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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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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최근연재일 :
2024.07.03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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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4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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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쪽

89. 틈새

DUMMY

“후우우우우.”


제냐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체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의지력을 사용해 MP를 다루는 건 깨나 피로감이 있는 일이다. 단번에 많은 양의 MP를 써내는 일 역시 그렇다. 의지력은 눈에 보이는 힘이 아니었지만 분명히 ‘힘’이라는 글자가 이름에 들어갈만한 것이었다.

마치 근육이 그러하듯 한계 이상으로 사용하면 둔한 뻐근함 따위가 감각 속에 전해져온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다시 한 번 초상 스킬을 발동시키면서 번개를 그러모은다. 오크들을 전부 몰살시키기까진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슬슬 미리 마셨던 MP포션들의 효과가 둔해지는 듯도 했다.


제냐는 한 손으로 인벤토리를 열어, 포션 하나를 꺼내어 입으로 까고 그대로 들이킨 뒤 버린다. 포션의 빈 병은 그대로 절벽 아래로 뚝 떨어뜨렸다. 절벽의 가장자리, 그대로 몇 발짝만 잘못 딛는다면 아래로 떨어질 지 모르는 위치였다.


중력에 따라 가파른 절벽의 벽면 앞을 그대로 내려가는 포션 병이, 그 아래에 있는 오크의 이마를 쿵, 때린다.


절벽의 돌벽을 타고 레드 오크 몇 마리가 기어오르고 있었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절벽은 맨손으로 올라오기 극히 힘든 높이다. 잡을만한 곳이 적당하지 않다면 길이 막히기도 했고. 거기다가 거대한 체구와 체중을 지닌 레드 오크들은 등반에 적합한 몸뚱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성과 무모함으로 뭉친 놈들이 돌벽을 박살내어 그 속에 손이라도 넣으면서, 천천히 기어오르고 있다. 힘만큼은 분명 괴물과도 같은 놈들이었으니. 제냐는 자신도 모르게 그 아래를 흘끗 보았다가 놈들이 다가옴을 깨달았다.


쏘아 떨어뜨리려면 화살이 적당할 듯하다.


제냐의 앞에 푸르른 번개의 창이 만들어졌다. 원형의 그것보다 조금 더 길죽한, 타원형의 구체였고 멀리 마을을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레드 오크들을 직격시켰다.


콰앙, 소리가 나면서 다시 오크 부락의 흙바닥이 터져나간다. 짜릿한 전류가 넓게 산개하면서 여러 마리의 움직임을 동시에 그물처럼 붙잡았다.


바닥에 넘어져 벌벌벌 떨어대는 레드 오크들의 모습이 우습다. 가까이서 보면 웃음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 3m에 달하는 거체들이, 보기만 해도 무섭게 생긴 괴물들이 그러고 있는 꼴이었으니.


체인은 침착하게 엿가락을 늘리듯 만들어내던 스킬을 완성시켰다. ‘체인 라이트닝’이라는 이름의 스킬이었다. 번개의 사슬이라는 뜻이었고, 그대로 멀리 있는 오크 무리에게 채찍을 휘두르듯한 손동작으로 투사체를 날려보냈다.


손바닥과 바닥 사이에서 놀던 전류의 끈이 그대로 주욱 늘어났고, 늘어나는가 싶더니 한 순간에 옮겨가듯 길게 뻗어 오크들에게까지 닿았다. 화살보다는 분명 한참 빠른 속력이었다. 몇 번 번쩍거리더니, 순식간에 수 백 미터를 지나 오크들에 닿는다.


체인의 손바닥에 아직도 연결되어 있는 그 전류의 끈이 레드 오크 한 마리의 뒷덜미에 닿는다. 그대로 전기가 늘어나면서 오크의 몸을 휘감는다. “크아아아아아!” 어금니가 튀어나온, 붉은 색의 민머리를 한, 그리고 가죽 갑옷 따위로 가랑이니 어깨니를 가린 거대한 야수가 울부짖었다. 손에는 거대한 할버드를 쥐고 있었다. 철이 부식되어 그저 기괴한 모양의 쇠몽둥이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케르륵’이라는 이름을 가진 레드 오크 개체는 제자리에서 벌벌 떨었고, 누런 색의 전류의 밧줄이 그 몸을 휘감다가, 문득 그 옆에 선 놈에게로 전류가 이어졌다. 눈깜짝할 사이에 끈이 생성되어 붙는다. 마치 자석에 쇠가 날아와 붙듯이 전류가 날아가 오크의 몸에 달라붙었고, 순식간에 끈이 퍼져간다.


한 두 번, 그런 식으로 전류가 퍼져나갔다. 체인 라이트닝은 여러 마리의 몬스터들에게 지속 피해를 입히고 움직임을 막기에 적합한 스킬이었다. 모든 스킬이 그러하듯 사용자의 역량에 따라서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는 기술이었고, 체인은 제법 유용하게 이 스킬을 다뤄온 숙련자다.


