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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의 서재입니다.

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지하이
작품등록일 :
2022.10.26 12:21
최근연재일 :
2024.05.08 23:16
연재수 :
19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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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3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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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78화 이안류

DUMMY

78화 <이안류>



캣니스는 모험가 길드의 문을 열었다.

이곳까지 오는 왕국은 축제 분위기였다.

모험가 길드도 예외가 아니었다.

저번 골렘 사건만큼은 아니지만 크나큰 위험을 이겨냈기에 모두가 들떴다.

사방으로 튀는 포도주와 맥주. 왁자지껄한 분위기.

한참 오크통으로 운동하던 브레드가 그녀의 입장을 알아봤다.


“캣니스여. 어딜 그렇게 다녀온 길인가?”

“잠시 높으신 분을 뵙고 왔어요.”

“높으신 분이라니. 아. 그렇군. 그가 말한 게 그런 거였나.”


몬스터 파도는 새벽에 끝났다.

브레드는 베르길드로 돌아갔다가 왕국군에게 이송되는 캣니스를 보았다.

눈앞에서 떠나는 마차를 보며 당황스러운 일도 잠시. 아직 자리를 뜨지 않은 기사가 사정을 간략히 설명했다.

물론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해서 두루뭉술한 사실만 알게 되었다.

그 뒤로 지금 처음 만나는데. 무슨 상황이었는지를 단번에 간파했다.


“칼투스 14세는 잘 지내고 있던···”

“브레드 씨! 건배!”


기회를 노리던 모험가가 브레드에게 달려들었다.

그와 거칠게 술잔을 부딪치느라 잠시 이야기가 끊겼다.

브레드는 술잔을 받아서 단숨에 들이켰다,

빈 술잔을 다시 모험가에게 돌려주고, 먼저 이야기하던 대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크흠. 다들 지치지도 않고 기운이 넘치는군. 그래서 캣니스 자네는 어떤가? 자네도 한 잔 마시겠는가?”

“네. 조금만 마실게요.”


브레드가 손을 높이 들자. 언젠가 보았던 모험가가 다가왔다.

캣니스 몫의 포도주를 요청하자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났다.


“이곳에 오기 전에 신전도 들렸네. 그대의 노고 덕에 에이린이 눈을 떴다고 하더군.”


브레드는 포도주가 담긴 술잔을 건네받았다.

그것을 다시 캣니스에게 건네었다.

캣니스는 담담한 얼굴로 술잔을 받았다.

그러나 담담한 얼굴과 다르게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대 덕분이네. 처음 에이린을 데려왔을 때는 모두가 그녀가 죽으리라 생각했으니.”

“브레드 님도 신전을 설득하느라 고생했어요. 원래 마족화는 살릴 방법이 없고, 이번 일도 저만이 가능한 일이지.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거든요.”

“허허. 그대만 가능하다는 일인가? 그런 길드원을 받아들였으니 평생 운을 다 끌어다 쓴 거로군.”

“물론이에요. 마음껏 자랑하셔도 돼요.”


캣니스는 나무로 된 술잔을 부딪쳤다.

술잔을 기울이려다가 안의 내용물을 보고 시선을 떼지 못했다.

검붉은 액체.

며칠 전에 질리도록 보았던 무언가를 연상케 했다.

포도주를 보는 눈빛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에잇!”


기분이 상한 일이라도 있는지. 술잔을 과감하게 입술로 가져갔다.

캣니스는 단번에 커다란 술잔의 반을 먹어 치웠다.


“흐으. 사실 제가 그 일 때문에 마음이 복잡하거든요.”

“복잡하다니. 어느 부분이 말인가?”

“에이린 님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서요.”


캣니스답지 않은 직설적인 말이었다.

브레드는 차분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얀 볼 위로 미약하게 붉은 취기가 감돌았다.


“얼굴 보기 싫고. 제 눈치를 살피는 일도 싫어요. 매번 어린아이처럼 챙겨주는 것도 질리고. 그냥 다 싫네요.”


정말로 취한 건지. 아니면 취하고 싶은 건지.

평소였다면 사제의 신성력으로 취기를 몰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하지 않았다.

술이 주는 신비한 마력에 빠지는 것을 즐겼다.

브레드는 평소에 캣니스가 하지 않았을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했다.


