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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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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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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8 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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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0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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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81. 뱀(3)

DUMMY

*


“암살자는?”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


알사드,


게으름뱅이 공작이라 불리는 장년의 사내는 눈을 피곤하다는 듯 반쯤 뜨고 있었다. 그의 성 내, 저택 집무실이다. 수도에서 그가 맡을 일들은 훌륭한 부하들이 모두 해내고 있었다. 그가 결재를 주어야만 하는 안건 역시 무수했지만 그의 선택 기준을 알고 있는 노련한 부관들은 알아서 잘 처리를 할 테였다.


그가 신경쓰는 것 중 한 가지는, 눈에 거슬리는 작은 가시 따위를 빼내는 일이었다. 정말 그의 손 끝에 작은 가시가 박힌 것은 아니었고,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가 도구로 부리려 했던 작힘 백작을 몰락으로 이끌고 간 자들 중에 잘 알지 못하는 이름은, ‘제냐 킴’이라는 것이었다. 로멜리아 가와 함께 움직인 나머지 자들은 대강 그가 파악하고 있는 자들이었고 또 신분들이었다.


결국 산슈카 왕국의 어느 귀족이라거나, 어느 지역에서 이름을 떨친 베테랑 용병이라거나 말이다.


그러나 제냐 킴, 이라는 떠돌이 용병은 이렇다 할 흔적도 업적도 없음에도 돌연 나타나 로멜리아 가문의 일을 도와주었다.

그 도움이나 일이 어찌나 영향력이 컸던지, 종래에는 작힘 백작이 모략을 꾸며 몰래 가문의 일원들을 암살하고 보물을 강탈하려던 일이 실패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또 어떤 흐름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로멜리아 가가 도리어 작힘 가를 습격해서 운트 작힘을 파국으로까지 몰고 갔다.


세르게이 알사드 공작은 자신의 계산 바깥에 있는 무엇인가를 지독하게 싫어했다. 그가 전능자도, 전지자도 아님은 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상황과 미래를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은 알사드 공작도 정신병자의 헛소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적어도 계획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는 걸 싫어한다. 그가 주관하고, 계산하고, 하나하나 심혈을 기울여서 구성물을 봐왔던 그런 일의 진행에 있어서 말이다.


제냐는 완벽한 방해물이자 이레귤러였고, 돌연변이같은 존재였다. 지방의 한미한 가문, 이제는 이름만 남았고 그마저도 희미해져 갈 지경인 로멜리아 가문에 그런 조력자가 딱 타이밍 좋게 찾아온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산슈카 왕국 국내에서도 정통파 중 골수가 아니라면 로멜리아 가문에게서 어떤 가치를 찾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국외인이라면 그 존재조차 제대로 알지 못할 것이고.

더군다나 로멜리아 가문과 작힘 가 사이의 일을 해결할 정도의 능력이 있는 자라면 굳이 약소한 가문의 일을 살펴 줄 이유가 없었고.


제냐는 그의 계획을 헝클어뜨렸다. 알사드 공작으로서는, 산슈카 국내를 넘어서 중부 대륙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으로서는 아주 작은 존재에 불과했지만 그는 제냐가 거슬렸다.


그래서 암살자를 보내고, 그 기사단 중 몇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알사드 령에는 세 개의 기사단이 있었다. 하나가 왕립 기사단과도 견줄만한 위용과 명성을 자랑하는 ‘푸른 늑대단’. 다른 하나가 공작의 명에 따라 각지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는 ‘붉은 늑대단’. 마지막으로 있는 것이 전력적으로는 가장 떨어진다는 평가의 ‘검은 늑대단’이었다. 알사드 가문의 문양은 늑대였다. 웅크린 사자가 로멜리아 가문의 그림이라면 알사드의 것은 아가리를 벌린 늑대가 사납게 짖는 모습을 옆에서 그린 것이다.


‘번견’을 상징하는 뜻이었고, 산슈카 왕국의 적대자에게 가장 매섭게 달려들겠다는 의미를 품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과연 그들이 산슈카 왕국을 위해서 뛰는지는 알 수 없으나.


