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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의 서재입니다.

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지하이
작품등록일 :
2022.10.26 12:21
최근연재일 :
2024.06.12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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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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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59화 옛 인연

DUMMY

59화 <옛 인연>



쿵쿵.

베르길드 저택에 발소리가 울렸다.

브레드는 쌀가마니를 들던 일을 멈추고 문 쪽을 바라봤다.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그가 찾아오리라 예상했던 인물이 들어왔다.


“브레드 님!”

“내가 허락한 게 아닐세.”

“그러면 어째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겠나?”


브레드는 칼같이 대답했다.

쌀가마니를 내려두고 이 일이 일어난 사정을 설명했다.


“길드에서 여기까지 멋대로 찾아오더군. 그대가 반가워하지 않을 거 같기에 차 한잔, 손님 방 하나 내어 줄 수 없다고 하였지만. 결국 쫓아왔네.”


화가 나서 찾아왔던 캣니스가 조용해졌다.

브레드는 남은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빈말이 아니었으니 손님 대접을 하지 않았네. 기다릴 방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먼저 온 손님들과 어울리고 있던 것이고.”


그리 말하고 대답을 기다렸다.

안 좋은 소리를 들을 각오까지 했지만, 별말 없었다.

그야 캣니스 쪽에서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이번 일에서 브레드는 최선을 다해줬으니까.

상대가 용사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음에도 캣니스를 위해 강경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에 비하면 캣니스는 형편 없었다.

다짜고짜 그에게 찾아와서 화를 냈다.

다행히 제 잘못까지 생각 못할 정도로 이성을 잃은 건 아닌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제가 예민하게 행동했어요.”

“허허, 괜찮네. 끝까지 막지 못한 내 잘못도 있으니. 우리 사이에 이런 일로 사죄하지 말게나.”

“아니에요. 저는 노력했던 브레드 님을 멋대로···”

“나였어도 그리했을 걸세. 그것보다 더 도움이 될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브레드는 쌀가마니를 들어서 방 한쪽에 쌓았다.

창고 한편에 수십 개의 쌀가마니가 쌓아져 있었다.

근처 의자에 걸었던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텐가?”

“저는···.”


캣니스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멈췄다.

브레드는 그녀가 마음 편히 답을 내릴 수 있도록 조용히 기다렸다.


“일단은 대화를 해보려고 해요.”


길었던 고민 끝에 답이 나왔다.


“그러면 그녀를 내쫓지 않겠다는 건가?”

“아이들의 앞에서 험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으니까요.”


브레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적으로 해결하려는 자세는 바람직하였다.


“그렇군. 그런데 그렇게 무리해도 괜찮은 건가?”

“찾아왔으니 최소한의 성의는 답해주려고요.”

“그대가 옳은 선택을 했으리라 믿네.”

“여러모로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해요.”


캣니스는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사과했다.

이에 브레드는 캣니스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어깨를 몇 번 두드렸다.


“걱정하지 말게. 자네는 베르길드와 나를 믿으면 될 일일세.”


그렇게 쓰기 위한 관계 아니었냐고. 그렇게 말하는 듯하였다.


“그러니 후회 없이, 크게 한 방 먹여주고 오게.”


그는 손을 흔들며 방을 나갔다.

캣니스는 그의 등을 바라봤다.

아무렇지 않게 등을 내주고 얼마든지 방패막이를 자처하겠다는 브레드 머슬릿.

그 응원에 힘입어서 두 주먹을 그러쥐었다.



*****



“다, 다시 만나줘서 고마워···.”


캣니스와 에이린은 손님용 방에 마주 앉았다.

기다란 탁자 위에는 흔하디흔한 차 한 잔도 없었다.

이가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명백한 불청객 취급.

그래도 에이린의 입에서 불평은 나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여기서 얼굴을 보기 전까지 네가 살아있는지 몰랐어···.”


에이린이 꺼낸 말은 전혀 새롭지 않았다.

첫 만남 때부터 짐작했던 부분이었다.


“그러니까 너를 해코지하러 찾아온 건 아니었어. 나는 그냥 신화시대의 유적지를 확인하러 왔을 뿐인데.”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닐 텐데요.”


쓸데없는 이야기를 차가운 말로 일축했다.

