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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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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최근연재일 :
2024.07.07 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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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4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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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90. 각자의 싸움

DUMMY

*


페인은 검을 바로쥐었다.


롱소드의 그립감이 마음에 들었다. 그 감각이 좋았기에, 이 무기를 고른 것이기도 하다.


오래도록 사용한 희귀한 아이템이었다. 희귀도 등급은 5등급. 그가 아마 플레이를 앞으로 계속 해나간다고 하더라도, 거의 바꿀 일이 없을 정도의 물건이었다. 페인의 레벨은 83이었고, 클래스를 굳이 따지자면 워리어, 혹은 나이트라고 할만하다. 나이트, 라고 하기에는 말을 타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승마 스킬도 없지는 않았다. 도리어 능숙한 편이다.


도시간이나, 혹은 국가간 이동을 할 때는 보통 말을 자주 이용했었으니까. 사르삿은 그가 머물면서 사냥을 할만한 필드들이 적당하게 있는, 플레이하기 괜찮은 지역이었다. 퀘스트들도 풍부하게 나왔고.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면서 플레이를 해왔고 스타팅 지역은 산슈카로부터 좀 떨어져 있는 인근 지역의 타국이었지만, 결국 이곳에 정착해 퀘스트들을 깨고 있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은 단순한 게임이라기에는 너무 경치가 좋았다. 입체적으로 느껴지는 시각적, 또 그 외 오감적 체험이 지나칠 정도로 현실적이다.


당연하게 게임에 접속한 이들은 게임 내부 세계에 몰입을 하게 되었고, 단순하게 플레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정말 이곳에서 사는 것처럼, 혹은 여행을 온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플레이를 하고 있으면서 모든 감각을 사용해서 세계를 느끼는 것이다.


경치가 좋고, 살기가 좋은 곳. 그러니까, 플레이를 할만한 지역을 고르는 건 단순하게 맵 상의 이름을 보고 어느 지역이 제일 좋은가, 순번 고르기를 하는 일이 아니었다. 오래 플레이를 하다보면 NPC들과 이 도시, 마을의 경치에 정감마저 느끼게 된다.


전투 역시 지독하게 현실적이었다. 피와 살이 튀긴다거나, 그런 그로테스크한 장면은 경험에서 빠져 있지만 그 외의 모든 것들은 현실과 닮아 있었다.


멀리서, 레드 오크 한 마리가 달려오고 있다.


언덕 아래에서 모습을 점차 드러내는 한 마리의 뒤로, 레드 오크 무리들이 보인다. 언뜻 사람의 형상이지만 자세히 볼수록 사람이라고 느끼기는 힘든 꼴이다. 3M에 달하는 거구. 붉은 색의 피부. 두터운, 마치 코끼리나 코뿔소의 그것을 보는듯한 질감의 외피를 가졌다. 주름이 겹겹이 진 살 속의 눈빛은 명백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고, 야수의 눈동자를 가졌으나 두 팔 두 다리로 움직이고 무기와 갑옷까지 걸치고 있었으니 질이 대단히 나빴다.

상대하기에 말이다.


오크, 고블린과 같은 영장류 형의 몬스터들은 분명 가장 지독한 난적들 중 하나였다. 콘란드 대륙의 역사적으로 보아도 말이다.


뿔은 없었고, 마치 돼지나 그런 짐승들처럼 머리 위로 귀가 솟아나 있었다. 멀리서도 페인의 뛰어난 시각이 오크들의 면상을 관찰해냈다. 푸들거리며 볼살이 떨린다. 길게 뻗어나온 어금니가 위협적이다. 상아빛의 색인 놈도 있었고, 무엇에 묻었는지 모르겠지만 검붉은 놈들도 있었다.


하나같이 쿵, 쿵 거리면서 언덕길을 밟고 올라온다. 가장 먼저 당도할 것 같은 녀석은 대도를 들고 있었다. 거대한 외날의 칼. 평범한 인간이라면 그대로 반으로 쪼개버릴 것 같은 기세의 칼이다.


