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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의 서재입니다.

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지하이
작품등록일 :
2022.10.26 12:21
최근연재일 :
2024.05.20 23:2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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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3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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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75화 재침공

DUMMY

75화 <재침공>



농성은 사흘 밤낮이나 계속되었다.

첫날에 기세등등했던 그들도 이쯤 되니 지치기 시작했다.

몬스터와의 전투 자체는 할만했다. 그러나 누적되는 피로가 사람의 의지를 꺾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고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몬스터의 파도.

살기 위해 영양분을 섭취해도 대충 입에 쑤셔 넣었다.

잠시 눈을 붙이는 시간도 뜬 눈으로 주위를 경계해야 했다.

항상 무구를 손이 닿는 위치에 놓으며. 또 나팔 소리가 울리지 않을까 초조해했다.

그 일이 지속되자 온전한 정신으로 있을 수 없었다.

전장에 선 사람 중 언어를 잃은 자까지 등장했다.


“끼에. 끼에. 끼에에···”


끝도 없이 귓가에 맴도는 이명.

무의식중에 따라부르는 이들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서서히 미쳐갔다.

광증은 전염병처럼 빠르게 옮아갔다.


“브레드 형씨. 이대로라면 우리는···”

“그래. 마음이 먼저 꺾이겠군.”


다행인 건, 그나마 모험가들이 버텨준다는 점이었다.

철야와 전투는 그들에게 일상이기에 정신줄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 소년병이나 기사직 대부분은 밤낮없이 치러지는 학살행위에 지쳐갔다.

한 기사는 간질 증상에 벅벅 몸을 긁었다.

신경질 내며 갑주를 벗자, 살점과 혈흔이 철퍽 쏟아졌다.

갑옷 사이사이에 박힌 머리카락과 부러진 치아가 우수수 쏟아졌다.


“하, 하하하하하하-!”


그렇게 또 한 명이 미쳤다.

그러나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다음이 자신일 수 있음을 인지하였기에.

전장에서의 그들은 스스로조차 믿을 수 없었다.


“하하하하! 이러다가 흡혈귀라도 될 거 같구나!”


미쳐서 하늘을 우러러보던 기사는 뚝 웃음을 끊고 팔을 내렸다.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입술을 꾹 다문 채 다시 얌전히 앉았다.


“흡혈귀라. 차라리 그거라도 되면 좋겠군.”


브레드는 쓸쓸한 표정으로 들판 너머를 보았다.

이곳에는 흡혈귀라면 환장할 대량의 시체가 가득했다.

차라리 흡혈귀가 되었으면 소망하는 자들도 적지 않게 있을 터이다.

피를 다루는 흡혈귀라면 더할 나위 없이 최적의 전장이니까.

그런 생각도 품어보지만. 몬스터 파도 속에서 흡혈귀가 없다는 점을 위안거리로 삼을 뿐이었다.


“하나 흡혈귀라면 우리만큼의 간절함은 없을 테지.”


브레드는 거대한 몽둥이를 들었다.

오크 한 명을 잡고 빼앗은 쇠몽둥이었다.

격투가인 브레드가 낯선 무기를 잡고 싸우는 이유는 단순했다.

지금 전투는 모험가의 고귀한 싸움이 아니라 학살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마냥 일방적이지도 않은. 언제나 바뀔 수 있는 위태로운 관계였다.


“역시 이상하다냐. 저번 달 조사에 따르면 베인지역에 이렇게 많은 개체수는 없었다냥.”

“남의 나라에서 난리를 피울 정도이니 그만한 준비와 확신이 있다는 거겠지.”


미세한 땅울림이 점점 거대해졌다.

고개를 숙이던 사람들의 눈빛이 불안하게 빛났다.


“다들 준비하는 게 좋겠군.”


다들 싸움에 지쳤다. 하지만 우는소리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모험가들은 하나둘 일어섰다.

기사들은 갑주와 투구를 착용하고 착검했다.

그들이 지쳤음에도 싸우는 이유는 하나였다.

등 뒤에 지켜야 할 것이 있기에 검을 들었다.


“기적이라도 일어나면 좋겠다만···.”


