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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봉이 님의 서재입니다.

백색의 황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수비니어
작품등록일 :
2015.04.16 22:49
최근연재일 :
2015.06.12 00:32
연재수 :
41 회
조회수 :
8,720
추천수 :
193
글자수 :
215,817

작성
15.05.17 14:16
조회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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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
12쪽

(2)

DUMMY

신전에 들어온 지 두 달만의 외출이었다. 봄꽃이 필 무렵 들어왔는데 꽃들 사이로 보이는 초록색 잎사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렇게 봄꽃을 한가롭게 보고 있는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그동안 꽃이 피는지 눈이 내리는지 전혀 신경 쓰지도 못하고 살았었다. 다만 계절의 변화에 따라 추우면 추운대로 더우면 또 그대로 모든 것이 성가시게 느껴지기만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여유가 생겨서인지 새삼 화사한 봄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후후... 세라피나는 꽃을 상당히 좋아하나 봐요. 창밖 풍경에서 눈을 못 떼고 있네요.”


엘리사는 오랜만의 외출에 평소의 차분한 모습과는 달리 기분이 좋아 보이는 세라피나를 보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세라피나는 자신보다 세 살은 어린 나이임에도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항상 신중하고 차분했다. 어떤 때는 그 나이의 소녀라고는 느낄 수 없을 만큼의 깊은 눈빛을 보일 때도 있었다.


챈튼가는 유명했다. 평민출신임에도 거대한 상회를 운영하며 최근 3, 4년 만에 벨라니스 뿐만 아니라 델로사나 갈라고스의 상권을 빠르게 장악하고 있었다. 그 뒤를 봐주는 다른 돈줄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검은머리의 챈튼은 어쨌든 수완 좋기로 유명했다. 상회의 주된 품목들이 귀족들이 주로 사용하는 종이나 사치품들이었기에 델로사의 귀족 사이에서도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반면 그의 가족은 알려진 바가 없어서 외동딸이 있다는 것도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런 부유한 집안에서 평민임에도 신성력 각성을 한 딸이 있다는 소문은 귀족들의 사교계에서도 아주 떠들썩했었다. 게다가 눈으로 아직 확인해 보지는 못했으나 그 신성력이 주임사제들의 것을 웃돌 정도라니, 그 재력에 고위귀족이 될 신성력까지 갖춘 딸을 두고 있는 윌리엄 챈튼은 차기 민회의 의원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그런 집안에서 자란 아가씨가 왜 저렇게 성숙한지 의아했으나 그녀 어머니의 정신병력이 알려지면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수도원에서 자랐다고 하니 조금은 안쓰럽기도 했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그동안 전혀 못 느끼고 살았던 것 같아서 조금 서글퍼져서요.”


“어이구. 성력이 높아서 오래오래 살 텐데 앞으로 많이 즐기면 되죠. 뭘 우울해하고 있어요? 이제 한창 좋은 열일곱이면서...”


세라피나는 그저 빙긋 웃으며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덜커덩거리며 굴러가는 마차의 바퀴 소리만이 들려왔다.


‘후후... 글쎄요... 내가 그렇게 즐기면서 살 수 있을까요?’


자조어린 웃음을 입가에 지으며 떨어지는 꽃잎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곁에서 떠나간 사람들이 떠올랐다. 습관적으로 옷 속에 숨어있는 로켓펜던트를 한 손으로 더듬었다. 그 안에 있을 이블린과 이베트의 얼굴을 떠올리면 진정이 되었다. 그럼에도 자꾸 가라앉는 기분에 다른 생각을 하려고 노력을 했다. 그런데, 떠오르는 것이 시어스 루텐이었다.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며칠 전에 카일러스, 엘리사와 함께 아침 예배가 끝나고 대성전을 나와서 그 앞의 분수대에서 웃으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세라피나, 어제 빌려준 책은 읽어봤어요?”


“아, 아직 못 읽어봤어요. 어휴... 정말 생각보다 할 일이 많더라구요. 저는 3년간 쉰다고 생각하고 들어온 거였는데, 휴식은커녕 논문 쓰느라 일하느라 정신이 없어요.”


“후후후.. 사실 지금이 일 년 중 두 번째로 바쁠 때라서 그래요. 이번 봄 제전만 끝나면 한가해질 테니 너무 상심 말아요.”


