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게임

새글

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최근연재일 :
2024.06.23 00:06
연재수 :
353 회
조회수 :
8,533
추천수 :
765
글자수 :
3,360,040

작성
23.08.25 14:08
조회
21
추천
2
글자
17쪽

68. "작작해야지 새끼야…."

DUMMY

*


"···어두운데."


동굴을 지난다.


자연적인 굴은 아니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져서 사실 동굴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고, 지하도로라고 해야 하리라.

그 상하좌우의 벽면과 천장, 바닥 따위가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작은 건물을 이렇게 만들기도 어렵고, 짧은 길을 형성하기도 힘이 들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이 걷고 있는 지하도로는 수십 km에 달하는 길이를 가지고 있었다. 보통은 사람의 발로 지나는 길이 아니었다. 매끄럽게 만들어진 바닥 위는 바퀴가 굴러 가기에도 적당했다.


말을 이용한다거나, 마차를 굴린다거나, 혹은 MP를 동력으로 하는 기계 장치를 이용한다거나 하는 게 적당한 길이다.


사람의 발로 걷는다면 적어도 수 시간 이상은 지치지 않고 걸어야 하리라.


다만 지금은 사람의 발이 그런 장치들에 뒤지지 않고 빠른 경우였다. 사람 중 하나는 애초에 인형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기도 했지만.


어두운데,


라고 말한 사람은 릿샤 애드윈이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반짝거렸다. 동굴은 간신히 길의 방향만을 알 수 있도록 전조등이 켜져 있었다. 미약한 세기로 길을 알리는 희미한 불빛이 땅에 박혀 빛나고 있었다.


통로를 따라 길게 늘어진 불빛이 점점이 이어진다. 흰 빛의 인도를 따라 끊임없이 달리고 있다. 불빛은 길의 형상을 알도록 해줄 뿐이며, 주변을 파악하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금 통로에 들어온 사람은 릿샤, 호아킨, 제냐, 개멋진나 최, 켄, 줄리앙, 중앙부의 근위 기사 셋, 그리고 안드레, 로웰 드버, 운트 작힘이었다.


갈색 사슴 기사단의 단원들을 비롯해 남은 사람들은 비전투 인원들과 함께 했다. 그들은 세슈칸 바깥의 은신처에 아직 남아 있었다.

수도로 보낸 지원 요청과 그리턴 가문쪽으로 보낸 것 중 어느 것이 먼저 닿아 지원이 올런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쪽이든 세슈칸 쪽으로 사람이 올 것이고, 전투 가능한 고급 병력이 포함되어 있을 테다.


은신처는 깨나 높은 바위산의 밑바닥, 그 틈새에 형성된 동굴이었다. 대략적인 위치를 지원 요청에 포함해 넣었다. 세슈칸의 서쪽 황무지 인근으로 그들이 오게 되면 발견할 수 있으리라.


바위산의 위쪽에서 경계를 서며 누군가 다가오는지 확인을 할 요량이었다. 혹여나 작힘군이 백작을 찾기 위해 주변을 이잡듯 뒤지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고, 지원 요청을 위해 보낸 연락이 중간에 도청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을 대비한 염려다.


운트 작힘 백작이 세슈칸을 넘어서까지 그 권력을 뻗칠 확률이 적기는 했지만, 그가 어떤 계열의 파벌에 속해 있는지 아직 정확하지 않았다.


중앙 부처에도 손길이 닿아있는 고위자가 그의 편이라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게 현실이다.


비전투 인원과 그들을 호위하기 위한 인력들이 은신처에 남고, 동굴과 같은 긴 지하도를 걷는 자들은 특별히 전투에 능숙한 자들이다.


사람이 굳이 많을 필요도 없었고, 운트 작힘 백작을 인질로 쥐고 있으니 최악의 상황에도 어떻게든 되리라.

'플레이어'인 제냐와 최태현이 일행의 다른 기사들에 비해 무조건 앞선다고 하기도 어려웠으나, 그들은 유저인만큼 전투에 능숙했다.


수많은 포션을 갖고 있었으며 초인적인 육신을 받아 이 게임 속 세상에 들어와 있다. 어지간한 상처는 흉터도 잘 남지 않는 데다가 고통을 적게 느끼고 자신의 스킬과 스텟의 보상을 정확히 이해하며 캐릭터를 키워나가는 전투꾼들이었다.


당장 익히고 있는 스킬의 가짓수나 종류를 따져 보자면 훨씬 더 많은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도 있었고.


