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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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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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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3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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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8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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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62. 전투, 전쟁

DUMMY

*


벌컥.


운트 작힘의 집무실 문이 열렸다.


로멜리아 일행이 성에 침입하고 나서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난 뒤였다. 그들이 본성 정문에 다다라 기사들과 마주하기 전이다.


“백작님!”


서재에 앉아 자신의 일을 하고 있던 운트 작힘은 갑작스럽게 소란을 떠는 가신의 부름에 눈을 위로 떴다. 고개보다 눈이 먼저 치켜 올라가는 방식의 쳐다봄은 마주하는 이로 하여금 불쾌감을 느끼게 한다.

운트 작힘에게 인상이 더럽다고 할 만한 자는 적어도 성채 내에는 없었다. 흰 피부. 웃으면 눈이 접히는 인상이다. 체구가 크고 무예를 단련한 체격이 탄탄하다. 근육질의 몸을 여러 겹의 비단을 사용한 정복으로 감싸 곧바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은근한 무게감이 있는 인간이다.


표정을 오래 들여다보면, 싱긋 웃는 표정 너머로 어딘지 잔인성이 느껴지는 것 같은 작자였다. 그런 운트 작힘의 심기를 생각치 않고 들어간 부하는 자신이 해야할 말을 토해냈다.

아무리 무서운 상관에게라도 전해야 할 일은 전해야 했다.


당장 들이닥치고 있었으니까.


“신원 미상의 기력술사, 초상술사들이 들이닥치고 있습니다! 어느 가문의 기사단인지 용병인지 파악되지 않고 있지만 작힘 성 외벽을 뚫고 그대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지금 곧장 본성 쪽으로 진격하고 있고 그 수는 약 20여 명 정도로······.”

“······뭐?”


운트 작힘은 그 보고의 내용에 표정을 달리 했다. 늘 철저하게 계산된 표정을 짓고는 하는 그라고 해도 차마 지을만한 무엇을 떠올리기 어려워서였다.

아니,

그러니까,

뭐라고?


흰 피부. 짧은 머리칼. 펜 대를 곱게 쥐고서 서류를 옆으로 넘기던 작자는 황당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성 내 그가 사용하는 집무실이나 기거하는 곳은 여러 곳이었다. 지금 자리한 방은 약간은 지저분한 감마저 있을 정도로 생활감 있는 가구들과 다양한 책과 자료들이 꺼내져 있다.

약간 높은 곳에 달린 창에서 바깥의 빛이 들어오고, 천장에 달린 작은 조명기구가 빛을 비춘다. 백작가에서나 쓸법한 고급 장식의 등이었다. 미량의 MP가 들어가 작동하는 물건으로, 빛을 내는 성질이 있는 특수한 광물을 가공해서 안에 광원으로 삼는다.


어딘지 인조적인 느낌이 드는 흰 빛과 밝은 낮의 태양빛 아래에서 그는 다시 한 번 표정을 구겼다.


그러니까,


“뭐라고?”


운트 작힘은 자신의 성을 누군가 쳐들어오리라 생각해본 일이 많이 없었다. 그는 철저하게 계획된 대로 행동을 하는 인간이었고, 자신보다 상위의 존재에게 먼저 이빨을 들이밀지 않았다.

세력과 권력도의 체급을 따진 뒤에 행동을 결정한다는 말이다.

자신이 가진 힘으로 누를 수 있을만큼만 악업을 쌓아왔다. 그런 그에게 정면에서 누군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은, 순간 벙찐 표정을 감출 수 없을 만큼이나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보고를 하러 들어온 젊은 가신에게 짜증스러움을 표출할 겨를마저 없었다.


그가 다시금 침착하게 파악한 정보들을 나열하자 운트 작힘이 다시 없게 끔찍한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전 기사단, 초상술 연구회 본성으로 호출해라. 어느 소가문에서 말도 안되는 짓거리를 벌이는 지는 모르겠지만··· 백주대낮에 산슈카에서 일을 벌이다니···. 그 뒷감당을 자기들이 하게 되겠지.”


운트 작힘이 할 말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수 없이 많은 자들을 태양빛 아래서 희생양으로 만들어낸 작자이니까.

산슈카의 국법이 살아있는 와중에도 말이다. 개중에 법관도 하나 저승길로 보내버렸다. 그가 쌓은 악업의 수치가 상당하다. 그가 나라의 요직이나 중심부에 위치하게 되면 산슈카의 국내 정세가 더욱 흐트러질 테다.


선하고 또 지혜로운 정치가가 나라를 다스릴 때, 행정 체계게 원활하게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시대가 난세라면 그런 위정자가 있더라도 간신히 보통을 유지하는 것에 그칠 때도 있었지만.