전류의 밧줄은 순식간에 부락 내부의 오크들, 열댓 마리를 잡았다. 그러고도 말단을 뻗쳐서 몇 마리인가 더 타격을 주었지만, 최종적으로 움직임을 막은 것은 그 정도였다. 오크들은 부들부들 떨어대며 털썩, 하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는다. 점차 고개를 아래로 처박고 지속적으로 전류에 의한 데미지를 입었다. “크워어어어어!”


제냐와 체인이 오크들 전부를 막는 건 역부족이었다. 그러던 사이에 오크들이 계곡 바깥으로 뛰어간다. 긴 거리, 1, 2km정도를 돌아서 그들에게 다다를 것이다. 언덕 위의 가파른 길은 달리기 적합하지 않다. 오크들은 강인한 각력으로 경사를 무시하며 계곡 바깥, 언덕의 아래에서 위쪽으로 뛰어오른다. 멀리 떨어진 제냐와 체인 등을 잡기 위해서 움직인다.


“크어어어어!”


부락 여기저기에서, 오크들이 전장의 함성을 내지른다. 야성이 그대로 살아있는 울부짖음이었다. 오크는 ‘악마종’에 속하는 몬스터였다. 이렇다할 전투력이나 대단한 담력이 없다면 듣는 것만으로도 서늘한 한기가 느껴지는 울부짖음이다.


한 마리의 레드 오크가 울부짖자 여기저기서, 동시에 여러마리가 울어대기 시작한다. 늑대들의 하울링처럼 오크들은 전투를 준비한다. 갑작스러운 습격이다. 그들 부락은, 오크들이 늘 그렇듯 전 인원이 전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습격자들을 언제나 처부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다.


이 어둠숲에서 레드 오크가 가지는 위상은 중간에서 위쯤, 상급은 아니어도 중상권의 계층은 되는 정도였다. 어둠숲에서 자신의 권역을 확고히 한 채 다른 괴물들을 내려다보는 거수들에게는 못미치지만, 그래도 무리지은 괴물 오크를 상대할 수 있는 놈들은 어둠숲에 적었다.


당연히 천적도 적었고, 무수한 몬스터들의 천국인 어둠숲은 그들에게 있어서 동시에 식량 자원의 보고이기도 했다. 거대한 체구를 유지할만큼의 고기니 하는 식량을 충분히 얻으며 자생하던 그들이다.

오크들의 마을에 벼락이 떨어졌고, 전쟁을 선포한 몇 명의 작은 인간들은 죽음을 당할 것이다. 오크들은 자신들의 붉은 피부 빛깔처럼 그 홍채를 붉게 물들이면서 거칠게 뛴다.


쿵, 쿵, 쿵! 하고 흙바닥을 파헤치며 달리는 오크들의 뜀박질이 위협적이다. 쾅! 하고, 그렇게 아직 마을을 벗어나지 못한 채 달려대는 오크의 머리 위로 썬더 볼트가 하나 더 떨어져 내렸다. 제냐가 정확히 핀포인트로 사격해서 날려놓은 MP탄이 정확히 맞은 것이다. 폭발성과 함께 한 마리 오크는 어깨 위로 몸체가 전부 소멸되었고, 그대로 빛의 입자로 화한다.


이미 플레이어들, 체인이나 제냐가 노려서 쓰러뜨린 오크들 중 HP가 다한 것들은 빛의 입자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그것들이 남은 자리에는 푸른 색의, 이질적인 아이템 박스만 남을 뿐이다. 아날로그 세상에 혼자 던져진 디지털 이미지처럼 보이는 그것들은, 전투가 끝날때까지 안정적으로 그 자리를 지킬 테였다.


아이템 박스는 파괴 불가능에 한없이 가까운 오브젝트였고, 아무리 강한 충격을 받아도 부서지지 않았다.

지속시간 역시 넉넉히 전투가 마무리된 뒤에 전공자가 건드릴 때까지 유지될만큼 길었고.


쾅, 하고 터졌던 썬더 볼트는 그대로 오크의 상체를 날려버리고 조금 더 앞으로 다가가 바닥을 때렸고, 흙구덩이를 만들어내면서 전류가 사방으로 튄다. 그 주위에 있던 레드 오크들은 그 잔여 전류에 맞고 움찔 몸을 떨었다. 대단한 피해까지는 아니었다.


시선을 절벽의 위로 가져가면, 제냐가 체, 하고 혀를 차고 있었다. 썬더 볼트는 공격 속도가 지나치게 느렸다. 초상 스킬들은 잘만 맞으면 몇 마리의 괴물들을 한 번에 물리칠 정도가 되었지만 공격 준비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다.


인벤토리라고 중얼거리며, 제냐는 황급히 푸른 물약 하나를 더 꺼내 마시고는 장궁을 꺼내 들었다. 붉은 기운이 감도는 듯한 멋들어진, 목질의 장궁이 튀어나오자 다른 이들도 슬쩍 눈을 들어 모습을 구경했다.

제냐는 확실히 다양한 공격 옵션을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였다. 페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허리에 차고 있는 칼만 하더라도 주력으로 쓰는 무기인듯 한데, 초상술에 궁술까지 다루다니.


