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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봉이 님의 서재입니다.

백색의 황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수비니어
작품등록일 :
2015.04.16 22:49
최근연재일 :
2015.06.12 00:32
연재수 :
41 회
조회수 :
8,715
추천수 :
193
글자수 :
215,817

작성
15.06.12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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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9)

DUMMY

*





오후에 정신없이 업무를 보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세라피나는 주교의 보좌실을 찾아갔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모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주교가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인지 모두들 정신없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레온이 딱딱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와 보좌관실 안쪽에 있는 문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주교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작은 응접실이 보였고 그 응접실과 연결된 방문도 보였다. 레온이 그 안쪽의 문으로 다가가 그녀가 왔음을 알리고 벽 한쪽의 줄을 잡아당겨 시녀를 불렀다.


응접실에서 잠시 기다리자 깡마르고 무척 왜소해서 세라피나보다도 작아 보이는 짙은 갈색 머리칼을 가진 중년의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상당히 날카로운 인상을 갖고 있었다.

칼라일 코헨. 델로사 중앙신전의 주교인 이 남자의 이름이었다. 코헨은 황제의 최측근이자 사사로이는 세라피나의 오촌 당숙 쯤 되는 관계였다.


세라피나는 그가 그녀의 근처까지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다가 몇 걸음 앞에서 멈추어 섰을 때 예를 취했다. 그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고 있자 코헨의 갈라진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자극했다.


“빈틈이 없구나. 좋아. 귀족태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흠잡을 곳이 없군. 바로 서게.”


“예. 감사합니다.”


그의 허락이 떨어졌음에도 세라피나는 고개를 반듯이 세우지 않고 살짝 숙인 상태로 감사를 표했다. 그는 흡족하다는 듯이 살짝 웃고는 레온에게 말을 했다. 그가 웃자 날카로웠던 인상이 순간 매우 온화하게 바뀌었다. 세라피나는 조금 놀랐으나 내리깔고 있는 눈을 들어 그를 바로 보지는 않았다.


“자네는 이제 나가봐도 좋네.”


“예.”


코헨이 소파에 앉으며 세라피나에게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였다. 그는 세라피나가 자리에 조용히 앉는 동안 관찰하는 시선으로 그녀의 모든 행동과 얼굴표정까지 꼼꼼히 살펴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더니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자신이 아는 누군가와 상당히 닮은 모습이 매우 신기했다. 흑발뿐만이 아니라 날카롭게 올라간 눈매나 야무져 보이는 입술, 풍기는 분위기까지 매우 닮아있었다. 옆에 같이 세워놓고 비교하고 싶을 정도였다.


‘눈동자가... 이블린이 저런 파란 눈이었지...’


그래도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애써 드는 생각을 털어내었다. 이렇게 닮은 모습의 아이가 카르펜의 역할을 대신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카르펜이 없는 현재 신께서 내려주신 안배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올해 17이라고 했나?”


“예. 가을이면 18이 됩니다.”


“자네를 왜 불렀는지는 이미 알고 있을 테고... 그래, 어떤가? 생각을 해봤나?”


“제게 생각할 여지라는 것이 있습니까?”


“뭐? 허허허... 그렇지, 이미 낙점된 이상 피할 수는 없지.”


그녀의 인상처럼 말하는 것도 야무지고 당차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그녀의 앞날에 어떤 악영향을 미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오히려 순종적이고 조금은 둔한 성격이어야 순탄히 흘러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다른 누군가를 물색하기도 힘들었다. 이정도 성력에 집안 배경, 나이까지... 마땅한 다른 처녀가 없었다. 여자들은 타고나기를 남자들보다 성력의 그릇이 약했기에 세라피나 정도의 성력을 갖고 있는 여성은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녀의 성력은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맑은 푸른빛은 아르미티즈 공과 비교를 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 어린 나이에 이정도면 앞으로 얼마나 발전할 수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럼 제가 원하는 것을 한 가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


코헨은 웃고 있던 입매를 굳히고 말없이 세라피나를 응시했다. 세라피나는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마주 바라보았다. 불편한 침묵을 깨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시녀가 들어와 코헨과 세라피나 앞에 찻잔을 내려놓고 조용히 물러갔다.


코헨은 주전자를 들어 어느 정도 우러난 차를 잔에다 따르면서 입을 열었다. 그의 차갑게 갈라진 목소리가 차를 따르는 맑은 소리와 함께 응접실에 울렸다.


“넘치는 것은 좋지 않네. 자네가 그 자리에 올라서는 순간 자네의 목숨은 자네 것이 아니게 되네. 넘치면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되겠지.”