기사단의 전력과 수준은 순서대로 푸른, 붉은, 검은으로 나뉜다. 푸른 늑대단의 전력을 최상이라 치고 붉은 늑대단이 중간, 검은 늑대단이 말석이었다.

그러나 그건 세간의 평가였고, 검은 늑대단 역시 붉은 늑대단에 뒤지지 않는 준수한 전력임이 사실이었다. 단지 그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임무가 아닌 것들을 수행하고 다니며 또 모습을 감추는 일이 잦기에 기사단원의 수도 수준도 과소 평가되어 알려진 것 뿐이었다.


푸른 늑대단은 영지 인근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할하고, 붉은 늑대단은 산슈카 각지나 분쟁 지역 따위를 돌아다니며 공작가의 명을 수행하고, 대공의 의지를 관철한다. 검은 늑대단은 가장 활동도 적고 수도 적었지만, 모습을 감춘 채 알사드의 의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이번에 알사드가 보낸 것 역시 검은 늑대단의 몇 명이었다. 알렌, 숀, 페이트. 세 명의 사내가 사르삿 인근에서 은밀하게 움직여 기회를 볼 것이었다.

상대가 깨나 힘 좀 쓰는 용병 나부랭이라고는 하지만, 명색이 정식 기사단의 일원인 세 명이 틈을 보아 노린다면 결국 목을 내놓아야 하는 수 밖에 없으리라.


그 외에도 알사드 공작의 명에 의해 그의 부관이 수를 쓴 것이 암살자였는데, 즉각적으로 일을 처리하기로 유명한 암살자를 시켰음에도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것이 조금 신경을 거스르기는 했다.


암살자의 이름은 아르망디 베샤민이었고, NPC인 공작 일행은 모르겠으나 플레이어로서 암살자의 길을 걷고 있는 여자였다.


나름대로 실력이 있고 화려한 커리어를 가진 여자라 거금을 주었지만, 계속해서 소식이 없고 혹은 변변찮은 이야기를 갖고 돌아온다면 즉결 처분할 생각마저 있는 공작파였다.


검은 늑대 기사단과 붉은 늑대 기사단은 수준이나 수로 보나 크게 차이가 없는 비등한 전력이었고, 푸른 늑대 기사단은 공작의 눈으로 보더라도 단연 앞서는 면이 있는 발군의 기사단이었다. 공작가와 공작령을 지키는 가장 예리한 검이라고 할 수 있다.


산슈카 왕국 제일의 기사가 누구냐, 는 질문에는 항상 왕립 기사단의 기사단장과 푸른 늑대 기사단장이 들어가곤 했다. 그들 둘만의 경쟁은 아니었지만, 항상 손꼽히는 셋이나 다섯 안에 이름이 들어간다.


알사드 공작은 테이블에 앉아 눈 앞에 선 멀끔한 인상의 중년인에게 이야기했다.


“아무튼. 확실하게 처리하기만 하게. 경과가 있으면 보고하고. 부족한 게 있다면 자네 선에서 알아서 추가로 사용하는 일이 있더래도 확실하게만 해.”


알사드 공작은 일과 관련된 일에선 거의 입을 열지 않는 편이었다. 그게 알사드를 바라보는 주변인들의 평가였고, 그건 프린스 알사드와 관계가 없고 멀리에 있는 인물일수록 공통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세르게이 알사드 공작과 근처에서 일을 하는 자들은, 알사드가 남모를 꿍꿍이를 가졌으며 또 그와 관련된 일을 할 때는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결정을 내리고 일하는 인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알사드의 앞에 선 공작가의 어느 문관은 주인의 생각에 대해 다 알지는 못했지만, 어느 방랑 용병 하나를 처리하는 일이 그런 알사드의 내밀한 계획과 관련된 일이겠거니, 알아서 짐작을 했다.

그리고 그런 일이라면, 공작가의 금고에서 활동비, 운영비 조로 다소 빼내어 쓴다거나 검은 늑대 기사단의 인물들 몇을 더 움직여도 문제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금발의 부관은 그저 곱게 고개를 숙이며, 허리까지 접은 그 모습에 알사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똑, 하고 손가락 마디를 접어 단단한 원목 테이블을 두드린다. 그 소리는 할 말이 끝났다는 이야기였고, 주인의 신호에 부관은 조용히 방을 나섰다.