캣니스의 말대로, 이곳에 찾아온 사정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에이린은 잔뜩 풀이 죽었다.

그래도 할 말을 하기 위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우리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지 않아?”


용사들은 캣니스를 배신했음에도 잘 살아가고 있다.

성직자의 죽음을 거짓으로 꾸며서 확실한 이득을 챙겼다.


“제가 왜요?”


그러나 캣니스는 관심 두지 않았다.

철저히 타인을 보는 듯한 거리감을 두었다.

에이린의 표정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대화를 이어가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캣니스가 입을 열었다.


“제가 용사님들의 삶을 궁금해할 줄 알았나요? 어디서 그런 오해가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전혀 아니에요.”


여전히 차가운 말로 상대방을 공격했다.

에이린은 이에 대해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저는 그때 죽었어요. 눈앞에 있으니 믿기지 않겠지만 용사였던 캣니스 센츄어리는 그날 죽은 거예요.”


눈앞에 있는 자신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러니 괜한 감정을 요구하지 마라.

단단히 닫힌 감정의 문은 조금도 열릴 틈이 없었다.


“그래···. 변명하지 않을게. 모두 내 잘못이야.”


에이린은 아랫입술을 씹었다.

이 거리감을 만든 지난날을 후회하였다.


“그래요. 인정하는 모습은 보기 좋아요. 하지만 딱 거기까지예요. 저는 지금 삶도 벅차서 용사님들의 삶이 어떤지 조금도 관심 없어요.”


증오도, 유감도, 슬픔도 없는 무감정한 눈동자.

에이린은 그 차가움에 몸을 떨었다.


“그런데요 에이린 님. 이런 말을 묻기에는 너무 염치없잖아요?”

“나, 나는···”

“당신이 밀었잖아. 마왕성에서.”


이렇게나 강하게 나오는 캣니스를 처음 봤다.

캣니스 또한 이렇게 강하게 나가는 일은 손에 꼽을 일이었다.

에이린은 가슴께를 움켜쥐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힘겹게 뗐다.


“그래서 나도 너 못지않게···.”


캣니스는 어디 한번 들어보자는 얼굴을 하였다.

에이린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어야했다.


“우리도 너를 그렇게 보낸 뒤로 편히 지내지 못했어···.”


말을 뱉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 전의 말을 벌써 후회했다.

아무리 포장해도 형편 좋은 불평이다. 분에 넘치는 배부른 소리다.

어떠한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캣니스는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차라리 윽박지르거나 한숨이라도 쉬었으면 좋았을 모습이었다.

에이린은 등줄기를 따라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한순간이 영원처럼 다가오는 시간이 이어졌다.

절박하게 쏟아질 말을 기다리던 입이 마침내 열렸다.


“그러면 물을게요.”


하지만 기대했던 것과 다른 말이었다.

조금도 궁금하지 않지만 마지못해 묻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더 이상 상대하기 싫으니 찾아온 용건 정도는 받아주겠다.

캣니스의 입에서 나오리라 생각지 못한 오만한 말이었다.


“우리는 찢어졌어.”


그렇지만 에이린은 그런 자비라도 절실했다.

악문 잇새 틈으로 꾸역꾸역 단어를 말했다.

근 몇 달간 처음으로 받은 수치심으로 얼굴이 얼룩졌다.

하지만 힘들게 얻은 속죄의 기회를 잡기 위해 또 한 번 고개 숙였다.


“게일도, 모몬도, 나도. 이제는 옛날 같지 않아···.”


에이린이 말했다.

용사 파티는 찢어졌다.

용사 파티의 해산은 모두의 동의하에 이뤄진 결정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이런 식으로 끝이 날줄은 몰랐어···.”


몇 년간 함께했던 파티가 한순간에 와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에이린은 가차 없이 버려졌다.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줄 알았던 우정이 얼마나 얄팍한 믿음이었는지를 체감했다.


“나는 다 필요 없고 너희들뿐이었는데···”


자의이든. 타의이든. 마탑주가 되었다.

절연의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토록 좋아하던 파티 행사에 몇 번 발을 들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칭송하는 말들이 예전처럼 즐겁지 않았다.

사람들도 디저트도 자신의 옛 모습을 떠올리게 하면 구역질이 치밀었다.


-나는 살인자가 아니야!


