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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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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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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3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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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7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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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쪽

71. 술래잡기의 끝

DUMMY

*


그리턴 가의 지원군들이 있었다.


그들은, 세슈칸 시에서 로멜리아 일행이 일을 벌이기 전 신호를 보내 사건이 일어났구나 하고 알아챈 참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간의 준비 기간이 있었고, 또 다시 작힘 성을 침투한 뒤에 꼬박 하루가 지났으니 충분한 시간이었다.


갈색 사슴 기사단의 부단장, 옌이 갖고 있는 지원 연락용 아티팩트가 제 기능을 다했고, 데슈칸 산맥의 로키 산에선 연락을 받았다.


곧장 로키 캐슬에서 갈색 사슴 기사단의 전대가 출발했다.

한 번 돕기로 했다면, 그리턴 가는 의리에 충실하다. 갈색 사슴은 배신을 모른다, 라는 말은 아주 오래도록 산슈카 왕국에서 떠도는 격언 중 하나였다.

지금은 케케묵은 말이 되어서 노인들 중에서도 그 말을 아는 자가 별로 없다.


사대고가라던가, 산슈카 왕국의 말도 안되게 오랜 역사라던가, 그런 것들에 심취하거나 관련 있는 사람들만이 이따금씩 기억하고는 한다.


개중에서 그리턴 가의 자작은 그런 말이나 정신을 기억하는 자였고, 아주 좋아하는 양반이었다.


“전단 출격!”


하이샨 그리턴이 지원 요청 용의 알람 기기로 신호를 받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호쾌하게 외친 말이었다.


로키 캐슬은 그리턴 가의 본거지였고, 그들의 본성이자 본영에 병사가 없다는 건 가문으로서 상당한 부담이었다.

성에는 수성을 하는 병사들이 있어야 했으니까. 또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는 영지, 그리턴 시티와 로키 캐슬 근처에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법이었으니 말이다.


몬스터들이 들끓을 수도 있었고, 당장 운트 작힘 백작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의 공격이 있을 법도 했다.

아직 시대는 야만스러웠다. 산슈카 국내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벽이 있을 때 정치던 무엇이던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법이었으니.


물론 그리턴 가의 레인저들이나 그 외에도 다른 정병들이 많이 있었지만, 특수 전력이자 본격적인 초인이랄 수 있는 기사단 전원이 움직이는 건 또 다른 의미이다.

당장 로키 캐슬에 남은 초인 병력은 소수의 워메이지들 밖에 남지 않게 되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턴 자작은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으며 곧 알렉세이 루드 단장이 이끄는 나머지 모든 기사단원들이 성을 벗어났다.


“가자!”


거친 음성을 토해내면서, 이른 시간 그들이 준마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세슈칸까지 갈 길이 멀었고 또 시간이 촉박했다.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일찍 도착할수록 좋은 일일 테다.


부서지는 햇살 속에서 이른 공기를 맞으며 기사단원들은 로키 캐슬의 거대한 정문을 벗어났고, 그대로 로키 산의 산책로를 따라 질주한다.


그게 며칠 전의 일이었고,


지금 그들의 위치는 세슈칸 시에 도착하기 조금 전, 서쪽 황무지 어느 인근이었다.


미리 빠져 있던 다른 자들과 함께였다. 갈색 사슴 기사단의 다른 단원들이나 워메이지, 칼젝 벤더스나 기사단의 부단장 옌 마퉁, 질리언과 페이브, 그리고 로멜리아 가의 두 아가씨들 말이다.


은신처에 남아 있던 이들은 계획대로 바위 동굴의 상부인 바위산의 꼭대기에서 달려오는 지원 병력을 찾았다.

다행히 큰 어려움 없이 다가오고 있는 기사단의 흔적을 넓은 황무지, 광야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은신처에 숨어 있던 자들 쪽에서 먼저 아는 체를 했고, 그렇게 무사히 합류한 이들은 다시 자리를 옮겼다.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그리턴 가에서 온 탓이다. 옌 마퉁은 갈색 사슴 기사단의 전원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을 보고 살짝 당황하기도 했다. 로키 캐슬의 수비는 그들 기사단의 가장 주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비록 당장 전쟁 중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영지의 방비는 언제나 지켜야 할 것이었다.


그런 평시의 모습을 다 버리고 지원 병력으로 달려온 알렉세이 루드를 비롯한 동료들의 출정은 반가움과 당혹스러움, 뭐 여러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일이었다.


어쨌든 45명의 기사단 전원이 다 모이게 되었다. 켄 마누엠은 엄밀히 따지면 기사단의 단원은 아니었고, 가문에 속한 자유 기사나 비슷한 신분이었다. 그가 그리턴 가를 떠나는 모습은 잘 상상이 되진 않지만, 그는 소속이 조금 달랐다. 로키 캐슬의 검술 총사범이자 고문으로서 물론 그 실력은 대단하다.


단장과 부단장을 비롯해 그리턴 가의 총력 중 상당 부분이라 할 수 있는 기사단이 전부 모이자, 그들은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때를 잘 만난다면 전면전을 벌이고 이득을 취할 수도 있을 수준의 몸집이 된 셈이다. 그들만으로 그레이 하운드 기사단을 상대해야 한다면 수비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맞았지만, 지금은 이레귤러라 할 수 있는 다른 조력자들이 여럿 있었다.


릿샤, 호아킨, 제냐, 개멋진나 최 등은 분명 전투에서 상당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는 고급 전력들이었다.


은신처에 숨어 있던 자들은 곧바로 다른 위치로의 출정을 준비해 내달렸고, 그렇게 모든 일행이 한 자리에 모였다.


길고 긴 터널, 세슈칸 시 심처로까지 이어져 있는 지하 통로의 출구는 황무지 한복판에 나 있었다.


그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별다른 오브젝트조차 없었다. 그저 근처 지도 상에 표시되는 좌표 계수로만 정확한 지점을 찾을 수 있었다. 작힘 가의 비밀통로는 여러모로 은밀한 모습으로 숨겨져 있는 것이다.