브레드는 피로 얼룩진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 몽둥이에 맞은 고블린 라이더의 머리가 터졌다.


“아쉽게도 무신론자라서 말이네.”



*****



“어,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존귀하신 분이시여!”


프로텐시아의 사제가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어느새 성역은 수많은 신자로 가득 찼다.

사제는 그들에게 방해될까 봐 섣불리 목소리를 높이지도 못했다.

어떻게 외부인은 발을 들일 수 없는 성역에 많은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지 의문이었지만. 지금 당장은 그 일을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어째서 기적을 보이시는 분께서 이리 신성한 기도 중에 자리를 비우십니까?!”


성역의 보존보다 눈앞에 있는 여사제의 행동을 더욱 우선 하였다.

여사제의 밀 색 머리카락은 수분이 마르지 않아 촉촉했다,

물에 젖은 사제복 밑으로 고운 피부가 비쳤다.

무려 사흘 동안 어떠한 영양소도 없이 호수에 들어가서 기적을 보인 여사제였다.

그런데도 지친 기색 하나 보이지 않고.

프로텐시아의 사제는 어떻게든 그녀를 더 머물게 하도록 애걸복걸하였다.


“지금 모두가 힘든 시기입니다. 이분들 모두가 여신의 안배를 바라보고 모였는데. 어찌 귀하신 분께서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캣니스는 태연히 물가에 서서 물기를 짜냈다.

자리를 지켜달라는 프로텐시아 사제의 부탁을 일절 외면하였다.

그래도 프로텐시아 사제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만큼 사흘 동안 호수에서 기도를 올리는 모습은 신을 모시는 자로서 놓치기 아쉬운 광경이었다.


“아 셀레브리디 교단에서 온 친우시여. 당신은 곤경에 빠진 프로텐시아 여신의 아이들을 지키러 온 대행자입니까? 마족화에 걸린 사람을 구하고, 이 힘든 시기에 사람들의 신앙을 한곳에 모으는 기적을 보이시는 당신은! 대체 어느 신의 부름으로-”

“하아···.”


캣니스는 그의 열렬한 구애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차게 식은 표정으로 마지막 남은 물기를 짜냈다.

대충 손으로 옷을 털은 뒤,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감사했어요.”

“네?”

“하지만 이제 가야 해서요.”


그 말에 프로텐시아의 사제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쉬운 마음을 가득 담은 말로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어째서 가야만 하는 겁니까?”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아픈 신자들을 내버려 두겠다는 말씀입니까?”


캣니스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가 미소 안에 담긴 의도를 파악하고 얼굴을 굳혔다.

사제가 고민하는 시간 동안 머리카락의 물기도 마저 짜내었다.

아직도 아쉬워하는 그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여신은 언제나 우리를 보살피셔요.”

“하지만 여신의 기적만이 저희를 구원합니다.”

“그분은 감히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아이를 이끌어요.”

“지금 저희는 당장 절망에서 이끌어줄 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우리에게 곤경을 이겨낼 수 있는 내면의 힘을 주었어요.”

“하지만 외부의 힘을 이겨낼 힘은 주어지지 못했습니다.”


캣니스와 프로텐시아 사제가 서로 바라봤다.

서로의 다른 견해가 충돌을 일으켰다.

서로의 의견이 좁혀지기 전에 자리를 벗어나는 건, 성직자의 예의에 어긋난다.


“하지만 셀레브리디 여신께서도, 프로텐시아 여신께서도-”

“-각자의 다름을 인정하시죠.”


캣니스는 눈을 크게 떴다.

줄곧 단호하게 말하던 프로텐시아 사제가 의견을 굽힌 것이다.


“셀레브리디 여신께서는 수많은 자아와 인종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프로텐시아 여신께서는 개성과 강함을 인정하셨죠.”


프로텐시아의 사제는 유연한 말을 쏟아냈다.

캣니스의 견해를 인정하고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유일하게 성역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비켜주었다.

막상 길을 내주니 머뭇거리는 캣니스에게 정중히 권했다.