그때부터 미친 듯이 마탑에 도움이 될 연구에 매달렸다.

자신의 쓸모를 보이기 위한 노력이 은거의 형태가 되어버렸다.


-그 사람만. 그 사람만 아니었어도···


몇 번이고 정신적으로 몰려 있을 때면. 용사 파티가 해산된 이유를 그 사람에게 돌렸다.


“그게 누군가요?”

“그건···.”


에이린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돌연, 마주한 테이블에서 내려와 두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마를 땅에 찧었다.


“나는. 나는 정말로 그런 줄 몰랐어······!”


자존심 높은 에이린이 두 손을 비비면서까지 용서를 구했다.

그 모습을 본 캣니스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함께 여행하는 동안에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모습.

이제는 어떠한 유감도 없으리라 여겼던 가슴에 파문이 일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용서를 바라지는 않을 테니까. 제발··· 제발······.”


캣니스는 이를 사리물었다.

한때는 누구보다 빛났던 마법사. 누군가는 동경했던 사교계의 별과 같은 존재.

마왕 토벌이 끝나고 어떠한 때보다 빛나야 할 순간이 찾아왔는데, 어째서 다시 만난 그녀는 누구보다 초라해진 모습이 된 걸까.


“일어서요.”

“미안해. 내가 정말 못나서······”

“일어서라고요!”


캣니스는 에이린의 팔을 잡아끌었다.

지금껏 평정을 유지해왔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이럴 거면 찾아오지 말았어야죠!”


결국 큰소리를 쳤다.

다시 무릎을 꿇으려고 하는 몸을 몇 번이고 잡아끌었다.


“잘 살았어야죠! 제 목숨을 버리고 가져온 평화라면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어야죠! 그런데 이 모습은 뭐예요? 왜 제가 이런 식으로 당신과······!”


캣니스는 소리쳤다.

몇 년간 쌓아뒀던 감정이 마침내 터졌다.

하고 싶었던 말과 하지 못했던 말을 모두 쏟아냈다.

그렇게 모든 감정을 토해낸 뒤에는 스스로 얼굴을 감쌌다.

충동에 휩싸여 뱉은 말 때문에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감정을 억누르려 애썼지만. 한 번 생긴 끔찍한 기분은 어지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만족해요? 잘 사는 사람 붙잡아서 이런 꼴로 만들어 놓으니까요?”


캣니스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맺혀 흘러내렸다.

짙은 원망이 담긴 푸른 눈동자가 눈물을 뱉었다.


“보석. 좋아하셨잖아요. 누구보다 꾸미기 좋아했잖아요. 그런데 지금 그 모습은 뭐예요? 대체 저에게 뭘 바라서 이러냐고요!”


억누르지 못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살겠다고 동료를 버린 사람이 이런 처량한 모습이 되어 찾아온 게 원망스러웠다.


“미워할 수 있게. 미움받을 용기는 있었어야죠. 그런데 이런 식으로. 저를. 나락으로···.”


견고하게 쌓아뒀던 마음의 벽이 무너졌다.

밖으로 나오려는 약한 소리를 참아내는 것만으로 고역이었다.

이제는 조금 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있을 수 없었다.


“아직 당신들을 미워해 보지도 못했는데···.”


캣니스는 얼굴을 감싼 채 원망하는 말을 뱉었다.

지금껏 한 번도 옛 동료를 미워한 적 없었다.

그저 언젠가 만나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외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얼마나 안일했는지를 깨닫고 말았다.


“이렇게 다짜고짜 찾아와서는 용서해 주라니요.”


뚝뚝. 턱 끝에 맺힌 눈물이 떨어졌다.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판단할 수 없었다.


“당신들은··· 정말··· 나쁜 사람들이야······.”


캣니스는 얼굴을 감싼 채 몇 번이고 비난했다.

모두가 그들을 영웅이라고 칭송해도, 자신에게만큼은 나쁜 사람이다.

이것만큼은 그들이 부정해서는 안 되고 빼앗아서는 안 될 감정이었다.


“당신들은 정말로··· 훌쩍······.”

“우, 울지마. 캣니스. 내가 잘못했어. 이번 이후로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게. 그러니 제발 울지마. 제발··· 제발······,”


지친 모습을 보이는 캣니스 앞에서 에이린은 손이 닳도록 빌었다.