보통은 한 가지에 집중해서 공격 스킬의 경험치를 집중해 얻고 한 가지 스킬군의 달인이 되는 게 목표인 경우가 많았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이 서비스 기간이 아주 길게 이어졌던 게임이고, 더욱 다양한 비밀들이 밝혀지고 고수들이 훨씬 많았더라면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몇 개의 클래스를 동시에 익히면서 준수한 전투력까지 얻어내는 자들의 시도는 그리 흔한 게 아니었다.


비련의 시나리오의 가이드나 유저들이 만들어내는 공략집, 그 문단과 문단 사이에 있는 팁은 한 가지를 늘 가리키고 있었다. 현실과 가까운 법칙으로 만들어진 게임이며, 당신의 땀을 존중한다, 라는 말이다.


전투 계열의 클래스를 익혔다면 전투에 한없이 진지하게 몰입해보고, 타인이 이해 못 할 정도의 괴짜같은 과정을 겪어서라도 험로를 거친다면 남다른 성취를 얻게 될 테였다. 물론 고작 게임에 그렇게까지 몰두하는 자들이 많지는 않다.


게임이 곧 인생이라는 식으로 굴고 있는 중독자들도 그렇게 하진 않는다. 그건, 도리어 명료한 정신으로 몰입해야만 도달 가능한 지점이기도 했다. 게임을 온전히 게임으로 보고, 눈 앞에 벌어지는 현상에 사실적으로 집중해야만 하는 것이다.

현실 도피를 위해 매몰되어서는 도리어 성취를 얻는 길에서 멀어질 때가 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은 만만하게 지어진 게임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현실에 가깝게 지어졌다, 라는 건 그런 의미였다.

제대로 잘 익혀내기 위해서는 다소의 노력과,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오.”


체인은 흘끗, 옆을 보고 철시를 걸어 메기는 제냐의 모습에 감탄을 흘렸다. 생각보다 깔끔한 폼이었다. 과연 그 능숙함대로, 제냐는 단숨에 장궁의 강력한 시위를 반신의 힘을 사용해 바로 당긴다. 쭈욱 늘어나면서 붉은듯한 장궁의 활대가 과부하에 괴로움을 토한다.

그 정도가, 강력한 탄성과 강성을 동시에 지닌 장궁을 사용하는데 적당한 수준의 부하였다. 파워샷을 걸어 당기고 있는 중이었다. 화살을 쏘는 행위에 한해서 근력과 순발력에 보정을 더한다.

기력을 화살에 걸어 올리는 것 역시 더욱 편하다. 파워 샷의 도움으로 700즈음의 MP를 한 발의 화살에 싣는다. 초상 스킬 한 발에 비한다면 훨씬 모자른 수치였다.


슬슬 MP의 활용이 많아지고 있었으므로, 최태현만큼 궁술 스킬이 다양하진 않더라도 철시를 적목시 따위의 상위품으로 바꾸는 게 좋을지 몰랐다. 기력술이 궁술의 위력에 미치는 비중이 커질수록, 단순히 화살의 강도나 세기보다 얼마나 MP를 잘 머금고 흘려보내느냐, 하는 MP반응성이 중요해진다. 적목시는 철시보다 확연히 반응성이 뛰어난 소재로 만들어진 것이다.


은색, 혹은 회색. 철시의 끄트머리에 달린 깃은 검은 색이다. 손가락만으로 철제의 화살을 잡아 지탱하며, 그 시위를 끝까지 당긴 뒤 놓았다.


팡, 하는


파공성과 함께 철시가 허공을 꿰뚫고 단박에 수백미터 너머의 레드 오크 대가리를 꿰뚫었다. 퍼억, 하는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고, 두부를 이루는 피륙과 뼈가 사라지듯 부서진다.


강렬한 타격감과 함께 한 마리가 절명했다.


그대로 철시는 흙바닥에 깊숙히 박힌다. 그 끄트머리, 꼬랑지의 깃만이 흙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내어 떨어댈 뿐이다.


제냐는 연사와 속사를 사용해야 했다. 적당한 위력적 지점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한 발 한 발의 힘을 줄이고, 얼만큼 쏴야 가장 많이 쏘아댈 수 있는지. 한 발에 담는 위력과 연발에 걸리는 시간은 늘 반비례한다. 시간대비 최대 화력을 얻어내기 위해서 몇 발 정도는 조정 사격이다.


제냐가 멀리서, 기력 감지술의 확장된 시야로 오크의 대가리가 뚫리는 것을 확실히 관찰했다. 만족스러운 사격이었고, 곧바로 다음 발을 걸어 시위를 당긴다. 수십 미터 정도의 절벽을 제 손이나 도구로 찍어 오르는 레드 오크들의 기세가 제법 매섭다.

보통 인간이라면 말도 안되는 일이었지만, 오크들은 인간이 아니다. 비중한 체중과 체형이었지만 그만큼 완력이 강력해, 쾅, 쾅! 하는 폭음과 같은 소리를 내며 절벽의 벽면에 자신의 손과 발을 박아 넣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절벽에도 결이라는 게 있어 석재를 잘못 건드리면 그대로 바위 뭉텅이가 빠질 수도 있기 때문에, 자리를 잘못 고른 놈들은 무식하게 올라오다가 중간 지점 즈음에서 떨어지거나 했다. 그 때에는 또 묵직한 충격음과 함께 오크들의 몸뚱이가 바닥에 엉망으로 널브러졌는데, 죽지도 않았다.