호아킨은 한 마리의 거대한 늑대로 변해 달리고 있었다. 마치 말처럼 긴 거리를 주파하기에 적합한 형태였다. 일반적인 늑대보다는 장거리 주행에 능숙하다. 다리가 긴 다이어 울프였고 그 털 색은 검다. 푸른 눈동자로 어둠 속을 노려보는 인상이 매섭고도 매혹적이라 그것이 호아킨임을 모르는 자들이 본자면 맵 내에 있는 어느 신령한 짐승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무수하게 많은 다이어 울프를 사냥하고 개들 중 우두머리였던 어느 네임드 몬스터의 신체 일부를 소모해서 완성시킨 변신술이었다. 호아킨의 변신술사로서의 능력이 더해져 모체가 되었던 몬스터보다 훨씬 강력한 상태이다.


호아킨의 위에는 운트 작힘과 로웰 드버가 타고 있었다. 운트는 여전히 손발목이 은사로 묶여 있는 상태였다. 조금 더 본격적으로 최태현이 묶었기에 작은 움직임 하나도 스스로 하기 어려운 꼴이다. 운트 작힘이 얹혀진 상태에서 흔들리는 늑대의 등으로부터 떨어지지 않도록, 로웰은 늑대의 등털과 앞에 있는 백작을 잡아 고정하며 균형을 잡았다.


지하도로는 길다.


릿샤가 지루함을 불평으로 토해낼만큼 말이다. 어둡다, 는 말은 시야가 좁다라는 말보단 그런 뜻이었다.


제냐는 두 다리로 부지런히 앞서 달리고 있었다. 별다른 함정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운트 작힘은 정말 그들을 제대로 된 길로 안내한 모양이었다.


"······."


사람들은 별 말 없이 달린다. 각자가 가진 이동 계열 스킬이 달랐기에 달리는 모습들이 달랐다.

릿샤는 가벼운 돌멩이가 날아가듯 톡톡 튀는 움직임이었다. 메뚜기나 뭐 그런 류가 생각나기도 한다. 아니, 그보다는 토끼에 조금 더 가까울까.


최태현은 제대로 마라톤을 하는 인간처럼 양 팔을 흔들어대며 정식의 달리기를 했다. 동작이 번거롭지만 그다지 체력이 줄어 보이지는 않았다. 실제로 먼 거리를 이동할 때 마라톤에 관련된 스킬을 얻었기에 그대로 쓰고 있다.


제냐는 장거리 이동에 보법을 쓰고 있었다. 사실 보법은 전투 시의 근접 간격을 조절하는 스텝이었지만, 이동기로 쓰자면 못쓸 것도 없었다.

보법이 복싱의 풋워크처럼 전투 시에 써먹는 스킬이라면, 이동용에 보다 적합한 스킬로는 경공이 있었다.


중국의 역사, 혹은 그 나라에서 만들어진 판타지 장르에서 따온 수법들이다. 몸을 가볍게 만들어 먼 거리를 쉽게 이동한다는 의미의 기술을 말함이었고, 콘란드 대륙에서도 동일한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어차피 무협이라는 장르에서 파생되는 이야기였으므로 비슷한 점이 많았다. 보법류나 경공류나 말이다. 둘 중 한 계열의 스킬을 익히고 자주 사용한다면 다른 하나도 머지 않아 얻을 확률이 높다.


보법 스킬을 사용해 장거리 달리기를 하는 제냐의 신형은 묘연하다. 하체의 흔들림이나 분주함이 상체까지 곧이 전달되지 않는데, 특수한 형식의 춤이라도 추는 것과 비슷하다.

달리는 도중 마치 유령처럼 홀연히 하체만 움직여 앞으로 나아갈 때가 있었다. 상하체나 몸의 각 부를 분절해서 움직이는 춤과도 닿아있는 형식인데, 고도로 익숙해지면 다른 부위의 움직임을 보고 공격 자세를 예측하는 상대의 수법을 무력화하기에 좋다.


보법을 사용하는 건 다른 본격적인 이동기를 사용하는 일에 비해서는 스테미나 효율이 좋진 않았지만, 그냥 냅다 달리는 것보다야 괜찮은 일이었다.


불규칙적인 움직임으로 제냐가 동굴 속을 나아간다.


운트 작힘 백작은 실로 팔다리와 몸통이 전부 묶여 있었다. 짐짝같은 신세였다. 물이라도 주고 약간의 음식물을 주기는 했지만 고생스러울 것이다. 그는 조금 더 고생스러워도 좋았다. 그 하나 때문에 다른 이들이 치러야 했던 시간에 비한다면.