두 사람 모두 누가 낫다 할 것 없이 만신창이였다.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한때 같은 목표를 가지고 함께 달렸던 나날들.

찬란한 미래를 꿈꾸며 노력했지만. 정말로 찬란했던 시절이 함께 모험했던 그때뿐이었음을.

그 사실을 모든 게 끝난 뒤에야 너무나 늦게 깨달았다.

사랑했던 모든 게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허어, 이거 참···.”


문을 열고 들어온 브레드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탄식했다.

참다 참다 들어갔거늘. 방 안의 풍경은 상상 이상으로 좋지 못했다.

어지러운 방안,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두 사람, 경솔하게 저지르는 행동들.

모든 게 난장판인 날이었다.



*****



달그락-

브레드는 찻잔을 놓았다.

기다란 탁자 앞에 두 사람ㅇㄴ 흠칫 몸을 떨었다.

단순히 찻물을 따르느라 들리는 소리일 뿐이었다.

그런데 과민하게 반응했다.

여전히 찻물을 모두 따를 때까지도 안절부절못하였다.

브레드는 한숨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크흠. 이제 조금 진정이 되었는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한마디 하였다.

여전히 눈치를 살피는 그들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고마워. 잘 마실게.”


그래도 이렇게 진정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조금 전의 일을 떠올리면···.

상상만으로도 한숨이 나왔다.


“응, 맛있어···.”


에이린은 찻잔을 양손에 포개었다.

캣니스도 제 몫의 차를 받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감사해요, 브레드 님.”

“천만의 말씀.”


작게 말한 캣니스는 고개를 떨궜다.

정말로 면목이 없었다.

브레드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대참사가 일어날 뻔했다.


-흐어어엉. 미안해. 죽어. 죽어야 해. 나 같은 건 죽어 버려야 해.


제정신이라고 할 수밖에 변명할 길이 없었다.

바보. 멍청이. 아는 욕설을 모두 동원해 욕하는 캣니스와 그녀 앞에서 인신 공양 마법을 준비하는 에이린.

브레드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셀레브리디 교단에서 두 번째 마나 사용자가 나올 뻔했다.

마탑은 허무하게 이번 대의 주인을 잃을 뻔했다.


“다시는 그렇게 죽으려 하지 마세요.”

“으응. 그럴게···.”


훌쩍.

아직 여운이 남은지라 두 사람의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했다.

캣니스와 에이린은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었다가 내렸다가를 반복했다.


“나는 이만 나가주도록 하지.”


브레드는 묘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은 브레드가 나간 이후에도 한참 동안 찻잔을 괴롭혔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던 거예요?”


캣니스가 먼저 못다 한 이야기를 언급하였다.

패앵- 에이린이 손수건에 코를 풀었다.


“훌쩍. 우리가 돌아온 지 삼 일째 되던 날. 순례 일정으로 너희 교단에도 들렸어.”


앱솔루트에 위치한 셀레브리디 교단의 신전.

이렇게라도 그쪽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 건 다행이었다.


“그러면 교황님과 만났겠네요. 그분은 여전히 건강하신가요?”

“응.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건강해 보였어. 그리고 네 이야기를 듣다가 눈물을 흘리시는 게. 좋은 분인 거 같더라.”

“아까 말했던 남자 이야기. 혹시 교황님께서 제 이야기를 한 건가요?”


조금 전에 어영부영 넘어갔던 한 외부인으로 인해 파티가 해산됐다는 이야기.

그 외부인이 교회 관련자가 아닐까 추측했다.


“아니야. 교황님도 네 이야기를 했지만. 최대한 말을 아끼셨어. 내가, 정확히는 우리가 마음이 바뀐 건 다른 사람과의 만남 때문이야.”


에이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일 유력했던 사람이 후보에서 제외됐다.


“다른 분이라니. 그러면 대체 어떤 분과 만난 건가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네?”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거든···.”


에이린은 스스로 말이 안 되는 걸 아는지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딱히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 사람은 다짜고짜 너에 관해서 물었어.”

“저에 대해서요?”

“그리고 우리는 사람들에게 알려줬던 이야기를 똑같이 했어···.”