확실히 초인적인 신체 능력을 갖고 있는 괴물들이었다. 그 무게만큼이나 강렬한 타격으로 땅바닥과 박았을 텐데, 놈들은 잠시 어질거리는 모습을 보이다가 다시금 절벽 위로 기어오른다. 제냐는 화살을 연달아 쏘아야 했다.


체인은 그러는 와중에 다시금 낙뢰나, 썬더 볼트, 썬더 스피어, 썬더 애로우 등 다양한 뇌전 스킬들을 흩뿌렸다. 비슷한 이름을 가진 여러 개의 스킬군들은 그 효과 면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외형 자체는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았다.


썬더 볼트가 가장 작고 느렸고, 썬더 스피어가 크고 빠르며 강했다. 썬더 애로우는 다소 작고 위력이 약했으나 아주 빠르고, 또 먼 거리의 목표물을 정확하게 맞추기 좋은 정확성을 갖고 있었다.


만일 체인이 독자적인 조정을 더하지 않고 스킬이 발현되는 시스템적 흐름에 맞추어 그대로 발동시킨다면, 그 크기가 모두 다르며 들어가는 MP량 역시 차이가 많이 났을 테다.


여러 개의 스킬들을 거리나 위치, 사격 환경에 따라 바꾸어가면서 쏘아댄다. 쾅, 쾅, 쾅! 하는 귀청 떨어지는 폭발음이 계속해서 오크 부락을 채웠다. 움막들 중 일부는 그 전류가 닿아서인지 곧 불에 타오르는 모습마저 보인다.

뇌전에는 당연히 열량이 가미되어 있었고, 제냐도 체인도 굳이 그것을 줄여서 발사하지는 않았으므로 탈만한 것이 닿는다면 불이 나게 마련이다. 연기가 곧 오크 부락 이곳저곳에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지푸라기나 동물의 가죽, 다 헤진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천 따위로 덮어진 원시적인 원막 중 몇 개가 활활 타올랐고, 그 불티가 바람을 타고 이곳 저곳으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레드 오크들은 고작 약한 불길 정도에 타죽을만큼 약한 생물체들은 아니었으나, 분지 자체가 화염으로 가득차고 연기밖에 없게 된다면 별다른 추가 공격을 하지 않아도 상당한 지속 데미지를 입게 될 테였다.


계곡의 입구를 막는 것이 가장 중요해 보인다. 제냐는 화살을 쉼없이 쏴날리면서 그런 생각을 했고, 곧 외쳤다.


“입구! 터뜨릴 수 있어요?”


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파워샷으로 당겼던 철시 하나가 그의 손에서 날아가, 절벽을 기어오르는 오크의 입부터 그 몸통을 꿰뚫었다. 그대로 치명상을 입은 오크는 손아귀의 힘이 풀려서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내장 중 일부가 통째로 날아가는 화살의 일격이었으나,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진 오크는 꿈틀거린다. 아직도 살아있는 것이다.


몬스터들은 가끔 초월적인 생명력을 보인다. ‘악마종’이라고 불리는 종류의 몬스터들은 더욱 그렇다. 그것들은 초상 스킬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상리를 조금씩 초월한 존재들이 많았다.

애초에 몹들 중엔 그런 컨셉으로 지어진 것들도 있다. 예컨데, 유령을 모티브로 한 그런 것들 말이다.


전투직의 플레이어들 역시 MP라 불리는 초인적인 에너지를 다루는 인간들이라 유령에게도 멀쩡히 타격을 입히기는 하지만, 물리 공격 내성같은 성질은 확실히 까다로운 조건이었다. 기력술을 굳이 익히지 않는 종류의 전투직 플레이어들은 그런 상대들을 잡기 위해서 아이템의 도움을 빌릴 때가 많았다. ‘성스러운 무구’니 뭐니, 하는 이름으로 불리는 무기군들이었다.


쾅! 제냐가 다시 한 마리의 오크를 떨어뜨렸다. 반동으로 몸이 출렁거리는 것마저 계산하고, 금세 자세를 다시 원점으로 돌린 뒤 화살을 메긴다. 연사와 속사, 그리고 파워샷의 연계는 그가 단시간 내에 얼마만큼 많은 데미지를 줄 수 있는가를 결정한다. ‘궁술’ 스킬의 숙련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런 파생되는 세부 스킬들의 숙련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더 양질의 경험, 더 잘 쏘아낸 스킬샷 한 번은 해당하는 스킬의 숙련도를 엉망의 자세로 쏘아냈을 때보다 더 큰 경험치로 돌아온다.

현실에서 궁도의 달인이라면 다른 이들보다 궁술 스킬들을 압도적으로 빠르게 익힐 수 있는 재능이 이미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수많은 스킬들은 서로 오만가지 상호작용을 하고 있었고, 보다 폭넓은 스킬군에 영향을 끼치는, 이른바 기초 스킬이라 불리는 것들이 더욱 중요해지게 마련이다.