모래 바람이 거칠게 불곤 하는 황야의 한 가운데. 붉은 모래로 덮여 있는 돌바닥의 한 지점은 지나가다 보면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평범한 땅이다.


그러나 미리 비밀스런 건축물의 지식을 갖고 접근하는 이가 본다면 다르다. 미세하게 불룩하니 튀어나와 있는 돌바닥은 아무런 문제 없는 황야의 요철로 보인다. 정확한 지점에 사람 몇 명 정도는 넉넉하게 서고도 남을만한 바위가 아주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바위는 MP를 다룰 수 있는 능력자가 다가가 정확한 방법에 의해 조작하면 틈새가 생겨나고, 기계식의 문이 작동하며 내부로 통하는 통로가 드러나는 곳이었다.

작힘 가의 가주가 대대로 가지게 되는 여러 상징물이나 아티팩트 등이 있었는데, 그런 인장과 같은 물건을 지녔다면 MP를 따로 운용하지 않아도 곧바로 열리게끔 되어 있었다. 운트 작힘 역시 매 순간 몸에서 떼어놓지 않고 지니고 다니는 아이템이었고, 덕분에 제냐 등이 들어갈 때는 별다른 절차 없이 손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나올 때도 마찬가지이리라.


정확히 들어가는 방법을 칼젝 벤더스가 미리 들었지만, 일부러 문을 조작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들은 때를 기다리며 자리를 잡고 있을 뿐이었다.


모래 먼지가 부는 황야. 저녁 무렵이었다. 어느새 저물어가는 해는 더 이상 대지에 빛을 비추지 않는다. 싸늘한 추위가 메마른 땅을 잠식해가고, 거친 바람이 분다. 하늘 위에 떠 있는 구름들이 땅에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며, 슬슬 모습을 드러내는 달을 가렸다가 말았다가 한다.


사내들은, 개중에 몇 명인가 아가씨나 여성이 있기는 했지만 대다수의 남정네들은 말 없이 입을 닫은 채 문이 열리기를 바라보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 긴 기다림은 아니었다. 그 처연한, 깊은 침묵에 하늘이 감동이라도 했는지, 운이 좋았는지 타이밍이 잘 맞았던 모양이다.


로키 캐슬에서 출발한 지원군이 여러 여정을 다 끝마치고, 모든 일행이 합류한 뒤 출입구에 서 있기 시작한 이후 금세 반응이 있었다.


지잉,


하는 어딘지 기계적인 효과음은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이 세계관에 잘 맞지 않는 듯도 하다. 그러나 곰곰이 들어보면 어딘지 삐걱거리는 기계적인 소리라기보단 아날로그에 가까운 것이었다. 누군가 바이올린의 현을 켠 소릴 증폭시키기라도 한듯 일정한 음의 소리가 났다.


그건 아티팩트에 의한 것이었고, 여기저기 이 세계에 흔적이 발린 듯 묻어 있는 아티팩트 공학의 소음이었다.

비밀문은 아마 저 통로 문 너머 작힘 백작이 근처에 올 때 열리게 될 것이다. 백작은 차려입은 옷 내부에 여러가지 비밀스런 물건들을 지니고 있었고, 개중 하나가 출입구와 호응하는 상징물이었다.


해가 저물어가고 달이 떠오르는 어둑한 황야. 저녁이 지나가고 있는 시점에 바닥에 있는 불룩한 바위에 네모난 정사각형 도형이 떠올랐다. 빛으로 만들어진 도형이 바위 내부에 만들어져 빛났다. 형광 물질로 그림을 그린 것 같은 모습이다.


근처에 도열해 있는 전투 인원들이 모두 들을 수 있을만치 분명한 소리가 났고 또 이어서 빛이 밝아온다. 누가 보아도 ‘문’이 열리는 장면을 떠올릴법한 연출이었고, 곧 문이 열렸다.


바닥에 있는 평범한 자연물로 보였던 바위가 아래로 움푹, 들어갔다. 매끄러운 절단면이 서로 마찰하며 긁히는 소리가 나는 듯하다. 몇 가지 작동음과 함께 바닥이 움직인다. 아래로 들어간 바위는 정확히 그 높이에 옆으로 사라질만한 공간이 있었던 듯, 땅 속 어딘가로 밀려 들어갔다.


바위가 사라지고 어둔 구멍이 나타났다. 내부에서 바라보면 갑자기 하늘 위로 출구가 생긴 듯한 형상일 것이다.


지하의 입구에서, 사람들이 급하게 뛰쳐 나왔다.


아니 정확히 말해 가장 첫번째로 모습을 드러낸 건 거대한 늑대의 형상이었다.


훅, 하고 물 속에서 날치라도 날아오르듯 거센 기세로 튀어나온 게 검고 시커먼, 거대한 짐승이다. 네 발 달린 것은 날개라도 있는 마냥 빠르게 허공 위로 솟았고 가뿐하게 황야의 바닥에 발바닥을 대며 중심을 잡았다.


“후욱.”


짐승의 아가리에서 숨소리가 끼쳐 나왔다. 기사단들은 갑작스러운 등장에 움찔, 했지만 그것이 곧 짐작했던 일행의 모습이었기에 그 이상 놀라지는 않았다. 곧 반가운 표정으로 칼젝 벤더스가 입을 열 정도였다. “호아킨 경······!”


그가 채 말을 다 끝마치기 전에 뒤이어 여러 명이 튀어나왔다. 열린 구멍은 직각으로 떨어지는 구조가 아니었고, 비스듬한 계단형의 내리막길이 있다. 낮은 위치에서 오르막길을 튀어 오르다 마지막에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점프를 뛰어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거대하고 검은 다이어 울프의 뒤이어, 제냐, 릿샤, 안드레, 줄리앙 그리고 여타 인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상대와 거리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좁은 통로 속 숨바꼭질을 막 마친 참이었고, 갑자기 모습을 나타낸 동료들에 약간 당황을 했다.