에이린은 캣니스의 눈치를 살피고, 또 무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우리는 너에게 정말로 큰 잘못을 저질렀어.”


수도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놨다.

기억 영상구를 조작하여, 캣니스 스스로 희생한 거짓 영상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이실직고 말했다.


“그 일은··· 지금은 넘어가도록 해요.”


그 일에 관해서는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 이 일을 걸고 늘어졌다가는 또다시 이야기가 제자리걸음 할 걸 알았다.

다행히 에이린도 그런 마음을 이해한 모양이다.

또 무릎을 꿇는다거나 사과한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거짓말을 했고. 남자는 모두가 아는 이야기를 진중한 표정으로 들었어. 그런데 이야기를 모두 들은 그 남자는···”

“믿지 않았군요.”

“응, 맞아. 이후에 남자는 우리를 성기사단 훈련장으로 데리고 갔어.”


힐끗-

에이린은 캣니스의 눈치를 살폈다.

차분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는 캣니스에게서 궁금한 점이 생겼다.


“혹시 너는 그 남자가 누군지 아는 거야···?”

“네, 확실하지 않지만 대충은요.”


아, 그렇구나. 대충 들어도 아는구나···.

혼잣말을 중얼거린 에이린은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이야기를 이어갔다.


“다짜고짜 그 남자는 우리에게 덤비라고 했어.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게일이 도발에 넘어가는 바람에 싸우게 됐지.”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얼핏 보기에도 만만치 않은 남자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신들은 용사였다.

절대로 이런 곳에서 질 거 같지 않았고, 질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그 남자에게 주제 파악만 시키면 된다고 여겼는데···.


“강했어. 우리는 용사인데도. 모몬도, 게일도, 나도, 그에게 상대가 안 됐어.”


변명할 여지 없는 패배였다.

수많은 마족과 맞서 싸웠던 그들이었는데, 어린아이 다루듯 손쉽게 다뤄졌다.


“그 남자는 우리가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 정확히 지적했어. 그리고 너에 대한 비밀을 이야기하더라···.”


믿을 수 없는 패배. 쓰라린 고통.

그 와중에 남자가 한 이야기는 충격 자체였다.


“여덟 살에 교단의 살수가 되었고, 열한 살을 앞둔 나이에 여신의 창이 된 아이가 됐다고···.”


힐끗. 에이린은 캣니스의 눈치를 살폈다.

두 눈동자에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당시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그들은 정체불명 신부의 말을 믿지 않았다.

모험하는 시간 동안 게일도, 에이린도, 모몬도. 캣니스가 열한 명의 팔라딘은커녕 제대로 된 사제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모든 일이 끝난 마당에서 그런 말을 들어봤자 믿을 리 없었다.

그 말을 증명해줄 당사자는 죽었고. 첫 조우부터 자신들을 쓰레기 보는 듯한 남자의 말이었으니까.


“그러고는 우리를 어딘가로 데려갔어.”


남자는 용사를 상대로 손속에 자비를 뒀고, 무참히 패버린 뒤에는 어느 공간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용사들은 무의식중에 쳐두었던 벽이 산산조각이 났다.


“아이들이 너를 찾더라······. ‘캣니스 언니는 어딨어···?’, ‘캣니스 누나가 맛있는 거 사 왔어···?’, ‘언니가 백 밤만 자면 온다고 말했단 말이야.’라고···.”


용사들은 차마 아이들을 안아 줄 수 없었다.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을 문 앞에서 발을 들이지 못하고 있자.

제일 맏이로 보이고 아이들을 보살피는 수녀가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은 건가요?


“똑같은 거짓말을 했어···.”


에이린은 줄곧 침묵하고 있을 수 없기에 입을 열었다.

모두에게 한 것처럼 똑같이, 제일 해서는 안 될 부분을 거짓으로 꾸며서 말했다.


“그때 처음으로 거짓말을 하기가 무섭다고 느꼈어.”


무언가 잘못됐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다들 울더라. 너를 돌려달라고 매달리고, 소리치고, 때리고···.”


아직도 그때 일을 회상하면 표정이 어두워졌다.

수도원의 수녀는 흥분한 아이들을 방으로 밀어 넣었다.

다소 엄격한 훈육이었는데 용사와 엮일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면 그럴만한 일이었다.