어디서 저런 물건들이 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게임 상의 설정을 지나치게 깊이 파고들지는 않는 편이었다. 페인은 전투를 준비한다. 먼저는 호흡이다. 스읍, 후. 운동은 그다지 깊은 취미가 아니었지만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 내부에서 그 비슷한 흉내는 내고 있었다.

이걸 한다고 현실의 육체가 대단한 근육질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감각은 익힐 수 있었다. 의외로, 깨나 효과가 좋은지 바깥에서 헬스 따위를 할 때 도움이 되는 것도 같았다.


짧게 호흡을 끊어 뱉으면서 페인이 먼저 달려들었다. 아직까지 언덕길에서 다 올라오지 않았지만, 결국 이쪽으로 올 놈들이었다.

진퇴가 자유로운 상황이라면 먼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페인은 애니에게


“먼저 치고 올게!”


라고 소리치며 달려 나갔다. 파악, 하고 흙바닥을 박차는 발은 순식간에 그를 수 미터 앞으로 밀어버렸다.


가벼운 판금 갑옷, 을 입은 것이 페인의 차림새였다. 그게 그의 전투 복장이다. 가벼운 사냥을 할 때는 그냥 가죽류의 경갑옷들을 착용하고는 하지만. 짙은 회색으로, 광이 나지 않는 판금 갑옷은 인챈터의 손길이 닿아 특수하게 만들어진 초상적인 물건이었다.

소재 자체에 MP가 흐른다. 그가 전투를 준비하며 기력술을 응용하자, 그에 호응하면서 주황빛을 낸다.


좋은 방어구는 전투 시의 능력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려주기도 한다. 괜히 플레이어들이 질좋은 방어구를 얻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것이 아니었다.

제냐의 경우에는, 몸놀림을 조금이라도 둔하게 한다던가, 관절의 가동 범위에 거치적거리는 면이 있는 것은 모두 제하고 특수하게 제작한 경갑옷을 입고 있었다.


페인도 애니에 비한다면 민첩 전사에 가까웠지만, 조금 더 근거리에서 치고박고 하는 일이 잦았다. 페인의 달음박질이 금세 오크의 앞까지 그를 인도했다.


철갑옷의 밑창이 언덕의 바닥을 깊게 내리누른다. 진각처럼, 힘을 실어 바닥을 밟으면서 바로 앞에서 폭발적인 대시를 한다.


길게 뻗어 있는 롱소드는 견갑 위에 걸친 상태였다. 그대로 뒤로 축 늘어뜨렸던 것을, 유연하게 몸을 굽히며, 그대로 상단으로 높이 올린 뒤에 레드 오크의 머리 부근에서 내리긋는다.


전방으로 폭발적인 움직임을 함과 동시에 내려베는 동작이었다. 페인의 키는 레드 오크보다 훨씬 작았지만 롱소드의 검날은 레드 오크의 미간을 넘었다. 그 끝이 오크의 미간을 찍었고, 손바닥보다 조금 더 폭이 좁은 롱소드가 유려한 선을 내려 그었다.


오크의 몸체를 도화지 삼아서 한 번의 휘두름으로 긴 세로선을 그린다.


검날에도, 어느새 무색의 기력이 덧입혀져 일렁거리고 있었다. 칼날에 닿기도 전에 움푹, 들어갔던 레드 오크의 이마는 어느새 칼날이 닿으면서 그대로 갈려나갔고, 깔끔하게 전신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촤악!


하는 실감나는 소리와 함께 한 마리가 절명했다. 페인이 주력으로 사용하는 스킬, ‘내려베기’였다. 몇 가지 패시브 스킬들이 당연하게 같이 쓰였다. 대단찮은 스킬이었지만, 사용자의 성취에 따라서 그런 기본 스킬들도 얼마든지 강력한 힘으로 쓰일 수 있다.