*


흑사黑蛇는 슬슬 회전을 멈추었다.


자신의 몸뚱이가 상당히 많이 상한 것을 느꼈기에 그럴 지도 모른다. 으르렁대는 신음을 내면서 짐승은 주변을 살핀다. 뱀의 감지기관이 작동한다. 고요한 숲 속이다. 뱀이 멈추자 그 굉음이 멎으면서 숲 역시 고요함을 맞았다.


여전히 동물들이나 바람의 움직임 따위가 소리를 냈지만 이전까지의 소리에 비하자면 침묵이나 마찬가지였다.


“크르르르르······.”


뱀이 운다.


주변은 뱀의 회전으로 거의 평야처럼 바뀌어버렸다. 물론 부서진 나무 잔해의 더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야 했지만, 뱀이 몸을 휘돌던 곳 근처에 서있을 수 있는 나무는 한 그루도 없었다.


휘익.


바람을 가르는 파공성이 그 때 들렸다. 촤악! 하고 단단한 철시의 촉이 흑사의 비늘 사이를 노려 파고들었다. 움찔, 하고 흑사는 그 방향을 관찰한다. 재빠르게 날아온 철시는 뱀의 예민한 감각으로도 보기가 어려웠다. 뭔가가 날아든다 싶을 때, 이미 자신의 몸에 꽂혀 있는 것이다.


작은 가시마냥 그리 크지 않은 크기였지만 제법 힘이 좋은지 흑사의 비늘이 무용지물이었다. 흑사는 오랜 시간(데이터로 학습된 역사로)자신의 살갗을 그토록 쉽게 부수는 것을 많이 만나보지 못했다.

어둠숲에는 주의할만한 맹수들의 어금니와 발톱이 몇 종류 있었지만, 근래에 본 기억은 없다. 한동안 흑사의 삶과 일상이란 그저 밤이 찾아온 어둠숲의 어귀를 거닐면서 짐승들을 그 둥지 째 씹어 삼키고, 몬스터들을 통째로 잡아 먹으며 배를 불리곤 다시 돌아와 자는 것이 전부였다.


뱀에게 있어 나름대로의 평화란 그런 것이었다. 오래 전 흑사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거대한 다른 짐승들마냥 먹잇감은 거칠게 반항하고 또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흑사는 뒤로 몸을 웅크렸다. 몸이 구부러지며 수축을 한다. 마치 용수철처럼 말려 들어가고, 또 휘는 것이다. 냄새. 이 숲에서 이질적인 냄새라고 한다면 바로 인간의 그것과 갑옷, 철의 그것이었다.


제냐는 판금 갑옷 따위를 입지 않았지만 그가 걸치고 있는 대개의 물건은 흑사의 감각에 충분히 이질적인 것이다.

자연물과는 조금 다른 인공적인 냄새. 거기에 철시가 쏘아진 방향 따위를 가늠하던 흑사는 눈을 크게 뜨며 주변의 정보를 받아 들이곤,


철시가 날아들며 발산하는 기력을 느꼈다.


뱀이 기력을 탐지하기 시작했다. 제냐의 위치가 보다 자세하게 잡혔다. 뱀은 뒤로 말아 넣은 몸을 한 번에 쏘아내듯이, 그 대가리를 세워 허공을 길게 날았다.


*


투확!


하는 의성어로 표현을 했지만, 두 글자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소리의 크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제냐는 갑자기 뱀이 공터에서 이상한 자세를 취하던 것을 보았다. 어딘지 불길한 예감이 느껴졌고, 그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갑자기 뱀이 날았다. 수십, 수백 미터 이상을 갑자기 날아드는 뱀의 탄력적인 움직임이다.


제냐는 그대로 활대를 쥐어 어깨에 걸곤 나무에서 도망치듯 빠져 나가야 했다. 마땅한 탈출로가 없었다.


저 멀리에서 고속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뱀의 위용은 트럭 그 이상의 것이다. 전투기, 라고 표현하는 게 옳을 것이다. 어떤 트럭차도 허공을 날아서 저런 속도로 다가오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콰득, 하는 소리가 뱀이 나무에 머리를 갖다 박기 전에 먼저 났다. 제냐가 강하게 나뭇가지를 박차고 날아 오르느라 부서지는 소리다.