그러한 기초 스킬들은 기초 검술, 중급 검술, 고급 검술 따위로 단계가 나누어져 여러 종류의 스킬들을 익혀서 마스터에 다다른다.


꼭 기초 검술을 12단계까지 익혀야만 다음 중급 검술을 익힐 수 있는 건 아니었고, 중급 검술에 해당하는 동작적인 깨달음을 얻어서 어려운 검술 동작을 해낸다거나, 하면 더 빠르게 얻을 수 있었다.


제냐는 어느덧 궁술의 중급 단계를 익히고 있었다. 이제 고작해야 2단계의 레벨 3이었다. 그러나 그것만 하더라도 상당한 성취였고, 만약 현실에서 똑같은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스포츠에 속하는 궁술 시합에서는 모조리 만점을 받아낼 수 있는 실력이다.

거기에는 스킬의 도움도 있었고, 초인적인 신체에서 비롯되는 완벽한 안정감 역시 큰 영향을 주었다. 활과 시위, 그리고 화살 사이의 그 잔떨림을 어마어마한 근력과 정밀한 운동 능력으로 현실보다 훨씬 디테일하게 잡아낼 수 있었으니까.


올림픽의 금메달리스트도 이런 신체를 보유하지 못했을테니까, 그들이 게임에 들어와 궁술을 연마한다면 훨씬 쉽게 활을 다룰 테였다. 현실에서보다도 더.


슁,


하는 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다시 하나, 절벽을 올라오는 레드 오크의 미간을 꿰뚫어 그 뒷머리까지 박살내는 파워 샷이었다. 제냐의 공격이었고, 많은 장기 중 뇌나 심장은 아무래도 생명과 직결된 부위이기에, 오크 한 마리는 그대로 죽어 떨어졌다.


얼추 이, 삼십 여 마리 정도는 해치운 것 같았다. 그러고도 다시 삼, 사십 마리 정도는 움직임을 막아 부락 여기저기에 드러누워 묶여있는 상태다. 그러나 나머지 오크들은 멀쩡히 살아서 뛰고 있었고, 부락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으나 불길이 전체를 덮지는 않았다.


한낮의 분지에서 레드 오크들이 분주하게 계곡을 벗어났다.


제냐가 외쳐 말했듯이, 체인은 계곡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직선 거리로 키로미터 단위가 되지 않을까, 싶은 거리였다. 그러나 공격하기에 모자람은 없었다.


체인은 제냐에게 짧게 답해주었다.


“아마도!”


파즈즈즈, 하고 공기가 팽창해서 터지는 소리가 난다. 뇌전이 스파크를 일으키면서 그녀의 손 앞에서 생성된다. 이번에는 붉은 번개였다. 적색의 번개, 는 자연상에 존재하기 어려운만큼 특별한 느낌이 든다. 그 선명한 불빛은 고도의 MP를 포함하고 있었다.

곧 그녀가 다루기 어려운 수준의 MP가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그녀 스스로 흘려보낸 MP였다. 체인의 MP가 날뛴다. 그러나 거기까지도 그녀가 계산하고 있던 반응이다.


다소 폭급하게 날뛰면서 팔을 벌린 범위 바깥으로 터져 나가는 전류의 줄기들. 그러나 곧이어 하나의 덩어리가 형성되면서 가운데로 모여든다. 체인이 마치 둥근 공을 손모아 잡듯이, 점점 벌린 양 손아귀를 천천히 가운데로 모은다. 종래에는 붉은 구체가 생성되었고, 전류들은 바깥으로 튀지않고 하나의 구체를 이루었다.


안정된 모습처럼도 보인다. 축구공만한 크기가 되었고, 허공에 뜬 구체를 다루듯 그 근처에서 그녀의 손이 멈춰있다. 마지막에는, 서로를 바라보던 손바닥이 바깥을 향한다. 정확하게 저 멀리 직선 거리에 있는 계곡의 입구 근처를 향해서였다.


그녀의 눈에 적색의 궤적이 점선으로 보인다. 마치 AR기술처럼, 현실적인 시나리오 온라인의 시야 내에 추가적인 점선이 쭉 뻗어나가 계곡의 입구 중간 부근, 그녀가 노리고 있는 목표 지점까지 연결되는 선을 그려낸다.


그 선은 곧 그녀가 만든 붉은 번개의 가상의 궤적이었고, 그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그녀는 다소 무리를 한 감이 있는 탄환을 쏘아낸다.


일반적인 썬더 스피어였지만, ‘버서커’라는 유니크 스킬을 사용한 결과였다. 버서커 스킬은 다양한 종류의 스킬에 응용해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었는데, 그녀가 다루는 스킬의 탄환들이 모두 적색으로 변한다. 다량의 MP를 일시적으로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해주지만, 아직 스킬의 숙련도가 완벽하지 않아 사용할 때마다 불안한 감이 있기는 하다.