롱소드에 순간적으로 걸리는 부하는, 검날의 무게보다도 훨씬 무거운 것이었다. 전신의 힘을 끌어다 쓰는 듯한 동작들이다. 롱소드를 다루는 일은 그렇다. 거꾸로 세워 땅바닥을 찍으면, 자신의 눈높이를 넘는 검을 쉽게 다룰 수는 없었다.


그 길이감을 이해하고, 롱소드의 움직임에 몸의 흐름을 맞추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거대한 이빨을 가진 맹수처럼, 페인은 자신이 많은 사냥을 통해 익혀낸 ‘롱소드 하류 검술’을 마음껏 펼쳤다.


비련의 시나리오에서 하류 검술은 딱히 저질스런 의미가 아니었다. 그 품질이 낮은 스킬이라는 뜻이 아니라, 고차원적인 무학에 근거해 연구로 만들어낸 전통적인 검술과 다른 쪽이라는 뜻일 뿐이다.

용병들이 실전에서 스스로 창안해 낸 검술들이며, 실전의 집대성이다. 고급 검술과 하류 검술은, 서로 상호 보완하면서 무기술의 사용자를 높은 수준으로 이끌어간다.


페인은 깔끔하게 내려벤 오크를 두고 그대로 안쪽으로 돌입했다. 습, 크흐 하고 다시 숨을 들이마시고 뱉는 등 짧게 호흡을 골랐다. 내려베기에는 ‘강격’이 같이 쓰일 수 있었고, 강격 스킬은 순간적으로 근력에 보정을 걸어주고 검날에 걸리는 기력술의 위력도 높여준다. 그만큼 약간의 부하가 있었고, 아주 약간의 지연이 더 생긴다.


그 시간을 벌기 위해서, 페인은 제자리에 있지 않고 도리어 더 앞으로 뛰었다. 레드 오크들은 날렵한 검사의 움직임에 당황하면서, 자신들의 무기를 고쳐 쥐고 그에게 달려든다.


*


멀리서 페인이 싸우는 모습을 애니가 보고 있었다.


“흠.”


그녀는 자신의 키보다도 높은 할버드를 세워놓고 있다. 어느 군대의 깃대던가, 혹은 텐트의 기둥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길이였다. 할버드의 날은 그녀가 옆에 세워두자 그녀의 정수리에서 머리 한 두어개 더 위의 지점에 있었다.


그립감 자체는 손아귀에 딱 떨어지며, 은은한 연두색 빛깔이 새어나오는 창대이다. 전체적인 색감은 철제의 물건임을 보여주는 듯한 은빛이었으나, 은은한 톤이 창대를 색다르게 보이게 만들었다.

도끼의 날 부분도 자세히 보면 안쪽이 더 짙고 검었고, 날 부분으로 보이는 외곽이 더 밝고 하얀 톤이다. 도끼의 머리 위에 있는 창날은 뾰족하고 은빛으로 빛난다.


할버드를 들썩, 들썩 하면서 슬쩍 움직이면서 애니 역시 움직일 때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길에 슬쩍, 아르망디가 걸린다.


아르망디 베샤민, 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아랍인 여자였다. 애니 미셀은 솔직히 그녀가 썩 믿음직스럽지는 않았다. 이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 자체가, 이런 오지의 전장에서는 P.K(Player Killing)을 막아줄만한 마땅한 억제력이 부족한 게임이기도 했고 말이다.


수많은 NPC와, 수 억에 달하는 플레이어들이 정밀하고 오묘한 상호작용을 하며 갖가지 시나리오를 만들어 낸다는 게, 듣기에는 최고의 자유도를 갖춘 세상 제일의 게임을 선전하는 문구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온갖 상황들을 겪어 본 중견 플레이어들의 눈에는 ‘언제 무슨 일이 터질 지 모르는 위험률 극상’의 서바이벌 게임이라는 말로도 보인다.


