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나봉이 님의 서재입니다.

백색의 황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수비니어
작품등록일 :
2015.04.16 22:49
최근연재일 :
2015.06.12 00:32
연재수 :
41 회
조회수 :
8,723
추천수 :
193
글자수 :
215,817

작성
15.05.01 23:48
조회
233
추천
5
글자
12쪽

(3)

DUMMY

카일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벽에 걸려있는 거울을 향해 들고 있던 약 그릇을 던져버렸다. ‘와장창’ 하고 커다란 소리가 방안 가득 울렸다. 왼쪽 광대 옆쪽으로 길게 늘어진 흉이 그의 얼굴을 더욱 사나워 보이게 했다. 며칠 전의 습격 때, 다친 후 바로 성력으로 아물게 했더라면 생기지 않았을 흉터였다. 얼굴 한쪽의 보기 흉한 흉터가 일그러지며 그 부분이 욱신거렸다.


방 한쪽에서 오들오들 떨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시녀들에게 고개를 돌려 노려보며 분기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너희들도 내가 흉해서 그렇게 오지도 않고 멀리 떨어져 보고만 있는 게냐?”

“아. 아닙니다. 그저...”


두 시녀가 고개를 더욱 깊이 숙이며 더듬으며 말을 했다.


그때 방안에서 일어난 소란에 방문이 벌컥 열리고 아르미티즈 공작부인이 들어왔다.


“너희들은 뭐하고 서 있는 게야? 어서 이것들을 치우지 않고!”


공작부인은 가만히 서서 고개만 조아리고 있는 시녀들을 향해 혀를 차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리고는 방 한가운데에 서있는 카일을 향해 타이르듯 말을 했다.


“이게 무슨 짓이니? 쯧쯔... 이렇게 감정조절을 못해서야 어디 아르미티즈의 자제라 할 수 있겠니?”


“어머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제가 아버지 자식이기는 한 겁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워라.”


공작부인은 뜬금없는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게 그러실 수는 없었습니다. 저도 그때 형님과 똑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제가 전혀 안중에도 없으셨던 겁니다. 지혈은 커녕 부상을 입고 쓰러진 제게는 괜찮냐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으셨다구요!”


카일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찌릿하게 아파오는 상처 위에 손을 대었다.


“후우... 대체 어린아이처럼 왜 이러니? 네가 지금 이렇게 투정이나 부릴 나이라고 생각하니? 네 형을 봐라. 그때 왼팔에 심한 부상을 입고도 아버지를 구해냈잖니. 좀 형처럼 의젓해질 수는 없는 거니?”


“하하... 역시나 그런 말씀뿐이군요.. 어머니도 똑같습니다. 이런 말을 해 무엇 하겠습니까? 됐습니다. 혼자 있고 싶으니 이만 나가주십시오.”


공작부인은 카일의 철없는 반응에 한심하다는 듯 표정을 지으면서도 점잖게 타이르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어휴... 정말 못났구나. 그렇게 화를 내기 전에 조금이라도 수련을 더 하거라. 네가 그 때 아버지를 도와 그들을 물리치는데 한 몫을 했다면 스스로도 이러지는 않았을 거 아니냐. 아무튼 그만 털어내고 이제 쉬도록 해라.”


“......”


“어서. 자리에 눕지 않고. 회복에 시간이 걸릴게다.”


“... 네. 그러지요... 알겠습니다. 어머니.”


짧은 대화 끝에 공작부인이 나가고 카일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또 형이다. 어린 시절부터 항상 비교당하고 살아왔다. 아니다. 비교라도 당했으면 오히려 이렇게까지 자괴감에 빠져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집안에서 자신은 그냥 유령 같은 존재였다.


외모부터 그랬다. 레온은 모든 사람이 보면 감탄을 금치 못하는 화려한 금발에 녹안이었다. 그 황금빛 머리칼은 그를 더욱 빛나 보이게 했다. 어두운 갈색 머리칼인 자신은 특징도 없고 눈에 띄지 않는 외모였다. 둘이 같이 서있으면 사람들은 레온만 보고 찬사를 늘어놓았다. 항상 약간 뒤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면 자신이 서있을 자리가 아닌 듯 불편한 마음만 들 뿐이었다. 어느 자리에서나 항상 함께해야 하는 형제였기에 자신의 자리는 아무데도 없는 듯이 느껴졌다.


부모님의 태도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였다. 식사 때나 손님이 왔을 때나 가족의 대화는 레온에 대한 것뿐이었다. 귀족 집안에서 아무리 성력이 높은 자식이 후계자로 지목이 된다지만 그래도 대부분 장자는 장자였다. 그런 이유일 뿐이겠지 라는 생각에 자신이 성력만 월등히 더 강하다면 조금의 관심은 돌아오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었고, 각성 전에는 이렇게까지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았었다. 그렇지만 그 또한 레온을 뛰어넘지 못했다.