원래의 계획은 출입구에서 나온 이들이 은신처로 다시 자리를 옮기는 것이었다. 그 상황에서 적의 추격이 있다면 최대한 움직여서 따돌리거나 한다. 이 출입구에 곧바로 만나기로 한 일행이 있던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야에 칼젝 벤더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근처에 있는 이들의 수가 생각보다 더 많았다. 수십 명의 기사들이 장비를 갖춘 채, 말 위에 타고 칼을 차고 있었다. 모두가 칼을 쓰는 건 아니었지만, 일단은 검을 들고 있다. 주 병기는 아니더라도 당장 같은 형태의 제식으로 싸울 수 있었다. 그게 같이 싸우는 자들의 기본이었다.

같이 싸울 수 있느냐, 전략을 수행할 수 있느냐, 는 제대로 된 군대냐, 는 질문과 같은 말이었고.

갈색 사슴 기사단은 당연히 그 누구보다도 군인이다.


익숙한 면상들을 보고 켄 마누엠이 먼저 소리를 쳤다. 느긋한 톤으로 말소리를 얹는 그는 특유의 넉살스러움이 행동에 묻어난다.

여유로운 행세를 하지만 정작 전장에서는 누구보다도 빠르고 날카롭게 움직이는 검이었다.


“여, 못난 년놈들이 여기 다 모여 있었네!”


시끄럽게 소리를 내며 아는 체를 하자, 몇 명이 인상을 구겼다. 가장 친근한 감정의 표현이었다.

켄 마누엠의 지도를 받지 않은 기사가 없다. 그의 손을 거쳐가는 이들은 굳이 기사가 아니더라도, 일반병이나 레인저들 중에도 수두룩하다.


그러나 그런 반가운 해후를 할만한 상황은, 엄밀히 말해 아니었다. 제냐가 입술을 비틀며 외쳤다.


“뒤이어 쫓아오는 자들이 있을 겁니다! 아마 그레이 하운드의 기사단원들이겠죠. 몇 명이나 튀어나올 지 모릅니다!”

“핫하, 망할 놈들. 여기가 네 놈들의 무덤이 될 거다. 고작 어디 산골짜기의 기사단이 그레이 하운드를 상대할 수 있을까!”


운트 작힘이 제냐의 말에 뒤이어 이야기를 붙였다. 호아킨의 등에 꼴사납게 매달려 입만 살아있는 모양이었지만, 아쉽게도 그의 말이 틀린 부분은 없었다.

그레이 하운드의 전체 병력이 모였고, 또 작힘 가의 군사들이 이 통로를 이용해 지금 당장 나온다면 그들로서도 상당한 격전을 치러야만 했다. 운트 작힘도 사실은 만만한 사내가 아니었고, 그의 기사단은 비슷한 수준의 작위를 가진 자들 중에서 가장 이름 난 군사들이었다.


제냐는 인상을 찡그렸다. 적당히 타이밍을 맞춰서, 튀어 나오는 자들에게 스킬을 쏟아부어야 하나. 이곳까지 오느라 릿샤도 자신도 MP를 많이 사용했다. 그는 인벤토리를 열어 푸른 물약을 먼저 마셔야겠다고 느꼈다.

전투를 준비해야 한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퍽.


그러나 그런 상황과는 별개로, 잡혀 있는 운트 작힘의 모습이 볼썽 사나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로웰 드버는 참지 않았고, 자신의 앞에서 아가리를 나불대는 백작의 뒤통수를 다시 한 번 때렸다. 퍽, 소리가 나도록 치인 백작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조용히 했고 또 표정을 감췄다.

그럴수록 속에서 은근한 불길이 타오른다. 아마 독사가 죽기 전에 로웰 드버에게 복수를 하긴 할 것이었다. 그의 마지막이 당장 지금에 어떻게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툭, 툭.


알렉세이 루드는 그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꼴을 보며 현재 상황을 짐작했다.


비밀 통로.


세슈칸 시, 작힘 성 내부로 이어져 있는 비밀 통로를 사용해 아티팩트를 탈환하려 한다는 작전의 개요는 들었다. 그래서, 그가 물었다.


“줄리앙 경. 그래서, 로멜리아 가家의 보구는 되찾으셨소?”


알렉세이는 진중한 말투로 묻는다. 풍채가 좋고 얇은 금실같은 머리칼을 가진 사내였다. 이번에 그가 탄 것은 약간 붉은 기가 도는 흑마였다. 줄리앙은 그 사이에 있다가 알렉세이의 말에 고갤 끄덕거렸다. “그렇소.” 그리고 그가 제냐를 처다보았다. “아.”


제냐는 자신의 인벤토리 속에 무엇을 넣었던지, 떠올렸다. 그가 “IV.”라고 다시금 작게 중얼거렸다. 눈 앞에 반투명한 푸른 창이 떠올랐다. 인벤토리 내부에 들어 있는 여러가지 아이템 목록이 떠올랐다. 항상 인벤토리를 꽉 채우고 다니지는 않는다. 적당히, 자신의 장구류로 들고 다닐 수 있는 것들은 드는 편이 좋다.

언제 비상 시에 넣을만한 물건을 찾을 지 모르니까.


아래로 스크롤을 내려 주욱 볼 수 있는 리스트의 맨 위에, 최근에 급하게 넣은 아이템이 두 종 있었다.


‘로멜리아 가의 손방패’, ‘로멜리아 가의 펜던트’.


심플한 이름이었지만, 그 기능은 심플하지 않았다. 3급에 달하는 아이템을 보는 건 깨나 어려운 일이었다. 더욱이 지금 정도의 레벨로 말이다. 호아킨이 유용하게 사용하는 주 무기인 거대한 배틀 엑스Axe가 5급의 아이템이었다.

게다가 산슈카 내의 등급으로 ‘제국기 1급’에 달하는 아티팩트는 그 가치가 남다르다. 희귀도보다 더욱 강력한 위력이 아이템 내부에 깃들어 있으리라.


희귀도가 항상 능력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었고, 아이템 등급보다 더 쓸만하며 강력한 물건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세상에 한 개 밖에 존재할 수 없지만 쓸모없는 아이템도 있으며, 여러 개가 흩뿌려져 있지만 발견까지 여러 장애물이 있어 한정된 수만 드러난 아이템들도 있었다.


