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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봉이 님의 서재입니다.

백색의 황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수비니어
작품등록일 :
2015.04.16 22:49
최근연재일 :
2015.06.12 00:32
연재수 :
41 회
조회수 :
8,714
추천수 :
193
글자수 :
215,817

작성
15.05.30 14:05
조회
230
추천
4
글자
12쪽

(7)

DUMMY

필리스 캘러임 백작이 돌아가고 난 후, 앨런은 땅거미가 그의 시야를 온통 회색으로 물들이고 있을 때까지 꼼짝 않고 창가에 기대어 서서 검게 물든 브룬스 산맥을 바라보았다. 앞으로의 거취 때문에 심란하고 복잡했다.


‘복수라...’


자신이라고 그들에 대한 증오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복수심을 갖고 행동에 옮기는 것과 증오심과는 별개였다. 지난 6년 동안 죄책감과 증오심 속에서 살아왔으나 자책하고 절망하기만 했을 뿐 복수를 위해 한 가지도 행한 것이 없었다. 그저 비겁하게 마음속으로만 저들을 증오하며 지금껏 술에 절어서 숨어 살아 왔을 뿐이었다.


교활한 그가 제시한 것은 두 가지였다. 아르미티즈의 눈치를 보느라 클레워스 영지를 다른 영주들이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직도 폐허가 된 채로 남은 그곳을 복구하도록 지원을 하겠다는 것이 한 가지였다. 또 가을 제전 전까지 반지만 넘긴다면 클레워스 자매가 절대로 영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목숨은 살려두겠다는 것이었다.


예리엘이라면 분명히 차곡차곡 자신의 힘을 기르면서 복수를 위해 온힘을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수도의 신전에서 일어났다던 대규모 습격도 어쩌면 그 아이가 개입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아이에게 비굴하게 목숨을 연명하게 해주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식으로 일을 진행한다고 해서 예리엘이 따를 리도 없었다.


일리아는... 차라리 이대로 그냥 두는 것이 그 아이에게 가장 좋은 일일 것이다.





깊게 가라앉은 녹빛 눈동자가 어둠속에서 번뜩였다. 레온은 일인용 소파에 앉은 채로 읽고 있던 책을 소리 나게 덮어버리고는 소파에 등을 깊게 묻고 고개를 힘없이 뒤로 젖혔다. 오른손을 들어 손등을 이마 위에 얹고 눈을 감은 채로 한참을 있었다. 지금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자신도 명확히 알 수가 없었다. 배신감... 이 단어 하나로 모든 것이 표현이 되지가 않았다. 소파 옆에 있는 작은 테이블 위에는 십여 권의 책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하, 하, 하......


허탈한 웃음소리가 어두운 서재 안을 울렸다. 고개를 똑바로 하고 손에 응축시킨 신성력을 결정화했다. 손바닥 위에서 파랗게 빛을 내고 있는 구체를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만 보고 있다가 던져 버렸다. 그 구체는 벽에 닿아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그는 조각 조각난 빛의 파편을 어두운 눈으로 응시했다.


빛의 마법사...


강하게 핏줄로 계승되는 빛의 마법사였다.


케일럽과 바에 간지 정확히 일주일 뒤에 북델로사의 아르미티즈 본성에 왔다. 오자마자 본성의 서고와 공작의 집무실, 서재를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금서와 관련된 흔적은 어느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런 책들이 성도 갈라고스에 있는 아르미티즈 성에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고서라면 제국의 역사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북델로사의 본성에 있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막상 작은 단서조차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팔짱을 낀 채 한참을 서성이며 생각해 보았다. 과연 어느 곳에 숨겼을 지... 그러다가 짚이는 장소가 한 곳 떠올랐다. 이곳마저 없다면 갈라고스까지 가 봐야했다.


본성의 동쪽 탑으로 연결된 복도를 지나 탑의 지하로 깊이 내려갔다. 어릴 때 한번 와 본적이 있는 이곳에 가주들만이 출입을 하는 거대한 창고가 지하 깊숙이 있었다. 그곳에서 책들을 본 기억은 없었고,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들과 무수히 많은 궤들이 그곳에 가득 차 있었다.