레온이 각성을 하고 아버지께서 함구령을 내렸음에도 소문이 퍼지자 금세 온 아르미티즈가 들끓었었다. 아부에 능한 자들은 초대 가주에 비견될 성력이라며 두 손을 치켜들고 찬양하기 바빴다.


그저 아름답다는 표현이 자연스러운, 새파란 사파이어와 같이 투명하고 빛나던 레온의 오러와는 달리, 자신의 오러는 탁한 보라색이 섞인 청보라 빛이었다. 순도에 따라 성력의 세기가 차이가 나는 만큼 결코 레온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희망을 버리지 않고 각성을 할 날만을 기다리며 살았었는데, 실망감에 며칠 동안 음식이 목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그래, 거기까지도 부모님의 다른 태도를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목숨이 걸린 일에까지 이렇게 없는 사람 취급할 줄은 몰랐다. 아버지는 그 상황에서 먼저 레온에게 다가갔다. 그의 성력으로 이미 아물어 있는 팔을 한 번 더 살펴보시고 나서야 당신의 상처를 돌보셨다. 그곳에서 살아남은 기사와 지원 온 기사들이 자신을 꺼내 줄 때 한번 쳐다보시고는 바로 다가오는 시장에게로 향하셨다. 오로지 어머니만이 오셔서 성력으로 치유를 해 주셨지만, 이미 제 때에 봉합되지 못한 상처는 흉터를 남기고 말았다.


똑똑똑...


정갈한 노크소리와 함께 부집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는 집사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사용인들조차도 자신을 무시하는 것만 같다. 그들은 항상 공손했지만, 귀족에게 대하는 예의 그 이상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레온에게는 주인을 향한 경외와 충성심까지 보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어차피 이 집안에 남을 사람이 아니라는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차갑게 대하게 되었고, 이제 자신의 곁에는 살갑게 구는 시종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공작 각하께서 부르십니다. 지금 서재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곧 가겠네.”





아버지께서 집무실로 사용하시는 서재에는 이미 레온이 와서 심각한 표정의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늦었구나. 어서 앉거라.”


“예.”


레온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아버지의 말씀을 기다렸다.


“우리가 습격을 당했을 때 갈라고스의 중앙 신전도 대규모 습격을 당했다. 감사제 때문에 많은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공격을 해온 거라 피해가 상당하다고 하는구나. 내가 봐도 상당히 조직적이고 훈련이 잘 된 자들이었으니 최소인원만 남은 신전 측에서 당해낼 수 없었겠지.”


“놀랍군요. 이제 5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렇게까지 결집이 되다니...”


“아마도 그 전부터 조직화된 것 같다. 클레워스 백작을 너무 얕보았어. 조용한 자였지만 그렇게 쉽게 당할 위인이 아니었는데. 퀴노스와 클레워스의 재산도 상당 부분 빼돌렸는지 채권이나 고가의 물건들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군요.”


“이번 습격으로 알았겠지만 그들의 세력이 생각보다 크다. 어느 신전에서도 그리 안전하진 않을 것이다. 고위사제 과정이 이제 1년밖에 남지 않았었는데... 내년은 다른 곳에서 보내야 되겠구나.”


“예.”


레온은 별다른 관심이 없었지만 공손히 대답을 했다. 오히려 남은 1년을 다른 신전에서 머물 수 있게 된 것이 달가웠다. 기분전환은 될 것 같았다. 고위사제 과정이 끝나면 이름과 얼굴만 알고 있는 두 살 위의 약혼녀와 결혼도 해야 할 테고 본격적으로 지위를 얻어 황궁에서 일하게 될 것이었다. 그저 굴러가는 대로 살게 될 것이 암담했다.


“레온, 어쩔 수 없이 델로사로 내려가는 것이 좋겠다. 그곳의 신전도 매해 제전을 준비해왔으니 배울 것이 많을 것이다. 대제사장에 오르려면 어차피 델로사에서 제전 준비도 해봐야할 테니 오히려 좋은 기회라 생각해라.”


레온은 생각지도 못한 갑작스러운 소식에 얼떨떨했다. 델로사라니... 이 집과 수도를 벗어나서 델로사에서 보내게 될 1년이 생각지 못한 선물이라도 받은 듯 무척 반가웠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쓰며 아버지를 바라보고 말을 했다.


“그럼 신분을 감추고 가게 되는 것입니까?”


“그래야겠지. 아르미티즈라는 것이 알려져서는 도움이 될 것이 하나도 없을 테니.”


