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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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소녀가 한 소년을 만났다.
소녀는 매일같이 소년을 찾았고, 소년도 소녀를 반겼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위안인 줄 알았다. 그것이 우정을 가장한 이성적인 호감으로 바뀌고, 애정이라는 감정이 어린 그들의 마음에 싹트는 건 순식간이었다. 관심이라는 물에 젖고, 기대를 거름삼아 그것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여린 싹이 조심스레 가지를 뻗어 작은 잎을 맺었을 때, 소년은 포기를 아는 청년이 되었지만 소녀라는 햇빛을 받기 위해 그녀의 밑으로 들어갔다. 비록 예전과 달리 같이 웃을 순 없었으나 소녀의 웃음에 그것은 청년의 마음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행복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속은 비었지만 겉은 먹음직스러운 그런 열매를.
반면, 하인이 된 청년의 모습은 순진했던 소녀에게 충격이었다. 처음으로 가진 감정을 포기할 수 없었던 소녀는 흔들리는 줄기를 다잡았다. 그러나 신분의 벽이라는 강풍이 불자 잎사귀들은 하나, 둘 떨어졌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아름다운 꽃을 피워냈다. 너무나도 여려 슬픈 꽃을.
소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곧고 다정한 눈을 사랑했으나 그에게 다가갈 수는 없었다. 청년은 소녀의 곁을 지켰으나 그녀에게 손을 뻗을 수는 없었다. 허락되지 않은 서로의 이름을 조심스레 읊조려 보는 것으로 애달픈 그들의 연심을 달랬고, 떨리는 음성은 흩어지고 흩어져 잔상만 남은 바람으로 상대의 마음에 닿아 한줄기 온기가 되었다.
그 따스함에 소녀는 여인이 되었고 아련한 꽃향기에 홀린 벌들이 그녀의 주위를 맴돌다 마침내 그녀의 아버지의 허락을 얻은 하나가 그녀를 취했다. 청년을 위해 피었던 꽃은 짓밟혔으나 근근이 생명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점차 시들어버리고, 벌은 다른 꽃을 찾아 떠난다.
여인이 24살, 청년이 26살이 될 때까지도 그들은 나란히 서지 못 했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애절했던 사랑의 향기만 남아 그들을 기렸다. 가리다
***
“아가씨, 뭐 쓰세요?”
시녀의 질문에 종이 위에 수려한 필체를 그리던 펜이 멈췄다.
“편지...랄까?”
“누구에게요?”
“으음.......”
수신인도 정하지 않고 쓴 것인지 금발의 소녀는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벌꿀색의 머리카락이 굽이쳤다.
“꿈속의 나에게?”
“네?”
“아니다, ‘과거의 나에게’가 맞는 것 같아.”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지 소녀는 입술을 삐죽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도 참, 저는 아가씨가 무슨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네요.”
“그러게, 나도 잘 모르겠네.”
시녀의 난처한 음성에 소녀는 붉은 입 꼬리를 올려 예쁜 미소를 지었다.
“분명한 건 이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란 거야.”
맑은 초록색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났다.
‘내가 바꿀 거니까.’
13살, 과거로 돌아온 소녀는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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