후자의 경우에는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이 조금 더 진행이 되고, 유저들의 수준이 높아지며 게임 내에 잠들어 있는 여러 아이템들이 다 발견되면 아마 실제적인 강함과 희귀도가 어느 정도 조정이 되리라.


그런 점에서 제국기 1급은, 아직까지 많이 등장하지 않은 아이템들 중에서도 상당히 유용하고 강대한 힘을 지닌 보물이었다.


‘소드 마스터Master'가 사용할 때 가장 빛을 발한다, 는 아이템 설명 내의 문구가 있는 방패와 펜던트이다. 한 손에 드는 것이 아니라 팔꿈치와 손등쪽으로 걸어 착용하는 것이기에 꼭 한 손 무기를 사용해야 한다거나, 이름과 달리 검이 아닌 다른 병종을 사용하더라도 상관은 없다.

그러나 마스터Master, 라는 칭호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기력술을 사용하는 물리계, 근접 클래스의 전투 직종 중에서 대표적인 주 스킬의 단계가 적어도 10급은 되어야 할 테였다. 숙달된 전문가Expert의 칭호를 갖고, 스킬의 수식어가 실제 발휘하는 능력보다 상당히 박한 평가라는 점을 따지면 굉장한 실력을 가진 전사여야 한다.


거기다 보통 콘란드 대륙, 곧 시나리오 온라인 내에서 ‘마스터’라고 불리는 레벨은 적어도 100은 훨씬 넘어야 했다. 100이상이 마스터라는 뜻은 아니었고, 그것이 최저치라는 말이다.


기력술을 비롯해 여러 가지 무기술, 무예술, 그 외 다종의 패시브 스킬들이 스택을 쌓고 완성된 전투적 기량을 뽐내는 인물에게 주어지는 칭호이다. 거기다 그 실력을 실제 전장에서 발휘 가능한, 심기체가 온전히 만들어진 자들을 전투 분야의 ‘마스터’라고 불렀다.


예전, 산슈카 제국기의 말엽 로멜리아 백작의 수준은 약 250정도였다. 지금의 플레이어들의 기준으로 환산한다면 말이다. 그런 자가 아티팩트의 위력을 활용해 그 이상의 전투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셈이다.


화수분처럼 사용자에게 쏟아지는 MP의 양은 지속적으로 푸른 물약을 마시는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위장의 용량에 따라 제한이 있고 전투 중에 일일이 마시는 모션을 취할 필요도 없이 말이다.

단번에 자신의 전체 MP이상의 힘을 쏟아낼 수는 없었고, 아티팩트가 제공하는 MP의 양도 시간당 단위량이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전투 중에 지치지 않는 활력을 얻는 것이나 거의 마찬가지인 일이었고, 이는 MP의 운용이 세밀해지며 기술이 늘어날수록 더욱 막강한 힘이 된다.


또한 손방패는 상대의 공격으로부터 사용자를 지키는 강력한 소형 보호막을 생성하는 아티팩트이다. 일부러 방패의 겉면으로 패링Parrying(복싱 등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쳐내는 것)을 할 필요 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자신의 검격에만 혼신을 실으면 된다.

더할 나위 없이 기분 좋게 날뛸 수 있는 환경을 착용자에게 주며, 그것이 개인 단위로 강력한 전투력을 뽐낼 수 있는 상위의 초인이라면 적군에게 있어서는 충분히 재앙과 비슷한 존재가 되리라.


마스터를 구분짓는 여러가지 조건들이 있었으나, 개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일을 뽑으라면 기력술의 수준이 경지에 달해 자신의 물리적 무기 바깥에 기력의 칼날을 세워내는 수준일 테다.

강력한 기는 유형화되기 마련이었고, 그건 제냐나 최태현이 기력술을 쓸 때도 충분히 발휘되는 모습들이다.

그러나 그 지점에서 나아가 아예 MP가 무기처럼 변하는 단계였고, 자신이 들고 있는 칼의 범위가 지속적으로 연장되는 상태를 말함이다.


기력의 칼날은 그 어떤 쇠붙이보다도 강력하고 날카로우며, 어떤 단단한 조직도 쉽게 허물어버린다. 고도로 밀집, 집약해서 형성된 기력술의 검날은 비슷한 경지의 MP술이 아니라면 막아내기가 힘들었다. 초상술사들은 보통 화끈한 범위 공격을 펼쳐서 상대가 아예 다가오지 못하게 만들거나, 혹은 여러 겹의 보호막을 형성해서 상대의 공격을 일시적으로 감당하기에 급급하게 된다. 그런 수준의 검사 앞에서는 말이다.


무술가의 수준과 개인차, 곧 스킬 트리나 개인의 감각 등 여러가지 조건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중급 기력술’이 9단계를 넘었을 때 시도 가능한 기예였다. 지금 최태현이나 제냐는 초기, 초급 기력술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거기서도 세분화해서 1부터 3단계 까지의 스킬 중 2단계 까지만을 익혔다.


중급 기력술의 9단계란 곧 중급 기력술3 스킬의 9단계 수준을 말함이다.


감각이 뛰어나며 양질의 경험을 한 플레이어는 이전 스킬의 경험치가 쌓이기 전에 다음 스킬을 익히기도 하고, 결국 더 진보한 스킬의 레벨에만 집중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스킬’이라는 건 다음 스텝의 기술을 배운다고 하더라도 이전에 익힌 것이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고, 그 효과는 어느 정도 중첩 발휘되기에 안정적으로 여러 개의 스킬을 고레벨로 맞춰두는 것이 결국 최대의 전투력을 가질 수 있는 비법이었다.


‘초급 기력술’에는 초급에 어울리는 달성 과제들이 경험치 획득의 행동 목록, 경험 목록으로 있었으며 다음 단계에는 또 다음 단계에 어울리는 행동들이 있었다.


같은 휘둘러 베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깊이 있는 묘리를 나타내느냐에 따라 수준이 갈렸고, 높은 경지의 검격을 발휘한다면 상위 스킬이 경험치를 획득하게 된다.

