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나봉이 님의 서재입니다.

백색의 황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수비니어
작품등록일 :
2015.04.16 22:49
최근연재일 :
2015.06.12 00:32
연재수 :
41 회
조회수 :
8,712
추천수 :
193
글자수 :
215,817

작성
15.04.17 13:21
조회
284
추천
6
글자
12쪽

(2)

DUMMY

새벽 동이 터올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저택으로 돌아왔다. 꽁꽁 언 손과 얼굴, 덜덜 떨리는 몸으로 황급히 본채로 들어가 부인의 방문을 두드렸다.


“저 딜런입니다. 백작 각하께서 급히 전하라 하신 서신이 있습니다.”


딜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이베트는 자신에게 말할 시간조차 없다는 듯 급히 나간 이든 때문에 밤새도록 자지도 못하고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딜런, 대체 백작님은 어디 가신 거니?”


“지금은 수도로 가고 계십니다. 이 서신을 급히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그래, 그랬구나......”


이베트는 잘게 떨리는 손을 들어 서신을 건네받았다. 그녀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딜런에게 말했다.


“아, 딜런 밤새도록 고생이 많았겠구나. 추위에 많이 떨었을 텐데 이제 가서 쉬렴.”


“예,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다시 방 안에 들어온 후, 이베트는 무슨 내용일지 두려워 차마 서신을 열지 못하고 노려보기만 했다. 봉투를 열면 어떤 괴물이 튀어 나올지 몰라 한참을 두고 보기만 했다.





아침부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이제 제법 눈송이가 굵어져 정원에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올해 첫눈이 내리는 것을 보던 예리엘은 지루한 수사학 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논리학 수업 다음에 바로 수사학이라니, 정말 일주일 중 제일 힘든 하루였다.


그래도 제법 흥미로운 수사학이었음에도 어제 오전에 다급히 뛰어가던 앨런의 모습이 자꾸 신경을 자극해서 수업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계속 집중하지 못하고 지루해 하고 있을 때 반가운 노크소리가 들렸다.


“수업 중에 죄송합니다. 선생님.”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셔야겠습니다. 급한 일이 있어 아이들 데리고 수도에 가봐야 해요.”


“아, 예 그러시군요. 수도에 가신다면 당분간은...”


“네. 다녀와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예리엘은 엄마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웃고는 있지만 분명 좋은 일로 수도에 가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그 동안 수도와 동떨어져 숨듯이 살아왔는데 느닷없이 간다니 분명 자신이나 이모님과 연관된 일일 것만 같았다.

수사학 선생님이 책을 정리하고 방을 나서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베트에게 물어보았다.


“엄마,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아니야, 그냥 엄마 아빠가 급한 일이 생겨서 그래. 네가 필요한 것들은 빨리 챙겨 놓으렴. 샐리가 와서 도와줄 거야. 점심 식사는 가면서 간단히 할 거니까 옷부터 갈아입고 나와.”


“네...”


이런 날씨에 먼 길을 급하게 떠나는 것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창밖을 내다보니 벌써 마차에 짐을 옮겨 싣고 있었다. 안 좋은 예감에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옆에서 샐리가 짐을 싸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예리엘은 아무 것도 안하고 시종들이 눈을 맞으며 짐을 싣고 있는 것만 바라보았다. 방문이 벌컥 열리고 브리젤라가 들어왔다.


“예리엘, 준비 다했어? 어라? 너 아직도 옷 안 갈아입었어? 엄마가 빨리 갈아입고 내려오라고 하셨는데...”

“어. 그래 지금 갈아입을게.”


브리젤라는 들뜬 표정으로 침대에 풀썩 앉으며 말을 했다.


“이렇게 급하게 대체 무슨 일이래? 히히... 정말 신난다. 수도라니 한 번도 못 가봤잖아. 이번에 황궁도 구경하고 싶다. 후후... 가보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아.”


“눈이 이렇게 많이 오는데 길이 많이 미끄러울 거야.”


예리엘의 걱정스러운 말에 브리젤라는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걱정 마. 수도까지 가는 길은 넓고 좋아서 위험하지 않다고 들었는걸.”


“그래... 옷 갈아입고 바로 내려갈게. 먼저 내려가.”


“어. 빨리 내려와. 네가 준비가 가장 늦었어. 참, 따뜻하게 입고 내려오라고 하셨어.”


“그래.”


