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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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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9.07 23:28
최근연재일 :
2023.09.16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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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3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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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12. 제인 메리어트

DUMMY

*


탕!


하고 총을 쏜 김영석은 다시금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한 스무 명 정도 죽인 것 같았는데, 골목의 사잇길에 모여 있는 무리들이 여전히 수가 많았다.


앞서서 이야기를 하는 듯한 간부, 김철형의 두부를 꿰뚫은 총격 이후에 그는 재빠르게 움직여 도망쳤다. 김철형이 허물어지는 것을 본 직후였다.


김철형이 있는 장소에서 대각선 위쪽으로 사선을 쭈욱 뻗으면 있는 곳이었고, 사실 총열을 조금 길게 한 권총이라 하더라도 거리가 애매했으나 아슬아슬하게 닿은 모양이었다. 김영석은 그대로 폐건물의 3층 부근에서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낡고 사람 없는, 더러운 먼지 투성이의 계단과 옥상으로 향하는 문을 벌컥 열고 지나 밝은 햇살이 내리쬐는 옥외에 다다른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별다른 기구도 없이 맨 몸으로 옆 건물을 향해 뛰었다.


영화라도 찍는 양 훌쩍 날았고, 몇 번의 낙법은 낙차로 인해 생겨나는 충격을 훌륭하게 줄여주었다. 몇 바퀴를 굴러대고 나서 다시 능숙하게 일어나는 김영석은 그대로 퍼즐 게임이라도 하듯, 자신이 달아날 수 있는 정도의 높이를 가진 건물들을 골라 그 지붕과 옥상 위를 뛰어 다니면서 폐건물이 모여 있는 옛 공장 지대에서 멀어진다.


김철형의 죽음을 또 한 번 눈 앞에서 본 조원들은 패닉에 빠졌고, 우왕좌왕 하면서 그 주변을 수색했다.


이후, 김영석은 완전히 그 자리를 빠져나간다.


바깥에 세워두었던 전동식 오토바이를 타고 차도를 따라 시외곽 쪽으로 빠졌고, 배낭에 넣어두었던 바지 따위로 옷차림을 새롭게 바꾼 뒤에야 다시 시내로 들어와서 정황을 살폈다.


하루가 지나기 전에 뉴스 속보가 TV를 통해 알려졌다. 비령 그룹 내의 저력으로도 온전히 막기 힘든 소식들이었는지, 서울시 외곽 부근의 폐공장 지역에서 조직 폭력배들의 집단 교전이 있었다는 단신이 흘러나왔다.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은 없었고, 비령 그룹이라는 단어도 전해지는 문장에 들어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름 다른 조직원들이나 윗선이 청탁을 통해 뒷수습을 하려고 했으나 완벽하게 막지는 못한 듯, 또 지나치게 큰 소란을 일으켜서인듯 슬슬 서울에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지역이라고는 하더라도 엄연히 서울 내부였고, 익숙한 도시에서 그런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다는 게 사람들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시민 전체의 분위기는 결국 정치가들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이 아닐 수 없었고, 자연스럽게 비령 그룹 내부로도 자중하라는 압력이 들어온다.

경찰 인력들도 이전까지 너무 큰 덩치의 범죄 조직을 방치하던 것에서 조금씩 전방위로 압박해 들어오는 움직임을 취할 수 밖에 없었고 말이다.


김도건은 다시금 그룹과 연이 닿은 유력자로부터 불편한 전화를 받으면서 스트레스가 쌓일 수 밖에 없었다.


*


“······예, ······예.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예.”


비령 그룹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김도건이 그렇게 저자세로 이야기를 할만한 자가 많지는 않았다. 물론 조직을 초월한 권력을 갖고 있는 사회의 거물들에게는 마음대로 뻣댈 수 없기는 하다.

한국의 조직 폭력배의 정점에 다다랐다고 할 수 있는 자리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종류의 힘에는 도리어 더 민감하게 엎드려야 하는 처지가 되는 셈이다.


