신이 해야 할 일에 큰 문제가 없다면 그저 행하면 될 뿐이다.

그러나 스티브, 민준, 세정 세 명에게 주어진 명령은 누가 보아도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그저 기계적으로 연구 과제를 위한 실험을 반복하면, 그러기만 하면 일반적인 것의 두 배 이상의 연봉을 받는 나날들이다.

이번에는 눈을 감더라도 이질감이 사라질 수가 없었다.


회사 내 지하 연구 시설에 사람을 하나 가두어 뒀다. 그에게 연구 도상에 있던 독극물 종류의 화학물을 투여하라, 는 말이었으니 말이다.


사실 셋 모두 어느 순간부터 대강 알고는 있었다. 이 제약사가 제대로 된 곳은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회사라는 하나의 집단이 성립하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뚜렷한 목표가 있어야 했다. 이익집단이니 당연히 매출을 중간 목표로 하는 목적이어야 할 테였고.


이렇다 할 주력 사업을 가지고 개발하는 것도 아니었고, 여타 다른 민간의 단체들과 교류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투자금을 많이 주고 모체가 되는 대형 제약사의 하청만을 받고, 용도 모를 약물들을 이따금씩 어딘가로 판매할 뿐이다.

연구를 직접 하고 있는 이들도 최종적으로 무엇을 만드는 지 프로젝트의 방향성을 몰랐고, 심지어 최종 결과물이 어디에 쓰이는 지도 모른다.


이 따위 곳이 제대로 된 연구 시설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어떤 과학자도 자신이 무얼 만드는 지 모르는 채 발명을 할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되었고.


회사에서 일하는 내내 과학자로서의 양심이라는 게 마음 속에 있다면, 그 테두리가 갉혀 나가는 듯한 생활을 해왔다.

비령 제약이 속해 있는 비령 그룹은 아무래도 불법적인 일에 대놓고 손을 대는 범죄 조직과 연이 깊거나, 혹은 그 자체인 듯 했고. 연구 시설이니 제약사 본사 건물이니 여기저기를 주름잡고 돌아 다니는, 제약 회사와는 전혀 연이 없는 듯한 사내들도 지나치게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러던 와중 오늘 들은 것은 더욱 놀라운 이야기다.


바깥에서 정신을 잃은 사내 하나를 덩치 좋은 양복 차림의 남자들이 가져다 놨다더라, 하는 이야기.


아무리 의구심이 들고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도 고작해야 말단에 불과한 그들의 이야기는 그다지 힘이 없다.

어느 정도 사연의 총체를 안다고 생각되는 부장급 인사들은, 대개 비령 제약의 모체가 되는 회사나 그룹 내부에 연줄이 닿아 있는 자들 같았고.

자세한 사연을 넌지시 물어보더라도 이야기를 돌리거나, 혹은 쓸 데 없는 이야기는 관심 두지 말라는 듯 냉엄한 눈치로 위협을 할 뿐이었고.


“후······.”

“난 못 해.”

“그러면, 뭐 여기서 나가자고? 당장 이 회사를 뭐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을 줄 알아?”


차례대로 스티브, 민준, 세정의 이야기였다.


가장 소스라치게 반응하는 것은 세정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안위가 가장 중요하다. 조금 더 깊게 파고들어가 보면, 자신의 안정적이고 부유한 삶이었다. 그것이 정의롭게 이루어진 삶이냐, 아니냐는 그렇게 중요한 편이 아니었다.


민준, 은 어지간한 비리에 대해서는 크게 반응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 해야 하는 때가 오자 망설였다. 그는 스스로 정의로운 인간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신나간 짓거리를 제 정신으로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따위 짓을 하며 살다가는, 언젠가는 세상의 공정한 심판 따위가 있어 뒤통수에 총알이 날아올 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순수하고 바보같은, 어린아이같은 생각이라고 하기에는 깨나 구체적이며 경험에 의거한 생각이었다. 한 번 타인의 목숨을 쉽게 빼앗거나, 불의한 일에 발을 담근 자들이 말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는 여러 번 보았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누군가를 죽일 때는 자신 역시 죽을 각오를 할 때 뿐이었다. 민준은 이토록 쉽게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돈을 쫓아 의문스러운 회사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다소의 배상금을 내고서라도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평상시에도 그런 마음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퇴사 욕구가 강렬하게 높아졌다.