“가시죠. 자매님의 말이 맞습니다. 여신께서는 모든 시련을 이겨낼 힘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극복할 수 있는 신념을 주었습니다. 가십시오, 셀레브리디 교단의 귀하신 분이여.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하여서 이 힘든 시기에 소중한 이를 지키도록 합시다.”


캣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의 곁을 스쳐 지나가 숲속으로 달려갔다.

아쉬운 마음이 가득한 눈빛의 사제를 돌아보지 않았다.

홀로 호숫가 남겨진 사제만이 아쉬운 미소를 지었다.


“여신이시여. 이를 기인, 기연이라고 불러도 좋겠습니까.”


프로텐시아의 사제는 수많은 신도가 기도하는 광경을 바라봤다.

그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이곳에 모였다.

이 고난을 이겨낼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했다. 극복할 의지가 기적을 불러오기를 기도했다.

이는 일평생 본적 없는 신비한 광경,

찰팍. 사제가 호숫가에 손을 담갔다.

손이 닿은 물은 차가웠다.

그는 물의 감촉을 느끼며 두 눈을 감았다.


“여신의 친우분의 아이께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성역이라고 불리지만. 그저 상징적인 의미로 유지되고 있을 뿐인 공간.

과거에 여신이 직접 성수로 채웠다는 호수였지만. 지금에 내려와서는 하급 사제의 신성력만도 못한 평범한 호수나 다름없었다.


“기적을 내려주시고···.”


그렇기에 그의 생에서 호수가 빛나는 광경은 볼 수 없을 줄 알았다.

황금빛 호수는 그저 성서에서나 나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라 생각했다.

신전의 과거의 영광. 허영 된 역사.

그런 이름뿐이라도 성역인지라, 마기에 오염된 여사제가 호수에 들어갔을 때는 경악했었다.

이어서 일어나는 광경에 노여움의 감정은 사라지고 경탄의 감정이 생겼지만 말이다.


“아- 여신이시여. 그분은 정말로 신의 사자가 아니란 말입니까?”


몇 번이고 사흘간의 기억을 되새겼다.

호수에 몸 담근 여사제가 몸에 새긴 마족화의 저주를 지워냈다.

그런 지독한 마기를 호수에 몸담았음에도, 성역의 호수는 오염되기는커녕 점점 황금빛으로 빛이 났다.

엘도라도의 황금비단 같은 물결이 일고. 그 사이에서 걸어 나온 여사제의 모습은 눈물을 흘리고 싶은 경건함이 생길 정도였다.


“어쩌면 그녀가 이 나라에 있은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을지도 모르겠군요.”


여신의 은총은 이미 충분히 내려진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이상의 은총을 바라지 않는다.

프로텐시아의 사제는 두 손을 모았다. 사람들 앞에서 성서의 기도문을 외웠다.

길거리 어디에서나 볼법한 옷차림이지만, 성직자로서 꼭 간직하고 다니는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

그것은 프로텐시아 교단의 최고 직위인 대신관의 증표.

그는 가람왕국의 안녕과 기적을 불러온 여사제의 앞날이 무탈하기를 기도하였다.



*****



신전을 나온 캣니스는 곧장 베르길드 저택으로 향했다.

기나긴 방황 끝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며칠 만에 돌아온 저택은 꽤 낯설게 느껴졌다.

시끌벅적했던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조용해진 저택은 어색했다.

어쩐지 한산하다 못해 음산하다는 인상까지 받을 정도였다.

저택 자체는 변함이 없는데. 이렇게 인상이 바뀐 모습이 새삼 놀라웠다.


“아··· 캣니스 님······.”


그때였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 누군가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 셰인이 그녀를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돌아오셨군요. 캣니스 님···.”


셰인은 처음에는 미소 지었지만, 곧 눈물을 터트렸다.

은 쟁반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캣니스는 그녀가 가진 죄책감이 어떤 종류인지 알 거 같았다.

분명 전에 일했던 바솔루트에 대한 죄의식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섣불리 위로의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그런 말을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한참 동안 제자리를 지키며 서 있었다,


“다른 분도 있나요?”


캣니스가 먼저 고개를 들어서 셰인과 시선을 맞췄다.

그 물음에 셰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네샤 님이 계세요. 제가 살피고 있기는 한데 도저히 상처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요.”