결국 비령 그룹이라는 범죄 조직이, 이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공권력을 넘어설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국가의 치안과 공권력을 사적인 범죄 조직이 넘어섰을 때 일어나는 일 따위는, 갱단 따위가 들끓는 남미의 어느 국가나 혹은 여러가지 재해와 쿠데타 따위로 치안이 엉망이 된 여러 국가들을 보면 알 수 있으리라.


한국은 그래도, 나름대로 치안과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선진국이었다. 뒷골목에서 자라 그럴싸한 외형을 갖추게 된 비령 그룹은 자랑스러울 정도의 구색과 성과였지만 진지하게 그들이 어떤 대업을 이룰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어려운 게 사실이다.


도건을 비롯해서 수많은 작자들은 무언가를 부수는 인간들이지, 새롭게 건설하는 자들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누군가를 죽이고 협박하는 것이었고, 그저 물쓰듯 돈을 사용하면서 기술자들을 고용하고 사업가를 부리는 일은 가능했지만 그 이상의 성과를 낼 수는 없었다.


도건은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한계와 능력을 잘 파악하고 있는 자라고 할 수 있다. 범죄 조직이 커지기 위해서 양지에 자신의 땅을 갖고 있는 지주들의 협력과 도움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그런 양지의 부자들 중 한 명이, 지금 도건이 전화 통화로 집무실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상대였다.


양화 기업이라는, 중견의 기업이 있었다. 대기업의 말석 정도 들어가는 곳이었고, 재계 서열로 치자면 그렇게 알아주는 곳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한국 사회에 충분한 영향력을 끼치고, 사내 유보금이니 혹은 그 회장이 쌓아둔 사적인 재산이니 하는 것을 따진다면 여러 종류의 일을 할 수 있었다.


양화는 그렇게 양심적인 기업은 아니었다. 식품 사업을 비롯해서 여러 종류의 사업을 하고 있는 기업이었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업계나 사회에 끼치게 될 불이익에 대해서는 크게 고려하지 않는 면이 있었다.

그들이 최고의 대기업이 아니기에 할 수 있는 발상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쉽게 움직이는 자들이 최대의 영향력을 가진다면, 결국 사회가 붕괴하는 것이 자신들이 바라는 야욕을 실천하는 일보다 선행될 것이기에 말이다.


어쨌건 양화는 뒤로 비령 그룹과 통하고 있었다. 그들 뿐만이 아니라 야당의 어느 의원, 혹은 여당에 속해 있는 원로 의원 등. 정치가들도 몇 있었고, 양화 외에 외국계에 강력한 사업적 지분을 갖고 있는 재외 사업가나 혹은 해외의 사업체들, 한국보다는 도리어 글로벌 시장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 이류 기업의 기업가쯤 되는 자들이 비령 그룹과 얽혀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최고라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정말로 선두를 달리고 있는 그룹이라면 자신의 분야에서 사업을 계속해나가 더 큰 이익을 도모하려고 하지, 다른 길에 눈을 돌리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비령 그룹과 함께 일을 하는 것은 리스크가 크지만 수익성이 높았다. 또한 미래가 별로 없다는 게 크다. 단기적이지만 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가능성 없는 소인배들이 택하는 행위였고, 비령 그룹이라는 이름 아래 함께 모인 자들은 대개 그럴 지 모른다.


어쨌건 그런 자들 중에서 양화 기업의 회장, 유종진은 도건에게 불편한 상대였다. 자신보다 연배가 훨씬 높은 것도 있었고, 비령 물산을 비롯해서 유통 사업 쪽에 막대한 지분을 갖고 도움을 주는 것도 있다.

또한 조직 내부의 가장 큰 사업이라 할 수 있는 마약 사업에 다양한 루트를 제공하고 이익금의 일부를 받아가고 있는 대주주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비령 그룹 내적으로 받는 이익보다 그들이 얻는 이익이 더 크지는 않았지만, 어쨌건 비령 그룹의 회장임에도 불구하고 불편스런 눈치를 봐야 하는 인간이라는 게 도건으로서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마음과 현실은 늘 다른 것이라서, 자세는 공손하게 표현해야 했지만 말이다.