제냐는 일단 허공으로, 대각선 윗 방향으로 멀리 뛰었다. 뒤로 도망쳐서는 저 빠르기로 날아오는 뱀의 대가리가 그대로 그를 처박을 것이다.

좌, 우 또한 뱀의 크기와 기세로 보건데 까딱하면 걸릴 확률이 있었다. 제냐는 아예 앞으로 뛰어 뱀의 뒤를 노린다. 그대로 쭉 뻗어 온 뱀이다. 그 중간 몸통 부근이 그의 높이 뜬 시선 아래로 보였다. 손에는 철검 하나, 그리고 어깨에 멘 장궁 뿐이다. 제냐는 허공에서 인벤토리를 열어 장궁을 수납했다.


1, 2초 정도 여유가 있다면 충분했다. 하늘로 솟구쳐 오르듯 뛴 그는 허공에서 그만한 시간이 있었다.


전통과 장궁을 대강 인벤토리에 넣어버린 제냐는 검 한 자루만을 들었다. 거대한 뱀과 싸우면서 손에 든 것이 고작 철검 한 자루 뿐이라.

낭만적인 상황이었지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진지하게 여기서 까딱하면 게임 오버가 되는 결말조차 머릿속에 그려진다.


제냐는 역수로 쥐어 철검을 아래로 향했다. 검극은 뱀의 몸통을 노린다. 양 손이 그립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검날에 빛이 흐른다. 제냐의 몸으로부터 뻗어나온 MP의 효용이었고, 곧 기력의 칼날이 강렬한 빛을 계속 더한다.


비스트 슬레이어와 발톱 대거가 손에 없는 점이 아쉽다. 대형 더플백 두 개 분량인 인벤토리에는, 갖가지 예비용 무구들과 물약들, 사용품들로만 가득 채워왔다.

금전은 비상용으로 갖고 다니는 얼마간이 들어 있을 뿐이었고, 보유한 재산이 많아지면 플레이어들은 보통 은행을 사용한다.


각 국가의 신뢰를 바탕으로 운영되는 국립 은행들이 있었고, 지역 별로 남부 대륙 은행, 중부 대륙 은행처럼 거대한 국가 연합 모두에서 통용되는 은행이 있었다.


제냐는 사르삿에서 중부 대륙 은행의 산슈카 지점을 통해 계좌를 만들고 저금으로 돈을 몽땅 넣어 둔 상태였다.


또한 은행에는 예금 기능만이 아니라 물건 보관이 가능한 시설도 존재했는데, 당장의 퀘스트에 필요 없는 물건들을 그런 보관소를 이용해 맡겨둘 수 있었다. 물론 용량에 따라 일정량 금액을 지불하지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예금액이 높아지면 은행에서 붙여주는 이자만으로도 지불할 수 있는 정도다.


고로 지금 제냐의 인벤토리에는 흑사 사냥을 위한 실용적인 물건들만이 가득 차 있었다. 철검이 부서지더라도 남은 무기들은 충분히 많다. 물론 그 이전에 비스트 슬레이어가 박혀있는 구석을 찾아 주무기를 다시 얻을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은 경우이리라.


“으랏.”


제냐는 떨어지는 중력과 공기의 기압을 맞으면서 기합을 내질렀다. 이를 악물고 꽉 쥔 철검의 그립을 놓치지 않는다. 그가 떨어지는 곳은 뱀의 몸통 위다. 공중에서 자세의 변화와 기력 방출로 떨어지는 방향의 이동 정도는 가능했다.

정확한 낙하지를 찾아 그가 다가간다. 뱀은 저 멀리서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면서 아직까지 멀쩡히 서 있었던 나무들의 군락지를 다시 초토화시킨다. 요동치는 뱀의 등줄기이지만, 처음 수축했다가 날아들 그 때보다는 훨씬 움직임이 덜했다.


콰학!


하고 철검의 검극이 뱀의 비늘을 갈랐다. 그대로 뿌리까지 박아 넣는다. 그리고 오래 끌지 않고, 그대로 기력술을 발휘해 검의 예리함을 끌어올린다. 곧바로 옆으로 길게 베며 뽑았다. 한 자리에 계속 연격을 퍼붓는다. 검술은 유려하고 흘러가듯한 느낌을 제냐에게 선사한다.


