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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봉이 님의 서재입니다.

백색의 황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수비니어
작품등록일 :
2015.04.16 22:49
최근연재일 :
2015.06.12 00:32
연재수 :
41 회
조회수 :
8,721
추천수 :
193
글자수 :
215,817

작성
15.06.05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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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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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8)

DUMMY

봄의 제전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요즘 세라피나는 무척 바빴다. 이때만 지나면 별 일이 없는 한 늦여름까지는 한가하다고 하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었다.


제전을 준비하던 초기에는 루텐 사제를 매일 한 번 씩은 만나서 제전 준비에 대한 일을 상의하곤 했었는데 막바지가 되자 오히려 그를 만날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벨라니스에서 돌아오고 나서 그를 제대로 마주친 적이 전혀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 신전에 들어오고 나서 그를 피해 다녔을 때는, 오히려 하루에 두 세 번은 마주치곤 했었다. 그리고 달빛 아래에서 마주친 그날 이후 그를 대하는 것이 조금 편해졌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그는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를 피해 다니던 때는 그때대로 성가시고 신경이 쓰였으나, 전혀 마주치지 않고 있는 지금, 마음이 편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신경이 쓰였다.

그렇게 쓸데없이 마음을 쓰고 있는 자신이 못마땅하기도 해서 요즘 그녀는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를 마친 후 여사제들이 평상시에 입는 짙은 회색의 사제복을 입고 오전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대성전으로 향했다. 그녀가 입은 사제복은 예배 집전 시에 입는 격식 있는 사제복과는 달리 소매의 폭이 좁고 무릎 약간 밑으로 내려오는 짙은 회색의 원피스였다. 이미 많은 사제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기에 세라피나는 조금 뒤쪽에 있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예배시간이 되자 성가대의 노랫소리가 대성전 안 가득히 울려 퍼졌다. 성가가 끝을 맺고 예배를 집전할 주임사제가 제대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 섰다. 소매가 좁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새카만 사제복 위로, 양쪽 어깨에 걸쳐 두른 황금빛의 스톨을 무릎 위까지 길게 드리운 복장의 시어스 루텐이었다. 둥그런 백색의 모자 아래로 밝게 빛나는 금빛 머리칼과 같은 색의 스톨이 검은색 사제복과 대비가 되어 더 찬란하게 보였다. 그의 등 뒤에서 태양신 라일의 형상을 조각해 넣은 오색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은은하고 아름다운 빛을 내며 성스러움을 더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서 있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해 보일 정도로 기품 있고 고귀해보였다.


오늘 집전 사제가 그 일줄 몰랐다. 고위사제과정 수료가 이제 일 년이 채 남지 않았으니 이제 이런 대규모 예배도 집전을 할 수 있게 된 듯싶었다. 오랜만에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있었다. 반갑기도 하고 멋진 모습에 아주 조금 마음이 간질거려서 살짝 미소를 띤 채 그를 응시했다.


그의 차가운 표정 때문에 잘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얼굴이 조금 야윈 것 같았다. 그가 들려주는 중저음의 낮은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까지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시어스는 전혀 막힘없이 능숙하게 예배를 이끌어 나갔다. 세라피나는 예배를 마치는 성가를 끝까지 듣고 조금 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돌아서 대성전을 나가는데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챈튼 사제님.”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시어스 사제가 반듯하게 서서 냉랭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서있었다. 세라피나는 미소를 띠우고 그에게 대답했다.


“예. 부르셨습니까?”


그가 몇 걸음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는 세라피나를 잠시 아무 말 없이 차갑게 내려 보았다. 세라피나는 그의 냉랭한 눈빛에 약간 오싹해지는 긴장감을 느꼈다.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왠지 자존심이 상해서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았다. 자신은 적이나 배신자를 처단할 때 그들의 핏발이선 증오가 가득히 차올라 있는 눈빛에도, 독기어린 끔찍한 저주의 말을 들어도,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았었다. 그가 자신을 왜 이렇게 보는지 의아했으나 물러서기는 싫었다.


달빛 아래에서의 그날 조금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었다. 서로 조금은 편해졌다고 여겼는데 이러는 이유를 전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레온은 예배를 집전하면서 그녀 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예배당의 앞쪽에 서서 집전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그녀가 들어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보지 않으려 애를 써도 저절로 향하는 눈길을 막을 수 없었다. 그녀가 다른 사제들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는 모습에도, 지금 자신을 보며 미소를 띠우는 것에도 너무 화가 났다. 그녀의 가녀린 두 어깨를 잡고 흔들며 소리를 치고 싶을 정도였다. 그녀를 마주보고 서있으니 그때 그녀를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안고 키스를 하는 그 자식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의 동그란 이마에 흔적이라도 남은 듯 눈길이 갔다.


‘그래, 이제는 인정해야겠다.. 난 그녀가 갖고 싶다.’


치가 떨릴 정도로 거부감이 드는 아르미티즈의 이름을 이용해서라도 그녀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한번 이용했다. 그녀 곁을 얼쩡거리는 카일을 얼마 전에 치워버렸다. 카일은 지금 약혼문제 때문에 급하게 수도에 올라갔으니 당분간은 그녀 옆에 서있는 것을 볼 일이 없을 것이다.


“하실 말씀이 있는 것 아니었나요?”


“...주교님께서 오늘 잠깐 말씀을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오후에 보좌실로 오시면 됩니다.”