레온은 지하 창고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 모두 뒤져보았다. 두 팔을 벌린 길이보다는 약간 짧고 그의 무릎보다 높은 큰 궤에서 마침내 차곡차곡 쌓여있는 오래된 서적들을 발견했다. 고대 마법의 이론과 활용에 관한 책들과 초대 가주의 비망록까지 찾아냈다.


레온은 가죽으로 된 표지에 무척 낡아 바스라질 것 같은 십여 권의 책을 들고 자신의 서재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모두 읽어보았다. 고어로 쓰인 책은 읽기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그 내용을 이해하는데 큰 무리는 없었다.


케일럽의 말이 맞았다. 태양신 라일을 섬기는 성국 라르고는 거짓 위에 세워진 나라였다.


700년 전, 혼란의 시대에 마법사들의 전쟁이 있었다. 적, 녹, 청으로 구분된 빛의 마법사 가문들은 동맹을 맺어 전쟁에서 승리를 했고, 다른 계열 마법사들을 탄압하고 사냥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십 년이 흐르면서 일반 평민들에게는 빛으로 화하는 마법의 힘을 신에게 부여받은 성력이라고 선전하고 속이며 성국 라르고를 건설했다.


혼란의 시대에 굶주리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살던 일반 백성들의 분노는 다른 계열의 마법사들에게로 향했다. 그것이 바로 제국 초기에 있었던 마법사 사냥이었다. 마법사와 그 자손들까지 잡아서 그들의 육체와 정신을 정화시키기 위해 산채로 불태워버렸다. 그 당시 성난 백성들이 수많은 재물을 축적하고 있던 마법사의 가문들을 약탈하고 몰살시키는 것을 황실에서는 오히려 조장하고 포상까지 내렸었다. 그 100여년 동안 지속된 학살에서 살아남은 마법사는 아무도 없었다.


이후로 마법 중에 성력으로 보일 수 있는 부분만을 발전시키고 그렇지 않은 영역은 철저히 사장시켜버리면서 대를 거듭할수록 진실은 묻혀버리고 말았다. 제국의 역사 700년 동안 신에게 부여받은 권력이라는 명분으로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절대적인 황권과 계급의식을 유지해왔다. 그들의 뜻대로 평민들은 그 세뇌된 의식 속에서 귀족의 권위를 결코 넘볼 수 없게 되었다. 평민들은 그들 스스로 신으로 부터 선택을 받지 못했기에 대우받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이 초대 가주의 비망록에 모두 적혀있었다.


자신의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려 버렸다. 마법은 신에 대적하는 악마들의 사악한 술법이라고만 배웠다. 아버지는 귀족들이 신의 의지에 따라 신성력을 부여 받은 것처럼 마법사들도 악마들의 선택에 의해 그들의 하수인이 된 것이라 가르치셨다.


‘아버지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실까?’


의문이 고개를 들었으나 이내 수그러들었다. 모르실 리가 없었다. 가주 승계는 무조건 전대 가주에게 그곳의 열쇠를 받으며 마무리가 되었다. 자신이 7살 때 가주가 된 아버지는 그곳에서 3일을 머물렀었다. 3일째가 되는 그때에 그곳에 가본 것이었다.


어린시절 본성에서 지내다가 갈라고스로 올라가는 길에 죄인을 호송하는 마차들의 행렬을 본 적이 있었다. 마차로 호송하는 것으로 봐서 그 죄인들은 모두 귀족들이었다. 주로 살인, 횡령, 반역 등 중죄인으로 거의 사형을 면하기 힘들 자들이라고 얼핏 들었다. 그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왜 신은 저런 중죄인에게까지 신성력을 나누어 준 것일까? 앞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계시는 아버지께 여쭈어 보았었다.


‘아버지. 왜 신은 죄인들에게서 신성력을 거두어가지 않으시는 걸까요? 그리고 큰 죄를 짓더라도 성력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잖아요.’

‘레온, 신은 무수히 많은 인간들이 무엇을 하는지 하나하나 신경 쓸 수가 없단다. 너는 개미에게 신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 홍수를 일으킬 수도 태풍을 불게 할 수도 있지. 만약 네가 키우던 특별한 개미를 다른 개미들과 섞어 놓는다면 넌 구분조차 못하잖니? 그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대체 신과 인간이 다른 점은 뭔가요?’

