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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봉이 님의 서재입니다.

백색의 황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수비니어
작품등록일 :
2015.04.16 22:49
최근연재일 :
2015.06.12 00:32
연재수 :
41 회
조회수 :
8,717
추천수 :
193
글자수 :
215,817

작성
15.04.22 18:58
조회
252
추천
4
글자
9쪽

(3)

DUMMY

레온은 열린 성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결국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아버지의 뒤만 따라다닌 것이 전부였다. 퀴노스가의 성을 공격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는 긴장감이 사라졌다.


아버지는 아르미티즈 가문 특유의 깊은 바다와 같은 푸른 신성력으로 수많은 기사들을 없애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푸른색으로 빛나는 긴 창을 손에 들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푸른색의 창에 찔린 부분이 불에 타들어 가듯 재가 되어 구멍이 뚫렸다. 원거리 공격을 할 수는 없었지만 공격범위 안에 들어온 자들에게는 무엇보다 위협적이었다. 새삼 놀라운 광경이었다.


동이 터오는지 어느새 주변이 조금씩 밝아져왔다. 밤새 지속된 치열한 전투 끝에 저 멀리 첨탑에서 제1기사단장이 퀴노스가의 깃발을 꺾어드는 것이 보였다. 700년이 넘는 시간을 버티며 제국의 시작과 그 역사를 함께해 온 거대 가문의 몰락이었다.


다섯 면으로 이루어진 성채의 중앙에 있는 정원으로 들어가니 병사들이 이미 시체가 된 퀴노스가의 가신들과 가솔들을 한데 쌓아 놓고 있었다.


넓은 중정의 한 가운데에 포박되어 무릎을 꿇은 채 앉아있는 라퀴노스 공작 내외와 클레워스 백작 부부, 이미 시신이 된 소공작이 있었다. 라퀴노스 공작 부부와 클레워스 백작 부부 역시 숨만 붙어 있었지 거의 시신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특히 클레워스 백작은 등 뒤로 깊은 자상을 입어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아르미티즈 수장인 아버지가 그들 앞으로 나섰다.


“안타깝게 되었소. 공작. 어젯밤 잠자리에 들 때 카르펜의 죽음으로 꽤나 안도했을 터인데... 후후후... 잠깐이나마 좋은 꿈을 꾸진 않았소?”


“시..끄럽다.. 야비한 놈..! 어서 쳐라!”


퀴노스 공작이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쿨럭쿨럭 기침을 하더니 핏덩이를 연신 토해내었다. 신성력을 과하게 사용하여 내장이 파열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미 더 이상 살 수 없는 몸이었다.


“그것이 마지막 소원이라면 그쯤은 들어드리지요.”


퀴노스 공작은 마지막 힘을 끌어 모았다. 그러나 이미 쓸 수 있는 신성력은 고갈된 상태였고 이블린처럼 재가 되어 사라지듯 자결할 만한 신성력도 처음부터 없었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 들끓다가 머릿속이 터져나가는 느낌이 듦과 동시에 시야가 암전되었다.


윈스턴이 피식 웃으며 검을 들고 퀴노스 공작에게 다가갔으나 퀴노스 공작의 눈이 뒤집히더니 몸이 천천히 옆으로 무너졌다.


“네 이놈! 네 최후가 어떨지 두고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공작부인이 눈을 부릅뜨고 윈스턴을 노려보며 외쳤다.


“훗... 보신다고 그리 기분이 나이지진 않으실 것입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들고 있던 검으로 이미 죽어버린 공작은 내버려둔 채 공작부인의 목을 쳤다. 잘린 목에서 심장 박동에 맞춰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다른 기사들이 통나무를 가져와 죽어있는 퀴노스 공작을 그 위에 엎어 놓았고 윈스턴이 직접 목을 베었다. 눈을 부릅뜬 채로 머리통이 굴러가는 끔찍한 모습에 레온은 눈을 돌려버렸다. 손에서 식은땀이 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윈스턴이 그런 레온을 돌아보지 않은 채 나지막이 불렀다.


“레온.”

“예.”


“클레워스 백작은 네가 쳐라. 그동안 검술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면 단번에 칠 수 있을 것이다.”


“......”


대답이 없는 레온을 돌아보고 윈스턴은 탐탁지 않은 듯 미간을 좁혔다.


“두려운 것이냐?”


“아닙니다.”


대답을 한 후로도 아무런 움직임 없이 가만히 서있는 레온을 보고 레온의 검술 스승인 켄들턴 백작이 나섰다.


“소공자, 공작가의 후계로서 많은 가신과 식솔들을 책임질 자리에 앉으실 분이 이런 것으로 망설여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굳건히 하셔야합니다. 열셋이면 공을 세울 나이지요. 아르미티즈의 가주가 되실 분으로서 반역자는 직접 처단하셔야 합니다.”


켄들턴이 레온의 어깨에 한 손을 얹으며 말을 했다.


주변을 둘러싼 기사단장들과 수많은 기사들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딱히 무서운 건 아니었다. 더럽지만 피할 수 없었다.