제대로 된 스킬의 레벨 업Lever-up 없이 고위 스킬에만 집중하다 보면, 나중엔 결국 기초 스킬의 경험치를 얻는 게 도리어 더 힘들어지는 우스꽝스러운 경우가 나오기도 한다.


자신이 익히고 있는 기예, 기술의 총체와 맥락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자만이 그 단계 별의 경험치를 정확히 또 가장 많이 획득할 수 있었다.


검을 들어 내려치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팔의 힘만을 사용하는 게 더 초급이라던가, 몸 각 부위의 협응성을 길러 낼 수 있는 완벽한 힘으로 검격을 선보이는 게 더 고급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갈렸다.


“잘 갖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사용하는 게 옳을까요?”


제냐가 아이템의 상세 설명 따위를 살피면서 주변에게 말했다. 줄리앙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꺼낸 알렉세이 루드를 처다본다. 이 자리에서 가장 경지가 높은 근접 전투 클래스라고 한다면 아마 기사단장의 위를 가진 그일 것이리라.


호아킨이나 릿샤도 훌륭하지만, 순수하게 스킬 구성이나 아이템, 칭호, 빌딩된 캐릭터의 상태를 살폈을 때 해당하는 아이템을 가장 잘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마도 ‘검사’ 하나에만 집중한 캐릭터이리라.


호아킨, 릿샤, 제냐, 최태현 등 훌륭한 자질을 가진 용병이며 전투가들이었지만 모두 다종의 스킬 트리Tree를 한 번에 진행시키며 익혀낸 멀티 클래스들이었다. 전투력이나 기량을 100이라고 친다면 순수한 근접 전투술은 일부를 차지하며 전체가 아니리라.


손방패와 펜던트는 보호막과 함께 ‘기력술 사용자’에게 MP를 부과했다. 마르지 않는 공격력과 방어력을 동시에 주고 있으니 당연히 그 에너지 전체를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선 MP전체가 적진에 투입되어야 한다. 근접전의 마스터가 해당하는 아이템을 썼을 때 가장 강력한 파괴력을 낼 수 있는 이유이다.


알렉세이 루드가 말했다.


“아마도. 사용하는 게 좋겠소. 저 아래서 무엇이 튀어나올 지 모르니. 이곳에 모인 수도 만만찮고, 또 그대들이 대단한 실력을 가진 조력자라는 데 동의하지만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게 좋겠지.”

“당연한 말입니다.”


제냐가 고갤 끄덕거렸다. 줄리앙은 헤슈나를 바라보았다. 로멜리아 가의 아티팩트는 정확히 말하면 그 후계자인 헤슈나 로멜리아의 것이다. 물건을 사용하기 위해 사용자의 의사를 살피는 것은 당연스런 일이었다.

헤슈나는 뭐가 문제냐는 듯, 해맑은 눈동자로 노신을 바라보았다. 줄리앙은 살풋 웃었고,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제냐가 자신의 시야 앞 쪽에 형성된 아이템 인벤토리 창에서 손가락을 긁어 아이템을 빼냈다. 두 종의 물건이 튀어나왔다.

펜던트와 손방패.


두 가지 모두 지독하게 아름답게 세공된 물품이었다. 기능을 위한 구조를 짰다면 나머지는 예술적 양식으로 채워져 있었다. 제국기에 만들어진 고도의 아티팩트는 아직까지 아티피서들, 공학자들, 초상역학자들이 모두 파헤치지 못한 비밀을 담고 있었다.

‘왜, 어째서’ 그런 구조를 갖게 되었는지 모르는 부분들이 있다는 말이었다. 소재도 그것을 가공한 기술력도 훌륭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뛰어남이 있다.


지금 산슈카의 장인들과 아티팩트 메이커들이 동일한 소재가 있어서 똑같은 수법으로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열화된 버전이 나올 것이다. 제국기에 있었으나 지금은 유실된 역사적 갭Gap은 복구하기가 힘든 것이었다. 지금 산슈카 왕국의 기술력이 모자란 이유보다도 당시 제국이 너무나 번성했던 이유다. 산슈카 왕국의 공학적 수준이 다른 나라에 비해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어쨌건 손방패의 테두리나, 펜던트의 외곽선은 정교한 문양과 섬세한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단순히 매끈한 선이 아니었고, 정밀한 금속 세공의 기계로 파낸 것 같은 복잡한 무늬가 바깥선을 이룬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다는 게 쉽게 이해되지 않는 세밀한 공예품이었다. 신라시대의 왕관들이나, 혹은 중국같은 나라에서 쌀알 따위를 파내 만든 기예와 같은 조각품들을 보는 기분이다.


손방패는 금으로 만들어진 테두리에, 내측으로 푸른 빛을 띄는 선이 하나 더 있었다. 신비롭고 고풍스러우며 역사적인 빛깔의 장식이었고, 아마 자연스럽게 그런 색을 내는 광물을 통째로 갈아 만든 것 같았다.

복잡한 금빛의 외곽선 안쪽에 약간 낮은 채도와 명도의 파란 선. 그 안쪽으로 상아색과 흰색이 섞인 둥근 면이 있었다. 으레 방패가 그러하듯 바깥쪽으로 조금쯤 튀어나와 날아오는 투사체를 빗겨내기 편하게끔 되어 있었다.


마치 나뭇결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처럼, 물과 기름 등 이색적인 액체를 잘 섞어둔 것처럼 결이 살아 있는 색깔이다. 휘도는 소용돌이를 형상화한 게 아닌가 싶은 모습으로, 둔탁한 빛을 내며 고품古品이자 고품高品스러운 자태를 보이고 있었다.


로멜리아의 손방패, 혹은 산슈카 금사자의 손방패. 제냐가 손으로 들어보면 제법 묵직한 감이 있었다. 광석이 통으로 들어가 만들어진 것 같은 무게감이다. 그 외에 여러 종류의 소재를 섞어서 유용하게 조직했고, 안쪽면을 보면 푹신하고 적당하게 손에 달라붙는 가죽이나 천 류의 질감이 느껴진다.