브리젤라가 나간 뒤 왼손 검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번에 수도에 가면 이모님.. 아니 어머니를 다시 뵐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숫가에서 집에 돌아온 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긴박했던 출생부터 지금에 이르는 수많은 일들.. 아직은 이르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아버지는 이제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말씀하시고는 긴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처음에는 그저 어처구니가 없었다. 상상도 못해 본 이야기들이었다. 자신이 현재까지는 카르파의 유일한 정통 후계자라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황당한 이야기였다. 퀴노스니 에피로스니 하는 것들, 귀족들 정치 이야기는 역사 시간에나 잠깐씩 배웠던 것들인데, 그것들이 자신의 운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니 믿기 어려웠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카르파가 친부이고 우리 모두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도 전혀 현실감 없이 다가왔다. 예리엘은 자신이 속한 세계의 하늘이 일순간 사라져 버리는 것만 같았지만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이야기였기에 그냥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거의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사실을 알고 나서 무언가 변한 듯 기묘한 느낌이 들었으나 그냥 그뿐이었고, 달이 지고 해가 뜨고 삼시세끼 먹고 수업 듣고... 실상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이 무너진 것 같던 느낌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났을 때는 감기 몸살로 며칠을 앓았었다. 약기운이 아니었다면 잠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자려고 침대에만 누우면 생기 없이 앙상한 겨울나무 같던 친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머니의 손길이 부담스럽고 무서워 슬며시 손을 빼내버렸던 장면이 자꾸 생각났다.


11년 만에 만난 딸인데, 주변의 눈이 두려워 가발까지 쓰고 나타나 어머니의 외양만 보고 두려워하고 꺼리는 모습을 보였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를 바라보던, 자신과 꼭 닮은 처연한 푸른 눈동자가 자꾸 어른거렸다.


대체 얼마나 힘든 세월을 보내셨기에 그렇게 몸이 망가졌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만약에 다시 한 번만 더 만날 수 있다면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냐고 위로해드리고 싶었다.


어머니의 그런 처참했던 모습과 제전에서 보았던 황제의 위압적이고 당당했던 모습이 자꾸 겹쳐보였다. 막연한 공포심을 느끼게 하는 친부라는 사람이 제 쌍둥이를 죽였고 너무나 불쌍해 보이는 어머니를 그렇게 만들었다. 또 자신의 존재를 안다면 자신까지 죽이려 들 것이다.


그런 생각들이 머리속에서 맴돌다보니 모두가 수도로 올라가게 되는 일이 결코 좋은 일이라 여겨지지 않았다. 제발 모두 무사히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이틀 밤낮을 내리 거의 쉬지 않고 마차를 달려 수도에 도착했다. 처음 출발하기 전 수도에 난생 처음 가본다고 좋아 하던 브리젤라와 일리아는 계속되는 멀미에도 전혀 휴식을 취하지 못해서 누렇게 뜬 얼굴로 연신 구토를 해댔다. 예리엘은 몸이 완전히 회복되진 않았지만 다행히 멀미를 하지 않아 브리젤라나 일리아보다 상태가 조금은 나았다.


자꾸 늦어지는 여정에 마음이 다급해진 이베트는 말을 타고 먼저 가버렸고 이베트가 먼저 떠나고 나서야 조금 속도를 늦출 수 있었다.


성도 갈라고스, 고대 창조신의 이름이었다. 성도 갈라고스가 수도인 라르고 제국은 아이러니하게도 창조신을 섬기는 다른 종교의 성지였다. 해마다 갈라고스를 섬기는 타 종교인들이 성지순례를 위해 성도 갈라고스를 찾아왔다.


타 종교에는 관대하면서도 같은 종교의 다른 교파에는 잔혹하기 그지없는 라일교도들이었다. 갈라고스를 찾는 수많은 외국인들 덕에 수도는 관광, 상업이 발달했고 문화, 종교, 정치의 중심지였다.


갈라고스 중심에는 황궁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귀족들의 거주 지역은 황궁을 중심으로 북쪽에 있었다. 노르센 산 밑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한적한 숲을 끼고 중앙 귀족들의 성이 드문드문 있었다. 산과 숲, 그에 어우러진 성들의 아름다움으로 멀리서나마 구경하려는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 성들 중에 예리엘이 도착한 클레워스 본가와 이블린의 친정인 퀴노스 가문의 성이 있었다.


이베트는 클레워스 본가가 아닌 성의 방비가 더 좋은 퀴노스 성에서 머물기로 했다. 퀴노스 성에 도착했을 때 먼저 출발했던 이든과, 퀴노스 공작, 그녀의 남동생이자 공작가의 후계인 마커스가 작은 서재에서 다음날 열릴 재판에 대해 논의하고 있던 중이었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그래, 고생 많았다.”