“···예, 회장님. 1일날 뵙겠습니다.”


마지막 대답으로 전화를 끊은 김도건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머리를 감쌌다. 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만일 신이 있다면 그에게 왜 이러는가.

양심이 없는 한탄일 수도 있었다. 그가 살기 위해 저질렀던 무수한 살인과 범죄들을 생각한다면. 싸이코패스처럼 그것을 묻어두고 다시금 한탄을 한다면,

김도건은 깊은 한숨처럼 혼잣말을 뱉었다.


“······이런 씨팔.”


회장실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다. 비령 IT. 나름대로 전 세대에 유명했던 IT계열 기업의 본사와 인프라를 그대로 흡수한 기업체였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고 헐값으로 나온 매물을 그들이 사들였고, 풍족한 재원으로 많은 기술자들을 영입해서 그럭저럭 성과를 내고 있었다.


그 내부에는 블랙 해킹이나 전자화폐의 시가 조작등 다양한 짓거리를 하는 자들도 있었다. 아시아 전역에 있는 범죄 조직들이 모이는 블랙 마켓의 교두보를 웹사이트의 형식으로 운영하기도 했고, 거기에서 나오는 수수료 역시 상당한 액수였다.

웹사이트 상의 페이지였지만 실제로 사람의 목숨이나 현물이 왔다갔다 하는 도박장에 불나방처럼 몰려 들어오는 인생을 져버린 불나방들도 많이 있었고.


어쨌건 다양한 방식으로 돈을 긁어 모아 나름대로 업계에서 실력 좋다는 인간들을 불러 일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비령 IT 자체도 그럴싸한 중견 기업이었다.


회장직에 앉아 홀로 넓은 방을 사용하고 있는 그는 그런 ‘잘 되어 가는’ 사업의 증거이기도 했다. 쾌적한 실내 인테리어와 업무 환경과는 달리 나날이 스트레스만 쌓여간다.


비령 그룹이라는 큰 짐을 안고 있었으니까, 그 무게감이 남다르기는 하다. 떡고물을 가장 크게 받아먹을 수 있는 자리라지만 그 돈을 노리고 달려드는 이리들로부터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게 큰 일이었던 탓이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그것으로부터도 다소 벗어나 있었다.


서울 구각동에서 벌어진 일련의 집단 살인은 그의 생각 밖의 일이었다. 비슷한 일이라면, 각 계열사의 조직원들이 서로 감당할 수 있는 장소에서 일어났어야 했다. 적어도 목격자는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외부자들의 눈과 귀가 닿지 않는 곳. 계열사가 소유하고 있는 건물 따위를 밀실로 만들어둔 뒤 그 곳에서 일을 처리한다던가.


주변에 출입 통제를 한 뒤에 철저히 일을 벌인다던가. 그런 것들이 그나마 그들 사이에 통하고 있는 상리였고 상식이었다. 그러나 서울 외곽에서 벌어진 공장 지대의 대규모 살인은 아예 논리를 벗어난 이야기였다.

비령 엔터테인먼트는 마약 사업의 유통 유포, 확대를 위해서 활약하고 있던 단체였다. 엔터를 맡고 있는 전호식은 그룹 내에서도 상당한 입지를 가진 인간이었다. 한국 사회의 사교계라고 할 수 있는 연예계를 통해서 뻗어나갈 수 있는 가지가 여러 갈래였으니까 말이다.


그들의 영향력을 사용해서 온갖 사업을 뒷받침 할 수도 있었고, 여태까지 연이 없던 새로운 분야와의 도개교 역할을 할 수도 있었다. 가급적이면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 전호식과 그 연예사는 살아남았으면 하던 게 김도건의 생각이었는데.


