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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봉이 님의 서재입니다.

백색의 황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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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니어
작품등록일 :
2015.04.16 22:49
최근연재일 :
2015.06.12 00:32
연재수 :
41 회
조회수 :
8,718
추천수 :
193
글자수 :
215,817

작성
15.04.16 23:22
조회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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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
8쪽

황궁으로부터의 도피 (1)

DUMMY

쿵, 쿵, 쿵, 쿵...


“어서 문을 여십시오!"


붉은 피로 얼룩진 하얀 천이 한쪽에 쌓여 있고 등잔불만 희미하게 침대를 비추는 어두운 방안에서는 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에 조용하고도 다급한 움직임이 일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 하나가 시녀의 품안에서 시끄럽게 울고 있었고 또다른 아기 하나는 핏줄이 터져 온 얼굴과 하얀 눈동자까지 새빨개진 여인의 품안에서 엄지손가락을 입에 넣고 잠들어 있었다. 이블린은 옆에서 입을 꼭 다문채로 눈물을 흘리며 문을 노려보고 있는 다른 시녀에게 품에 안고 있던 아기를 안겨주었다.


그녀는 멈추지 않는 하혈과 산후통으로 구부정해진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비틀거리며 걸어 갔다. 머리부터 몸 전체가 바닥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바닥에는 피로 물든 발자국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온 몸의 기운이 빠져 움직이기 힘들었지만, 이를 악물고 한쪽 벽면을 차지한 자신 몸의 세 배는 되는 거울을 옆으로 밀었다. 꼼짝도 않을 것처럼 보이던 육중한 거울은 이블린의 손에 붉은 빛이 맺히자 미끄러지듯 스르르 움직였다.


거울 뒤로 덩치 작은 여자가 허리를 숙이고 겨우 지나갈 만한 작은 통로가 나왔다. 이블린은 암흑처럼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통로 안쪽을 한 번 노려보고는 방금 아기를 건네 준 시녀에게 말을 했다.


“이베트, 언니 정말 미안해요.. 이 통로를 따라 두 번째, 다섯 번째, 아홉 번째에서만 왼쪽으로 가야해요. 내 아기를 부탁해요. 어서 빨리. 잊지 말아요. 두 번째 다섯 번째 아홉 번째에요.”


이베트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결연한 눈빛으로 이블린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는 곧장 아기를 안고 곰팡이 냄새 가득한 습하고 어두운 통로로 뛰어 들어갔다.


이블린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 언니의 뒷모습을 흔들리는 눈빛으로 잠시 쳐다보다가 거울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다시 침대로 가서 누웠다.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온몸의 힘이 빠져버렸다. 계속 울어대는 아기를 안고 있던 시녀에게 아기를 달라고 손짓을 했다.


아기는 아직 씻지도 못해 피범벅이 된 모습이었다. 이블린의 품에 안기자마자 이내 울음을 그치더니 그녀의 가슴께에서 엄마의 젖 냄새를 맡은 양 입을 오물거렸다. 빨갛게 붓고 태지로 뒤덮여 지저분한 아기가 너무나 안쓰러웠다. 이블린은 눈물을 왈칵 쏟아내면서 속삭이듯 아기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 엄마가 정말 미안하구나. 내 아기...”


솜털같이 보송보송한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어루만져 보았다. 손가락 발가락은 아주 작은 힘에도 부러질 것 같이 여렸다. 아기의 주먹 안으로 손가락 하나를 집어 넣어 보았다. 자신의 손가락을 꼭 쥐고 있는 아기의 힘이 제법이었다. 저절로 그려지는 미소가 처연하게 느껴졌다. 아기의 손가락을 입에 살며시 가져다 대보았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쿵, 쿵, 쿵, 쿵..


“문을 열어라! 카르파께서 명하셨다.”


이블린은 심장이 싸하게 식는 것 같았다.


“안됩니다. 이곳은 카르펜 전하의 산실입니다. 아무도 들일 수 없습니다.”


문 앞을 막아놓은 삼단 협탁 옆에 서 있던 시녀들 중 하나가 외쳤다. 이제 곧 기사들과 황제가 들이닥칠 것이다. 이미 빠져나간 아기와 이베트에 대해서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된다.


주변의 시녀 다섯을 한 번씩 찬찬히 둘러보았다. 흐르는 눈물은 닦지도 않은 채 아기를 받치고 있지 않은 오른손을 손바닥을 위로 하여 천천히 어깨 높이로 들어올렸다.


이블린의 손바닥 위에서 방금 전보다 더 선명한 붉은 색의 오러가 맺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시녀와 이블린의 눈이 마주쳤다. 시녀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쥐고는 눈을 감았다.


‘미안... 배운 게 이런 것밖에 없어서 비밀을 지킬 다른 방법은 모르겠어...’