몇 년 만에 뵙는 그녀의 아버지는 그 사이에 많이 노쇠해 보였다. 부녀간의 회포를 풀 새도 없이 당장 내일 있을 재판을 준비하느라 퀴노스공은 이베트와 잠깐 눈만 맞추고 바로 이든에게 말을 했다.


“꼴이 우스워진 민회라지만 이미 손을 써두었네.”


“문제는 그들을 온전히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썼다고 해도 에피로스 측에서 더 많은 돈을 지불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합니다.”


“그렇긴 하지. 그렇지만 그 세 표를 행사하는 집안들의 약점을 틀어쥐고 있는 한 쉽게 넘어가진 못할 걸세. 가장 완고했던 필리스는 장자를 인질로 잡아 놓았지.”


이미 황제와 한통속인 에피로스를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서 이제 와서는 아무런 권위도 힘도 없는 민회이지만 그들의 힘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도 라퀴노스를 지지했던 민회이기에 어느 정도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진실 따위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쪽도 이쪽도 어차피 재판의 준비 과정에서 증거를 찾는 것이 아닌 만드는 것에만 집중했기에 양측 간의 공방은 그저 시간 낭비에 불과할 것이었다.


“아버지, 재판에서 질 경우도 생각해 두셨나요? 어차피 원로원의 폐위심판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래. 에피로스 측에서 반발을 우려해 화형과 동시에 바로 우리를 친다는 정보가 있었다. 아무래도 라퀴노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카르펜이시니 시민들의 여론도 무시할 순 없겠지. 처형 이후 우리를 치기까지 기간이 길어질수록 저들만 불리한 일이니 서두를 수밖에 없을 게다.”


이베트는 이번에 모든 사활이 걸린 것을 직감하고는 불안감에 두 손을 기도하듯이 마주 잡았다. 재판에서는 아무래도 준비가 부족했던 라퀴노스가 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그 다음을 대비해 놓아야 했다. 전면전이 되어 서로 치명상을 입더라도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수세에 몰리더라도 이쪽에서 총공세를 편다면 최소한 몰살당하진 않을 것이다.


“그럼 어쩌죠? 저들은 군권까지 장악하고 있으니 그 군사들을 이용한다고 쳐도 우리는요? 사병을 수도 내로 들이면 반란으로 간주될 게 뻔하잖아요.”


“그래서 공화파들이 주도한 시민 폭동으로 위장할 셈이다. 사병들을 노르센산 중턱에 이미 배치시켜 두었다. 공화파가 처단 대상이 되긴 하겠지만 그들이 그랬던 것이야 하루 이틀일도 아니고...”


“그나저나 정보는 믿을 수 있는 건가요? 전 아무래도 너무 불안해요.”


이베트의 말이 끝나고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안의 모두가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앨런, 무슨 일인가?”


“아가씨들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리고 필리스의 가주가 찾아왔습니다. 공작님을 지금 바로 뵙자고 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백색의 황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1 (9) +2 15.06.12 197 2 12쪽
40 (8) +1 15.06.05 139 3 11쪽
39 (7) +2 15.05.30 230 4 12쪽
38 (6) +1 15.05.26 184 4 13쪽
37 (5) +2 15.05.25 213 3 13쪽
36 (4) +1 15.05.20 248 3 14쪽
35 (3) +2 15.05.18 175 4 12쪽
34 (2) 15.05.17 198 5 12쪽
33 델로사 신전, 개화 (1) 15.05.14 222 4 12쪽
32 (7) 15.05.11 245 4 12쪽
31 (6) +1 15.05.09 185 6 14쪽
30 (5) +1 15.05.06 221 5 10쪽
29 (4) +1 15.05.04 210 5 14쪽
28 (3) +1 15.05.01 233 5 12쪽
27 (2) +2 15.04.29 216 5 13쪽
26 붉은 빛의 세라피나 (1) +1 15.04.29 210 7 13쪽
25 (7) +3 15.04.27 251 5 21쪽
24 (6) +1 15.04.26 247 5 14쪽
23 (5) +1 15.04.25 220 6 11쪽
22 (4) +2 15.04.24 110 5 13쪽
21 (3) +2 15.04.22 252 4 9쪽
20 (2) 15.04.21 248 5 12쪽
19 침몰, 그리고 탈출 (1) +2 15.04.20 246 7 12쪽
18 (7) +2 15.04.20 230 5 9쪽
17 (6) 15.04.18 249 5 11쪽
16 (5) 15.04.17 265 5 11쪽
15 (4) 15.04.17 219 5 10쪽
14 (3) 15.04.17 243 4 10쪽
» (2) +1 15.04.17 285 6 12쪽
12 붕괴의 시작 (1) 15.04.17 235 5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