가장 최근의 기록이 천 년 하고도 수백 여 년 전의 일이었던 역사적 유물치고는 천과 가죽이라는 게 어불성설인 소리였지만, 어차피 이 세계는 현실성과는 동떨어진 콘란드 대륙이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 게임’ 속 세상이었고, 이곳에 존재하는 초상력이라는 신비한 에너지와 그에 따른 스킬들은 다양한 종류의 기적을 파생시켰다.

현실에서는 ‘기적’이 될만한 일들도 이곳에서는 그럴 수 있는 현상에 불과한 것이 많다.


천과 가죽은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으며, 제국기에 축복을 받아 강력한 초상력학적 가치를 지니게 된 소재였다. 거기에 전성기를 달리던 시절 존재하던 고고한 초상술사들이 자신들의 스킬을 아낌없이 때려박았고, 지금 산슈카 왕국에서 구하기 어려운 수준의 소재들을 물 쏟아붓듯 사용해 만들며 강화시켰다.


‘인챈트’라고 불리는 지금도 있는 작업 과정을 몇 번이나 거쳤을 지 짐작하기 어렵다.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여전히 매끈한 표면을 자랑하는 질감이었다. 상처하나 나있지 않은 것이, 그것보다 상위의 아티팩트와 부딪혀 본 적이 없구나, 라는 깨달음도 주지만 동시에 그 오랜 세월 동안 어지간한 무기는 다 아래로 보았구나, 하는 승리의 흔적으로도 보인다.


그 내측은 밝은 톤의 색깔로 구성된 겉면과 대비되는 어두운 색깔들이다. 짙은 감청색이나 갈색, 검은색 따위의 배합이었다. 재질은 다 알 수 없으나 손등이나 팔목, 전완부에 와닿는 부위는 말했듯 천이나 가죽 류의 질감과 같았다.


제국기 1급 아티팩트라고 한다면, 산슈카 제국에서도 상당히 주요하게 관리하고 다루었던 아이템이라는 뜻이었고, 그 거대한 제국의 역사에 방점을 찍고 역사서에 이름을 남겼을 정도라면, 정말 용龍류의 괴물을 잡고 그 껍질을 벗겨 만들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시나리오 온라인 내에 최후의 아이템 따위는 결코 아니었지만, 그런 전설적인 거대 괴물의 이름이 아이템 설명에 나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수준은 되었다.


크기는 차고나면 손등과 가락의 중간까지를 덮고, 또 전완부 거의를 가리는 지름의 둥근 것이었다. 타원이 아니었고, 제법 무게감이 있으나 팔에 채웠을 때 닿는 느낌이나 조작감이 좋아 무기술에 그리 방해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차지는 않고 아이템을 꺼낸 뒤 몇 번 주물거리며 각 부위를 만져보는 제냐에게도 그렇게 느껴졌다.


펜던트는 성인 남성인 제냐의 손바닥을 큼직하게 채울 정도로 가운데 달린 보석류가 컸다. 전체적으로 포도를 닮은 듯한 모양이었고, 그 외곽선은 말했듯 복잡하게 조형된 금테로 되어 있으나, 단단하기가 슬쩍 매만져봐도 조금의 휘어짐이 없는 것이 상당했다.

초인에 가까운 제냐의 손끝 힘으로 밀어봐도 움직일 기색조차 없었다. 소재의 튼튼함 이외에 스킬이 부가된 특수한 아이템임이 분명했다. 포도알이 있는 내부 부분은 방패와 비슷한 톤의 하얀색으로 면이 채워졌다. 약간의 상아빛이 섞여 있었고, 마치 시계가 그렇듯 뚜껑을 열어 내부를 볼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바로 알 수 있도록 그 하단부 즈음에 버튼 같은 게 있었고, 달칵 하고 제냐가 눌러보자 곧 안이 열렸다. “허.” 제냐는 그 짧은 새에 속내를 구경하고 작게 숨을 뱉었다. 포도알처럼 생긴 내부였다. 그저 외형과 테두리가 닮았나 했더니, 뚜껑 속을 보았더니 정말 포도를 형상화한 모양이었다.


알알이 전부 다른 류의 보석이 박혀 있었다. 가만 보면 몇 개인가 종류가 겹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연속된 색이나 종류의 보석이 들어 있지 않았다. 일정한 패턴이 있는가 싶기도 하다. 둥근 테두리가 아니라, 지독한 집요함으로 세밀하게 면을 깎아내어 각도마다 빛이 다르게 비추는 세기 힘든 수의 면체面體였다.


보석이랄만하고, 그 광택은 시각적 아름다움의 최고랄만했다.


영롱하게 빛나는 푸른, 녹빛의, 붉고, 누런, 하얗거나, 혹은 검은, 갈색의, 금빛의, 그리고 은빛의 보석들이다. 제냐가 한 눈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종이었고 언뜻 세어보면 수십 개의 보석이 알알이 박혀있다.


턱, 하고 제냐가 뚜껑을 닫았다.


초상력이 담기기 좋은 소재는 가치가 높은 광물일 때가 많다. 그 외에 특수한 짐승의 신체 부위라거나, 그럴 때도 있지만 가장 흔하게 쓰이는 고급 소재는 보석이었다.

그런 점에서, 아마 하나하나가 거대한 저장량의 초상력 배터리일 테다.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제국기의 유물이니, 아마 제냐가 알지 못하는 아티팩트 공학의 이치를 따져 보석들이 유기적으로 작동하며 더 많은 양의 초상력을 담기 위해 호응하고 있을 것이고 말이다.


아티팩트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스킬이라고 부를 수도 있었다. 초상력이란 에너지가 있었고, 그 힘이 발동될 형식이 있었으니, 그 정보를 물건에 고정시켜 따로 사용자가 없더라도 스킬을 쓸 수 있도록 만들어둔 것이다.

초상술사들이 그저 자연스럽게 대강 써먹는 시스템 상의 스킬Skill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 그 미학을 알아본 것 같은 감상이었다.