“아직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듣지 않으셨습니다.”


코헨은 고개를 들어 세라피나를 차가운 눈으로 보며 입으로만 빙긋이 웃었다.


“... 그래. 말해보게.”


그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세라피나의 잔에 차를 따르고는 그녀의 앞으로 내밀었다. 세라피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인사를 표하고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칼라일 코헨... 모든 사건에서 언제나 한 발짝 물러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교활하기가 독사 같다는 유스터스 리날디와 함께, 막후로는 어떤 속셈을 갖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선황제의 장녀인 루이스 코헨의 아들이자 현 황제와는 사촌이었다. 현 황제의 공식 후계가 없는 상황에서는 황권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는 정치에는 뜻이 전혀 없다는 것을 내비치며 대제사장의 자리도 마다하고 주교의 자리에 앉아서 델로사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의 후계인 20대 후반의 아들 역시도 그의 영지 밖으로 걸음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코헨의 영향력은 교단에서는 아르미티즈보다도 막강했다. 황제 다음의 종교적 이인자가 바로 코헨이었다.


“그 시기가 내년이었으면 합니다. 가을 제전은 아직 제게 무리입니다.”


“아닐세. 자네 성력 심사 때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니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네. 결코 부족하지 않네. 그 정도면 오히려 아주 훌륭하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로군.”


“예. 하지만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


“... 좋아. 묻지 않겠네. 내년으로 미루는 것이야 별 문제는 아니지. 그러나 자네는 다음 대 카르펜이 추대될 때까지 혼인은 고사하고 약혼도 할 수 없을 것이야.”


코헨의 느릿한 말투와 거친 목소리가 세라피나는 거슬렸다. 상대를 깔보고 무시하지는 않으나 앞에 있는 자가 자신보다는 확실히 아래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말투였다.


가늘게 뜨고 있던 눈을 돌려 차를 한 모금 마신 코헨은 세라피나를 보고 빙긋 웃었다.


“성녀는 어린 처녀여야 하는 법이니까.”


“......”


세라피나는 불쾌한 기분에 꼭 다물린 입을 억지로 잡아 늘려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황제측은 빠르면 이번 가을부터 그녀의 성력을 드러내면서 성녀로 추앙할 계획이었다. 아직은 어리지만 그에 걸맞는 주교의 자리에 먼저 앉히고 나서, 대주교, 대제사장까지 올릴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런 계획은 종교 집단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가능했다. 성력의 강함과 황제인 카르파의 지지는 모든 것을 이루어 줄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그들의 통제 아래에 놓고 마음껏 이용하며 일반 시민들을 선동할 생각인 것이다.


‘그렇게 아르미티즈의 입지를 약화시키겠지...’


그리하여 6년이나 비어있는 자리를 아직까지 꿰차고 있지 못한 아니카 아르미티즈의 입지를 없애려는 것이다. 그러나 세라피나는 이러한 그들의 계획에 동참할 생각이 없었다. 주교의 자리는 스스로 차지할 것이다. 훗날을 위해서 모든 것은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야했다.


“그러니 앞으로 몸가짐에 신경 써야 할 것이야. 그리고 이번 봄 제전이 끝나면 바로 보좌실로 옮기게. 이제부터 배워야 할 것이 많아.”


“예. 명심하겠습니다.”


응접실을 나오면서 문을 닫기 전에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차를 음미하고 있는 코헨을 잠깐 보았다.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이 테이블에 반사되어 아래쪽에서 불빛을 비추고 있는 듯한 그의 얼굴은 어둑한 방안에서 음산해 보였다.





문을 닫고 나오자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던 레온이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보좌관실 내부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이제 높은 신분이 될 그녀를 향해 어색한 웃음들을 보내고 있었다.


“봄 제전에 대해 상의 드릴 일이 있습니다. 따라오시지요.”


레온의 의도적인 시선 차단이 그녀로서는 반가웠다. 그는 그녀를 이끌고 옆에 있는 회의실이 아닌 건물 밖으로 나갔다.


“업무 일로 보자고 하신 것이 아닌가요? 왜 밖으로...”


“같이 저녁식사나 합시다.”


“예? .... 죄송하지만 일이 너무 많아요. 다시 집무실로 가야합니다.”


“아니. 내가 라일리 사제에게 이미 말해 놓았어요. 오늘 저녁은 쉬어도 좋답니다. 거절은 거절할게요. 딱 30분 줄 테니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오세요. 신전 정문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레온은 세라피나에게 웃으며 뭐라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한 채 돌아서서 가버렸다. 뒤늦게 그의 뒷모습을 보며 세라피나가 그를 불렀으나 레온은 못 들은 척하고 걸음을 빨리할 뿐이었다.