공작가 후계의 의무... 알고 있다. 전장에도 제일 먼저 나가야하고 귀족 지위의 배신자나 탈영병, 반역자도 직접 처단하여 위엄과 질서를 보여야 한다는 것. 이미 출전을 명받았을 때 각오했던 일이다. 이미 해본 살인 따위는 겁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껏 죄가 없는 사람을 죽인 일은 없었다. 그것이 묵직한 칼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남들이 자신에 대해 피도 눈물도 없을 완전한 푸른 피라고 수군거렸지만, 한 번도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정도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실망, 정의가 아닌 정치에 휘둘려 반역자가 아닌 패배자의 목을 벨 생각을 하자 속이 울렁거렸다. 이런 정치싸움에 환멸이 들었다. 그러나 자신이 아르미티즈를 버리지 않는 한 지금 해야 하는 일이었다. 에피로스의 아르미티즈 가문 밑에 있는 수많은 기사들이 자신을 보고 있다. 여기에서 물러선다면 권위가 무너지고 말 것이다.


레온은 검 집에서 검을 빼어 들고 거의 빈사 상태에 빠진 클레워스 백작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검을 높이 들어 망설임 없이 내려쳤다. 뿜어져 나온 피가 얼굴에도 튀었다. 한 겨울의 냉기로 차가워진 얼굴에 뜨거운 피가 튀는 순간 전신에 힘이 바짝 들어갔고 눈은 저절로 감겼다. 그 끔찍한 기분은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역겨웠다.


아버지가 다가와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 그 손길에 몸이 땅으로 추락하는 느낌이 들었다.


“잘했다.”


“......”


클레워스 백작의 시신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클레워스 백작부인의 얼굴을 안쓰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얼굴이 낯이 익었다. 기억이 났다. 어제 이른 오전에 있었던 재판정에서 카르펜 전하의 옆을 지키던 귀부인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밝은 회색빛 잿가루를 손에 꼭 쥐고 흐느껴 울던 그녀였다.


문득 생각해 보니 반역자라면서 공개처형을 하지 않고 바로 목을 벤 것은 카르펜 전하의 국장과 맞물려 민심이 악화될 것을 고려한 행동이었다. 모든 것이 계산된 일이었고 그 과정 속에 자신이 들어있다는 것이 구정물에 발을 담근 듯 기분이 더러웠다. 퀴노스 일가의 몰락은 아마도 앞으로 있을 카르펜 전하의 서거 소식과 국장에 의해 희석될 것이고 서서히 잊혀질 것이다. 또 누군가는 에피로스의 꼭두각시가 되어 라퀴노스를 대표하는 퀴노스 공작의 자리를 잇는다...


“넌 이제 그만 들어가 보거라.”


“예.”


“켄들턴 백작. 레온과 함께 돌아가게.”


“예. 주군.”


레온은 보좌관과 함께 멀어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다가 빠른 걸음으로 중정을 벗어났다. 성의 정문에 다다랐을 때 피 묻은 검을 분노로 가득한 눈으로 내려 보고는 있는 힘껏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말에 올라타서 미친 듯이 달렸다. 한겨울 새벽공기가 무척이나 찼지만 레온의 들끓는 심정을 식혀주진 못했다.





윈스턴은 본관으로 들어가 700년을 이어온 가주들의 초상화가 줄지어 걸려 있는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그들의 눈길이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듯했다. 그들 모두를 자신의 발밑에 눌러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무섭기는커녕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지 못해 웃음소리를 흘렸다.


기사 한명이 빠른 걸음으로 윈스턴에게로 다가와 한 쪽 무릎을 꿇고 오른 손을 가슴에 대었다. 보좌관이 그를 보고 말하라는 뜻으로 손짓을 했다.


“아무리 성 내부를 뒤져 보아도 소공작 부인과 그 아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클레워스 백작가의 세 여식도 마찬가지입니다. 탈출로를 통해 이미 도주한 것 같습니다.”


윈스턴은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호탕하게 소리쳤다.


“숨이 붙어있는지는 상관없다. 머리만이라도 가져와라!”


“예. 주군!”


기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고개를 숙이고 멀어졌다.


윈스턴은 주먹을 쥐었다. 큰 산을 막 넘었다. 이제 순리임을 내세워 아니카를 카르펜의 자리에 앉히고 원로회만 서서히 푸른색으로 물들일 일만 남았다. 황제의 오만한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게 된다면 정복자의 승리감을 만끽하는 지금보다 몇배는 더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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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99 연두초록
    작성일
    15.04.24 11:12
    No. 1

    재밌네요~~
    근데 신성력이 이렇게 권력을 탐해도 상관없나요?
    신성이 있어야 발휘되는게 신성력이 아니라 그냥 초능력 같은건가 궁금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5 수비니어
    작성일
    15.04.24 12:40
    No. 2

    댓글 감사드려요 ㅠㅠ
    문피아는 수준도 높은 듯 해서 왠지 올리기가 무서웠는데
    관심주셔서 힘이 납니다ㅎㅎ
    앗!
    저건 노코멘트에욥... ^^;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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