짧지만 강렬한 만남이 머리에 와닿는 동안, 수녀는 아이들의 행동을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알겠다고 했어···. 그 아이가 나에게 사과할 일은 없었는데···.”


사과를 받아들인 뒤에야 수녀 자신도 붉어진 눈가를 손으로 가렸다.

게일이 손수건을 건넸지만, 그것을 외면하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열다섯 혹은 열여섯···.’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용사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을 돌보지만 수녀 또한 어린 나이였다. 그런데도 용사의 앞이었기에 눈물을 숨기려 했던 거다.

그제야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수녀의 나이와 별 차이가 없던 캣니스의 나이를. 열여덟 살의 소녀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를.


“끝인가요?”


에이린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야기는 끝이 났다.


“응, 네가 궁금할 만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어. 이후에 우리의 사이는 틀어졌고. 나는 마탑의 주인이 되어서 바깥 상황에 대해 알기 힘들어졌어.”


마탑의 꼭대기에서 망가진 용사와의 관계를 곱씹고, 곱씹고, 곱씹고, 곱씹었다.

편지를 써보고 통신석을 사용해 봤지만 모두 연락이 끊겼다.

외롭고 절박했다.

그렇기에 그녀 나름대로 망가진 관계의 이유를 고민하고 결론을 내렸다.


“내가 잘못한 거야···.”


마왕성과의 결투 당시에는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한 명이 희생하면 모두가 살 수 있었으니까.

결과적으로 세 사람이 살았으니 잘된 일이라고.

죄책감이 드는 마음을 위선으로 덮어두었다.


-너희는 그 아이를 이해한 적 없었다.


영원한 도피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날을 기점으로 종점이 찍혔다.

셀레브리디 교단에서 나온 그날, 동료였던 두 사람이 나란히 걷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런 식으로 캣니스를 보내서는 안 됐어.


어떻게든 끝까지 함께 싸웠어야 했다는 저주스러운 말과 함께 헤어졌다.

이후로 에이린은 끝없는 자기혐오에 시달렸다.


“내 자기만족이라는 걸 알아. 어떤 식으로도 너를 떠밀 자격은 없었어.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나는 다시 그 상황에 가서도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어. 대체 내가 무얼 해야 했지? 마법도 무력도 모두 마왕이 압도적인 상황이었는데?”


후회와 타협이 반복되는 눈동자가 심히 흔들렸다.

그녀의 앞에서만 과거의 광경이 다시금 재현되는 듯하였다.


“그러다가 문득 너라면 다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너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지 않았을까? 라고.”


평소에 그토록 장애물 취급하던 존재였지만 버리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항상 위기가 찾아올 때 캣니스는 무언가 해주었다.


“그렇지? 너는 다 방법이 있던 거지?!”


에이린의 물음에 캣니스는 침묵했다.

옛 동료가 이렇게 망가진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거 같았다.


“마탑에 혼자 남겨지니 줄곧 의문이 들었어. 정말로 나는 두 사람을 살리고 싶었던 것뿐일까? 혹시라도 너에게 자격지심을 느끼고 있던 게 아닐까 두려웠어.”


이야기하던 에이린은 스스로 팔에 손톱을 박아넣었다.

정말로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일을 벌인 게 맞는지 자문했다.

혹시 캣니스를 질투하고 일을 벌인 건 아닌지 행동의 저의를 몇 번이고 의심했다.


“그러니까 벌을 받는 거야···.”


오랜 고민 끝에 답을 생각했다.

이제 와 당시의 진실 여부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럴게. 제일 가깝게 지내던 두 사람이 떠났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답이 된다고 여겼다.


“내가 나쁜 거야. 내가 쓰레기야. 능력이 뛰어난 네가 부러워서 등을 떠민 거라고.”


캣니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에이린의 상태는 심각했다.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등을 떠민 형식이 되었지만. 과정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꾸며서 스스로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었다.


“나는 정말 쓰레기야. 그렇지?”


그뿐 아니라 이야기 중에 은원이 드러내는 진심들.

에이린은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없었다.


“제 대답은 같아요, 에이린 님.”


그렇기에 캣니스는 차가운 말로 응수했다.

에이린의 모든 행동 원인은 자기 위안을 위하여 스스로 상처 내는 행동이었다.