포도알을 닮은 복잡한 펜던트는 금줄로 엮여 있었다. 목에 걸면 가슴께로 축 늘어지는 위치이다. 거의 끝없는 MP를 사용자에게 부여하는 강대한 아티팩트.


제냐가 알렉세이 루드를 보았다. 말을 꺼낸 당사자이니 이 물건을 어떻게 유용하면 좋을지 생각이 있으리라.


살이 찐 것은 아니었으나, 그 체격과 골격이 거대한 양반이 말 위에서 선명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다소 떨어져 있는 제냐에게도 분명하게 전달되는 내용이다.


“이곳에서 ‘소드 마스터’에 가장 가까운 이는 저기 계신 분이오. 켄 선생께서 사용하는 게 좋겠지. 로멜리아 가의 후계자이신 헤슈나 로멜리아, 또 아드리안 로멜리아 공이 허락한다면 그리턴 가의 기사가 사용하고자 하니 부디 말씀해 주시지요.”


알렉세이의 말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기사단원들, 자신에게 있어서 더없이 친근한 자식들의 면상을 보고 답잖게 목소리를 띄워 반겼던 켄을 본다. 그의 표정이 묘했다. 알렉세이의 말이 한 치의 틀림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는 인간은 없지만, 제냐가 느끼기엔 그러했다.

과한 칭찬일 수 있는 이야기를 면전에서 들으면서 약간의 동요가 없다는 점이 말이다. 저건 덤덤한 자신감이었다. 아니면 귀가 먹어서 말을 못들은 것이거나.


어둔 구름이 달빛을 잠깐 가렸다가 다시 땅 아래로 내렸다. 마침 허락받은 빛의 위치에 켄의 얼굴이 걸렸다가 스치듯 지나간다.

왜인지 월광이 그를 비추며 분위기를 만들자 모두가 켄 마누엠, 이라는 평범한 체격의 사내를 굉장히 거대한 존재감의 검사로 느꼈다. 허허, 웃거나 별 얘기 없이 일행 속에 파묻혀 있던 자가 그리턴 가의 단장조차 아래로 보는 기력술사라는 말인가.


켄 마누엠이 얘기했다. 푸른 머리칼은 잘 다듬지 않는 듯 덥수룩하게 머리통 상단에 솟아있다. 그는 늘 그렇듯 약간 처진 눈꺼풀을 다 뜨지 않은 채 말한다.


“알렉세이 경이 그리 말하니 내가 써야겠군. 허락해주시겠습니까, 헤슈나 공.”


헤슈나는 물음의 화살표가 자신에게 향하자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고개를 황급히 끄덕거렸다. 고된 여행과 황야의 거친 바람이 먼지를 묻혀 그녀의 얼굴을 지저분하게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미모가 다 가려지지는 않았다.

청초한 아름다움은 고된 상황에서 도리어 더 빛을 발하는지도 모른다.


제냐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이놈의 NPC들. 어차피 그가 아는 사연도 없었고, 세부 설정을 파악하고 게임 내에 들어오는 편도 아니었다. 그가 알지 못하는 여러가지 내부 설정들이 있겠지. ‘같은 편’으로 움직이기로 했으면 끝까지 그렇게 하면 될 일이다.

동료들 간에 합의된 사항대로, 제냐는 곱게 아이템을 넘겼다. 손방패과 펜던트. 조금 떨어진 자리에 있었기에 “받으시오, 그럼.” 하고 제냐는 말하며 펜던트를 휙 던졌다.


가벼운 스냅으로 고귀한 물건이 포물선을 그렸다. 초인적인 반사신경과 육체 능력을 가진 자가 받지 못할 일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허공을 휙, 하니 낚아채듯 손을 움직여 정확히 펜던트를 받았다. 제냐는 그가 펜던트를 받은 걸 보자 켄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표정으로 말하며 손방패도 넘겼다.


훅, 하고 던진 게 아까의 것보단 묵직한 궤적을 그리면서 날았고 회전하며 느리게 날아오는 방패를 켄은 멋지게, 묘기처럼 잡아챘다. 그 방패의 뒷면이 정확히 자신을 바라볼 때 팔을 끼워넣어, 손잡이가 되는 끈을 척, 하고 잡은 것이다.

원래 손이 들어가고 방패를 들 때 사용하는 부분에 그의 손이 들어갔다. 켄 마누엠은 제냐를 보면서 웃었다. 허허허. 제냐 역시 마찬가지였고.


켄은 잘 드러나지 않고, 또 스스로 실력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분명 이중에 소드 마스터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다. 순수한 기력술과 근접 전투 계열의 스킬과 경험치만으로 가장 높은 기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제한된 전장에서 싸운다면 그를 이길 수 있는 이가 없으리라. 예컨데 무기술과 기력술만 갖고 근접 거리에서 전투를 한다면 말이다. 호아킨의 경우, 변신술을 사용하지 못한다던지. 제냐의 경우, 궁술과 초상 스킬을 사용하지 못한다던지 제약을 건다면.


두 종의 아티팩트는 그런 지극한 물리 계열 전사에게 어울린다. 켄은 아주 오래 전 산슈카의 영웅이 사용했던 물건을 사용하기로 했다.

아이템이 감각적으로 사용자에게 인도하는 사용법이 있었다. 켄 마누엠은 펜던트를 목에 걸어 채웠다. 손방패는 자신의 주 손인 오른손에 착용한다.


칼을 휘두르는 팔놀림이 느려지지 않을까 싶었지만, 애초에 물리적인 근육의 힘은 평범한 인간을 아득히 넘은 입장들이다. 이 세계에서 인간의 여러가지 능력들은 평범하지 않았다. 단련하고, 고련을 거치고, 죽음의 가까운 위기를 겪었다가 살아난 자들은 기어코 발전하게 되어 있다.


그 비밀이나 사실을 아는 인간들이 많지도 않고, 또 이 세계가 현실인 NPC들이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그런 고련을 감당할 수 있는가는 개인마다 다른 것이었지만 말이다.


켄 마누엠은 자의든 타의든 전장터에서 지독한 시간들을 보내왔다. 훌륭한 자질과 능력이 있었고, 그것을 개화시킬 환경 속에서 자기류의 검술을 아득히 높은 수준으로 익혀냈다.