그녀는 일반적인 의지력을 가진 초상술사였고, 딱히 현실의 그녀, 김세인이 특출난 집중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도 아니었다. 캐릭터에 부여된 의지력 이상의 MP를 일시적으로 다룰 수 있게 해주는 것만 하더라도 버서커는 그녀에게 참으로 고마운 스킬이었다.


붉게 물들고 또 축구공만한 크기로 집약된 뇌전의 탄환은, 그대로 소리도 없이 슈우우, 날아가 계곡처럼 보이는 입구 근처의 돌벽을 때렸다.


오크들이 서둘러 나가고 있는 부락의 입구는 거대한 체격을 가진 레드 오크 네 다섯 마리 정도가 한 번에 길을 지나면 비좁아보이는 정도의 좁은 길목이었다. 거기에 탄환이 절벽을 때렸고, 그대로 강렬한 폭발음과 함께 돌들이 무너져내린다.


쿠루루루, 하면서 바윗 덩어리들이 입구 쪽으로 쏟아져 내려왔다. 길의 한 절반 정도가 돌무더기에 깔려버렸다. 지나가려던 오크 한 마리가 돌들에 깔려 그대로 소식이 없었다. 죽었을 지도 모르고, 살아는 있으나 단순히 움직이기 어려운 상황인지도 모른다. 아마 그대로 내버려두면 자연스럽게 죽게 되리라. 절벽의 한 쪽이 무너져서 길이 한참이나 좁아졌다.


피잉, 하고 화살이 날아간다. 저 멀리, 입구를 나가려는 오크의 뒤통수를 정확히 꿰뚫었다. 그대로 입을 벌리고 쓰러지는 오크는 화살의 강력한 관성에 이끌려 앞으로 넘어졌고, 땅바닥에 함께 화살에 꿰인 신세가 되었다. 그 위를 오크들이 밟고 넘어간다. 제냐는 계속해서 철시를 날렸다. 한 통에 가득 담겼던 철시를 다 소모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체.”


혀끝을 가볍게 찬다. 입에서 군소리가 나며 침이 조금 튀겼다. 아름다운 입술에서 나온 소리였다. 아르망디 베샤민, 아랍 계열의 인종인 그녀가 작게 그랬다.


페인은 문득 옆에 있는 그녀의 얼굴을 슥, 보았다가 눈길을 돌렸다. 그들은 이제부터 달려올 레드 오크들에 맞서야 한다. 계곡의 입구를 무너뜨리는 게 좋겠지만, 레드 오크들은 터프한 놈들이다. 돌무더기로 길을 막아선다고 해도 시간이 걸릴 뿐 뚫을 것이다. 결국 두 명이서 백 여 마리, 아니 200여 마리는 될 지 모르는 수를 전부 잡아 죽이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들에게 완벽한 회피 이동기와 떨어지지 않는 MP가 있다면 가능은 하겠지만. 그런 이동 기술과 아이템이 없기에 근접전투에 능숙한 클래스인 그들이 도와야 한다.

페인은 다시 제냐를 슬쩍 봤다. 제냐는 굳이 그가 도와주지 않더라도 근접전에 아주 익숙할 것 같기는 했다만.


애니는 할버드를 쥐고 있고, 페인은 롱소드를 건들거리고 있다. 레드 오크들은 아직 멀다.


두 사람은 아낌없이 절벽 근처에서 MP를 쏟아내며 초상 스킬들을 난사한다. 주로 뇌전 계열의 것으로, 마침 두 명의 원소 계통이 비슷한지 번갯불이 번쩍거리면서 여기저기서 전류가 넘쳐 흐른다.


그런 모습을 가장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고 있는 게 아르망디이다.


검은 머리칼을 뒤로 길게 늘어뜨린 그녀는 두 자루의 숏소드를 늘어뜨려 쥐고 있다. 그녀의 허리춤에는 벨트, 검들을 수납하기 위해 일부러 찬듯한 도구에 여러 숏소드가 걸려 있었다. 움직일 때 급격하게 뱡향을 선회하면 철그럭 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칼집끼리 부딪히기도 했다.

일부러 그렇게 소리가 나도록 꾸민 기묘한 복장처럼도 보이지만, 그저 숏소드가 많을수록 좋기에 한 차림새일 뿐이었다.


만일 은밀 기동이 필요하다면 걸리적거리는 몇 종류는 인벤토리에 집어 넣고, 또 몸에 붙은 것들이 잘 흔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특수한 이동법을 사용해 상대의 뒤를 잡아챈다.


암살자. 그게 베르망디가 가진 클래스였고, 보통 특이한 클래스들은 육성에 어려움이 많이 따랐다.


그녀는 스타팅 포인트부터가 사르삿이었다. 산슈카 왕국의 중심지에서 플레이를 시작한 그녀는 자신의 특이한 성격에 맞추어 이상한 직업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그 전투 스타일이나 얻게 되는 퀘스트들의 성향이 자신의 취향이라는 점에 이끌려 암살자가 되었다.


레벨이 올라갈수록 많은 임무를 성공하게 마련이었고, 안정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몰래 죽이고 나니 뒷세계에서는 나름대로 알아주는 암살자가 되었다.