“네. 다 질렸어요. 그러니 이만 용서해주려고요.”


캣니스는 술잔 속의 포도주를 응시했다.

포두주에 비친 그림자가 물결을 따라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를 바라보는 눈빛이 공허하게 가라앉았다.

알게 모르게. 취기로 홍조가 생긴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이상 엮이기에는 정말 끔찍해요.”

“후우, 정말 못 말리겠군.”


브레드는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캣니스가 쥔 술잔을 빼앗았다.

술잔을 뺏긴 캣니스의 눈빛이 애처롭게 변했다.


“앗. 제 술잔···”

“그런 표정 짓지 말게 캣니스여.”


브레드는 팔을 뻗는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밀쳤다.

옆 탁자에 술잔을 내려두고 한숨을 쉬었다.


“자네의 선택이니 존중하겠네. 하지만 그리 한 뒤, 정말로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대답은 없었다.

캣니스는 망토의 모자를 눈 밑까지 뒤집어썼다.

누가 봐도 대답에서 회피하려는 행동이다.

말 없는 행동이 대답을 대신했다.


“거보게. 자네도 사실 알고 있는 걸세. 자네가 그녀에게 가지고 있는 마음은 미워하는 종류가 아니라는 것을.”

“미워하는 게 아니라면 이렇게 가슴이 답답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고마움이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일지도 모르는 일이고. 이런. 벌써 내 말을 부정하지 말아주게.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시선에서 하는 말이니.”


브레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웃음 지었다.

캣니스는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가 꺼낸 단어를 입 안에 되뇌다가 입술 끝을 가볍게 씹었다.


“혼자 무리하다가 죽을 뻔했어요. 대체 어디서 감사한 마음을 느끼라는 건가요···.”

“듣기로는 자네도 마찬가지로 알고 있네. 그러면서 그녀를 비난하는 건가?”

“저는 애초에 상황이 달랐는걸요. 무리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자네는 답을 알고 있지 않나.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이 정말로 분노인 건가?”

“분노가 아니라니···. 그래요. 부정하지는 않겠어요.”


캣니스는 그의 말대로 순순히 시인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은 확실히 분노와 달랐다.


“그래. 그거면 됐네. 지금 감정을 긍정하기에는 자네와 에이린 사이에 쌓인 것이 많다는 거겠지.”


브레드가 낙천적인 이야기를 하였다.

캣니스는 입을 다물었다.

해소되지 않는 감정에 답답해하다가 탁자 위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은 가로막혔다.

빼앗긴 술잔을 돌려받기를 원했지만,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절했다.


“홧술은 상황을 극복하기에 좋은 수단이 아닐세. 특히 이런 경우에는 상대방에게도 귀한 술에도 예의가 아닌 법이지.”


예의. 그런 예의 차리지 않아도 상관없는데.

캣니스의 볼이 불만스럽게 부풀어 올랐다.


“내가 보기에 자네는 이미 취한 것으로 보이네. 이만 돌아가서 이불 덮고 자게나.”

“저 안 취했어요. 그리고 어린애 취급하지 말아주세요.”

“그렇지. 자네는 어른일세. 어린아이처럼 집까지 바래다줄 필요는 없겠지.”


제 발로 갈 생각이 없다면 저택까지 바래다주겠다는 말.

토라진 그녀에게서 대답은 없었다.

그저 더욱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릴 뿐이었다.


“클레인 님 오면 다 이를 거예요. 아무도 없는 모험가 길드에서 다 같이 술잔치를 벌였다고요.”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말게. 이미 루나에게 허락을 구하고 한 일이었으니.”


캣니스는 망토를 탁탁 털었다.

악의가 가득한 말을 부정당했으니 할 말이 없었다.

제 투정은 어떠한 성과도 이루지 못하고 완벽하게 가로막혔다.

결국 술 한잔 못 마시게 하는 브레드를 흘겨보며 모험가 길드 밖으로 나왔다.

건물 밖은 안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다르게 한겨울이었다.


“흐으. 춥네요. 벌써 여신님을 뵙기는 이르니 어서서 돌아가야겠어요.”


추위에 어깨를 오소소 떨었다.

지붕 끝에 매달린 고드름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거리에는 하나둘 눈송이가 떨어졌다.

가람왕국에 내린 첫눈이었다.


“캣니스.”