악하고, 태만한 의지를 가진 자가 어려운 시기에 나라의 윗자리에 앉는다면 순식간에 국정이 황폐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운트 작힘은 자신이 세슈칸의 대영주 자리로 만족할 사내가 아니라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아서는 안된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는 더 큰 권력과 야욕의 실천을 원한다. 그를 위해서라면 애국심도 딱히 없었고, 산슈카를 내전이나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해도 좋다.

그가 잘 가다듬어 온 정병들과 모든 자원, 재력, 인맥을 총동원해서 살아남고 전공을 올려 지금의 명문가들이 가지고 있는 위치 그 이상에 서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가 위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결국 현재의 판을 흔들어야 했다. 위에 선 게으름뱅이같은 돼지들을 끌어내리고, 그가 늑대로서 올라가는 것이다.


산슈카를 위한 길은 아니었고, 작힘 가를 위한 일이었으며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는 운트 작힘 개인을 위한 사업이었다.


작힘은 현재 영 내에 있는 기사단 전부에게 호출을 내렸다.

다행히 전시를 대비하지는 않았어도 어느 정도 방비는 되어 있었다. 그리 멀리 가지 않아도 본성 건물에서 기사단의 각 병영 건물로 호출을 날릴 수 있는 초법식 기계 설비가 있다.


병영 내에 머무르지 않는 자들까지 단번에 모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곧바로 오리라.


작힘 성 변방에 위치한 워메이지들의 연구실에서 초상술사들을 불러 오는 건 조금 느릴 것이다. 현재 성내에 누가 있더라, 운트 작힘이 머리를 굴렸다.


당장 기사단의 십인장 둘과 부단장 하나. 그리고 워메이지 셋이 그의 호위 순번으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매 시간 그의 곁에 서서 주변을 주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가 움직일 때 같이 따르고, 같은 건물에 있어야 한다는 제약이었다.


운트 작힘은 현실적 가능성과 별개로 자신의 공포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부하들을 부려먹었다.

그것이 그의 목숨줄을 연장시켜줄 고마운 수단이 될 것이다.


“뭐 하나.”


운트 작힘이 핀잔처럼 던지자 가신이 부리나케 방을 나섰다. 쾅, 하고 목재 문이 거세게 닫혔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들려온 보고가 거짓일 리는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집무실 한 켠에 세워 둔 자신의 오랜 애창에게 다가갔다.


어떤 암살자가 갑자기 들이닥친다면,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그도 단련한 창술을 써먹어야 할 것이다.

그 역시 무예를 단련하는 기력술사였고, 마스터의 경지를 목적으로 달려나가는 한 명의 무술가였다.


까마득하지만, 언젠가는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재능이 넘치는 아들이 되어도 좋다. 로멜리아 가에게서 먼 옛날 얻어냈던 아티팩트는 그의 대에서 쓸만한 제물이 되어줄 것이다.


그들 가문에서조차 제대로 써먹지 못하고 잊혀져던 기간이 많은 아티팩트였다. 역사서를 뒤지다 알아낸 물건은 기능이 상당히 훌륭했고, 몇 명의 학자들을 동원해 알아본 바 현대의 어느 아티팩트에 뒤지지 않고 도리어 압도적으로 강력한 성능을 가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기력술 ‘마스터’의 경지에 다다랐을 때 제대로 사용 가능하다는 아티팩트. 그는 그 오래 전 산슈카 제국의 내부에서 권세를 자랑하며 시대를 호령했던 로멜리아 공작가와 같은 위치에 서길 바랐다.


지금은 고작 백작가에 불과했지만, 앞으로는 다를 것이다.

변화의 바람이 불어야 했고, 없다면 그는 스스로가 만들 셈이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말이다.


그는 방구석 한 켠으로 다가가 대충 세워 두었던 청록빛 창의 대를 쓰다듬었다. 한 번 매만지면서 손으로 쥐어보았고, 익숙한 감각에 순간 요동쳤던 심장이 조금 가라앉음을 느꼈다. 그의 눈빛 역시 차분해졌다.

누구도 작힘 가의 야욕을, 운트의 야망을 막을 자가 없을 것이다.

그는 다짐하듯 중얼거리면서 움직였다.


암살자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 직접 가는 것이 차라리 나으리라. 그의 성에는 많은 병사들이 있었다.


*


운트 작힘이 상황을 알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순간이었다.


로멜리아 일행의 돌진행이 작힘 성 내부, 본성 건물 입구 즈음에 다다른 것은 말이다.