막말로, 이렇게 필드에서 모아서 급조한 파티원들 중 누군가는 도덕 수치가 악, 쪽으로 물들어 있고 암살자나 인류 진영의 숙적같은 클래스, 퀘스트를 진행하고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인류 진영은 하나의 큰 연맹이었고, 그 안에서 무수히 많은 전쟁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몬스터를 앞에 두고서는 일치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콘란드 대륙의 역사의 흐름이자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진지한 의미로,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고자 하는 미치광이는 적은 것이다. 안타까운 점은 ‘적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드물게 역사에서 자신을 비롯해 그저 모든 세계와 문명을 파괴하려는 정신나간 인간들이 있어 왔다.

그런 명맥은 현재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하고 있는 현대 콘란드에도 이어지고 있어서, 간혹 이상한 마이너 루트를 타며 플레잉 하는 유저들이 그런 길에 들어설 가능성도 있다.


애니는 그런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아르망디 베샤민의 표정이나 눈빛은 어딘지 냉혈한 같고 차가운 구석이 있었고,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감정적으로 교감이 일어난다는 느낌은 받을 수 없었다.

거기다··· 이렇게 레드 오크들을 해치우기 위해서 모두가 힘을 합하는 와중에도 힐끔힐끔, 오크가 아닌 제냐 킴이라는 작자의 뒤를 바라보는 점이 더욱이 그렇다.


힐끔이는 시선 자체는 별 일이 아니었으나, 한 가지 목적을 이루고자 한다면 둘 이유가 없는 곳에 시선이 간다는 게 찜찜한 구석이다.


애니는 베르망디를 향한 주시와 경계를 놓치지 않으면서, 페인의 말대로 자리를 지켰다. ‘먼저 치고 올게’라는 말의 뜻은, 자기 혼자 움직일테니 원거리 공격을 하는 술사들의 근처에서 호위를 계속 서고 있으라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페인은 뛰어난 검사였지만 두 개의 손과 한 개의 롱소드가 곧이어 계속해서 밀어닥치는 오크들을 모두 당해내고 있지는 못했다. 그가 레드 오크 무리에 휩싸여서 쉽게 게임 오버 당할 정도는 아니지만, 곧 그의 견제를 뚫어내고 이곳에 다가오는 오크들이 생겨났다. 애니 역시 할버드를 조금씩 흔들거리더니, 기어코 땅바닥에 둔 것을 들어 올려 앞으로 겨눈다.


묵직하고, 길다란 도끼창의 무게추와 같은 그 끝이 허공을 가르면서 훅, 하고 눕혀졌다. 애니는 한 손으로 그 움직임을 감당했다. 어느 정도 레벨이 오르고 나면 기사류의 클래스 플레이어들은 모두 초인적인 힘을 갖게 되기는 하지만, 애니는 개중에서도 근력 위주의 플레이어였다.

할버드는 상당히 무겁다. 일반적인 철로 이렇게 만들었을 때보다도 더. 그녀가 그렇게 만든 이유는, 단순히 공격력을 위함이었다. 그리고 MP반응성이 높고 강도도 좋으면서, 강력한 무기의 소재로 쓰일만한 광물이 무거웠던 탓이었다.


레드 오크 몇 마리가 페인을 무시하고 그들에게 다가선다.


애니는 기력술을 사용해 갑옷 전체에 두르고, 할버드의 칼날에 보내어 덧씌웠다. 푸르스름한 기력이 그녀의 몸을 휘두른다. 그녀 역시 페인처럼 판금 갑옷을 입고 있었다. 페인의 것보다 조금 더 두툼하고, 방어력이 좋은 편이다. 투구는 굳이 쓰지 않았다. 괜히 시야를 가리고 거치적거리는 느낌이었으니까.