어느 지점에 다다라서 걸음을 멈췄다.

베르길드의 저택 앞에서 이름 불렸다.

캣니스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조금 전까지 브레드에게 욕했던 익숙한 얼굴과 마주하였다.

주황색 눈동자와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

에이린 프런티어가 짐 보따리를 짊어진 채 서 있었다.



*****



“캣니스. 무사해서 다행이야.”


오늘 병석에서 일어났다는 에이린 프런티어.

털 달린 옷을 입었다고는 하지만 이 추운 날씨에 밖에서 기다렸다.

캣니스는 입 안에서 몇 마디 웅얼거리다가, 상대방의 몸 상태를 고려해 다른 말을 하였다.


“에이린 님. 몸은 괜찮아요?”

“응. 덕분에 살았어. 이번 일로 걱정 끼쳐서 미안해.”

“아니요. 걱정 같은 건 한 적 없어요. 제가 뭣 때문에 에이린 님을 걱정하겠어요?”

“그래? 그러면 다행이네. 사실 너라면 또 자책하고 있지 않을까 걱정했거든.”


캣니스는 꾹 입을 다물었다.

에이린의 병이 나은 지 사흘도 채 되지 않았다.

여윈 볼. 짙게 내린 눈그늘. 기운 없는 어깨. 붉게 홍조가 오른 볼.

이처럼 아직 아픈 몸으로 밖을 돌아다닐 때가 아니었다.

추운 날씨에는 더더욱 아니 된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이 이상 눈을 맞았다가는 쓸데없이 감기에 걸리겠어요.”


쇠창살로 된 문을 열고 정원 안으로 발을 들였다.

들어오라고 문을 열어뒀지만, 이상하게도 에이린은 들어오지 않았다.


“뭐해요? 안 들어와요?”


캣니스가 들어오라며 재촉했다.

이에 에이린이 움직임 대신에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피곤해 보이기도 하고 쓸쓸해 보이기도 하는 미소.

한참을 서로 얼굴을 바라본 뒤에야 말문을 열었다.


“나는 못 들어갈 거 같아.”

“어째서죠···?”


캣니스는 불안한 심정으로 되물었다.

그 질문에 에이린이 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개인적인 사정이 생겼어.”


에이린은 무안한 표정으로 양쪽 입꼬리를 올렸다.

밤 중에 찾아왔으면서 안으로는 못 들어간다는 말.

이어질 말이 어떤 말인지 알 거 같았다.


“오늘 떠나려고 찾아왔어.”


아픈 몸을 이끌고 눈 내리는 밤임에도 찾아온 이유.

본인에게 직접 확인받았듯이. 이별의 말을 전하려고 찾아왔다.


“떠난다고요···?”


캣니스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무슨 말을 할지 고르다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떠난다고요. 인제 와서?”


가슴 속에서 수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분노, 원망, 슬픔 그리고 브레드가 이야기했던 어떠한 감정도 있었다.


“그 몸으로 어디를 가는데요?”

“마탑으로. 슬슬 돌아갈 시기이긴 했어.”

“안 돼요. 몸 상태가 호전될 때까지 더 안정을 취해야 해요.”

“캣니스. 마탑이 날 괴롭힐까 봐? 걱정하지 마. 내가 오히려 걔들을 괴롭히지.”


돌아가지 말라고 해도 고집을 부렸다.

캣니스는 주먹 쥔 손을 세게 그러쥐었다.


“···그 성격이라면 더 안 돌아간다 해도 뭐라 못할 거 아니에요.”

“푸훗. 그렇긴 한데. 사실 여기 온 일도 몰래 나온 거라서 그래. 길드장이 한 의뢰는 끝났으니 더 큰 소란이 생기기 전에 돌아가야지.”

“그래도 조금만 더 있다 가셔야 해요. 에이린 님의 몸 상태는 아직 여행을 감당할 정도가 아니에요.”

“걱정하지 마. 그쪽에서 포탈을 열거든. 그러니까 내가 이 시간에 너를 기다린 건 우연이 아니라는 거야.”


눈이 내리는 세상은 점점 하얗게 변해갔다.

바닥에 쌓이는 눈 두께만큼이나 침묵이 이어졌다.

캣니스는 인정했다.

자신은 에이린이 떠난다는 말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순순히 건네는 이별의 말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를 변덕에서 비롯된 이기심이라고 해도 좋았다.