단기간 내에 수많은 플레이어와 NPC들을 게임 오버의 뒤안길로 보내버렸다. 우스운 말이다. 게임오버의 뒤안길.


실제로는 그런 짓거리와 아무 연관이 없는 그녀였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을 플레이한다는 것 자체가, 특별한 정신병력은 없다는 뜻이기도 했고. 물론 진료 기록이 전혀 없고 완벽하게 사회화된 고도의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의 경우에는 시나리오 온라인의 시스템도 딱히 가입자를 막지 못했다.


굳이 따지자면, 그녀는 소시오패스에 가까울 지도 몰랐다. 타인들이 하는 말에 그다지 공감이 가지는 않았으니까. 크게 관심도 없었고. 그것만이 전부라면 그녀의 정신적 이상성을 설명하기에 아주 부족한 말이었지만. 그녀는 본심을 깊이 들어가 케내어 보더라도 똑같은 생각이었다.

그저 피상적으로, 지나가고 별로 연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흥미가 없는 것뿐만이 아니라 오래도록 관계성을 유지해야 하는 사회적 관계성 속에서도 타인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저 흥미 본위의 삶, 당위성 위주의 삶을 살아갈 뿐이었고, 법적 도덕적 규율이라는 건 의무감에 의해서 지킬 뿐이었다.

취미가 딱히 유별나지도 않았다. 드러내놓고 악독한 짓을 하지도 않았고. 그러나 게임이라는 세계 안에서, 그녀는 나름의 취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은밀하게 누군가에게 다가가 그 목을 취하는 식의 플레이와, 남들의 눈을 피해 다녀야 하는 암살자로서의 행로는 제법 재미가 있었다.


힘든만큼 나름의 성취감조차 있었고. 그런 성취감은 삶의 활력이 되고, 그녀 자신의 삶을 연명시켜주는 좋은 요소이기도 했다.


아르망디 베샤민. 그녀는 혀를 내밀어 아랫 입술을 핥는다. 저번에 당해내지 못했던 대상, 이 바로 앞에 있었다.


자신에게 대놓고 등을 보인 채로 오크 마을의 토벌에 주력하고 있는 동양인 남자 말이다. 그의 플레이 네임도 알고 있었다. 우연히, 어둠숲에서 지금 이렇게 다시금 파티가 되어 통성명을 하기 전부터. 그녀가 그에게 다가가기 전부터 말이다.


그녀는 말했듯 나름대로 유명세를 얻은 사르삿의 암살자였고, 그런 그녀에게 신용을 보이며 의뢰를 맡긴 인물이 있었다. 그 자세한 내막까지는 잘 알지 못했지만, 대강은 이해했다. 그녀가 플레이어로서 조사해서 알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자리에 있는 권력자의 종이 은밀하게 그녀를 불러내어 돈을 주며 퀘스트를 맡겼다.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던 그녀는 여느 때와 아무 다름 없이 퀘스트를 수락했고, 한 인물의 뒤를 쫓아 어둠숲에 오고 그에게 시비를 걸기에 이른다.


처음에는 연약한 얼굴을 하고 가장을 하다가, 갑자기 본색을 드러낸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단순한 논리로, 어둠숲에서 사냥을 하는 정도의 플레이어에, 제냐가 잡는 몬스터들이나 받는 퀘스트들의 난이도를 봤을 때 자신이 더 강할 것 같아서 그런 것 뿐이다.


정면 대결에서 무난하게 이길 수 있다면 굳이 돌아갈 이유가 없었다. 단지 귀찮아졌을 뿐으로, 그녀는 민낯을 드러내듯 제냐에게 표정을 바꿔 보이며 검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결과는 충격적으로, 완벽하게 지고 팔을 잃고 도망을 가는 꼴이었다.


아르망디는 나름대로 험로를 거쳐서 기술을 익혔다. 암살자와 같이 마이너 계열의 육성로, 플레이 스타일을 갖고 가는 건 상당히 어려운 길이었다. 비련의 시나리오의 컨셉은 어디까지나 현실 반영이니까, 양지를 걷지 않고 음지를 걷는 길이 그만큼 지저분하고 고되며 성취조차 잘 이루지 못한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올바른 방식의 헌신과 노력이라면 그 끝에 대단한 성취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음지의 길을 걷는 건 곳곳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녀가 마주해야 했던 건 그녀의 성격보다 훨씬 더 독랄한 NPC들이었고, 보통 암살자를 찾는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사정과 입맛에 따라 얼마든지 도구를 갈아치울 수도 있는 작자들이었다.


잠깐 시선을 빼앗기고 잠깐 재물에 눈이 돌아간다거나, 혹은 말실수라도 잘못 했다가는 곧바로 게임 오버였다. 그녀는 칼날같은 삶을 살아왔고, 거기에서 얻어진 전투력에 상당히 자신이 있었다. 적어도 비슷한 레벨 대에서 그녀보다 더 강한 전투직 클래스의 플레이어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여태까지 암살은 순조로웠다. 제냐 킴, 이라는 저 빌어먹을 흑발의 동양인을 제외하고서는 말이다. 그녀 자신보다 분명 레벨도 그리 높지 않은 것 같은데, 근접전에서 보여주는 퍼포먼스와 노련함은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무슨 NPC들 중에 있는 검술의 달인과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간혹 의뢰 중 어려운 것으로, 상당한 무력을 보유한 기사 류의 캐릭터를 죽이는 임무를 맡기도 한다. 그럴 때 그녀는 자신의 실력을 셈 해 볼 작정으로 정면으로 덤비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상당한 고생을 하고 나서야 의뢰를 완수할 수 있었다.