전호식은 죽었다. 의문의 인물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아니, 사실 의문도 아니다. 이번 역시 그를 죽인 범인의 인상착의는 버젓이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더욱 말이 안되는 일이기에 사실같지 않게 느껴진다.

갑자기 비령 엔터의 특작조들이 모여 있는 아지트로 침입해서 전호식을 죽이고, 십 수 명을 무참하게 살해한 뒤 흔적도 없이 도주한 인물의 인상착의는 김영석의 그것과 똑같았다.


한 번 죽였던 부하가 살아 돌아와서 이 난리를 피우고 있다는 이야기다. 김도건이 비령 물산의 몰락과 목진형, 김영석의 죽음에 관여를 한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알고도 방관을 하기는 했다.

어차피 자기들끼리 내부적으로 그릇 싸움을 하는 것이었으니까. 주관자이자 개들의 주인 역할을 맡고 있는 김도건은 개들끼리 물어 뜯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끼리 서로 피튀기는 경쟁을 통해서 상처가 나고 약해지는 걸 반겨하고 있다.


여태까지 간부들도 머저리들은 아니라서 연합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정확한 정보가 있을 때 움직이는 것이고, 서로의 뒤를 치기 위해서 빈틈을 노리고 있다. 내부 항쟁이 지연되어 가는 와중에, 다시 한 번 간부가 죽은 일이다.


더군다가 서울 시외곽이라고는 하지만 버젓이 시내에서 벌어진 일에 경찰 쪽도 눈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비령 그룹이라는 존재를 알기는 하지만 그들이 아직까지 일부러 손을 대지 않던 것을 그 역시 깨닫고 있다.

경찰과 비령 그룹은 밀월관계 까지는 아니어도 불편한 이웃 정도로는 유지되던 사이였는데. 국민적 여론이 범죄 조직의 소탕을 원한다면 다소의 소모나 희생을 안고서라도 총력전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경찰 조직의 총력이 투입되기 시작하면 결국 수 천 명의 조직원이고 뭐고, 쓸려갈 수 밖에 없었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으면 양화 사社를 비롯해서 다양한 투자자들도 발을 뺄 것이었다. 그게 김도건이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이다. 어떤 식으로든 비령 그룹은 살 길을 모색해야만 했다.


최대한 공론화되지 않으면서 아버지 대로부터 세운 금자탑을 지키는 것. 김도건이 생각하는 사명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지키면서 그것까지 함께 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김도건은 당장 언론계에 연이 닿아 있는 모두와 연락을 했고, 간신히 생각보다는 일을 빠르게 무마할 수 있었다. 엔터 사의 아지트가 있던 구각동으로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위치에 있는 조직원들이 협력해야 했다. 시체들을 치우고, 흔적을 지우고.


결국 언론에 나올 정도의 살인 사건으로 조사를 받게 되어, 엔터 사의 특작조원들 중 상당수가 일단 수감되었다.

김도건은 신경성 위염으로 아파오는 복부를 참으며 다방면으로 수소문을 하고 일처리를 해야 했다. 젠틀하게 빗어진 머리가 벗겨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대강 좆대로 살고, 좆대로 죽는 일이 대부분인 조직의 보스가 왜 이런 고민을 해야만 하는가, 심히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죄를 저지르면서도 호의호식을 누리며 살고자 하는 그의 욕망이 괴로움을 불러 일으키는 근원이었지만, 그는 두 가지 다 놓을 수는 없는 인간이었으니까.


해당 건으로 양화의 유종진 회장에게 평소보다 조금 더 굽실거리고, 부담스런 조언을 받아야만 했다. 당장 만나기로 했던 9월 1일의 약속 또한 평소보다 불편한 자리가 되리라.


김도건은 자신의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김영석이라는 인간을 처리하기 위해 궁리를 하기에 이른다.


*


“어서 오게.”


김도건이 김영석의 종적을 잡아내고 처리하기 이전에 유종진 회장을 만나러 왔다.