“왜···”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

캣니스는 에이린을 붙잡지 못한다.

에이린의 표정은 결정을 바꿀 얼굴이 아니었다.

떠나야 한다고 표정 짓는 상대방을 어떻게 붙잡을 수 있을까.


“대체 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은 흘렀다.

여전히 눈발이 흩날렸다.


“켓니스. 사실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떠오르지 않네. 음. 그래도 이 말은 전해야겠다. 나는 말이야. 항상 네가 부러웠어.”


에이린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추위 탓에 양 볼이 머리카락만큼이나 붉게 물들었다.

어설프게나마 웃음을 가장한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다가 못 끝낸 말을 이어갔다.


“부러웠어. 너는 나랑 다르게 두려운 게 없어 보였거든. 그러니까 뭐랄까. 사람들이 너에게 기대는 게 익숙해 보인다고나 할까? 응, 그래. 마치 그래 보였어. 누구를 구한다는 책임을 아무렇지 않게 짊어졌지.”


에이린이 그 시절에 하지 않은 찬사를 늘어놨다.

진심 어린 찬사에도 캣니스는 기뻐하지 못하였다.

여전히 주먹을 움켜쥐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두 눈빛은 어떠한 감정으로 낮게 가라앉았다.


“아니요. 에이린 님이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하지 않아요. 저는 겉으로만 그렇게 보였을 뿐이에요.”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는 거야. 너는 우리 중 누구보다도 용사라는 이름에 적합했으니까. 책임감 있고, 약한 사람을 돌볼 줄 알았어. 용사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게 누구냐고 묻는다면 그건 바로 네가 아닐까 싶은 정도로.”

“···인제 와서 그런 말 들어도 기쁠 거 같나요?”

“응. 그러겠지. 하지만 그래도 네가 알아줬으면 해서 말하는 거야. 우리 중 누구도 네게 영향을 받지 않은 인물이 없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 게일도, 모몬도, 나도, 심지어 나중에 합류한 킬리언도···.”


또다시 이야기가 끊겼다.

한 겨울밤의 공기는 차가웠다.

그러나 캣니스의 마음만큼 시리지 못했다.

예전 같았으면 자존심 때문이라도 이런 대화를 하지 않았을 거다.

굳이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더라도 이런 말을 한다는 자체가 쑥스러웠으니까.

그런데 굳이 그동안 하지 않았던 진심을 전하는 이유.

에이린은 정말로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항상 네게 미안한 일만 했네. 아니지. 킬리언은 제외니까 초창기 세 사람만 그랬네. 음.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지금 그때 일을 말해도 마음에 안 와닿겠지만, 정말로 미안했어.”

“사과는 필요 없다고 말했을 텐데요.”

“하하 응. 그랬지. 정말 미안해. 아차! 이러면 안 되는데, 계속 미안할 일을 만들어버리네.”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일단 안으로 들어와서···”

“미안해.”


에이린이 거절하는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했다.

지금 이 마음이 끊길까 봐. 예전부터 아픈 일만 만들었다고. 미안할 일만 만들었다고. 지금도 캣니스의 기대를 져버려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였다.


“그리고 고마웠어.”


또다시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 끝까지 함께해 줘서.”


에이린은 스스로 말하기 쑥스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이 상황이 평소답지 않은 건 아는지. 미소로 감정을 얼버무렸다.


“가람왕국에 다시 만났을 때 선뜻 만나줘서 고마워, 끝까지 내 이기적인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웠어. 그리고 한번 아팠을 때 외면하지 않아 줘서 고맙고, 또 이렇게 나를 구해줘서 고마워.”


감사한 마음을 전한 에이린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여지없는 속죄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은 한겨울의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떡 선을 따라 떨어졌다.

죄책감과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함께 있어줘서 고마웠어.”


모든 말과 행동이 말해주었다.

이제는 정말로 헤어질 때라고.

설령 다시 만나지 못하여도 미련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을 전부 전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응. 이제는 정말로 떠나야겠다. 다른 네 친구하고도 인사 나눌까 했는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인사를 하겠어?”


방해꾼은 이쯤에서 빠져주겠다.

너에게 상처를 준 죄인은 사라지겠다.

너는 예전도 지금도 여전히 올곧다는 말을 전하였다.