“안내해주세요.”

“하지만 캣니스 님도 며칠 전까지···”

“괜찮아요. 어서 안내해주세요, 셰인.”


셰인은 캣니스의 단호한 부탁에 알겠다고 답했다.

2층 복도를 걷는 동안, 캣니스는 셰인의 걸음걸이를 보고 눈매를 좁혔다.


“여기예요.”


거대한 저택에서 여러 곳 비워둔 손님방 중 하나를 가리켰다.

문을 열자, 독한 약초 향기가 코를 찔렀다.


“어? 캣니스?”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던 바네샤가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며칠 동안 눈에 띄게 야위었다.


“또 움직이셨죠!”


셰인은 바네샤에게 일어나지 말라며 몸을 눕히게 했다.

다리를 절뚝이며 강제로 이불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나 잠시만 앉아 있겠다는 바네샤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침대 위를 벗어나지 않는 조건으로 합의를 봤다.


“창문은 왜 열어두고···.”

“바람 때문에 저절로 열렸어. 내가 그런 게 아니야.”


거짓말이었다.

셰인은 창문에 남은 흔적을 보았지만 아무 말 않았다.

묵묵히 창문을 닫고, 약방에서 받아온 약을 바네샤의 얼굴에 발랐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캣니스의 말에 바네샤의 얼굴이 활짝 폈다.

바네샤는 여태 그 말을 기다렸는지. 상처로 부은 입술로도 말을 쏟아냈다.


“그렇지? 네가 보기에도 나 멀쩡하지? 하여간에 루나도 셰인도 걱정이 많다니까? 고작 조금 쓸리고 부러진 걸로 난리란 난리는.”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만 셰인의 안색은 점점 나빠졌다.

셰인은 바네샤의 밝은 모습을 보기 힘들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입을 막았다.


“그래서 말이야. 이 침대 위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겠다는데도···”

“바네샤 님.”


캣니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바네샤를 불렀다.

왼손을 들어서 바네샤에게 내밀었다.


“나는 정말 괜찮은데···.”


괜찮다는 말과 다르게 바네샤의 두 눈이 잘게 흔들렸다.

캣니스의 손을 꺼리고 있었다.


“어서요. 모험가를 위해 업무 보시는 귀중한 손이잖아요.”


캣니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촉하였다.

바네샤는 여전히 손을 내밀기 꺼렸지만. 여전히 손을 거두지 않는 캣니스를 보며 고집을 꺾었다.


“너 손이 차갑네···. 하하··· 이거··· 조금 흉하지···?”


사람 체온 같지 않은 차가운 손이 붕대가 감긴 손 위를 훑었다.

캣니스는 붕대를 푸는 동안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오른손을 감고 있던 붕대가 모두 풀렸다.

붕대가 사라진 자리에는 바솔루트 성기사에게 당한 상처가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 별거 아니야. 이쪽 일을 하다 보면 한두 번은 이러거든.”


흉터도 흉터지만 손의 형체가 문제였다.

뼈와 관절이 올바른 위치를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틀려 있었다.

근육과 인대도 많이 손상되어 이대로 두면 두 번 다시 깃펜을 잡지 못할 것이다.

그 손을 몇 번이고 쓰다듬던 캣니스가 눈물 흘렸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캣니스는 망가진 손을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바네샤가 울지 말라며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해요. 제가··· 제가 무능해서···.”

“애도 참, 내가 괜찮다니까.”


바네샤는 밝게 웃으며 캣니스를 다독였다.

별거 아니라고. 이카루스가 오면 고쳐줄 거라고. 금방 나을 거라고 자신했다.


“죄송합니다. 캣니스 님···. 제가 바네샤 님을 지키지 못해서···.”


하지만 이 자리에 모두가 알고 있었다. 치유의 힘은 만능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끊어지고, 부러지고, 뒤틀린 손을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는 건 고위 사제라 하더라도 쉽지 않다.


“애들도 참···. 너무 흉해서 보기 힘든데. 얼른 약 바르고 감아주면 안 될까?”


바네샤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괜히 본인의 일에 슬퍼하는 두 사람을 위해 더욱 힘내 보였다.