스티브, 는 그들 중에 체격이 가장 큰 백인이었다.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머리에 콧대가 높고, 푸른 눈을 가졌다. 나름대로 훤칠한 인상을 한 청년이었다. 34세. 국제적 나이로 그러했고, 걔들 중에서 굳이 나이로 상하를 따지자면 막내였다. 민준과 세정은 그보다 한 살이 많았고.


스티브는 타인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어찌 되든, 자신에게 피해만 오지 않는다면 주변 환경 정도는 깔끔하게 무시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런 삶의 태도가 늘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때로 자신이 눈돌린 환경이 스스로에게 위험으로 다가올 수도 있었으니까. 스티브도 그 정도의 감은 있기에 한숨을 쉬는 것이었다.


그들은 비령 제약의 본사 건물 지하, 연구동이 있는 1층에 있었다. 지하 1층부터 4층까지는 연구동이었다. 건물은 지하 6층까지 있었는데, 5-6층은 간부나 혹은 부장급 이상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셋은 무엇도 아니었고 ID카드도 없었으며 특별한 지시도 없었기에 여태 한 번도 들어가 본 바가 없다.


제약사나 뭐 그런 기밀이 중요한 시설과 회사에서 보안 시설은 있게 마련이었지만 뒤가 구려 보이는 비령 그룹 계열의 회사라고 한다면, 그 기밀이 지독한 것이지 않을까 하는 짐작 정도는 가능했다.


스티브는 자신의 높은 콧대 옆으로 움푹 들어간 안와를 매만졌다. 마른 세수를 하듯 손바닥으로 곧 쓸어내린다. 피곤했다. 최근 계속된 연구 과제로 잠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육체적인 피로만이 문제는 아니었고, 근래 벌어진 시끄러운 일들이나, 특히 지금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 탓에 얻은 정신적 스트레스가 더한 이유였다.


스티브는 회사 내선을 이용한 통화용 수화기를 달칵, 하고 내려놓았다. 그들이 머무르는 연구동의 한 방 구석에 있는 전화기였다. 데스크 모서리에 고정되어 있는 흰 색의 통화기는 간단한 다이얼로 연구실 내부와 본사 위 쪽 사무자들과도 연결이 가능하다.

연구실 쪽에서 통화를 돌릴 때는 특수한 회선을 이용하면서 도청 따위를 방지한다.


연구동 내부, 보다 더 깊은 지하에 개인 집무실을 갖고 있는 그들의 부장에게서 전해져 온 지시였다.


말했듯 내용은 별 것 없었다. 그들이 연구했고, 보관중이던 Fa-1123이라는 약물을 주사기에 옮겨 1027 의약품실에 있는 남자에게 투여하라는 말이다.

Fa-1123을 투여하라, 는 말은 단순한 지시 문장으로 끝날 내용은 결코 아니었다. 직접 연구를 했기에 알고 있었다. 임상 실험을 한 적은 없었지만 대강의 효과는 뻔하게 알 수 있다.


아마 지독한 고열과 함께 신체 내부에 바이러스가 퍼지고, 또 면역 체계가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목이 타들어가는 듯한 갈증과 가려움, 곧이어 피부 전체에서 격통을 느끼다가 1시간 여 내에 죽는다.


사람에게 투여된 적은 없었지만 약물 반응의 검사 대상이 되었던 모든 고등 포유류 동물들이 동일한 반응을 보였다. 사람도 대동소이할 것이다.


물론 악영향만 있는 약물은 아니었다. 대놓고 독극물을 만들고자 했다면 더 지독한 것을 만들었겠지. ‘바이러스’라고 되어 있지만 전염성은 전무했다. 투여된 이후 짧은 시간 동안 숙주의 신체 내부에서만 살아서 활동하다가 한 시간 내로 사멸하고 마는 생물들이었다. 그 외에 바깥으로 나와서 생존이 불가능했고, 외부 공기와 닿는 순간 죽는다.