“아니. 잠깐만요.”


조금 황당했다.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버리다니...


‘30분...’


동쪽 사제관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기에는 빠듯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걸음을 떼었다. 그러다가 일방적인 그의 통보에 이대로 따라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들면서 조금씩 화가 났다. 이내 발걸음이 느려지면서 그냥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득 달빛 아래에서 하얗게 빛나는 얼굴이었지만 외로워 보이던 그의 표정과 함께 불안하게 흔들리던 초록색 눈동자와 기운이 빠져 있던 그의 두 어깨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정문 앞에서 자신이 올 때까지 기다릴 그의 모습과 외로워보이던 그 때의 모습이 겹쳐졌다. 또 최근에 미묘하게 어두웠던 그의 안색이 신경이 쓰이기도 했었다. 세라피나는 발을 땅에다 구르고는 마음이 자꾸 약해지는 스스로에게 짜증을 냈다.


‘어휴! 정말!’


그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동쪽 사제관으로 가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시녀를 불러 물을 받아 세수를 다시 하고 옅은 화장을 했다. 그리고 평소에는 입지 않던 프릴이 달린 연한 핑크색 원피스를 입었다. 땋여있던 머리를 풀고 포니테일로 다시 묶어 살짝 웨이브진 머리칼을 자연스럽게 내리고 크림색 리본으로 장식을 했다. 거울을 보며 귀 옆으로 잔머리를 가지런히 내리고는 시계를 보았다. 벌써 30분이 지나있었다. 작년에 사두고 신지 않았던 베이지색의 구두를 꺼내어 신고는 서둘러서 방을 나섰다.





레온은 초조하게 광장에 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20분이 넘게 지났다. 신전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멀리서 걸어 나오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표정을 억지로 굳혔다.


“늦었습니다. 30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그렇게 말씀만 던져 놓고 가시는 게 어디 있어요? 나오지 않으려다가 계속 기다리실 것 같아서 그냥 나왔어요.”


그녀의 흘겨보는 눈과 뾰로통하게 나온 입술이 귀여워 보였다. 뾰족하게 나온 붉은 입술에 눈길이 머물렀다. 레온은 자신의 불순한 생각을 차단하기 위해 그녀의 눈으로 시선을 돌리고 그녀의 옷차림에 시선을 옮겼다.


나오지 않으려다 나온 사람치고는 화사하게 잘 어울리는 예쁜 옷차림이었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보이려고 입고 나온 옷이기에 기분이 좋아져서 피식 웃음이 났다. 귀족가 여식들이 입는 치렁치렁하고 불편해 보이는 파니에 드레스와는 달리 신흥시민계층들이 입는 실용적이면서도 발랄해 보이는 디자인이었다.


레온은 세라피나에게 팔을 내밀고 그녀의 얼굴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녀의 하얀 손이 자신의 감색 수트 위에서 자리 잡는 것을 보고 레온의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광장 한쪽에 세워둔 마차로 다가가 깍듯한 마부의 인사를 받으며 마차 위로 올랐다.


작가의말

명색이 로판인데 40회가 넘어서야 첫 데이트가 나오네요.. ㅎㅎ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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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6) +1 15.05.26 184 4 13쪽
37 (5) +2 15.05.25 213 3 13쪽
36 (4) +1 15.05.20 248 3 14쪽
35 (3) +2 15.05.18 175 4 12쪽
34 (2) 15.05.17 198 5 12쪽
33 델로사 신전, 개화 (1) 15.05.14 222 4 12쪽
32 (7) 15.05.11 245 4 12쪽
31 (6) +1 15.05.09 185 6 14쪽
30 (5) +1 15.05.06 221 5 10쪽
29 (4) +1 15.05.04 211 5 14쪽
28 (3) +1 15.05.01 233 5 12쪽
27 (2) +2 15.04.29 216 5 13쪽
26 붉은 빛의 세라피나 (1) +1 15.04.29 210 7 13쪽
25 (7) +3 15.04.27 251 5 21쪽
24 (6) +1 15.04.26 247 5 14쪽
23 (5) +1 15.04.25 220 6 11쪽
22 (4) +2 15.04.24 110 5 13쪽
21 (3) +2 15.04.22 252 4 9쪽
20 (2) 15.04.21 248 5 12쪽
19 침몰, 그리고 탈출 (1) +2 15.04.20 246 7 12쪽
18 (7) +2 15.04.20 230 5 9쪽
17 (6) 15.04.18 249 5 11쪽
16 (5) 15.04.17 265 5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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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3) 15.04.17 243 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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