호아킨의 등에서 그 늑대가 움직이는 대로 몸이 팔랑거린다. 그 움직임을 로웰 드버가 잡아주고 있었다.


작힘 백작 스스로가 상당한 수준의 무술가가 아니었다면 배겨내기 힘든 취급이었을 테다. 그 역시 기력술을 다루는 인간이다. 다만 은사라는 최태현의 아이템이 어지간한 중수급 캐릭터 아래까지 모조리 결박할만한 물건이어서 힘을 방휘하지 못할 뿐이다.


터널이 길었다, 참으로.


안드레는 어제 오늘 다양한 방법으로 작힘 성에 침투를 해본다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정문을 통해서만 평범하게 들어왔는데, 참으로 색다른 경험들이다.


이런 지하도로가 있다는 것도 그레이 하운드 기사단에 입단한 뒤 은연중에 들었을 뿐이지, 그 정확한 위치나 상세한 정보를 알지는 못했었다.


가주가 위기 상황 때 대피용으로 쓸 통로를 거꾸로 들어와 작힘 성을 침입하다니. 거기다···


그가 흘끗 거리며 뒤에서 달리는 검은 빛의 다이어 울프를 처다보았다. 어두움에 섞여 유연한 몸짓으로 달리는 그 주행이 잘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그 위에 자신이 모시던 주군이 묶인 채 있다는 걸 안다.


"······."


기이한 경험이었다, 참.


물론 직접 묶인 채로 늑대 위에서 머리가 계속 흔들리고 있는 작힘 백작보다야 덜 희귀한 경험일 테지만.


"큽."


마침, 운트 작힘은 덜컹거리는 등허리의 충격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으면서 몸이 반으로 계속 접혔다 펴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격한 헤드 뱅잉을 계속하고 있노라니 토악질이 마려웠지만, 불행히도 먹은 것이 딱히 없었기에 속이 비어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토사물로라도 그를 잡은 무도한 무리들에게 반항을 하기가 어려웠다.


어질거리는 머리는 나름대로 고련이란 고련을 다 겪어본 그로서도 상당한 고통이었다.

잠깐이 아니라 오래도록 반복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타이밍에 맞추어 계속 덜컹거리고 고개를 가누기도 힘드니, 자연스레 입이 벌어졌다. 백작은 자신의 혀를 씹어 뱉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가능한한 균형을 잡고 애를 쓰면서, 그 시간을 버텼다.


*


"······."


그리턴 그리섬은 자신의 미간을 손으로 문지르다가, 눈가를 지그시 그대로 눌렀다. 피곤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런 피곤함을 준 건 별 것 아닌 종이 한 장이었다.


중앙 부처로 세슈칸에 파견되었던 칼젝이나 킬이 연락을 보내왔다. 지원 요청에 대한 것이었고, 짧은 몇 개의 문장으로 지방의 상황을 담아서 같이 보냈다.


세슈칸같은 주요 도시 거점에는 중앙과 연락이 편하도록 부서마다 도움을 주는 지부 격을 만들어 두는 일이 잦았다. 법무부 역시 마찬가지다. 중앙에서 일하는 자들보다는 훨씬 말단이고, 부처의 직접적 업무에 대한 지식이나 권한이 있는 이들은 아니었다.

단순하게 고용된 계약직이나 일용직에 가까운 이들이고, 그곳에서 실제 살고 있는 주민들 중에서 적법한 자를 골라서 인원을 채웠다.


연락, 통신 기기 또한 설비가 되어 있었고 파견된 법관이 그것을 이용해서 연락을 보낸 모양이었다.


단순한 지원 요청이라면 응급 용의 장치였고, 아주 단순한 빛 신호만으로도 의사 전달이 가능했기에 법관이 직접 들고 움직였다.


일단 칼젝의 것과 킬의 것 모두 지원 요청을 보내왔다. 둘 중 한 가지가 신호를 울렸어도 좋았을 일인데, 두 물건 모두 사용했다는 점을 보니 사태가 안좋다, 는 뜻으로 들렸다.

그리고··· 연락 용의 기기로 보내온 정보는 깨나 파격적이었다.


킬 드로얀이 죽었다.

그는 살해당했고, 아마 작힘 백작의 짓이다.

로멜리아 가문과 함께 하고 있다.

운트 작힘 백작을 치기 위한 병력이 필요하다.

지원이 늦어질 경우, 그들끼리 사적인 조치를 위해 먼저 움직일 것이다.