서울 시내의 고급스런 호텔, 따로 룸 형의 레스토랑을 빌려 만나고 있는 둘이다. 유종진이 먼저 앉아 있었고, 그 다음 김도건이 자리했다.


김도건도 그리 늦은 건 아니었고, 도리어 상리보다 더 일찍 자리해서 30분 앞선 시간에 도착했다. 그보다도 먼저 와있던 유종진의 얼굴을 보고 도건은 인상을 구기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빌어먹을 영감은 자신을 놀리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는 건지, 회장 답지 않은 의외의 짓거리를 할 때가 많이 있었다.


비령 그룹의 정당한 후계자, 또 현직 회장이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상황이 어려울 때는 어쩔 수 없다. 유종진은 더부룩한 쳇기가 있는 듯한 인상을 하고 있는 인간이었다. 그에 어울리는 튀어나온 배에, 전형적인 중장년 정도 사내의 체형이다.


미리 한 켠에 앉아있던 그는 일어서지 않고 슬쩍 손으로 그를 반겼다. 거의 날아간 머리에, 약간의 수염을 멋스럽게 기르고 가꾸고 있다. 날카로운 인상에 안경은 쓰지 않았고, 코는 높았다.

그는 회색의 정장을 입고 있었으나, 또 단추는 풀고 안에 입은 셔츠도 약간은 큰 사이즈를 입은 것 같았다. 포멀한 차림새를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꼴이었다.


넥타이도 매지 않았고, 어디 친근한 회사 과장, 부장 정도의 인상이었지만 그가 입고 있는 옷은 분명 수제작으로 만들어진 명품 브랜드의 고급스런 옷이었고 또 슬쩍 보이는 시계는 손목에 걸려 있기엔 지나치게 비싼 가격대의 것이었다.


주름진 유종진의 얼굴과 그 인상을 보면서 도건은 자신 역시 마주 웃었다. 그의 손짓에 따라 고개를 숙여가며 인사를 건넸고, 그 다음 마주 앉는 도건이었다.


도건 역시 적은 나이는 아니었으나 유종진에 비하면 연배가 아래다. 부친이었던 김도형에 비하면 유종진이 어렸으니, 도건으로 보자면 큰 형이나 삼촌 즈음 되는 차이일 것이다.


여러모로 비령 그룹의 성장과 유지 발전을 도와주고 있는 투자자들 중에서, 가장 손이 크고 깊게 연관이 되어 있는 작자라고 할 수 있었다.

어려운 일이 생긴다면 종진에게 상담을 요청하는 것도 그리 의아한 일은 아니었다.


“······예.”

“젊은 사람이 빨리 빨리 다니지 좀 그랬어.”

“···죄송합니다.”


도건은 괜한 소리로 자신에게 핀잔을 주는 종진에게 별다른 대꾸하지 않고 사과했다.


흰 천으로 깔끔하게 덮인 테이블이었다. 제법 큰 크기였고, 종진의 자리에서 통창으로 이루어진 바깥이 바라다 보인다. 서울 시내의 전경과 한강이 한 눈에 들어오는 좋은 자리였다. 도건은 경치를 뒤로하고 종진의 얼굴을 보고 앉는 자리다.


테이블을 두어 개 더 놓고 의자를 많이 가져온다면 열댓명도 식사를 넉넉하게 할 만한 방이었지만 지금은 한 개의 테이블과, 두 의자 뿐이었다.


김도건이 들어오자 문 근처에 서 있던 웨이터가 주문을 확인하고 나간다. 그들이 예약한 시간까지는 아직 조금 남아 있었는데, 미리 요리를 시작해 가져올 것이다. 그 전까지 여유롭고,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게 사내 둘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리라.


도건은 자리에 오면서 당연히 많은 조직원들을 데려 왔다. 회장직에 있으며 항쟁 중이었고, 언제 누가 노릴지 모른다는 생각은 그를 편집증적인 안전주의자로 만들게 된다.


