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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봉이 님의 서재입니다.

백색의 황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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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니어
작품등록일 :
2015.04.16 22:49
최근연재일 :
2015.06.12 00:32
연재수 :
41 회
조회수 :
8,711
추천수 :
193
글자수 :
215,817

작성
15.04.17 14:06
조회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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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
11쪽

(5)

DUMMY

재판이 속개되고 또 다시 치열한 공방이 오갔다.


“카르펜께서 성력을 잃으신 것이 증거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이단의 증거이지요.”


“아닙니다. 11년 전 출산을 하신 몸으로 성력을 무리하게 사용하셨기에 깊은 내상을 입어 그리 되신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증거를 보이시오. 신성력 폭주를 하셨다는 증거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증인도 없질 않소.”


“산실로 쓰였던 건물 일부가 붕괴되었소. 그때 복구하지 않은 건물의 잔해가 아직도 있거늘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단 말이오.”


“이것은 카르펜 전하의 직속시녀가 쓴 일지입니다. 건강에 대한 기록뿐만 아니라 드신 음식, 취침시각까지도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일지에 따르면 카르펜께서 주무시는 도중에 잠이 든 채로 일어나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계신다고 적혀있습니다. 심지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신다는데, 이것이 카르펜 전하의 영혼에 악령이 침투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황족의 건강에 대한 일지는 극비입니다. 저것을 입수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공개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저 증거는 날조임이 분명합니다. 기각을 요청합니다.”


라퀴노스측의 변호인이 황제 쪽을 바라보며 불채택을 요구했다.


“일지의 증거능력을 인정한다. 카르펜의 이단이라는 중요한 재판에서 사소한 증거라도 채택함이 마땅하다.”


황제는 무심하게 거부했다.


“이 일지를 작성한 시녀를 증인으로 세우겠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재판은 결국 매수당한 이블린의 당숙부와 수석 시녀의 배신에 의한 증언으로 끝나가고 있었다. 고대에 있었던 마녀 재판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증인석에 앉은 이블린에게 자신을 변호할 발언권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블린은 조용히 앉아 상황을 주시할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판결이 내려졌다. 에피로스의 3표, 황가의 4표, 민회의 2표가 이블린의 이단을 인정했다. 선고와 형의 언도만이 남겨진 상황에서 이블린이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일어나서 판관들을 하나하나 둘러보고 참관인 석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블린의 나긋한 음성이 울렸다.


“아주 재미있는 연극 한편을 본 것 같군요. 훗... 어차피 진실 따위는 중요치 않아 가만히 구경만 했더니 그대들은 나를 마녀로 만들었어요.”


이블린이 에피로스 측의 한 인물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대가 신의 버림을 받은 마녀는 성력을 사용하지 못한다 했지요... 자, 내가 신께 버림을 받은 마녀라고 다시 주장해 보시지요.”


고요해진 재판정 안에서 이블린은 엘레노어를 마주보고 비웃음을 흘린 후 눈을 감고 턱을 들어 서서히 온몸의 성력을 끌어 모았다.


엘레노어는 이블린의 모습을 눈을 가늘게 뜨고 주시했다. 타고난 성력의 그릇은 가득 차 있지만 전혀 쓸모없게 되어버렸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동안 회복이 많이 된 듯 보였다. 예상치 못한 변수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큰 흐름을 바꿀만한 것은 아니었다.


구태여 이블린의 행동을 막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이번 판결은 정해져 있었고 두 가문의 결말이 어떻게 나든 잃을 것이 있는 쪽은 저 두 가문이었지 황실에는 사실상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 그냥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을 재미있게 구경이나 하다가 남은 쪽마저 속아내는 작업에 들어가면 될 일이었다.


서서히 붉은 기운이 이블린의 온몸에서 연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활활 불타오르는 불새처럼 형태를 갖춘 새빨간 오러가 주변을 휘감았다. 오러의 파장에 건물이 흔들리고 천장이 무너질 듯 금이 가 부스러기들이 떨어져 내렸다. 모두들 멍하니 그 광휘한 붉은 빛이 재판정 가득히 넘실거리는 아름다운 광경을 지켜보기만 했다.


이블린은 모든 흐름이 막혀 다시 일정량 이상의 신성력을 쓰면 죽을 것이라는 의관의 말이 오히려 고맙게 느껴졌다. 이대로 고통 없이 홀가분하게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예리엘에게도 종교재판을 거쳐 화형까지 당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예리엘의 앞날을 위해서도 카르펜으로서 죽음을 맞는 것이 옳았다.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렇게 죽는 것뿐이었다.


두 달 전쯤 보았던 딸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의 손으로 죽였던 아기의 울음소리도 귓가에 울렸다. 황궁 정원에서 처음 만났던 아드리안의 부드럽게 웃는 얼굴도 생각이 났다. 그리고 엘레노어... 무도회에서 아드리안의 옆에 서있을 때마다 종종 눈이 마주치곤 했었다. 그 갈망하는 눈동자에 고개를 돌렸었다.


약혼을 하기 전에 죽은 아드리안 대신 그와 국혼을 올렸다. 그 후로 급격히 어른이 되었다. 아드리안과 함께 자신의 순수는 죽어버렸다. 형의 모든 것을 질투했던 엘레노어는 그의 형을 그리워하는 그녀에게 가혹했다. 당하는 만큼 자신도 변해갔다. 아버지나 엘레노어처럼 비정함과 잔혹함을 몸에 익혀버린 이블린은 더 이상 자신에게 있어서 순수한 열정이었던 아드리안을 그리워할 수 없게 되었다. 그 후로 온통 무채색의 세상이었다.