그러나 얼핏 웃고 있는 눈은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참고 있었다.

속내를 캐는데 익숙한 캣니스는 그 감정을 읽었다.

하지만 감정을 읽었다는 사실을 드러내서는 안 되기에. 당장은 이기적인 감정을 억눌렀다.


“바네샤 님. 잠시만 눈을 감아주실래요?”


한참 우느라 얼굴에 눈물 자국이 가득했지만, 끝내 캣니스는 웃어 보였다.

바네샤는 본인도 눈을 가리기를 바라였기에 순순히 따랐다.


“정말 고생하셨어요. 이제는 걱정하지 말고 쉬세요.”


곧게 닫힌 그녀의 눈꺼풀 위로 따스한 온기가 전달됐다.


“힐(Heal).”


캣니스의 몸에서부터 치유의 힘이 전해졌다. 치유의 힘은 전신으로 뻗어갔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움직이지도 못했던 손가락이 미약하게 움직였다.

전신을 찌르는 것 같던 통증도 희미해졌다.

부러진 다리도 꺾인 발목도 서서히 통증이 완화됐다.

아프면서 푸석푸석해진 머리카락도 마치 소녀 시절처럼 광택을 되찾았다.


“···어떤가요?”


캣니스가 물었다.

눈을 뜬 바네샤의 얼굴은 조금 전과 큰 차이가 있었다.

거울을 보여주고, 바네샤는 말끔해진 얼굴을 어루만졌다.

뜻대로 움직이는 손가락을 마음껏 꼼지락거렸다.


“고마워···.”


그리고 말하였다.

긍정적인 답변에 캣니스는 미소 지었다.

치유의 힘을 불어넣던 손을 거두고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정말로 고마워···.”


바네샤는 캣니스의 손을 잡고 울음을 터트렸다.

캣니스는 바네샤의 등을 두세 번 쓸어내렸다.


“셰인 님. 남은 일은 부탁할게요.”


캣니스의 부탁에 셰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멀찌감치 있던 창가에서 멀어져, 바네샤의 자리를 묵묵히 정돈하였다.

캣니스는 여전히 눈물을 참고 있는 셰인에게 다가갔다.

붉은 눈시울이 얼마만큼 제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지 알려주었다.

은근슬쩍 신성력을 사용하여, 셰인이 숨기고 싶어 했던 절뚝이는 다리도 치유하였다.


“감사합니다···.”

“뭘요. 이제 쉬세요.”


캣니스는 바네샤가 잠드는 모습까지 확인했다.

셰인이 함께 있으니 큰일은 없을 터였다.

고생해준 두 사람이 머무는 방문을 닫았다.

그제야 복도로 나와 숨을 돌렸다.


“후우. 지치네요.”


복도를 걷다가 한 지점에서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자신의 방이 아닌 문 앞에서 기대어 앉았다.

상체를 돌려서, 미련이 담긴 손길로 방문을 쓸어내렸다.

문 하나를 두고 있는 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이내 손을 떼고 편히 문에 기대었다.


“정말···.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요.”


캣니스는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제 온기로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도 말하는 목소리가 복도를 타고 흘러갔다.


“제가 정말로 약하긴 하나 봐요. 소중한 것 하나도 제대로 못 지키는 걸 보면요,”


복도에 앉아서 제 한심함을 고백했다.

대륙을 구했으면서도 가까운 사람 몇 명을 지키지 못하는 모습이 한심하다고 여겼다.


“적어도 제 손이 닿는 곳은 지킬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지금 보니까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던 거 같아요.”


캣니스는 신성력을 사용한 여파로 저릿한 손을 그러쥐었다.

제 탓이 아닌데도 다친 이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했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이 살아있어서 생긴 일 같았다.

분명 이번 일은 바솔루트가 나쁜 건데도 죄책감을 느꼈다.


“혹시 혼내실 건가요? 저를 지키는 건 문지기님인데 제가 그 일을 빼앗는다고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요. 아무리 위험하다고 해도, 저는 모두를 지키고 싶어요.”


캣니스는 단 한 번도 제 능력까지만 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 생각조차 이기적이라고 여겼다.