진짜 전장이라면 머리를 가장 보호해야 할테지만, 여기는 게임 내였고 그녀는 잠시 들른 플레이어였으며 또 초인이었다. 단순한 이치에 사로잡힐 이유는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대로, 마음껏 운동 능력을 발휘하며 전투를 즐겨봐도 괜찮은 곳이라는 말이다.


묵직한 은빛, 혹은 회색빛. 그런 갑옷에 MP가 깃들었고, 애니가 뛰었다. 할버드는 상대를 밀어내듯이, 그 앞으로 겨눈 채 돌격이다. 기승 동물은 없었지만, 애니의 돌진은 그 자체로 흉포한 기세를 담고 있었다. 마치 말 위에 탄 기승병이 랜스 차징을 하듯이, 강력한 기세로 할버드의 날 끝이 레드 오크를 눌렀다.


고작 몇 걸음 만에, 일반 사람의 수십 보 거리를 좁혀들며 레드 오크 한 마리의 두터운 복부를 할버드 창의 말단이 찔렀다. 그것만으로 끝은 아니다. 기력은 응축하며 회오리친다. 푸르슮한 그것이 할버드의 끝에 모여들었다가, 터져나간다. 막대한 반발력을 나타내면서 상대를 민다.


배쉬bash, 스킬이었다. 단순히 강격의 영어를 뜻했지만 그녀가 사용하는 방식이 조금 달랐다. 강력한 저지력을 발휘하고 상대를 밀어내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할버드 창으로 쓰고 있으나 거대한 방패나 둔기를 사용해 발휘한다면 더 어울릴지 모른다.


기력은 예리함보다는 ‘후려치는’ 데 더 주안점을 두고 소모되고 있었다. 레드 오크는 내장이 짓눌리는 충격을 받으면서 “끄어어어어” 깊은 신음 소리와 함께 그대로 튕겨 나갔다.


거구가 날았다.


마치 공이 튕겨진 것처럼 상당한 반탄력을 가지고, 기력의 폭발로 인해 날았다. 곧이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박아 몇 번을 굴렀다. 오크의 배에 깊이 들어간 자국이 났다. 자국은 다시 살이 밀려 올라오며 사라지지 않았다. 그대로 흉터로 남았고, 내부의 장기가 부서지고 뼈가 부러진 듯 했다.


오크는 움찔거리며 죽지 않았음을 피력했지만 더 이상 일어서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레드 오크들은 흉포한 성격을 가졌고, 또 목숨을 도외시한 공격이 일반적인 공격 방법이었다. 악마종이라 불리는 것들은 특히 그렇고, 대부분의 몬스터들 또한 그렇다. 마치 전쟁과 전투를 위해서 태어난 악귀의 물질화와 같이 끝없는 야성을 보이며 덤벼드는 것이다.


콘란드 대륙 위의 인류들은 오래 전부터 그런 몬스터들과 무수한 전쟁을 벌여왔고, 때로는 이기고 때로는 패퇴했다. 그러나 지는 날보다 이기는 날이 훨씬 더 많았기에, 지금의 집단들이 번영을 맞이했다.

아직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오지가 많고, 몬스터들이 득시글대는 위험 지역들이 많기는 했으나 인류는 번성했다. 충만한 MP를 다루며 초상력학, 공학 따위가 발전했고 삶의 질이 올라가는 중이었다.


그와중에 나타난 수 억의 플레이어들은 인류의 좋은 동반자이자 동맹, 일꾼이나 전사가 되어서 몬스터들을 패퇴시키고 있었고.


게임 내, 인류의 역사의 전환점이 될만한 좋은 시기일지 모른다. 그런 깊은 생각까지 하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애니에게도 몬스터들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놈들이었다. 일부러 그렇게 느끼도록 흉측한 외형으로 디자인 해서 구현화시켜 둔 것 같기도 하다. 그로테스크한 면들도 있었고, 그 습성들도 일반적인 동물이라고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폭급하다.