그의 기술류는 하나의 시스템System이 되었고, 정돈된 체계는 곧 다른 이들을 더 높은 경지로 이끄는 교육법이 되기도 했다.


그는 분명 완성형에 가까운 검사 중 하나였다. 왕도, 산슈카의 중심부로 가서도 그를 소홀히 대접할 수 있는 자가 없으리라.


꺼끌하게 자라난 수염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이제 구덩이에서 튀어나올 자들을 기다려야 할 차례였다. 아티팩트는 장비하자 이미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상태라는 걸 감각적으로 알 수 있었다.


콘란드 대륙에서 고급의 아티팩트는 가끔 신기한 AI가 들어있는 경우가 있다. 물건엔 생명도 영혼도 없었지만, 그것은 마치 주인을 가리는 듯 행동했다. 수준이 미달되는 사용자의 손에 들어간다면 제대로 힘을 토해내지도 않는다.

최소한의 기준이라는 게 있다는 양, 깐깐한 부하처럼 굴고는 했다.


켄은 최소한의 기준을 충족시켰다. 이중에서 유일하게 말이다. 아마 운트 작힘 백작이 서둘러 그것을 사용하려 했다면 생각이나 환상보다는 훨씬 변변찮은 성능에 실망했을 테이다. 그만큼 그는 마스터에서 먼 위치에 있는 기력술사이자 창술사였으니까.


그레이 하운드의 기사단장, 빌버 쿠스라면 그나마 좀 나았을 지도 모른다.


빌버 쿠스는,


솔직히 말하면 작힘 가에 대한 충성도가 그리 깊거나 마음도 크지 않았지만 의무감으로 달렸다. 그는 그런 사내였으므로 말이다.


그는 저녁 무렵의 황무지 한복판에 수십 명이 넘는 초인들이 진을 치고 있는 비밀통로의 출입구 바깥을 향해서, 어둔 길을 계속해서 달리고 있던 중이었다.


그의 뒤를 그레이 하운드의 충직한 단원들 십여 명이 따랐다. 갑작스러운 추격전이었으므로 페이스가 나뉘었고, 선두에 설 수 있는 자들이 앞선 것이다. 그들이 그레이 하운드에서 가장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자들이라 해도 무방했다.


애초에 모여 있던 병사들의 수가 많았지만 긴 터널에 띄엄띄엄 자리했다. 수십 키로미터 정도 되는 긴 길을 달려서 이동할 수 있는가, 가 추격전의 조건이었기에 당연히 기사단원이나 워메이지들 몇 명 정도만 갑작스레 일어난 변고를 쫓을 수 있었다.


그 앞에 무엇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레이 하운드는 이름처럼 사냥감을 물어뜯는 맹견들이었다. 길들여지지 않은 맹수는 아니었고, 작힘 가와 세슈칸 시티, 그리고 나아가 산슈카를 위해서 뛰는 자들이다. 여러가지 더러운 일들을 많이 겪었고 양심의 기준선 사이에서 헷갈리는 왈츠를 춰야 할 때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인간성을 지키며 살아있는 이들이었다.


뭐, 단장인 빌버 쿠스가 그 단원들 모두의 인간성을 책임질 수는 없어도 적어도 쓰레기만으로 구성된 집단이 아니라는 점 정도는 자신할 수 있었다.

가급적이면 그들은 악행을 저지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런 이들을 집요하게 부리는 자가 운트 작힘이었고 말이다.


캐릭터 설정의 상세한 선악 수치를 따져보자면 운트 작힘의 것이 가장 악으로 크게 치우쳐져 있을 것이다.


빌버 쿠스, 몇 명의 십인장, 그리고 단원들 중 뛰어난 자들. 약 십 여 명 정도가 선두를 달려 출구 근처에 다다랐다. 조금 시간이 걸리면서 뒤를 따르는 이들을 다 세어보면 서른 명 정도 되었다.

당장 그레이 하운드 기사단의 전체가 소집되고 움직인 게 아니었다. 저택에 모여 빌버 쿠스에게 성토를 하듯 다음 행보를 요구하던 이들은 전체 중 상당수였지만, 결국 일부였고 나머지는 자신들의 위치를 지켰었다.


작힘 성은 넓고 또 언제나 해야 하는 일들은 있었기에, 단원들은 추가적인 습격이 있을까 외부 성벽등 각자가 맡은 포인트를 지켰다.

빌버 쿠스가 상당수의 단원과 워메이지를 대동하며 직접 사건 현장을 처리하려 달렸고, 단장의 명이 어느 병사를 통해서건 전해졌다면 작힘 성 내에 있던 전체 단원들이 결국 움직였겠지만 추가적인 이야기가 없었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수비 위치를 지켰다.


그래서 빌버 쿠스는,


결국 긴 추격전의 마무리로 황야의 하늘을 보며 지하에서 솟구쳤다.


그리고 자신을 환영하듯 도열해 있는 갈색 사슴 기사단원들과, 그 외 몇 명의 조력자들이 전투 태세를 갖춘 것을 보고 사납게 인상을 찌그러뜨렸다. 비틀린 웃음이 그의 낯을 장식했고, 거친 사내는 웃으며 말했다.


“이런 썅.”


뒤이어 네 명의 십인장과 단원들 중 수위를 다투는 실력자 일곱 명이 튀어나오기까지 일 분이 채 걸리지 않았고, 그러고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므로 빌버 쿠스의 구겨진 인상이 펴질 줄을 몰랐다.


“안녕하소.”


출입구에서 튀어나온 빌버 쿠스를 바라보며, 제냐는 얼마간 그와 대치하고 있다가 무언가 적당한 대사를 고민하고 외쳤다.

누가 보아도 놀리는 듯한 말소리에 빌버의 심정이 더 시궁창으로 떨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jenni-miska-4Vfsfjv6GJ0-unsplash.jpg


작가의말

안녕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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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62. 전투, 전쟁 23.08.18 24 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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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54. 돌아가는 길 23.08.13 22 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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