천장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정신이 든 재판정 내의 모두가 물리적 공격을 막을 수 있는 결계를 쳤다. 레온은 천장으로 뻗어가는 붉은 빛의 기둥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한 사람의 신성력이 이 정도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천장이 모두 무너져 버렸고 더 이상 그 빛을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붉은 빛은, 먹구름이 잔뜩 껴 어두워진 거리의 모든 건물들을 온통 희미한 붉은 빛으로 물들였다. 황도 갈라고스의 수많은 시민들은 황성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빛의 기둥을 보았다. 거리로 나온 모든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자세로 카르펜을 경배했다.





예리엘과 딜런은 어느새 또 눈구름이 몰려왔는지 어둑해진 사위에 온실 밖으로 나와 본성을 향해 걸음을 했다. 눈이 많이 오려는지 잔뜩 찌푸려진 회색빛 하늘은 나아지려던 기분을 다시 침체시켰다.


외투가 조금 얇아 보여 딜런은 자신의 외투를 벗어 예리엘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딜런의 어깨밖에 오지 않는 예리엘의 키 때문에 외투는 무릎까지도 폭 감싸서 한결 따뜻해 보였다.


“괜찮아. 조금만 더 걸으면 되는 걸.”


“아니야. 너 앓고 난지 얼마 안됐잖아. 만날 비실비실해서 감기를 달고 살았으면 좀 따뜻하게 입고 다녀.”


“응. 이렇게 오래 나와 있을 생각은 아니었어.”


예리엘은 딜런의 걱정스러운 말이 너무나 따뜻하고 좋아 살며시 웃음을 지으며 딜런을 올려 보았다. 그때 갑자기 어둑했던 주변이 노을빛과는 다른 빨간색으로 물들었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황성이 있는 방향에서 새빨간 빛의 기둥이 하늘에 떠있는 구름까지 닿아 있는 것이 보였다. 저렇게 핏빛으로 빨간 신성력은 퀴노스 가문의 특징이었다.


예리엘은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입술을 짓씹다가 황성을 향해 뛰어갔다. 딜런이 어깨에 덮어주었던 외투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예리엘! 기다려!”


딜런은 달려가는 예리엘을 붙잡았다.


“놔! 가 봐야해! 저렇게 신성력을 쏟아내면 죽는단 말이야!”


“너 어차피 이대로는 황성에 들어가지도 못해! 그리고 백작님께서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절대로 성 밖으로 한걸음도 나가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어. 네가 위험하다고.”


“그럼 어떻게 해? 엄마나 할아버지가 지금 죽어가고 있단 말이야! 그런데도 집안에만 있으라고?”


예리엘은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멈칫했다. 그리고는 입 안쪽을 깨문 채 두 손을 모아 입으로 가져다 대었다. 이모님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문을 나설 때 자신의 뒷모습을 보고 지금 자신과 꼭 같은 자세로 울음을 감추던...


털썩...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아... 안돼...’


딜런은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은 예리엘의 어깨를 감싸고 하늘을 뒤덮은 붉은 구름을 망연히 올려다보았다.





상황이 정말 재미있게 되었다. 이대로 이블린이 자신의 신성력을 모든 갈라고스의 시민들에게 증명을 하면 이단 판결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바로 오후에 예정되어있던 카르펜의 폐위에 대한 원로회의 소집조차 무산될 것이다.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성기사의 결계 속에서 엘레노어는 불타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이블린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이제 정말 그녀와는 마지막이었다. 그냥 이대로 그녀를 막지 않고 보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블린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던 레온에게 여인의 목소리로 부르는 성가가 들려왔다. 맑고 청아한 음성이 마음속 깊은 곳까지 울렸다.


...머리칼보다 많은 죄악에 감히 우러러볼 길 없고

마음은 꺾이고 말았나이다...

라일이여,

당신 얼굴 찾고 있사오니 당신 얼굴 나에게서 감추지 마옵소서...


성가가 끝을 맺고 빛의 기둥이 폭발적으로 터져나가면서 카르펜의 몸이 머리카락 끝과 손가락 끝부터 잿가루가 되어 기둥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카르펜의 얼굴에서 맑은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팍... 하고 미세한 가루들이 흩어져 모두 하늘로 올라가고 나서야 붉은 빛이 사라졌다. 레온은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아... 전하...! 이블린... 흑흑...”


재판정의 고요한 침묵 속에서 카르펜 옆에 서있던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라퀴노스 측의 모두가 바닥에 엎드려 통곡을 했다. 에피로스 측도 멍하니 주저앉아 그 모습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황제가 조용히 일어나 재판정을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 레온은 죄 없는 카르펜이 아름답게 승화하는 장면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판관 13석에 앉아있는 자신의 아버지를 보았다. 레온은 입매를 굳히고 노기를 띤 아버지의 모습에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자꾸만 화가 나서 두 주먹을 꼭 쥐고 큰 걸음으로 재판정을 나섰다.


작가의말

성가는 공동번역 성서 시편 27, 40 에서 발췌한 것이에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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