악마종들은 교활함마저 갖추며 짐승치고는 손재주가 압도적으로 좋고, 또 무리 지어 사냥을 하기에 플레이어들도 보통 치를 떠는 놈들이었다. 아득히 약하고 작은 놈들이라면 몰라도, 어느 정도 위협이 되는 강함을 가진 데다가 그것들이 번식해서 압도적인 수가 되어버리면 그때부터 끔찍한 꼴이 되는 것이다.


애니도 초보자 시절 오크한테 몰려서 반대로 사냥을 당하듯 쫓겼던 경험이 있다. 성인이 된 이후이니 망정이었지, 담력이 약한 어린애가 그런 꼴을 당했다면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이었을 테다.

물론 그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 비련의 시나리오 속에는 여러가지 비쥬얼적, 시스템적 안전 장치들이 있기는 했다.


애니는 그대로 멍청하게 달려드는 옆의 오크에게 향한다. 할버드는 길게 휘두르는 무기였다. 거리감이 중요하다. 긴 거리를 먼저 점유하고, 완벽한 타점과 궤적에 상대를 끌어들여야 했다. 거대한 무기를 다루면서 플레이어에게 가장 요구되는 건 아이러니하게 섬세함이었다.


거대한 힘을 세밀하게 다루지 못한다면 그저 헛방만 날리다가 전투가 끝나버리고 말테니 말이다.


할버드를 그대로 앞으로 밀듯이 내민 채, 옆으로 이동한다. 그대로 길게 원을 그리면서, 먼저 걸리는 놈의 복부를 친다. 애니에게 다가오는 오크는 두 마리였다. 한 놈이 먼저 걸렸다. 배쉬 스킬은 연속적으로 발휘해도 그다지 부담이 가지 않는 스킬이었다.

기본 스킬을 능숙하게 익힌다, 라는 육성 스타일은 페인과 애니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론이었다. 제냐 역시 마찬가지다.


고수라고 불리는 레벨에 가까워질수록, 플레이어들은 기본기에 치중하게 되어 있다. 다양한 스킬들을 연마하는 일에도 게을리할 수 없었지만, 기본 스킬들은 그것 하나가 역량이 늘어나면 계통군 전체에 광범위한 상승 작용을 일으키니 말이다.


그대로 옆으로 길게 휘두른 할버드에 배쉬가 걸려 있다. 기력이 응축되었고, 다시 폭풍이 몰아치듯이 레드 오크 한 마리를 옆으로 날려버렸다. 배트에 걸린 야구공처럼, 다가오던 레드 오크는 다 헤진 철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이 완벽하게 분쇄되면서 옆으로 날았다. 애니에게 오던 오크가 그녀의 시선에서 왼 쪽에 한 마리 더 있었다.


보다 오른쪽에 있던 놈이 먼저 걸려 날았고, 그대로 애니는 힘을 더 실어서 기력을 폭발시켰다. 그렇게 많은 양이 들지도 않는 일이다. 쾅! 하는 폭음이 들리며 레드 오크에게 걸린 놈은 자신의 동료의 몸통 박치기에 당해 균형을 잃고 넘어져야 했고, 그 위로 튕겨나가듯 먼저 난 놈이 멀리까지 허공을 날았다.


쿠당탕, 하고 교통사고라도 난 듯 거체들이 이리저리 흐트러졌다. 오크들이 천천히 다가온다, 페인은 자신의 선에서 감당할 수 있을만큼 오크들의 어그로를 끌며 전선을 유지한다. 그러나 결국 혼자서 그 모든 오크들을 처리하는 건 넘치는 짐이었다. 근접 전투 클래스의 역할을 하는 파티원이 셋이라면, 공평하게 삼등분하는 것이 옳다.