“예. 그럼 오후에 뵙겠습니다.”


세라피나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한 후 돌아섰다.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조금 힘을 주어 잡았던 탓에 몸이 살짝 그에게로 돌아갔다. 세라피나는 손목을 잡힌 채로 불쾌함에 인상을 쓰고 그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죠?”


레온은 그녀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를 보고 있으니 화가 났다. 다시는 뒤돌아볼 것 같지 않은, 냉랭하게 등을 돌린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잡았다. 그녀를 잡아 끌고 대성전 건물 뒤쪽으로 돌아 한적한 정원으로 들어갔다. 이목을 끄는 것이 탐탁지 않은 듯 그녀는 전혀 소리치지도 억지로 손을 빼려고도 하지 않았다. 정원에 이르러서야 잡고 있는 손을 뿌리치고 자신을 노려보았다.


“자, 이제 이 무례한 행동에 대한 해명을 하시죠. 명확한 사유가 없다면 징계를 면하기 힘드실 겁니다. 절 납득시키지 못 하신다면 지금 바로 징계위원회에 회부할 겁니다.”


“주교가 되려고 하는 겁니까?”


그의 냉랭한 시선이 그녀의 얼굴위로 내려앉았다.


“그걸 왜 루텐사제께 말씀드려야 하는 거죠?”


“보좌관실 모두가 그러더군요. 챈튼사제를 델로사 신전에서 주교로 추대하려 한다고 하던데, 주교자리 포기하시죠.”


“예? 정말 어이가 없군요. 제가 그래야할 이유라도 있나요?”


“그 자리는 챈튼사제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건 루텐사제가 판단하실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아무런 관계도 아니잖아요?”


“어리석군.. 그 자리에 어리고 배경 없고 신성력만 강한 챈튼사제를 대체 왜 추대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렇게도 마리오네트가 되고 싶은 건가? 그런 권력이라도 탐이 나나?”


그의 신랄한 말에 세라피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가 다시 그를 차갑게 응시하며 말을 했다.


“마리오네트가 되든 권력을 탐하든 모두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실 말씀이 그것뿐이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번 일은 넘어가드리겠지만 이런 식으로 한 번 더 제게 무례하게 대하신다면 다음엔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겁니다.”


세라피나의 차가운 말에 레온은 가슴이 선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화풀이를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자신조차도 이런 자신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서 오래되고 낡은 첨탑 끝에 외발로 서 있는 것처럼 불안했다.


아직 거취에 대해 어떻게 할 지 결정을 내린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르미티즈를 선택하거나 버리거나 둘 다 섣불리 결정할 수가 없었다.


케일럽은 셀레나를 만나게 한 이후로 더 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씩 마주치는 눈빛에서 느껴지는, 그 미안함과 궁금함을 내비치는 그의 복잡한 감정이 자신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그녀를 이곳으로 무작정 끌고 왔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충동적이었지만, 사실 전부터 그런 권력의 진흙탕 속으로 그녀가 들어가는 것이 싫었었다. 가문의 힘도 없는 그녀가 이리저리 휘말리다가 최악의 경우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상당히 독실해 보이는 그녀에게 진실을 알릴 수는 없었지만 교단의 교리에 깊이 빠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과할게요. 미안합니다.”


세라피나는 돌아서려다가 갑작스러운 사과에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하고 차가워보였지만 가라앉은 눈빛 때문에 지쳐보였다. 그녀의 화난 감정은 갈 곳을 잃어버리고, 어느새 불편함이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분명 무언가 큰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 동안 몇 번 마주치지는 못했으나 볼 때마다 그 특유의 당당함과 여유로움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날카로워 보였고 많이 지쳐보였다. 항상 같이 다니던 장난기 많아 보이는 사제도 요즘엔 그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것 같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말을 했다.


“세라피나라고 불러요.”


갑작스러운 말에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 보았다.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담고 있던 그의 눈빛에서 흔들림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세라피나는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내가 싫다고 해도 다들 그렇게 부르는데 한사람쯤 더 이름을 부른다고 이젠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요. 대신 저도 시어스 사제님이라고 부를게요.”

“아니, 레온이라고 불러요. 시어스는 제 미들네임이에요. 세라피나는 레온이라고 불러요.”

“아...네. 그럼 저는 가볼게요. 오후에 보좌관실에서 봐요. 레온.”


세라피나는 웃으며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정원을 나섰다. 그런데 정원을 나서자마자 그와 거리를 두기로 결심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한 자신이 못마땅해져서 후회를 하고 말았다. 그래도 걸어가는 발걸음만은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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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7) 15.05.11 245 4 12쪽
31 (6) +1 15.05.09 185 6 14쪽
30 (5) +1 15.05.06 221 5 10쪽
29 (4) +1 15.05.04 212 5 14쪽
28 (3) +1 15.05.01 233 5 12쪽
27 (2) +2 15.04.29 216 5 13쪽
26 붉은 빛의 세라피나 (1) +1 15.04.29 210 7 13쪽
25 (7) +3 15.04.27 251 5 21쪽
24 (6) +1 15.04.26 248 5 14쪽
23 (5) +1 15.04.25 220 6 11쪽
22 (4) +2 15.04.24 110 5 13쪽
21 (3) +2 15.04.22 253 4 9쪽
20 (2) 15.04.21 248 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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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7) +2 15.04.20 230 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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