연격이란 곧 밸런스를 유지하고, 끊어지지 않게 관성을 이용하며 공격을 계속 퍼붓는 일이다. 뱀의 위에서 때 아닌 춤이라도 추듯이, 제냐는 검 한 자루를 가지고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어가며 한 군데를 계속 파냈다. 트럭만한 몸통이다. 거기다가 아주 질기고 강력하며, 거죽과 살이 날아가더라도 일정 깊이 이상 더 들어가기가 힘들다.


치이이익, 하고 어디에선가 타들어가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제냐의 귀에 들리기에는 너무 멀고 작은 소리였지만, 그런 미세한 소리와 함께 처음에 입었던 상처의 자국들 근처엔 연기가 나며 아무는 듯한 모습도 있다.


뱀의 스킬 ‘초회복’이다. 일반적으로 초회복이라는 게, 근성장과 관련된 용어였지만 이 뱀에게는 ‘재생’에 가까운 단어로 쓰이고 있었다.


뱀은 자체적으로 HP포션, 붉은 물약을 먹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보이는 셈이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 내에서 HP포션은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멎게 해주는 역할이지, HP를 원래대로 회복시켜주는 역할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결국 계속해서 타격을 입힐 수만 있다면 흑사는 쓰러지겠지만, 조금 더 쓰러뜨리기 어려운 까다로운 존재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유저들이 흔히 ‘피통’이라는 이름으로 HP를 부르고는 하는데, 제냐와 흑사의 HP는 고작 몇 배 정도의 차이에 불과했지만 그 전체 면적은 어마어마한 차이가 난다. 육체의 크기와 그에 동반되는 내구도는 곧 방어력이 되고, 똑같은 피해를 받더라도 전체 면적에 치명상을 입으면 잔여 HP와 상관 없이 곧바로 리타이어 될 수 밖에 없는 제냐에 비해 흑사는 그 전체 면적에 치명상을 입히기가 극히 어려웠다.


제냐는 단단한 돌을 못과 망치로 깎아내듯이, 흑사의 몸통 한 부위를 갉아대고 있었다. 그것이 캉, 캉 거리면서 소리를 낼 때마다 흑사 역시 통증이 있던 모양이다. 장렬하게 전방의 숲을 쑥대밭으로 만든 흑사가 다시 대가리를 휘어 뒤로 돌아왔다. 제냐는 “이런 씹.”


하고 다시 위로 뛰었다. 뱀이 요동치며 움직인다고 느끼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뱀은 그 턱 아래로 자신의 몸을 쓸어버리듯이 부비며 몸통 위를 청소했다.


콰학! 하고 장렬한 소리와 함께 제 몸을 마찰시키는 흑사다. 제냐는 허공으로 뛰었다가 다시 그대로 뱀의 대가리쪽 등허리에 안착했다. 철검은 여전히 쥐고 있었다. 앉는 동시에 콱, 하고 철검으로 찍어 손잡이처럼 고정시킨 뒤 자세를 안정화시킨다.


1, 2초 정도였다. 그러자마자 다시 기력의 칼날을 북돋아 뱀의 살점을 베어내면서 뺀다. 다시 긴 마라톤이었다. 몇 번의 연격으로 뱀의 몸통 위에 상처를 냈다. 제냐는 이번에는 요동치는 몸통 위에서 균형을 잡아야 했다. 대가리에 가까울수록 더 다이나믹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수직 보행의 묘리로 발바닥에 접착력을 만들어 순간순간 버텨야 했다. 그렇게 균형을 잡으면서 앞쪽으로 튀어나간다. 앞쪽이라 함은, 뱀의 대가리가 있는 방향이었다. 트럭만한 굵기. 거대한 대가리는 쩍 벌리면 어지간한 자동차라도 한 입에 삼킬 수 있을만큼 벌어진다. 트럭도 들어가지 않을까. 트럭보다 큰 것조차, 한껏 벌린 아가리 속 이빨들이 씹어 부수면서 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냐는 뱀의 머리 쪽으로 가서 그 이마에 철검을 내려쳤다.