할 수 있다면 능력을 넘어가는 일이라도 나선다. 살 수 있다면 모두가 웃는 결말을 맞이하고 싶다.

스스로 크다고 여기지 말고 작은 것을 바라봐라.

누구보다 낮은 위치에서 여신을 섬길 때 끊임없이 들어온 교육이었다.


“그러니까요 문지기님···.”


동행자 듣고 있는지 안 듣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문 너머에서 듣고 있을 거라 믿으며 말을 전했다.


“도와주세요 문지기님.”


툭. 뒤통수를 문에 닿게 고개를 젖혔다.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리려 해서 참아내려고 애썼다.


“더 이상 저 때문에 누군가 다치는 건 싫어요···.”


평생을 혼자 싸웠기에 누구와 협력하는 법 같은 건 몰랐다.

이번처럼 혼자 싸우는 데 실패해서 누군가 다치는 일 같은 건 처음 겪었다.


“도와주세요 문지기님···.”


그런데 여전히 약해진 몸으로 누군가를 지키는 법을 모르겠다.

정말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자신은 전성기 시절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졌다.

그래서일까.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이에게 제 나약한 본심을 이야기하였다.


“도와주세요 제발···.”


어쩌면 이렇게까지 애원하는 이유는 이기적인 마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껏 가더가 속삭이는 따뜻함이 좋았으니까. 그가 주는 울타리의 포근함이 좋았으니까.

분명 문 하나로 단절된 이 시간 동안 지독하고 외롭고 괴로웠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껏 문지기님에게 기대기만 했다는 거 잘 알아요. 그래도 이번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도와주세요···.

끝까지 뱉으려던 말을 멈추었다.


“죄송해요···.”


캣니스는 고개를 떨구었다.

차가운 문에 닿아있는 손을 천천히 내렸다.

문지기 가더.

과연 그가 언제까지 자신의 편의를 봐줘야 하는 걸까.

애초에 그들의 관계는 가더가 우선권을 쥐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지금까지 많은 편의를 봐줬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해준 게 없었다.

부탁하고 윽박지르는 거밖에 한 게 없었다.


“죄송해요. 못난 모습을 보이고 말았어요···,:


캣니스는 그에게 매달리기를 멈췄다.

조금만 힘들면 그에게 매달리려는 행동을 비난했다.

언제나 그에게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면서. 정작 궁지에 몰리면 그가 가진 상냥함에 멋대로 기대려 한다니.


“심려를 끼쳐서 죄송해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더 이상 그래서는 안 되기에 순순히 거리를 두었다.

자신은 동행자와의 동등한 관계를 원한 거지. 보호나 받는 신세를 원치 않았다.

그러니 쓸데없는 불안감을 드러내서는 안된다.

약한 마음에 입 바깥으로 나오지 않도록 단단히 억눌렀다.


“아직 무엇 하나 큰일 나지 않았는데요. 그렇죠?”


바솔루트가 아무리 자신했다고는 해도 가람왕국도 만만치 않은 나라였다.

그런 가람왕국의 무엇 하나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은 왜 벌써 끝이라도 본 것처럼 우는 소리를 늘어놓은 것일까.

이런 행동은 지금 전장에서 싸울 사람들을 모욕하는 일일 텐데.


“전부 다 잘 풀릴 거예요. 다시 꼬치도 사 먹고, 웃으면서 거리를 걸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캣니스는 그들을 믿기로 했다.

좋은 일만 있을 거라고 여기기로 했다.

바솔루트와의 악연도, 생존을 건 사투도 잘 이겨낼 거라 믿었다.

무사히 몬스터 파도를 이겨내고 행복한 날이 돌아올 것이라고. 그렇게 소원했다.


“만약 이번 싸움이 무사히 끝나면 문지기님과 더 이야기를 나눠도 될까요? 좋아하는 게 뭔지, 싫어하는 게 뭔지. ···이번에 제 무엇에 실망한 건지. 문지기님에 대해 더 많은 부분을 알고 싶어요···,”


‘하하.’ 캣니스의 입에서 공허한 웃음이 나왔다.

이윽고 사흘간의 피로와 함께 탈력감이 찾아왔다.