페인은 천천히 오크들의 템포를 조절하듯 그들의 공격을 받아주고, 틈이 날 때마다 롱소드로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애니의 시선으로 봤을 때 삼, 사십 여 보 정도 더 떨어진 곳이었다.


오크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그에게 달려든다. 벌써 일고 여덞 마리가 어지럽게 페인을 둘러쌌지만 능숙하게 그 공격을 피해내고 있었다. 페인의 몸놀림은 잽싸고 유연하다.

언제 보아도 그랬다. 애니는 여성인 자신과 스타일이 바뀐 게 아닌가, 가끔 생각했다. 실제 게임 바깥 현실에서 그녀는 이처럼 힘을 중시하는 류는 당연히도 아니다. 운동에도 그렇게 재능이 있는가, 생각이 될 정도였고. 그러나 비련의 시나리오 속에서 주어지는 캐릭터의 신체를 가지고 마음껏 움직이는 건 재미있고 또 즐거운 일이었다.


애니는 자신 역시 느리게 뒤로 이동했다. 페인보다도 더 천천히였다. 결국 전선을 유지하고, 등을 맞대고 오크들을 죽이는 게 중요했다. 계속해서 화살을 쏘아내고, 뇌전의 일격을 우르릉 쾅쾅 거리면서 쏟아내는 두 사람에게 닿지 않게끔 하면서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함께 파티에서 전투하기로 한 아르망디 베샤민이 중요하다. 애니의 눈이 뒤를 향했고, 아르망디를 찾았다.


*


쾅, 쾅!


강렬한 폭음이 먼발치에서 들려왔다. 그건 초상 스킬이 터져나가는 소리였다. 뇌전의 기운은 땅이니, 움막이니, 오크니, 절벽이니 하는 데 들이박고 큰 소리를 내면서 주변을 초토화시킨다. 거기다가 제냐가 쏘아대는 화살도 평범한 것은 아니다. 기세가 매섭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오크들은 무언가 터져 나가는 게 아닌가 싶은 굉음을 내면서 땅바닥과 조우했다. 두 사람은 지금 이 순간에도 오크들을 계속해서 격살시키고 있었다.


연달아 화살을 쏘아내며 지친 기색도 없다. 제냐와 체인은 중간중간 인벤토리를 열어 푸른 물약을 마시면서, 계속해서 MP를 쏟아낸다.


아르망디 베샤민은 그런 광경을 보고 있었다. 자신의 정면에는 초상 스킬과 화살을 쏘아내는 원거리 딜러Dealer(게임 따위에서 공격 교환을 데미지 딜링으로 표현하며, 공격을 도맡는 사람)두 명이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왼 쪽으로 돌리면 저 멀리서 달려온 오크들을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는 두 명의 전사가 있었고 말이다.


아르망디는 느슨하게 쥔 숏소드 두 자루를 자신의 손아귀에 꼭 말아 쥐었다. 그립은 자유자재로, 약간은 여유롭게 쥐는 것이 가장 좋았다. 그녀의 검로는 변화무쌍한 편이었으니까. 일반적인 궤적으로 검격을 날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예측을 피하기 위해서 검이라는 도구를 쓰고 있을 뿐이었다.


일단은, 제냐에게 틈이 보이지 않았다.


아르망디는 계속해서 제냐 킴의 뒤를 보고, 그 뒷덜미에 자신의 칼을 꽂아넣을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생각보다 제냐라는 인물의 경계심이 높았다. 그 역시 머저리나 기억 상실증에 걸린 인간은 아니었기에 아르망디의 외견을 당연히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그녀는 오만했고, 또 방심했다. 암살 시도에 심혈을 기울여 성공하고자 했다면 외견이라도 차라리 바꿔서 그에게 다가가는 게 나았을 텐데. 꼴사납게 실패하고, 당장 흔들리는 정신머리를 붙잡기 위해 어둠숲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 또 예상치 못하게 조우하고 말았다.