제냐는 저 멀리 무리지어 있는 기사들을 보며 속으로 올 것이 왔구나, 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걱정했던 순간이었다. 백작가의 기사들은 강력하다. 저들을 정면에서 모조리 상대하는 건 애초에 어불성설이었고,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돌입해서 비켜가는 것이 목적이다.


작힘 백작이 있는 건물 정면을 지키고 있으니 그들을 무찌르지 않고는 갈 길이 마땅치 않다. 드보라는 행동이 빠른 여자였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거나, 얇은 판금으로 이루어진 특수 제작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의 수가 열 댓명은 되어 보인다.

그녀가 순식간에 그러모아 데리고 온 자들의 숫자였다.


그 외에도 본성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정병들이 만만찮게 모여들었다.

여태까지 소대 수준, 고작해야 2-30여 명 정도가 한 무리의 최대였는데 얼핏 보아도 백 여 명 이상 정도는 모인 것 같았다.


정문 근처에 진을 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기세가 매섭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아직 초상술사들이 합류하지는 못했는지 스킬이 날아오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일단 멈추지 않았다. 제냐는 가볍게 견제기로 화살을 하나 쏘아 멀리 날려 보냈다. 적절하게 MP를 섞은 철시였고, 답잖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던 놈은 위에서 아래로 찍어 누르는 도끼처럼 한 병사를 절명시켰다.


쾅! ‘커억.’ 하고 짧은 단말마가 그의 끝이었다. 그 근처에 진을 치고 있던 사내 몇이 몸을 가볍게 떨었다. 무심하게 날아온 화살은 깔끔하게 동료의 목숨을 앗아갔다.


백주대낮. 그들은 미친 질주를 계속한다. 로멜리아 일행 말이다. 릿샤는 준비한 것을 털어내야 함을 인지했다.


한 발, 그리고 두 발이다.


그녀는 지금이 마지막 기점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시간을 끌면 아예 작힘 성 내부 모든 병력이 모여들어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가 될 것이다. MP를 아낄 때가 있었고 쏟아낼 때가 있다. 지금은 후자이리라.


그녀는 질주의 뒤켠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면서 슬슬 MP를 사용했다. 속도가 줄었다. 기술의 사용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린다. 그런 그녀의 곁에 로웰과 워메이지 둘, 그리고 최태현이 붙었다. 혹시나 있을 위협을 막고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릿샤는 허공에 약간 떠 있었다. 점프를 한다고 해도 닿을 수 있는 허공 5, 60cm정도 지점이었다. 자력으로 띄워 올려진 무언가처럼 둥둥, 미세하게 움직이면서 그녀가 자신의 힘을 다룬다.

콘란드 대륙에서 마음껏 쓸 수 있는 힘은 호쾌해서 좋다. 거대한 오브젝트를 때려 부수는 일은 굉장한 감각이었다. 그녀의 손아귀에 있는 모든 반지가 빛을 냈고, 곧 잃었다. 순식간에 MP가 빨려들어가는 일이었다.


릿샤는 손을 앞 쪽, 조금 위로 들었다. 불편하게 들린 손바닥 앞으로 반투명한 유색의 기운이 몰려들었다. 처음에는 회색의 바람 줄기같은 것이었는데, 한 두 호흡을 할 만한 시간만에 금세 구체화되었다.

폭풍을 닮았다. 그림으로 폭풍을 그리라고 하면 그렇게 나올 법한 색감이었다. 주로 토네이도니 하는 것들이 어둔 하늘 아래서 구름같은 연기와 함께 이루어지기에 나오는 색깔이었다.


점점 짙어진다. 기운이 회전한다.


돌아가는 바람의 줄기들이 계속 겹치고 굵어졌다. 그녀의 앞에 둥그런 폭풍이 생겨났다.


‘폭풍의 한 자락’에 몇 종의 풍술을 섞은 것이었다. 윈드 블래스터, 윈드 볼트. 순식간에 세 종류의 초상 스킬이 발현되었고 하나로 합쳐졌다. 아이시 블래스터도 살짝 섞는다. 얼음 속성의 스킬이지만 바람 속성 역시 조금 들어가 있었다. 공통점이 있고 연결고리가 있는 스킬 끼리는 그래도 동시 사용이 가능한 면이 있었다.


그녀가 스킬을 가동하자 술사로서 가지고 있던 여러 종류의 패시브 스킬들이 그 진가를 드러낸다. 스킬의 발동을 빠르게 도와주는 것도 있었고, MP운용을 더욱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끔 감각적으로 도와주는 것도 있었다.

스텟 자체를 높여주는 종류 역시 여러 개다. 거기에 아이템 역시 전부 쏟아넣고 있었다. 그녀가 치렁치렁하게 달고 있었던 많은 악세사리들이 순식간에 내부의 힘을 다 토해냈다.