캣니스는 팔을 늘어뜨리고 다리를 쭉 뻗었다.

제 몸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저 혼자 편히 있어서는 안 되는데···’


어쩐지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힘이 빠진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눈꺼풀이 감기고. 금방이라도 깊은 수마에 빠질 것만 같았다.

캣니스는 당장 수마에 거부할 이유가 없기에 잠시만 눈을 붙이기로 했다.


“···미안해.”


그때였다.

등진 위치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캣니스는 한 번 떨구었던 고개를 퍼뜩 들었다.

등 뒤에 있는 문을 돌아봤다.

또 한 번 소리가 들려오지 않을까 정신을 집중했다.


“문지기님···?”


그러나 여느 때처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문 안쪽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었다.

평소의 그라면 생각지 못할 아주 가느다란 목소리.

어쩌면 그 또한 이번 일을 슬퍼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목이 졸린 목소리를 낼 정도로 슬프지만. 당장은 못 나오는 사정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때, 또 한 번 반응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사뭇 다른 방식의 반응이었다.

굳게 닫혀있던 문 안쪽에서 무형의 기운이 뻗어왔다.

무형의 기운을 느낀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치 죽음을 직감하게 하는 기운.

그것을 정통으로 받은 캣니스가 제 몸을 끌어안았다.


“허억-”


팔에 소름이 돋았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온몸이 미친 듯이 떨리고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생존 본능이 도망치라고 경종을 울렸다.

당장 이 자리에서 벗어나라고 경고하였다.


“듣고 있었군요.”


하지만 캣니스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온몸을 얼음장처럼 만든 공포감은, 조금 전의 기운이 사라진 뒤에도 한참 동안 머물렀다.


“듣고 있었어요···.”


그래도 자리를 뜨는 대신에 미소 지었다.

눈가에는 반가움의 눈물이 핑 돌았다.

이 두렵기만 한 기운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기에.

캣니스는 공포를 반기면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해요 문지기님.”


힘겨운 감사의 말을 전하고 문에 기대었다.

한쪽 어깨를 문에 밀착한 채로, 한쪽 다리를 엉덩이 쪽으로 끌어당겼다.

한쪽 귀를 문 쪽에 기대어. 진심 어린 감사의 말을 다시 한번 전했다.


“정말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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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90화 서큐버스 여왕 23.08.16 22 0 19쪽
111 외전 인연의 시작 終 23.08.14 17 0 24쪽
110 외전 인연의 시작9 23.08.11 20 0 18쪽
109 외전 인연의 시작8 23.08.09 17 0 17쪽
108 외전 인연의 시작7 23.08.07 20 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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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외전 인연의 시작4 23.08.01 19 1 13쪽
104 외전 인연의 시작3 23.07.31 17 1 15쪽
103 외전 인연의 시작2 23.07.29 17 0 17쪽
102 외전 인연의 시작1 23.07.28 19 0 15쪽
101 89화 동향과의 재회 23.07.27 26 0 17쪽
100 88화 동향과의 재회 23.07.25 22 0 13쪽
99 87화 동향과의 재회 23.07.24 24 0 21쪽
98 86화 동향과의 재회 23.07.20 24 0 14쪽
97 85화 동향과의 재회 23.07.19 20 0 17쪽
96 84화 동향과의 재회 23.07.18 23 0 16쪽
95 83화 동향과의 재회 23.07.17 24 0 22쪽
94 82화 동향과의 재회 23.07.12 30 0 14쪽
93 81화 동향과의 재회 23.07.10 36 0 13쪽
92 외전 마계의 끝자락에서 23.07.05 42 0 29쪽
91 80화 그의 비밀 23.07.03 37 0 24쪽
90 79화 그의 비밀 23.06.28 39 0 19쪽
89 78화 이안류 23.06.23 66 0 25쪽
88 77화 이안류 23.06.20 32 0 16쪽
87 76화 재침공 23.06.16 39 0 18쪽
» 75화 재침공 23.06.13 34 0 24쪽
85 74화 재침공 23.06.07 34 0 25쪽
84 73화 재침공 23.06.03 34 0 11쪽
83 72화 재침공 23.06.03 41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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