다만 신체 내부의 특정 효소와 결합해 일시적으로 특이한 능력을 대상에게 부여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특정되는, 또 예상되는 특이성은 다음과 같다.


동물의 순간적인 근력 증가, 감각 기관의 초인적인 활성화, 그리고 대뇌 피질의 활성화와 기능 증강을 통한 정보 처리 능력의 향상과 약간의 기시감.


초인超人물약, 이라고 해도 좋았다. 의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어느 수퍼 히어로 무비에 나올법한 설명들이었고, 그런 약물이 아무런 부작용 없이 개발된다면 무수한 사람들의 기능이 증가하고 또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일들의 영역이 넓혀지리라.


물론 아직까지 기술력은 그런 약물의 상용화 단계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발상은 괜찮았으나 비참한 실패작에 불과했고, 아직까지 갈 길이 멀었으며 스티브의 감각에서 볼 때 그 약물의 연구 단계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었다.


먼 길을 나서야 하는, 거대한 광야와 사막을 건너야 하는 여행자가 물도 옷도 없이, 어린아이의 몸으로 그 출발점 근처 언저리를 헤매고 있는 정도였다.

그런 약물을 제대로 된 ‘약’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저 어떤 발상으로 인해 실험중인 화학물에 불과하다. 사람에게 쓴다면 단순한 독극물이었고.


“으으으.”


스티브는 앙다문 잇새에서 신음처럼 비명을 토해냈다. 그다지 크지는 않았다. 이 187cm의 건장한 백인은 이따금씩 그런 소리를 내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든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민준 역시 안색이 좋지는 않다. 세정이라고 좋은 것은 아니다. 단지 행동에 망설임이 없을 뿐.


“그냥, 하고 넘어가. 말했잖아. 뭐 어떻게 할 거냐고. 이제 와서 비령 그룹이 이상한 곳이라고 당장 나가서 어디 고발이라도 하게? 그도 아니면 여길 들쑤셔서 부장님 비롯해서 간부진들이랑 몸싸움이라도 하거나?

퇴사할 거 아니면 그냥 입다물고 하고, 잊자.”


세정이 긴 말을 토해냈다. 민준은 그럴수록 안색이 까맣다. 신경성 위염이 도지는 것도 같았다.


한참을 실랑이하듯 애쓰던 그들은, 이내 귀신같은 표정으로 늘 그들을 다그치는 부장의 연락이 다시 오기 전에 움직였다.


*


벌컥,


하고 문이 열렸다.


몇 개의 까다로운 잠금 절차를 충족시키고 나서 둔중하게 밀려 열리는 철문이었다. 의약품실을 비롯해서 조금 중요하다 싶은 연구동의 룸들은 대개 이런 식이었다.


1027 의약품실. 이미 연구소에서 퇴근할 자들은 나갔고, 야근을 하거나 당직을 선다거나 하는 인간들만 남아 있는 시간이었다.

인적 없는 연구동 구석 어느 방 안. 작은 실내의 의약품실 내부에 기척을 내며 들어온 것은 한 명의 남자와 여자였다.


스티브는 영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 또한 이게 무슨 짓거리인가, 싶은 것이다. 한국말과 영어 모두가 능통하며 그 외에도 몇 개 국어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재원인 그는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생각했다.

이게 맞을까?


아니, NO, 절대.


그따위 결론들만이 반복해서 내려졌다. 그런 스티브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세정은 눈깔이 약간 맛이 간 표정으로 움직인다. 뭐가 그녀를 움직이고 있는 걸까. 스티브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를 적극적으로 막지도 않았고, 못했다.


그 역시 이 빌어먹을 조직을 어떻게 한다거나 할 수는 없었다. 그저 순응하거나, 낙오되거나 할 뿐.

지금같은 상황이 한 번만 더 반복된다면 아무 거리낌 없이 그냥 낙오되고 퇴사하는 쪽을 선택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했다.