마치 이전에 최기욱이 그러했듯, 커다란 차에 호위를 늘 대동하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도 마치 의전 차량인 양 호위조 인력들을 배치해 함께 다닌다.

낭비처럼도 보이지만, 위험한 시기에는 어쩔 수 없었다. 누군가 행세를 하는 것인지 정말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것인지 모를 김영석의 복수도 생각할 수 밖에 없었고 말이다.


유종진도 평소에, 비령 그룹에서 제공해주는 호위조를 몇 명인가 데리고 다닌다. 따로 사비를 들여 호위 인력을 구성하기도 하는 회장이었지만, 최근에는 그 역시 신경 쓰이는 구석이 있는지 대동하는 사람 수가 늘었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엘리트 호위 인력과 비령 그룹에서 김도건이 보낸 조폭들이 섞여서 그의 주변에 같이 다니고 있었다.


방 안에도 곧장 문을 열면 유종진의 호위 인력이 두 명 있었다. 김도건을 따라온 자도 한 명이 있었고.


호텔의 15층 높이에 있는 레스토랑 룸이었고, 그 중간 즈음인 7층 라운지에 호위 인력 몇 명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타고 온 차량 근처, 지하 주차장에 여러 명이 대기하고 있었고.

각자가 무전기를 들고 곧바로 연락하기 위해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암살을 당한다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마냥 웃기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 그들이 겪는 현실이었다. 한낮에 대로변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치밀한 작전과 집요한 악의가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하고, 실제로 김도건 역시 그렇게 누군가를 처리한 전력이 있었다.


대담한 손과 의지가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유종진과 김도건이 갖는 약간의 권력은, 소란이 커지지 않는다면 그런 사건을 무마할 정도는 되었다. 언제 곪은 상처가 터져 나올 지는 또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사업 얘기를 좀 해야지. 자네의 경영권과 안전을 보장해주면 비령 그룹의 지분을 우리에게 넘기겠다고 했지.”

“······예.”


도건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연히 모두 넘기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종진이 갖고 있는 힘은 나름대로 쓸만한 것이었고, 현재 그룹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다양한 유력자와 투자자들 중에서 가장 입김이 센 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면 도건이 살아남는 데 확실히 도움이 될 것이다.


범죄 조직의 보스가 일반적인 호위 인단을 꾸리기도 난처한 면이 조금 있었는데, 종진의 도움을 받아서 전문적인 경호 인단을 지원 받아 배치하려는 속셈도 있었다. 지금까지보다 더욱 더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방식의 경호가 시작될 것이다.

얼마나 많은 돈이 들던 상관은 없었다. 김도건은 자신의 안위가 가장 중요했으니까.


조직의 내밀한 구석을 모르는 외부인, 민간인을 조직 내 항쟁에서 보호막으로 사용한다는 게 꺼림칙한 면이었지만, 유종진 역시 비령 그룹과 연이 깊은 자였으니 그가 알아서 해주리라 믿었다.

종진이 전폭적인 투자로 많은 입김을 미치고 있는, 단골 업체가 있었고 그들 중 일부를 김도건에게 보내 줄 생각이었다. 유종진으로서는 말이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그저 문서 상의 약속만으로 비령 그룹이라는 단체의 많은 지분을 얻게 된다면 아주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종진으로서는 그룹의 회장이 누가 되는 사실 큰 의미는 없는 일이었지만, 적어도 말이 통하고 안면이 있는 자가 계속해서 집권을 한다면 쓸 데 없는 소요나 비용이 줄어드리라는 계산도 있다.


두 악인은 이해 관계가 일치했고, 별다른 실랑이 없이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물론 지분 등 보상을 얼만큼 해주느냐, 에 대해서 다소의 의견 차가 있기는 했지만 크지는 않았다. 현재 유종진이 갖고 있는 비령 그룹 내의 지분은 7%였다. 회장인 김도건이 갖고 있는 것이 41%였고, 다른 그룹 내 조직 간부들의 전체를 합치면 30%정도가 된다. 나머지 20여%는 종진이 아닌 다른 투자자들이 소규모로 나눠 갖고 있었다.