“예.”


이제는 정말 기꺼운 마음에 심장까지 두근거렸다. 그런 심정을 감추기 위해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대답했다. 아무도 자신의 신분을 모르는 곳에 가서 1년 동안 모든 것을 잊고 살아갈 수 있다니... 답답하기만 한 자신의 인생에서 이런 큰 선물을 받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내년 봄 모집 시기에 가게 되는 것입니까?”


“아니다.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어느 정도 준비를 마친 후 가거라. 계속 수도에 있는 신전 소속으로 되어있을 테니 그리 알고.”


“그럼 저는 그곳에서 3년을 보내야 하는 것입니까?”


카일이 차분한 목소리로 윈스턴에게 물었다.


“1년은 그 곳에서 보내고 나머지 2년은 갈라고스의 신전에 있어야겠지. 아무래도 성도의 신전을 경험하는 것이 앞날에도 도움이 될 터이니...”


“예..”


“너희는 머리색도, 눈 색도 다르니 서로 형제가 아닌 것으로 해둘 것이다. 그리 알고 이만 나가 보거라.”


“예.”


카일은 지금 이곳이 아닌,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 좋았다. 레온의 동생이란 말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서 아르미티즈의 차남이 아닌 자기 자신을 바라봐주는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다. 게다가 항상 레온의 뒤에 서서 다니던 것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된 상황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레온과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레온은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던져 털썩 누웠다. 어머니께서 보신다면 한 말씀 하실만한 행동이었지만 들뜬 기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이런 기분이라니... 평생 처음으로 느끼는 것 같은 즐거움에 누군가 불쑥 문을 열고 들어온다고 해도 도저히 진지한 표정이 지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얼굴에 미소가 절로 그려졌다.


누워있는 상태로 목에 걸려있는 풍뎅이 껍질이 달린 반지를 꺼내어 봤다. 빙긋 웃으며 반지를 손에 꼭 쥐고는 눈을 감았다.


‘후후... 조금만 기다려. 내가 델로사에 가면 널 찾아낼게.’


그동안은 그 아이를 찾아볼 생각을 하지도 못했었다. 제전이 있는 일주일에서 열흘간만 그곳에 머물렀기에 그런 것도 있었지만, 어깨를 누르는 아르미티즈의 무거운 짐을 어차피 내려놓을 수가 없는 처지여서 궁금했지만 찾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었다. 무척이나 반가울 것 같았다. 찾아서 그저 그동안 잘 지냈냐고 물어보고 싶다.


흔치 않은 검은머리에 푸른 눈, 예리엘이라는 이름.. 찾기가 어렵진 않을 것 같다. 그 근방에서 사는 것 같았으니 그곳의 귀족들을 찾아보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자라서 어엿한 숙녀가 됐을 그녀를 생각하자 레온의 눈을 감은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백색의 황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1 (9) +2 15.06.12 198 2 12쪽
40 (8) +1 15.06.05 140 3 11쪽
39 (7) +2 15.05.30 231 4 12쪽
38 (6) +1 15.05.26 184 4 13쪽
37 (5) +2 15.05.25 213 3 13쪽
36 (4) +1 15.05.20 248 3 14쪽
35 (3) +2 15.05.18 175 4 12쪽
34 (2) 15.05.17 199 5 12쪽
33 델로사 신전, 개화 (1) 15.05.14 222 4 12쪽
32 (7) 15.05.11 246 4 12쪽
31 (6) +1 15.05.09 185 6 14쪽
30 (5) +1 15.05.06 221 5 10쪽
29 (4) +1 15.05.04 212 5 14쪽
» (3) +1 15.05.01 234 5 12쪽
27 (2) +2 15.04.29 216 5 13쪽
26 붉은 빛의 세라피나 (1) +1 15.04.29 210 7 13쪽
25 (7) +3 15.04.27 251 5 21쪽
24 (6) +1 15.04.26 248 5 14쪽
23 (5) +1 15.04.25 220 6 11쪽
22 (4) +2 15.04.24 110 5 13쪽
21 (3) +2 15.04.22 253 4 9쪽
20 (2) 15.04.21 248 5 12쪽
19 침몰, 그리고 탈출 (1) +2 15.04.20 246 7 12쪽
18 (7) +2 15.04.20 230 5 9쪽
17 (6) 15.04.18 249 5 11쪽
16 (5) 15.04.17 265 5 11쪽
15 (4) 15.04.17 219 5 10쪽
14 (3) 15.04.17 243 4 10쪽
13 (2) +1 15.04.17 285 6 12쪽
12 붕괴의 시작 (1) 15.04.17 235 5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