‘인간은 개미에게 신은 인간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이겠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아버지의 생각은 무신론자의 것과 비슷했다. 신이 전혀 인간사에 관여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신을 경배하고 믿을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순간 모든 것이 허탈하고 막막해졌다. 자신의 세상이 뒤집어졌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떠서 갈 곳을 잃은 작은 배 한 척에 홀로 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무 것도 더 이상 생각하기 싫어졌다. 의도적으로 생각의 흐름을 차단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암흑 속이었던 세상이 어슴푸레하게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레온은 두 손으로 뻑뻑한 눈을 꾹꾹 누르며 일어서서 책들을 들고 다시 동쪽 탑으로 향했다.


탑 내부를 정리하고 나오니 사위가 어느새 밝아져 있었고 사용인들은 이제 일어나서 각자의 일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레온은 마굿간으로 걸어갔다. 새카만 자신의 말이 일어나서 건초를 다 먹을 때까지 한쪽 기둥에 기대어 서서 기다렸다. 새카맣게 윤이 나는 자신의 말을 보자 예리엘이 떠올랐다. 그녀의 맑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를 보고 싶어졌다.





델로브시 외곽까지 속도도 내지 않고 천천히 달려왔다. 멀리서도 순백으로 빛나는 신전이 눈에 띄었다. 신전의 주변에서는 누구나 말이나 마차를 타고 갈 수 없기에 말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갔다.


신전 앞 광장의 분수대에 까만 머리칼의 여자가 앉아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눈을 깜빡이고 크게 떠 다시 봐도 예리엘이었다. 단정하게 땋은 머리에 금욕적으로 보이는 짙은 회색과 검은색의 사제복만을 입고 있던 평소의 경직된 모습과는 달리, 그녀는 곱게 웨이브진 머리를 풀고 연하늘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그 나이보다도 어린 소녀처럼만 보였다. 보고 싶다고 생각을 했더니 정말 눈앞에 나타났다. 반가운 마음에 심장이 두근거렸고 발걸음은 빨라졌다.


그녀에게로 가는 발걸음이 불과 열 걸음 정도 남았을 때, 그녀가 다른 곳을 보고 눈부시게 미소짓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금발이라기엔 색이 어두운 머리칼에 키가 크고 준수하게 생긴 남자가 분수대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 역시 그녀와 마주보고 잔잔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녀에게로 향하는 발걸음이 서서히 멈춰졌다. 멍하니 서서 신전 내의 누구에게도 보인 적이 없는 그녀의 미소만 바라보았다.


그 남자가 예리엘에게로 다가가서 다정하게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녀는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재잘거리며 그에게 뭐라 말하고 있었다. 둘은 행복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신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까지 가더니 헤어지기 싫어하는 연인처럼 서로를 끌어안았다. 레온은 그 모습을 멀리서 보고는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를 향한 그녀의 미소를 보니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다시 드러나는 그녀의 표정은 방금 전과는 달리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모래색 머리칼의 그는 그녀를 달래듯이 이마에 키스를 하고는 그녀가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고 서있었다.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이 현기증이 나고 멍했다. 아마도 이틀 내리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아아... 그녀에게도 약혼자가 있었구나.’


외동딸이라고 알려진 그녀가 그럴만한 나이라는 것을 알고도 바보같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녀의 감정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녀 곁에서 얼쩡거리는 카일을 못마땅해 하거나 자신과 엮이면 행복해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 우스워졌다. 정말이지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레온은 신전으로 향하던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노아 호수로 향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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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99 연두초록
    작성일
    15.06.02 08:58
    No. 1

    신성력이 아니라 마법이었군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거짓으로 포장한 신성력.
    이 진실이 밝혀질까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5 수비니어
    작성일
    15.06.05 23:03
    No. 2

    불의검님 예측이 맞았었어요... ㅎㅎ
    진실은... 주인공들의 몫이죠~^^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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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2) 15.04.21 248 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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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7) +2 15.04.20 230 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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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5) 15.04.17 265 5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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