제냐는 화살을 계속해서 쏘아내고 있었지만, 그의 MP는 상당히 정련된 기세였다. 흐트러짐 없이, 기사가 접근전을 준비하듯이 그의 신체 전반에서 웅웅거리며 울어대고 있다.


기력술을 쓸 줄 알게 되는 시점부터 전투라는 건 역시 MP의 교환이 되므로, 아르망디는 제냐가 다루는 MP의 흐름을 읽었다. 허점이 별로 없었다. 지금 당장 다가가서 칼을 찔러 넣어도 화살을 돌려 그녀를 쏘거나, 피해낼 테였다.


아르망디는 일단 암살 시도에 적합한 타이밍을 더 기다리기로 했다. 이대로 계속 지속이 된다면, 제냐를 게임 오버 시키는 것은 무리였고 그냥 말 그대로 파티 플레이를 다 하게 생겼다. 암살자라는 클래스는 리스크가 높은 직업이었고, 살아남는다면 가끔 유니크한 보상이나 많은 재물, 또 높은 공격력 스탯 따위를 얻게 되지만 한 번이라도 실패하고 잘못한다면 도리어 의뢰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될 수 있었다.


그녀에게 의뢰를 맡긴 이는 산슈카 국내에서는 적어도 손에 꼽힐만한 인간인 듯 추정되었고, 이대로 제냐를 없애지 못한다면 그녀의 목숨이 위험하리라. 쓸 데 없는 비밀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 그녀에게 공적으로 수배가 떨어진다거나 도리어 암살 대상이 되어서 쫓기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암살자라는 건 권력자들에게 다루기 쉬운 칼이기도 했고, 동시에 자신을 노릴 지 모르니 때가 되면 부러뜨릴 수도 있는 그런 취급의 도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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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그냥 뭐. 애니의 이미지에 닮아서 넣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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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92. 파이어 볼, 궁술 23.09.26 27 3 24쪽
92 91. 김세인 23.09.25 33 3 29쪽
» 90. 각자의 싸움 23.09.24 33 3 24쪽
90 89. 틈새 23.09.24 29 3 34쪽
89 88. 포격 23.09.24 28 3 25쪽
88 87. 레드 오크 부락 23.09.22 30 3 20쪽
87 86. 주변인들 23.09.22 33 3 19쪽
86 85. 검은 비검飛劍 23.09.22 35 3 30쪽
85 84. 단테스 무기상점 23.09.22 30 3 19쪽
84 83. 별 것 아닌 아이템들 23.09.21 30 3 19쪽
83 82. 흑사의 죽음 23.09.20 30 3 21쪽
82 81. 뱀(3) 23.09.20 27 3 20쪽
81 80. 뱀(2) 23.09.19 29 3 27쪽
80 79. 뱀 23.09.18 26 3 26쪽
79 78. 달칵 23.09.07 30 2 35쪽
78 77. 뒤꽁무니 23.09.05 32 3 31쪽
77 76. 암살자 23.09.02 37 3 42쪽
76 75. 어둠숲 23.09.02 31 3 31쪽
75 74. 헤어짐 23.09.01 31 3 32쪽
74 73. 프린스 알사드Prince Alsard. +1 23.08.31 37 4 55쪽
73 72. 퀘스트의 끝, 즈음 23.08.29 31 3 36쪽
72 71. 술래잡기의 끝 +1 23.08.27 32 2 41쪽
71 70. 술래잡기 23.08.25 28 2 23쪽
70 69. "…단장!" 23.08.25 25 2 21쪽
69 68. "작작해야지 새끼야…." 23.08.25 25 2 17쪽
68 67. 합류 23.08.25 25 2 18쪽
67 66. 황무지의 동굴 23.08.25 25 2 21쪽
66 65. U씨의 경우 23.08.21 28 2 20쪽
65 64. 생각보다 23.08.21 25 2 27쪽
64 63. 두 발째 23.08.18 28 2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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