쾅! 하는 소리가 들리도록 묵직하게 내려 쳤으나 이마 부근의 비늘이 조금 까진 것 말고는 큰 피해가 없었다. 아마 대가리 쪽이 특별하게 단단하고 강한 모양이었다. 거기에 잔여 HP와 상관 없이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뇌 따위가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제냐는 조금 뒤로 물러났다.


앞 뒤로 움직이는 그 걸음들은, 모두 초고속으로 지면을 달리고 솟구치거나 하는 뱀의 대가리 위에서 하는 것이었다. 잠깐 정신을 놓치면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떨어질만하다.


발바닥에 기력을 소모하며 접착력을 만들어서, 90도 이상 넘어가는 지경에 버텨야 했다. 그대로 뱀이 몸을 뒤집어 제냐를 깔아뭉게려 하지는 않았다. 아직은 말이다. 제냐는 다시금 칼날에 검기를 모으고 썬더 인챈트를 시전했다. 튀는 번갯불이 한낮의 대기에서도 유달리 밝게 빛난다.


철검의 칼날이 덜덜덜 떨린다. 무기의 내구성이 떨어져도 할 말이 없었다. 기력술과 인챈트 스킬의 합체는 아무래도 급수가 높은 무기의 전용 스킬이었다. 비스트 슬레이어가 간절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제냐는 쿵! 하고 지면에 제 턱을 박으며 떨어져 내린 뱀의 대가리 위에서 한 차례 얕게 뛰었다가 다시 밟고, 그 이마 부근을 향해 날았다. 몇 미터 즈음 되는 거리를 한 번에 도약해 뱀의 미간에 닿았다. 그가 노리는 건 이마 쪽이 아니었다. 더 무른 부분이 필요하다.


제냐는 움직이는 뱀의 머리 앞 쪽으로 몇 걸음 걸었고, 그대로 미끄러지듯 몸을 옆으로 떨어뜨렸다. 뱀의 둥근 대가리, 그 콧잔등 근처에서 놀다가 발을 헛디딘듯 옆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이다.

물론 미끄러진 게 아니라 일부러 아래로 내려간 것이다. 눈깔을 찌르기 좋게 말이다.


수직 보행의 묘리는 손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우둘투둘한 뱀의 대가리에는 잡힐만한 것이 있었다. 콧잔등 근처에 있는 적당한 돌기(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를 잡으며 뱀의 대가리 앞에 매달렸고, 곧바로 뱀의 크게 뜨고 있는 눈깔의 앞이었다. 제냐의 상반신과 비교해야 할만한 크기의 눈깔이었다.


누런 홍채와 검은 동공. 뱀은 눈을 크게 떴고, 눈꺼풀을 채 감지 못했다. 그건 흑사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실수였다. 제냐는 뱀의 눈을 향해서 철검을 찔러 넣었다.

samuel-scrimshaw-iq8x4Ik8mi8-unsplash.jpg


작가의말

다음 편에서 뱀은 일단 처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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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76. 암살자 23.09.02 36 3 42쪽
76 75. 어둠숲 23.09.02 31 3 31쪽
75 74. 헤어짐 23.09.01 31 3 32쪽
74 73. 프린스 알사드Prince Alsard. +1 23.08.31 37 4 55쪽
73 72. 퀘스트의 끝, 즈음 23.08.29 31 3 36쪽
72 71. 술래잡기의 끝 +1 23.08.27 32 2 41쪽
71 70. 술래잡기 23.08.25 28 2 23쪽
70 69. "…단장!" 23.08.25 25 2 21쪽
69 68. "작작해야지 새끼야…." 23.08.25 25 2 17쪽
68 67. 합류 23.08.25 24 2 18쪽
67 66. 황무지의 동굴 23.08.25 23 2 21쪽
66 65. U씨의 경우 23.08.21 27 2 20쪽
65 64. 생각보다 23.08.21 24 2 27쪽
64 63. 두 발째 23.08.18 27 2 36쪽
63 62. 전투, 전쟁 23.08.18 26 2 19쪽
62 61. 일점돌격 23.08.17 25 2 29쪽
61 60. 돌입 23.08.16 25 2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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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57. 사연 23.08.13 32 3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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