이블린은 아기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나서 천천히 주먹을 말아 쥐더니 이내 쫙 폈다. 선명한 핏빛의 오러가 수많은 수정 결정을 이루더니 오른손을 중심으로 나선형을 그리면서 쏟아져 나갔다. 순식간에 살점들이 찢겨져 날아가고 주변이 온통 피로 물들었다. 이블린은 자신의 곁을 몇 년간이나 지켜주던 시녀들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날카롭던 이명이 멀어지고 침대에 기대 앉아 창을 통해 보이는 사각형의 하늘을 보았다. 눈앞에서 먼지들이 햇살에 뿌옇게 올라오고 있었다. 일식이 끝나 어느새 어둠이 걷히고 밝아져 있었다.





복도에서 철컹철컹하는 갑옷 입은 기사들의 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문 앞에서 멎었다.


“문을 부숴라.”

“예! 카르파!”


쿵, 쿵, 쿵...


쿵! 하고 큰 소리와 함께 문이 부숴지는 소리가 났다. 바닥에 흥건히 고인 피가 밟혀 철벅철벅 발소리가 들렸지만 이블린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이런, 이런... 내 사랑 이비, 도대체 이게 무슨 난장이지?”


그제야 시선을 돌려 자신에게 말을 건 사내를 가만히 보았다. 문을 부수고 들어온 칠흑 같은 흑발에 밤색 눈을 가진 건장한 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자는 온통 피로 철벅거리는 바닥과 가슴이 으스러진 채 쓰러져 있는 시체 다섯 구, 그리고 아기를 안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이블린을 보고는 금세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블린은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카르파 벤 엘레노어 스라만 디 라르고 폐하...”


이블린의 거칠고 억눌린 음성이 고요한 방안을 울렸다.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격식 차린 말을... 후후...”


엘레노어는 침대로 다가와, 터진 핏줄로 벌겋게 부은 그녀의 얼굴을 손가락 끝으로 건드리며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올렸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이블린이 안고 있는 갓 태어난 아기를 보았다.


“그게 저주의 산물인가?”


“저주라니요. 마르카에 따르면 이 아이는 새 시대를 열 운명의 아이입니다.”


“훗... 그게 그렇게도 해석이 되는가? 너희 라퀴노스가 항상 그렇게 낭만적이라 왠지 아니꼽단 말이지."


엘레노어가 표정을 굳히고 아이를 내려보며 말했다.


"설령 저주가 아니라 해도 상관없다. 황가에는 그 어떤 빌미도, 작은 흠결도 있을 순 없지.”


이블린은 고개를 돌려 엘레노어의 손길을 떨쳐내었다. 저 음성에 치가 떨렸다. 대체 이렇게까지 라퀴노스를 적대하면서 자신이 원로원에 의해 추대되었을 때 반대하지 않은 이유는 뭔가?


처참할 정도로 강압적이었던 초야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적의를 오로지 자신에게만 내뿜고 있으니 이젠 억울하다 못해 증오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설마 제 첫 번째 자식에게까지도 그렇게 모질게 굴지는 않을 거라는 일말의 기대를 저버리지 못했었다.


그러나 부서진 문과 함께 기대는 이내 절망으로 변해 있었다. 엘레노어에 대한 배신감과 아이에 대한 연민으로 일렁이는 차가운 분노만이 이블린의 가슴을 짓눌러 왔다.


너무도 가련하고 안타까워 보기만 해도 눈물이 차올라 차마 아이의 얼굴을 보지는 못하고 더욱 세게 안으며 아기에게 나지막히 읊조렸다.


“아가, 넌 이 세상에서 가장 고결하고, 권위와 능력에 한 점 오류도 없는 태양신 라일의 자손이란다. 절대로 흠결이 될 수 없단다..”


이블린은 가슴 사이를 찢고 나올 듯이 솟구치는 울분으로, 젖은 눈을 들어 엘레노어를 노려보았다.


엘레노어는 그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켄.”

“예! 카르파.”


“저주받은 아이를 처단하라.”

“명을 받듭니다.”


“안돼! 손 대지마!!”


어흐흐흑...아악... 이블린은 울분을 토해내며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꼭 안고 있던 아기에게 속삭였다.


“미안하다. 아가. 미안해...”


온 몸에서 연기처럼 피어오른 핏빛 오러가 삽시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작가의말

연재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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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6) +1 15.04.26 247 5 14쪽
23 (5) +1 15.04.25 220 6 11쪽
22 (4) +2 15.04.24 110 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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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7) +2 15.04.20 230 5 9쪽
17 (6) 15.04.18 249 5 11쪽
16 (5) 15.04.17 265 5 11쪽
15 (4) 15.04.17 219 5 10쪽
14 (3) 15.04.17 243 4 10쪽
13 (2) +1 15.04.17 285 6 12쪽
12 붕괴의 시작 (1) 15.04.17 235 5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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