엘리사의 상냥한 말투에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투정을 부리게 되었다. 그 날 이후 지금까지 억지로 어른이 되어야 했기에, 딜런이 아닌 타인에게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이 스스로도 조금은 신기했다.


“어어? 그런데 두 사람 뭐예요? 서로 이름 부르는 거예요? 챈튼 사제님! 저한테는 항상 거절만 하셨잖아요. 와... 지금 차별하는 거예요?”


카일러스가 굉장히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똑바로 보며 불평하는 투로 말했다. 조금 멋쩍어졌다. 사실 항상 그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건 것도 있었지만, 대화를 가장 많이 나눈 상대도 그였고, 그는 언제나 혼자 있는 자신을 먼저 챙겨주기도 했었다.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엘리사, 내 말이 맞죠? 지금 챈튼 사제가 차별하는 거죠?”


“후후... 세라피나 나이도 같은데, 그냥 친구로 지내요. 계속 얼굴 볼 사이인데 친하게 지내면 좋지.”


조금은 어색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두 명이 같은 말을 해서 더 이상 거부하기도 힘들었다. 앰브로스의 작위와도 멀다고 했으니 조금은 가까워져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 알기에도 앰브로스의 직계에는 카일러스라고 하는 이름은 없었다.


“그래요. 그럼 카일러스라고 부를게요.”


“와... 이름 한 번 부르기 정말 힘드네요. 세라피나.”


카일은 싱긋 웃으며 이름을 불렀다. 잘생긴 얼굴에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니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와... 목소리가...’

붉어진 얼굴을 손등으로 가리며 몸을 돌렸다. 그런데 대성전에서 나오고 있는 시어스 루텐이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는 그 옆에 있던 밝은 갈색 머리의 사제에게로 고개를 돌리고는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시큰둥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걷고 있던 남자 사제가 뒤를 돌더니 자신을 힐끔 쳐다보고는 씨익 웃고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언제 봤다고 저런 가벼운 행동을 하나 싶어서 황당해졌었다.





그날 저녁에 확정된 예산안을 가지고 주교 보좌관실을 찾았다. 또 어떤 트집을 잡을까 싶어서 문 앞에서부터 조금 긴장이 됐다. 노크를 하기 전에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 번 가볍게 두드린 후 안으로 들어갔다. 보좌관실에는 다섯 명의 사제가 각자 자리에서 업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세라피나를 모두가 쳐다보았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자 그 중의 한 사제가 벌떡 일어나서 다가와 반갑게 말을 걸었다.


“아. 세라피나 사제님. 몇 번 오셨다고 들었는데 그때 마다 제가 자리를 비워서 엄청 안타까웠었는데... 이제야 간신히 만나네요. 그때 환영회에서 인사했었죠? 브라이스입니다.”


“아. 브라이스 사제님. 기억나요.”


세라피나는 빙긋 웃으며 예의바르게 인사를 했다. 느닷없이 이름이 불리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저희 부서에 여사제가 없어서 기대했었는데, 의전 제례 부서에 들어가셨다고 해서 정말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자주 오신다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하하하...”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 조금은 황당했지만 그냥 예의바른 미소를 지었다.


“업무 보러 오신 것 아닙니까? 따라오십시오.”


루텐 사제가 옆으로 와서 살짝 자신의 시야를 가렸다. 세라피나는 브라이스와 눈인사를 하고는 그를 따라 나갔다. 그는 보좌관실을 나가서 바로 옆에 있는 회의실로 안내를 했고 그곳으로 함께 들어갔다. 몇 번 오갔지만 회의실에서 업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라 조금은 의아했다.


넓은 회의실 테이블 한 쪽에 자리를 잡은 시어스가 서류를 건네받아 한 장씩 읽기 시작했다. 항상 무언가 트집을 잡거나 반려를 시켰기에 조금은 긴장된 마음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다 넘겨보지 않은 서류를 놓더니 그녀를 건조하게 빤히 쳐다보았다. 또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원래 그렇게 아무하고나 서로 이름을 부르며 지냅니까?”


“네?”


세라피나는 어리둥절해서 눈만 깜박이며 되물었다.


“아무 남자나 사제님의 이름을 불러도 상관이 없습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너무 사교성이 좋은 것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시어스의 질책하는 듯한 말투에 세라피나는 기분이 상해버렸다. 자신이 무슨 헤픈 여자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듯해서 상당히 불쾌했다. 기가 막히고 억울했다. 사제 중에 사적인 대화를 그나마 조금이라도 하고 있는 사람은 엘리사가 유일했다. 설령 자신이 헤프게 굴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이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었다.