투자자들은 각계에 분포해 있었고, 대개 회장인 김도건을 통해서 비령 그룹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각 계열사와 연을 맺는다. 간부들 중 일부가 배신을 꿈꾸면서 투자자들을 포섭할 계획을 꾸릴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 위해서 최소한 각 계열사의 중진들이 모두 하나의 의견으로 합치되어야 하리라.

이후에 투자자들 중 일정 수를 끌어들여야 하는데, 도건이 개인적으로 긴밀하게 연을 맺고 있는 이들만 하더라도 확실하게 5%는 넘었다. 여기에 유종진의 절대적인 지지를 약속받는다면 일단 경영권에 대한 문제는 없으리라.


물론 비령 그룹이 일반적인 기업도 아니었고, 여차하면 뒤를 노리는 이들로 굴러가는 곳이었지만, 다른 놈들과 달리 도건으로서는 유종진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었다. 사회적으로 비리를 제외하더라도 충분히 거물 그 이상인 유종진에게서 사병이랄 수 있는 인력들을 지원 받아 버틴다면 그들도 별다른 수가 없을 것이다.


범죄 조직의 깡패들이 어디 경찰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을 것이고, 김도건처럼 특별한 인맥을 만들기에도 어려움이 있을 테니. 그들이 합심을 해서 킬러라도 고용을 한다면 다소 고생을 하겠지만, 그런 작자들로부터 요인을 경호하기 위해 특별한 훈련을 마친 이들이 종진이 다루는 자들이었다.


“···그건 그쯤 하고··· 초인약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가?”

“······예?”


종진이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먼저 다른 내용을 꺼내자, 도건은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 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앉아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 식사를 가져다 주는 웨이터들이 왔고, 그들의 앞에는 메인 디쉬가 놓여진 상황이었다.


잘 구워진 한우 안심 스테이크의 일부를 썰면서 종진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야기했다. 도건은 자신이 잘못 들었는가 싶어서 반문을 했고. 도건을 바라보는 종진의 눈빛은 자못 날카로운 것이었다. 늙은 장년인의 눈빛은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도건을 보는 시선이지만, 그가 바라는 건 그 너머에 어떤 초월적인 것이다.


“······김영석이라는 친구가 있지 않은가. 요새 소문이 자자하던데.”

“······소문 말입니까.”


도건은 마땅히 꺼낼 말을 찾지 못해서 그의 말을 주워 섬겨 한 번 더 읊을 뿐이었다. 유종진은 그런 김도건의 태도에 자신이 제대로 짚었다, 라고 생각했다.

김도건은 반면 그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지는 못했다. 스티브 블레어를 비롯해서, 비령 제약 쪽의 인물들이 이야기해준 사실들이 있지만 김도건의 상식으로 이해하기에는 불가해한 구석이 많은 괴담이었다.


그는 유종진이라는 인물이 그 괴담에 대해서 읊고 있다는 걸 알았고, 일단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들으신 게 있으십니까.”


도건은 차분하게 말하면서 눈빛을 내리 깔았다. 자신 앞에 놓인 채끝 스테이크를 바라본다. 반쯤 먹었고, 손에는 나이프를 쥐고 있었다.

스테이크를 써는 도구로 이 자리에서 종진에게 해를 가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 짓을 벌였다가는 곧장 바깥에 있는 가드들 중 더 힘이 센 놈이 살아서 문 안에 들어와 현장을 통제하겠지. 높은 확률로 도건이 데려 온 놈이 종진의 프로 가드들한테 제압당할 확률이 높았다.


서울 시내, 제인 메리어트 호텔에서 일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찰나간에 든 상상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도건은 무탈하게 살고 싶었다. 그의 무탈한 행복이 사회에 거대한 짐이 되며 악의 일종이라는 건 차치하고서 갖는 바람이다.