토해진 보석은 광택을 잃어버리고 여전한 형상을 가졌지만 어딘가 가치가 떨어진 듯한 모습이었다.

그것으로 기능이 끝나버린 일회용의 아티팩트도 있고, 충전 시간을 가지면 다시금 사용할 수 있는 물건들도 많이 있었다. 아마 지금 당장은 다시 쓰지 못하리라.

푸른 물약, 포션은 인벤토리에 가득 채워넣고 있었다. 전투는 지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당장 그녀는 신경을 오롯이 한 곳에 집중했다.


의지력이라는 건, 캐릭터의 신체가 플레이어의 움직임대로 따르듯이 현실의 집중력에 영향을 받는 면이 있었다. 남다르며 탁월한 정신력을 가진 플레이어들이 게임 내에 접속해서 초상술사로서 두각을 나타내는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건 운동 계열의 기술을 가진 자들이 비련의 시나리오 속에서 금방 해당 스킬을 얻고 레벨을 올릴 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원리다.


그녀는 릿샤 애드윈의 한계를 넘어서 바르샤 애드윈으로서 할 수 있는 한계까지 자신의 능력을 끌어쓰고 발휘하기 원했다.

단순히 수치적으로 나타나는 의지력 그 이상. 원래대로라면 스킬을 형성하는 것조차 어려울 테다. 또 그것을 정면으로 쭉 곧게 날려보내 대상을 제대로 맞추는 일도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고.


그러나 신경쓰지 않고 그녀가 MP에 MP를 더했다. 힘에 힘을 더하고, 회전력에 회전력을 가미했다. 폭풍이 거칠게 요동치며 테두리, 외곽선이라 할 만한 것이 점차 무너져갔다.

회색빛의 바람 줄기들은 멀리서 보아도 심상찮은 것이었다. 그녀는 거대한 바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대부분의 것을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종류로 말이다.


단번에 세 가지 스킬을 동시 발현할 수 있는 릿샤는 남들보다 스킬 스택을 쌓는 속도가 빠르다. 대개의 고레벨 술사들이 그러하듯, 릿샤 역시 고속, 고화력 초상 스킬전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폭풍의 한 자락에 한기마저 어리며 점차 무시무시한 것이 되어갔다.


그 생김새는 ‘전설’ 스킬에 해당하는 블리자드Blizzard, 혹은 유니크 스킬 눈보라의 상위 레벨을 닮았다.

풍속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렬하게 휘도는 것이 심상치 않았고, 그 사이에 세미하게 형성되어 있는 얼음의 입자가 음산한 소리를 냈다.

평범하게 만들어진 얼음도 아니었고, 무언가를 분쇄하기 위해 나타난 초현실적인 알갱이였기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닿는 모든 것을 갈아버릴 것 같은 위세를 떨치면서 그녀의 앞에서 바람이 휘돈다.


주변으로 그 한기 서린 바람의 흔적이 흩어져갔다.


거리를 벌린 동료들 역시 릿샤가 심상찮은 짓거리를 하는 구나, 알 수 있었다.


로웰 드버는 말없이 곁에 있었다. 다이어 울프 한 마리는 으르렁거리면서 그를 태우고 있다. 회색빛, 흰빛의 터럭을 가진 거대한 놈을 제어하면서 그는 릿샤의 주위를 맴돌았다. 누군가 공격을 위해 다가오면 바로 늑대를 움직여 물게 할 심산이었다.


로웰은 막대한 MP를 갖고 있다. 그는 잔존한 MP로 단숨에 버프 스킬을 더 쓸 수도 있었지만, 당장은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아낀 채 무리에 잔류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릿샤의 MP가 요동치며 증폭되었다. 본디 갖고 있는 MP는 일정하지만, 그것을 제 눈 앞에 어떤 현상으로 구현화시키며 쏟아내니 만만찮은 기세가 주변으로 뻗어나갔다. 한 1, 2백여 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작힘 군 역시 그 이상함을 알아보았다.

기력을 다루는 기사들은 MP에 민감한 존재들이다. 초상술사들이 괴랄한 짓거리를 벌일라 치면 그들 역시 금방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의 생명을 앗아갈만치 심각한 일인가, 아닌가 가늠하는 눈대중이 발달해야 기사 또한 전장에서의 수명이 길다.


그레이 하운드의 십인장 중 하나인 마부스는 드보라의 옆에 서 있었다. 열 명의 기사들은 단원들과 십인장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딜 가도 밀릴만한 전력은 아니었지만, 또한 작힘 성내에서 시간만 벌면 곧이어 지원군이 올 것이기에 불리한 전황은 아니었음에도 다가오는 자들이 기이하게 두렵게 느껴졌다.