사실 그와 자주 마주치며 일을 하는 것이 처음에는 상당히 불편했었다. 그러나 치밀하고 유능한 그는 자신이 결제받을 서류를 가지고 오면 한번 검토를 해본 후 한두 군데씩 지적을 해서 잘못된 곳을 고쳐주었다. 그의 손을 거치고 나서는 한 번도 주교에게 결제를 받지 못한 적이 없었다. 조금 어색한 관계였지만 그는 친절하지만 않았을 뿐 자신을 은근히 배려해주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있었다.


주교는 굉장히 바쁜 자리였다.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주교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었다. 언제나 부재중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서류들은 보좌관 선에서 처리가 되곤 했으나 의전 제례부의 중요 제례에 관한 서류만큼은 주교의 결제가 꼭 필요했다. 한 번에 결제되지 못할 서류는 올려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서류를 가져오면 항상 제일 먼저 검토를 해주었기에 일정에 차질 없이 모든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창으로 햇볕이 많이 들어와서 눈이라도 찌푸리면 몸을 살짝 기울여서 가려주기도 했고, 변덕스러운 봄 날씨에 감기에 걸려 코를 훌쩍거리자 다음날 따뜻한 벵쇼를 한잔 건네기도 했다. 자신을 차갑게 대하기만 하던 그가 이런 배려를 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눈만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합니까? 식기 전에 마셔요. 그리고 신성력 씩이나 있는 사제가 무슨 감기입니까? 아침마다 한 번씩 운용은 하시는 겁니까? 하루 한 번씩 순환시키지 않으면 성력이 없는 사람들처럼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것 몰라요?’


비록 차가운 말투였지만 내용은 따뜻했다. 그 이후로 조금은 편해졌다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그는 처음 만난 날 이후로 6년 전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꺼내지 않았기에 그 부분에 대한 부담감도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세라피나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턱을 당겨, 상당히 예의를 차린 귀족적인 자세를 하고 딱딱하게 말을 했다.


“죄송하지만 그건 사제님께서 신경 쓰실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와 친하게 지내건 간섭하실 권리, 없으시잖아요.”


“평판에 좋을 것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여성 사제들이 적다보니 남성 사제들끼리 이런저런 말들이 오가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선배 사제로서 충고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마 어떤 말들이 돌아도 상관이 없다고 하실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 그래도 이런 말을 들을 만큼 제 행실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죄송하지만 이만 늦었으니 예산안 문제는... 내일 일찍 다시 오겠습니다.”


“후우...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군요...”


시어스는 한숨을 쉬더니 피곤한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말을 했다.


“아니요. 더 이상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군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녀는 테이블을 짚고 일어서면서 그의 말을 끊고 뒤돌아섰다. 그런 그녀를 그는 붙잡지 않았다. 문을 닫고 나가는 그녀를 그냥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마차는 어느새 델로브의 중앙 광장에 다다랐다. 6년 동안 일부러 이곳으로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었다. 예전 축제 때마다 자신이 머물던 타운 하우스로 가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자신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희미한 기억과는 달리 그리움은 전혀 희미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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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4) +1 15.05.20 248 3 14쪽
35 (3) +2 15.05.18 175 4 12쪽
» (2) 15.05.17 198 5 12쪽
33 델로사 신전, 개화 (1) 15.05.14 222 4 12쪽
32 (7) 15.05.11 245 4 12쪽
31 (6) +1 15.05.09 185 6 14쪽
30 (5) +1 15.05.06 221 5 10쪽
29 (4) +1 15.05.04 212 5 14쪽
28 (3) +1 15.05.01 233 5 12쪽
27 (2) +2 15.04.29 216 5 13쪽
26 붉은 빛의 세라피나 (1) +1 15.04.29 210 7 13쪽
25 (7) +3 15.04.27 251 5 21쪽
24 (6) +1 15.04.26 248 5 14쪽
23 (5) +1 15.04.25 220 6 11쪽
22 (4) +2 15.04.24 110 5 13쪽
21 (3) +2 15.04.22 253 4 9쪽
20 (2) 15.04.21 248 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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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7) +2 15.04.20 230 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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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5) 15.04.17 265 5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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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3) 15.04.17 243 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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