'······.'


대강 그런 내용의 정보를 보고서로 정리해서 부처의 하급자가 차장관인 그의 업무 책상 위로 올려주었다.


산슈카의 백주대낮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고 쉽게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사건들이다.

그의 사촌, 그리턴 자작의 요구에 의해 로멜리아 가문과 얽힌 일의 진상을 파악하려 보낸 자들이었는데.

그들에게까지 운트 작힘 백작이 손을 대었다?


대영주라 할 지라도 막나가는 처사였다.


아직 명확하게 재판으로 밝혀진 일이 아니라곤 하지만, 칼젝 벤더스가 상관의 죽음을 두고 거짓을 고할 동기는 딱히 없었다.


이미 칼젝은 로멜리아 가문 측의 의견을 사실로 여기고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다. 법관이 현장에서 사사로운 판단을 한 뒤 함부로 움직이느냐, 고 굳이 책을 잡자면 잡을 수는 있겠지만 애초에 이 시대에 법관을 파견한다는 건 그런 일이었다.

스스로 가서 두 눈으로 보고 움직이라고 중앙의 관리를 지방으로 보낸 것이었고, 그 일을 위해 법관들은 산슈카 국법 총론을 인이 박히도록 공부한다.


성문법만이 아니라 실제로 적용된 다양한 판례와 법리, 그 법 너머에 있는 산슈카 국의 문화나 법철학까지를 이해한 자들이 보통 법무부의 법관들이었다.

중앙에서 말단 관리처럼 부려지고 있다고 정말 그가 한미한 직위인 것은 아니었다. 다른 곳에 간다면 모두 '관'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처럼 대우를 받는다. 즉각적인 판단이 요구된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그들은 현장의 재판관 임무를 대리 수행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위한 증거 기록 아티팩트가 그들에게 주어지고, 추후 현장 판결에 문제가 있었다고 여겨지면 다른 이들보다 더 엄정한 법의 처벌을 받기야 하겠지만은.

칼젝이건 킬이건 믿을만한 놈들이었다. 나름대로 오래 본 놈들이기도 했고.

자신들의 목에 칼이 좀 들어온다고 의리나 정의를 배신할 만한 성격들도 아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렇지···.


[세슈칸 시 작힘 성. 외벽과 본성 건물 대파. 내부 병력 초토화. 수많은 주민들과 여행객들이 동일한 증언.]


"···후우."


거대한 사건은 굳이 칼젝이 보고하지 않더라도 정확한 정보로 그에게 올라왔다. 말했듯 여러 부처의 지부가 각 대도시에 주둔하고 있다. 엄밀히 말해 제대로 된 업무가 가능한 조직은 아니더라도 소식의 전달 정도는 가능한 정도로.


세슈칸에서 일어난 사건은 무수한 주민들과 여행자들, 내외국인들이 동시에 목격한 모양이었다. 수 만이 넘는 인파가 매일같이 움직이고 있는 대도시의 가도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그 많은 이들의 정신과 증언을 조작할 수 있을 정도라면 대도시의 성이 파괴된 것보다 더 큰 일이리라.


고로 올라온 정보는 사실이라고 보여진다.


그리섬은 칼젝 쪽에서 올린 보고의 내용과 다른 부처나 정보 경로를 통해 올라온 보고서를 번갈아 보았다.


지원이 늦어지면, 사적 조치을 먼저 할 수 있음.

세슈칸 시 작힘 성 대파.


"······작작해야지 새끼야···."


법관과 지방의 대귀족과의 관계는 늘 서로 으르렁거리는 원수와 비슷했다. 왕실과 국가의 권위를 등에 지고 온 재판관의 판결이 엄정할 지라도, 지방의 권력자는 늘 더 복잡한 확인 절차를 요구하게 될 테니까.


그들은 적어도 가능한 모든 유리한 절차를 요구하고, 또 그로 인해 법망의 빈틈을 파고들어 자신들에게 득이 되는 판결을 이끌어 낼 힘들이 있었다. 늘 산슈카의 법치란 그런 자들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이번 일 역시 정확한 사태를 파악한 뒤에 운트 작힘의 변을 듣고, 지지부진한 재판 과정 끝에 로멜리아 가를 위한 선처를 조금 판결하며 끝이 났을 사건이었다.

빈자와 부자가 함께 재판정에 선다면 아무래도 어쩔 수 없다. 법치와 정의가 살아있다면 그 판결이 뒤집힐 수는 없어도, 덩치가 큰 쪽은 돈을 제물로 내어주고 자신의 죄를 최대한 경감시키려 할 테다.