특히나 저 멀리서 바람을 다루고 있는 풍술사, 상당한 경지로 보이는 초상술사가 벌이는 짓이 심상찮다.

그는 가볍게 잔소름을 털어내며 기력을 운용했다. 그의 몸 내부를 훑듯이 MP가 움직였다. 희미한 열기와 함께 안온함이 그의 신체를 감싼다.

기력술은 신체와 정신 동시에 영향을 미친다. 주로 물리적인 스텟을 강화하지만, 정신력 계열에도 아무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었다. 애초에 MP자체가 ‘정신력 에너지’였다.


초상적이며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힘이었기에 이렇다할, 비교할만한 대상이 지구의 것 중에는 없었다. 그건 신비한 법칙으로 인해 움직이며 사람의 기를 돋우며 보강해주고 또 지켜주기까지 하는 지고의 도구였다.


기력술사들은 자신의 의지와 함께 MP를 고양시킨다. 기력은 단단하게 유형화되며 기세를 일으켜 적과 맞선다. 공포감이 들 때 도리어 전투 의지를 불태우면서 기력의 불꽃을 거세게 만드는 일은 기술사들이 해야 하는 가장 기초적인 일이었다.

어떤 전장에 들어가는 기력술사들도 그렇게 한다. 누구나, 전쟁과 죽음이라는 것은 긴장되고 무서운 일인 법이다.

절대자라는 호칭을 달고 떵떵거리며 거니는 초일류 이상의 능력자들도 그러하다. 하늘 아래 서면 한낱 인간일 뿐이다. 칼에 목이 베이면 떨어져 나가고.


초인이 현실로 만들어지는 이 세계에서 그런 작자들의 목을 베는 일이 다소 어렵기는 하지만, 불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런 초인들은 더더욱 자신의 육체와 함께 정신을 단련해야 했다.


전쟁이 빈번하며 아직까지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는 콘란드 대륙. 진정한 시나리오의 끝을 보기 위해서 사내들, 혹은 여인들은 자신의 능력을 갈고 닦는다.

초상술이나 기력술 경지의 끝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눈 앞에 놓인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심정으로 걷는 수련자들의 이야기였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뭐,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고 다른 방식으로 플레이의 끝을 보는 스타일도 여럿 있었지만 MP를 사용하고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하는 플레이어들이 주류라는 걸 반박할 수도 없었다. NPC들까지 모두 통털어 보더라도 그러하다.

전쟁과 전투, 물리적 경쟁의 역사는 콘란드 대륙에서도 중요한 페이지와 분량을 차지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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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82. 흑사의 죽음 23.09.20 25 3 21쪽
82 81. 뱀(3) 23.09.20 22 3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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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78. 달칵 23.09.07 28 2 35쪽
78 77. 뒤꽁무니 23.09.05 30 3 31쪽
77 76. 암살자 23.09.02 35 3 42쪽
76 75. 어둠숲 23.09.02 29 3 31쪽
75 74. 헤어짐 23.09.01 29 3 32쪽
74 73. 프린스 알사드Prince Alsard. +1 23.08.31 35 4 55쪽
73 72. 퀘스트의 끝, 즈음 23.08.29 29 3 36쪽
72 71. 술래잡기의 끝 +1 23.08.27 27 2 41쪽
71 70. 술래잡기 23.08.25 25 2 23쪽
70 69. "…단장!" 23.08.25 23 2 21쪽
69 68. "작작해야지 새끼야…." 23.08.25 22 2 17쪽
68 67. 합류 23.08.25 22 2 18쪽
67 66. 황무지의 동굴 23.08.25 20 2 21쪽
66 65. U씨의 경우 23.08.21 24 2 20쪽
65 64. 생각보다 23.08.21 22 2 27쪽
64 63. 두 발째 23.08.18 24 2 36쪽
» 62. 전투, 전쟁 23.08.18 24 2 19쪽
62 61. 일점돌격 23.08.17 24 2 29쪽
61 60. 돌입 23.08.16 23 2 16쪽
60 59. 태양의 숨결, 폭풍의 한 자락 23.08.16 52 2 24쪽
59 58. 릿샤Rissha의 방 23.08.16 20 3 17쪽
58 57. 사연 23.08.13 29 3 24쪽
57 56. 누군가의 죽음 23.08.13 24 3 13쪽
56 55. 어느 법관의 정의正義 23.08.13 23 3 27쪽
55 54. 돌아가는 길 23.08.13 22 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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