NPC들은 같은 수준의 스킬을 갖고 구사한다거나, 혹은 수치적인 스텟이 비슷한 것 같더라도 강함이 다른 경우가 많았다. 단순한 스킬 구성, 스텟 구성 그 너머에 있는 실제 검술에 대한 이해인 듯하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방대한 데이터 베이스를 바탕으로 자가 학습과 발전을 거듭해서, 초AI 만물박사가 만들어낸 게임이었다.

그 속에는 현실의 온갖 무술과 그 흐름, 실전 데이터들도 들어가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달인들의 정보를 토대로 비련의 시나리오는 초인들을 재조직했고, 리셋이 풀려버린 듯 현실에서 불가능한 수준의 육체 능력을 갖게 된 이 세계의 달인들은 그야말로 상대하기가 난감한 수준의 괴물들이 되었다.


그런 차이점 때문에, 아직까지도 플레이어들은 최정상 급에 있는 강자들에게 당해내지 못하는 중이었다. 랭커들 중 가장 끝자락에 있는 이들도, 세계관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일컫어지는 이들이나 몬스터에게는 아직 덤비지 못한다. 게임의 끝을 보려면 아직 어느 정도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제냐를 상대할 때의 느낌은 NPC의 노련한 전투직 클래스를 상대할 때와 느낌이 비슷했다. 아르망디의 감각은 틀림이 없었다. 그녀가 경험할 수 있는 수준에서의 유저들이라면, 그녀는 분명 개중 최상위의 전투 능력을 갖고 있는 유저가 맞았으니까.


NPC와 플레이어들의 스킬 활용 격차, 무술 따위에 대한 이해도의 격차는 줄이기가 상당히 어렵다. 무수한 시간을 데이터 생성으로 인해 ‘실제 살아낸 듯한’ NPC들의 퍼포먼스를 이제 막 게임에 접속해서 검을 다루기 시작하고, 어떤 류의 기술을 접한 이들이 당해내기가 어려운 게 당연하다.


그러나 시나리오 온라인을 플레이하고 있는 유저들의 수는 많았고, 고수로 갈수록 그 분포도가 급격히 줄어들며 좁아진다지만 아르망디가 아직까지 본 적 없고 당해낼 수 없는 고수들 역시 수없이 존재했다. 단지 그녀가 만나보지 못했고, 제냐를 처음으로 보았을 뿐이다.


쉴 새 없이 화살을 날려대는 등을 보면서, 아르망디는 퀘스트를 클리어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계속해서 제냐 킴을 노리고는 있었다. 첫 번째 시도 후에 스펙 차이가 상당해서, 다른 수를 생각해야 하지 않나 하면서 어둠숲에서 서식하는 NPC마냥 돌아다니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로 만나게 되었으니 그녀로서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페인이나 애니, 체인이라는 세 플레이어들의 눈길이 조금 거슬리기는 했다. 그러나 기회가 적어도 주어졌다는 점에서 이전의 막막한 상황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그녀는 숏소드를 쥔 손의 힘을 주었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했다. 적당한 때가 오면 단칼에 처리해야 한다. 물론 동귀어진(同歸於盡같이 죽음을 맞이하는, 자기 방위를 포기하는 공격 방법)의 수단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목적은 제냐의 죽음이 아니다. 암살자로서 자신의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비련의 시나리오에서의 플레이를 이어가는 것이었지. 그렇게 되었다가는 본말전도이다.


레벨이 어느덧 50을 넘은지도 꽤 되어가는 시점이다. 이 즈음에서, 중수와 고수의 경계에 선 전투직 플레이어들이라면 HP가 기본적으로 만 단위는 넘었을 테다. 아무리 적은 자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거기다가 다들 콘란드 대륙을 여행하고 모험처럼 퀘스트 플레이를 해나가며 자기들만의 비장의 수단 따위는 하나둘씩 만들어 두었을 시점이기도 하고.

단순히 틈을 보아서 절벽에서 밀어버린다거나, 하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확실하게 목숨을 끊기 위해서는 좋은 타이밍을 노려야만 했다. 아르망디는, 두터운 폭을 가진 숏소드를 손 안에서 놀리며, 레드 오크들을 기다린다.


멀리 처다보았다.


크르르르!


하는 먼 거리에서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듯도 하다. 떼를 지어 달려드는 레드 오크들이, 그리 오래지 않아 긴 언덕길을 돌아 그들 근처에 당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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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뒤통수를 노리는 아르망디의 시선에 대한 형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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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85. 검은 비검飛劍 23.09.22 35 3 30쪽
85 84. 단테스 무기상점 23.09.22 30 3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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