그런데 칼젝 벤더스가 예상 이상으로 더 머리가 돌아버린 모양이었다.

그만큼, 킬 드로얀이라는 상관은 그에게 있어서 애틋한 동료이기도 했을 것이다.


어떤 일에 있어서 그 직업적 정의와 가야할 길을 일러 주는 스승이나 선배는 때로 거대한 그늘로 누군가의 마음에 남게 된다.

연인간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런 상위자의 배려나 마음 씀씀이는 큰 사랑으로 아래에 있는 이들에게 각인되는 법이다.


킬은 칼젝의 좋은 선배이자 동료이고, 선생이자 친구인 뭐 그런 사내였다. 그리섬도 둘을 잘 안다.

품성이 괜찮은 놈들이었고 콤비였으니, 시간이 더 지난다면 순조롭게 승진을 해서 나중에 상황이 허락한다면 자신이 앉은 자리에 앉혀도 되겠다 생각했었다.


법무부의 인재 하나가 사라진 것은 그로서도 뼈아픈 손실이다. 가깝게 지냈을 칼젝의 마음은 이해가 간다.

그런데 그 구멍난 마음이 조금 지나쳐서, 작힘 성이라는 산슈카 국의 귀중한 유물에 거대한 구멍을 내버린 모양이었다.

그가 함께하는 로멜리아 가문의 일원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수도 사르삿 금사자궁 내부에 앉아 있는 그로서는 정확히 알 길이 없었다.


거대한 석조 건물에 구멍을 낸다던가, 한 채를 반파시킨다던가, 하는 소식을 들어보면 거진 왕실 연구회 소속의 술사가 함께 하는 게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어디서 그런 막강한 전력을 조력으로 얻어냈는지.


칼젝이 죽지 않은 건 다행이다.


그리섬 그리턴은 좋아해야 할 지 아니면 다른 감정을 느껴야 할 지.

세슈칸 시로부터 오고 있는 보고들 속에서 애매한 감정을 느끼며 다시금 차 한 잔을 찾았다.

윗대가리 역할이라는 건 늘 이렇다. 아래에서 사고 치면 머리털만 빠지는 일상인 것이다.


*

sebastian-marx-3w8eCQgX_4c-unsplash.jpg


작가의말

애정이 담긴 말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84 83. 별 것 아닌 아이템들 23.09.21 25 3 19쪽
83 82. 흑사의 죽음 23.09.20 24 3 21쪽
82 81. 뱀(3) 23.09.20 22 3 20쪽
81 80. 뱀(2) 23.09.19 25 3 27쪽
80 79. 뱀 23.09.18 23 3 26쪽
79 78. 달칵 23.09.07 28 2 35쪽
78 77. 뒤꽁무니 23.09.05 30 3 31쪽
77 76. 암살자 23.09.02 35 3 42쪽
76 75. 어둠숲 23.09.02 29 3 31쪽
75 74. 헤어짐 23.09.01 29 3 32쪽
74 73. 프린스 알사드Prince Alsard. +1 23.08.31 35 4 55쪽
73 72. 퀘스트의 끝, 즈음 23.08.29 29 3 36쪽
72 71. 술래잡기의 끝 +1 23.08.27 27 2 41쪽
71 70. 술래잡기 23.08.25 25 2 23쪽
70 69. "…단장!" 23.08.25 23 2 21쪽
» 68. "작작해야지 새끼야…." 23.08.25 22 2 17쪽
68 67. 합류 23.08.25 22 2 18쪽
67 66. 황무지의 동굴 23.08.25 20 2 21쪽
66 65. U씨의 경우 23.08.21 24 2 20쪽
65 64. 생각보다 23.08.21 22 2 27쪽
64 63. 두 발째 23.08.18 23 2 36쪽
63 62. 전투, 전쟁 23.08.18 23 2 19쪽
62 61. 일점돌격 23.08.17 24 2 29쪽
61 60. 돌입 23.08.16 23 2 16쪽
60 59. 태양의 숨결, 폭풍의 한 자락 23.08.16 52 2 24쪽
59 58. 릿샤Rissha의 방 23.08.16 20 3 17쪽
58 57. 사연 23.08.13 29 3 24쪽
57 56. 누군가의 죽음 23.08.13 24 3 13쪽
56 55. 어느 법관의 정의正義 23.08.13 23 3 27쪽
55 54. 돌아가는 길 23.08.13 22 3 1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