“···들었지. 자네도 이미 알지 않은가. 내가 아는 걸 자네가 모를 리도 없고.”

“······.”


후, 도건은 짧게 한숨을 내쉰다.


답잖은 모습에 종진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속내를 밝힐 생각이라고 여겼다. 종진은 거기서 한 번 더 깊게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김영석. 모를 리는 없을 텐데. 나도 알고 있으니. 물산 쪽의 걸물 아니었나. 목진형 사장 밑에 있던 놈이고. ······자네가 내부 항쟁을 공인한다는 소식 이후에 어떻게 된 지는 듣지 못했는데. 최근 재미있는 소문이 들리더군. 김영석.

그가 다른 자들에게 당해서 처리되었다가 살아났다고. 그 과정에 비령 제약의 개발 중이던 신약 샘플이 활용되었다고 말이야.”


생각보다 정확하게, 깊은 내용을 알고 있는 종진의 모습에 도건은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어떤 개새끼인지는 모르지만 프락치(러시아어, fraktsiya)가 있는 모양이었다. 짐작하고 있던 바였지만, 생각보다 더 깊이 들어와 있는 모양이었다.


도건조차도 최근에 보고를 들은 일을 그처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현실로 추론하건데 말이다. 도건은 찌푸려지는 인상을 이내 참지 않고 종진에게 이야기했다.


“······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이 사람은. 왜 이러나. 내가 아무리 둔하다고 해도 그 난리가 일어났는데 우리 파트너께서 있는 조직 일을 그 정도로 모를까. 당연한 소리 묻지 말고 이야기 해보게.”


해보게, 라고 말하는 그 말끝이 지독하게 능글맞다. 도건은 불쾌감을 감추며 이야기해야 했다.


“······저도 아는 바 없습니다. 조직 내에서 죽은 놈들 근처 있던 자들이 소문을 흘리고 있는 것 뿐이고요. ···영석이가 죽은 건 맞습니다. 이후에 돌고 있는 소문이 정말 영석이로 인한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고요. 제 눈으로 본 건 없습니다.”


도건의 말은 진실이었고, 담백한 이야기였다. 종진은 물론 믿지 않았지만. 식사 자리에서 중요한 정보를 갖고 있을 지도 모르는 파트너를 지나치게 케기가 부담스러운 종진은 더 이상 그의 속을 긁지는 않았다. ‘그렇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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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그렇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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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작가의 말 23.09.16 18 2 1쪽
23 22. (完) 파스타 23.09.16 15 1 7쪽
22 21. 테이크 아웃 23.09.16 15 1 24쪽
21 20. 퇴장 23.09.16 16 1 16쪽
20 19. 콜트 +2 23.09.15 20 1 22쪽
19 18. 지지支持 23.09.15 19 1 29쪽
18 17. 조직 내 간부 총회 23.09.14 18 1 16쪽
17 16. 도주 23.09.14 18 0 16쪽
16 15. 파리지옥 23.09.14 18 0 15쪽
15 14. 손님 왔습니다. 23.09.13 21 0 20쪽
14 13. 짧은 재회 23.09.13 28 0 24쪽
» 12. 제인 메리어트 23.09.13 28 0 27쪽
12 11. 탕! 23.09.12 27 0 33쪽
11 10. 빠른 퇴장 23.09.11 37 0 25쪽
10 9. 스티브 블레어 23.09.11 28 0 26쪽
9 8. 김도건 23.09.10 34 0 31쪽
8 7. 민형석 23.09.09 37 0 30쪽
7 6. 떨어지다 23.09.09 35 0 25쪽
6 5. 회복 23.09.09 35 0 23쪽
5 4. 숨 좀 쉬자 23.09.09 30 1 22쪽
4 3. 초인 23.09.08 41 1 30쪽
3 2. 오발 23.09.07 34 1 20쪽
2 1. 기억 23.09.07 41 2 28쪽
1 0. Prologue. 23.09.07 78 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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