미쳐도 적당히 미쳐야지.


복도, 의약품실의 바깥에서 들어오는 백색광이 작고 추우며 초라한 실내를 비추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연구동 내부의 실내였다. 그 안에 누가 보아도 이질적인 사내 하나가 엎어져 있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마 평범한 인상의 동양인 남성인 것 같았다. 엎드린 채, 고개를 조금 옆으로 가누고 비상등이 켜져 있는 실 내 벽면 근처에서 정신을 잃은 꼴이었다.


약간의 연민이나 복잡한 감정이 들기도 전에, 세정이 뚜벅거리며 움직였다.


이미 치사량에 버금가는 신경성 약물이 투여된 ‘영석’은 별다른 반응을 할 수 없었다. 잠깐이나마 정신을 차린 것이 그의 신체적 강인함, 혹은 정신적인 끈질김 덕택에 일어난 일이었으니 말이다.


비령 그룹을 자신이 일할만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세정은, 조직의 명령에 따랐다. 그녀가 곱게 들고 온 주사기가 하나 있었다. 연구용으로 쓰이는 것이고, 튼튼한 철제 테두리를 가졌다. 투명한 실린더 내의 불투명한 액체가 찰랑거렸다.


Fa-1123.


스티브가 직접 연구에 참여했기에 실패작의 효과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둔 방 내부, 정신을 잃은 남자에게 다가가는 여자를 보면서 눈을 가렸다.


‘Oh shit······.'


그는 속으로 욕지기를 뇌까렸고, 그러는 사이에 흰 가운을 입은 30대 중반 정도의 여성, 연구원, 적당한 중간 체격에 마른 몸매를 가진 긴 머리의 그녀는 영석의 근처에 앉았다.


무릎을 꿇은 채 다른 손으로 라이트를 켰다. 들고 다니는 여러 가지 물건들 중에는 비상 라이트도 있었다. 실내 전력이 끊겼을 때를 대비해서 하나 둘 정도는 가지고 다니라는 물품 리스트에 있는 것이다.


손 안에 쏙 들어오는 펜 형의 라이트는 제법 빛이 강했고, 그것으로 정신을 잃은 사내의 목덜미 근처를 살피다가, 그녀가 주사기의 바늘을 그 동맥 자리에 차분하게 꽂아넣었다.


영석은, 만 24시간 내에 독류에 속하는 화학물이 두 번이나 제 몸에 들어오는 수난을 겪었다.


*


작가의말

음,


그렇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누아르물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4 작가의 말 23.09.16 22 2 1쪽
23 22. (完) 파스타 23.09.16 16 1 7쪽
22 21. 테이크 아웃 23.09.16 19 1 24쪽
21 20. 퇴장 23.09.16 17 1 16쪽
20 19. 콜트 +2 23.09.15 21 1 22쪽
19 18. 지지支持 23.09.15 22 1 29쪽
18 17. 조직 내 간부 총회 23.09.14 19 1 16쪽
17 16. 도주 23.09.14 19 0 16쪽
16 15. 파리지옥 23.09.14 22 0 15쪽
15 14. 손님 왔습니다. 23.09.13 24 0 20쪽
14 13. 짧은 재회 23.09.13 29 0 24쪽
13 12. 제인 메리어트 23.09.13 29 0 27쪽
12 11. 탕! 23.09.12 30 0 33쪽
11 10. 빠른 퇴장 23.09.11 38 0 25쪽
10 9. 스티브 블레어 23.09.11 30 0 26쪽
9 8. 김도건 23.09.10 36 0 31쪽
8 7. 민형석 23.09.09 38 0 30쪽
7 6. 떨어지다 23.09.09 36 0 25쪽
6 5. 회복 23.09.09 36 0 23쪽
5 4. 숨 좀 쉬자 23.09.09 32 1 22쪽
4 3. 초인 23.09.08 42 1 30쪽
» 2. 오발 23.09.07 36 1 20쪽
2 1. 기억 23.09.07 42 2 28쪽
1 0. Prologue. 23.09.07 83 2 1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