지금은 작은 손톱자국과 자기 비난이지만 언젠가는 더 과감한 행동을 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그 생각을 고쳐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상대방의 상처를 보듬어 주기에는 캣니스 본인 또한 받은 상처가 많았다.


“그렇게 살아남았으니 어떻게든 살아가세요.”


자신은 마냥 착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 이기적이라고 평가한다.

그런 이기적인 사람이기에 에이린이 스스로 해결할 때까지 방치하기로 했다.

이것은 그녀 나름대로 내리는 벌이기도 하였다.

에이린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상황을 수긍하여 고개 숙였다.


“그래, 그래야겠지···.”


제 소망과 다른 결정을 별말 없이 받아들였다.

어느 관점에서는 순순히 반성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지금은 그저 캣니스의 의견을 최우선 했을 뿐이었다.

캣니스는 그러한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에이린의 행동은 자기 회피라고 해도 좋은 태도였다.


“그나저나 그날 이후로 용사님들과 접점이 끊긴 건가요?”

“응. 나 같은 애랑은 한 시도 함께하기 끔찍할 테니까. 그동안 사이가 괜찮았던 모습도 분명 개들이 참고 있던 거야···.”


대답한 에이린은 고개를 숙였다.

우울하게 숙인 목덜미 위로. 작은 문신이 엿보였다.


‘이거. 이것만이라도···!’


그 문신은 인신공양 마법 대신에 바친 절대복종 마법이었다.

현 앱솔루트를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금지된 노예 각인이거늘. 기어코 에이린은 자진해서 몸에 새겼다.


-미안해. 캣니스. 날 용서하지 마.


원치 않던 노예를 얻은 캣니스는 홍차를 마셨다.

문득 마음 한구석에 외면해 두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독히 피곤한 기분이 들어서 미간 사이를 꾹 눌렀다.


-어째서······.


등을 밀린 직후에 일어났던 짧은 순간의 일.

에이린이 제게 마법을 발동하고 스크롤을 찢은 순간, 어떻게든 살기 위해서 동료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간절하게 붙잡은 팔은 냉정할 정도로 빠르게 뿌리쳐졌다.


-희···생해.


차가울 정도로 낮은 목소리.

띄엄띄엄 들렸지만, 여전히 기억나는 말.

옛 기억과 함께 마시는 홍차는 쓴맛이 났다.

새삼 이곳에 없는 옛 동료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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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79화 그의 비밀 23.06.28 40 0 19쪽
89 78화 이안류 23.06.23 68 0 25쪽
88 77화 이안류 23.06.20 33 0 16쪽
87 76화 재침공 23.06.16 44 0 18쪽
86 75화 재침공 23.06.13 36 0 24쪽
85 74화 재침공 23.06.07 35 0 25쪽
84 73화 재침공 23.06.03 35 0 11쪽
83 72화 재침공 23.06.03 43 0 16쪽
82 71화 재침공 23.05.29 44 0 15쪽
81 70화 재침공 23.05.25 42 0 20쪽
80 69화 재침공 23.05.22 50 0 15쪽
79 68화 재침공 23.05.18 34 0 17쪽
78 67화 재침공 23.05.15 45 0 22쪽
77 66화 재침공 23.05.10 46 0 19쪽
76 65화 다시 한번 던전 23.05.05 48 0 18쪽
75 64화 다시 한번 던전 23.05.02 52 0 12쪽
74 63화 다시 한번 던전 23.04.29 48 0 14쪽
73 62화 다시 한번 던전 23.04.25 55 0 18쪽
72 61화 다시 한번 던전 23.04.22 52 0 18쪽
71 60화 다시 한번 던전 23.04.21 49 0 20쪽
» 59화 옛 인연 23.04.17 56 0 26쪽
69 58화 옛 인연 23.04.12 56 1 21쪽
68 57화 옛 인연 23.04.05 62 0 20쪽
67 56화 베르 23.04.01 55 0 13쪽
66 55화 길드 23.03.29 56 0 22쪽
65 54화 길드 23.03.25 64 0 16쪽
64 53화 길드 23.03.11 61 0 12쪽
63 52화 길드 23.03.08 61 0 12쪽
62 51화 길드 23.03.01 59 0 13쪽
61 50화 길드 23.02.26 74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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