“그러니까 결국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야. 그토록 너를 싫어했지만, 사실은 너와 만나서 정말로 행복했다는 거야.”


에이린은 미소 지었다.

웃으면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듯이 미소 지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마지막 이별은 웃으면서 헤어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정말로 그러했다.

캣니스가 화를 내지만 않았어도.


“누구 마음대로요?”

“캣니스?”

“누구 마음대로 용서해요!”


물기가 가득한 눈을 부릅떴다.

헤어지려는 상대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에이린 님은 편하겠어요? 저한테 용서받지도 않고 이렇게 떠나니까요! 사람 속을 이렇게 헤집어 놓고! 제멋대로 떠들더니 이제는 스스로 용서하고! 누구는 매 순간 신경 쓰여 미칠 뻔했는데! 이렇게 멋대로 편해진다고요?!”

“캐, 캣니스···?”

“이렇게 헤어지면 끝이에요? 이런 식으로 헤어질 거면 처음에 떠나라고 했을 때 떠났어야죠! 대체 당신은 어디까지 이기적으로 행동할 건가요!”


에이린은 미소를 지워낼 정도로 당황하였다.

분명 캣니스가 자신이 떠난다는 소식을 반길 줄 알았다.

그만큼 몇 주 동안 ‘얼른 마탑으로 돌아가라.’라는 말을 듣곤 하였으니까.


“이번 일도 그래요! 제가 언제 에이린 님에게 무리하라고 했던가요? 왜 멋대로 사고치고 죽으려 하는데요? 대체 왜!”

“그. 그런 게 아니야 캣니스. 너도 알잖아. 어떻게든 그놈 속을 파헤쳐야 했어. 그러지 않았다면 바솔루트 놈들은 폐허가 된 왕국에서 낄낄거리며 웃었을 거고, 그러면 네가 아꼈던 사람들은 굉장히 불행해졌을 거야.”

“그래서요? 그렇게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분이었어요? 그러면 제가 기억하는 일은 뭐죠? 스스로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에서 최악의 선택을 저질렀잖아요!”

“기, 기억하고 있었어···?”


에이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빈사 상태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하리라 생각지 못했다.


“당연히 기억해요! 그런데 이 일을 잘한 짓이니 칭찬해 달라고요? 멍청하게 목숨까지 버려가며 한 일을 말이에요? 그러면 제가 감사할 줄 알았나요? 저 때문에 에이린 님이 다쳤는데!”

“하지만 내 괜한 짓 덕분에 왕국이 무사했잖아. 성기사 놈은 놓쳤지만, 충분히 가공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그 성과 때문에 에이린 님은 죽을 뻔하고요!”


에이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캣니스는 거 보라는 듯이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아까부터 제 눈에 맺히는 눈물이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닦아냈다.

그래도 거슬리자, 캣니스는 더욱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박박 닦았다.

눈가를 비롯한 얼굴 전체가 새빨개진 얼굴로 쏘아봤다.

제 편할 대로 떠나려는 상대방을 쏘아붙였다.


“정말로 죽을 뻔했어요. 에이린 님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아세요? 마족화가 진행됐어요. 용사이자 마탑주인 사람이 지성을 잃은 마족이 될 뻔했어요! 이제는 알겠어요? 꼼짝없이 마족이 되었을 거라고요! 제 목숨을 위한 짧은 생각 때문에 영영 인간으로 돌아오지 못 할뻔했다고요!”

“마족화? 내가? 그러면 나는 이미 죽었어야···.”

“제 몸으로 마기를 옮겨서 정화했어요. 무려 정화하는 데만 사흘 밤낮이 걸렸어요. 그런데 잘했다고요? 잘된 일이라고요? 제가 죽든 말든 왜 그런 멍청한 짓을···!”


에이린은 캣니스의 말에 당황했다.

스스로 쓸데없는 목숨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목숨이 구해진 당사자는 제 목숨을 더 소중히 여기라고 화를 내주었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도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미련하게··· 미련하게 뭐 하는 거예요···.”


분한 감정을 모두 쏟아내고 고개를 숙였다.

캣니스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며 흐느꼈다.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적당히 사리고 빠졌어야죠. 그런데 이게 뭐예요. 목숨 같은 거 필요 없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에이린은 당혹스러워하며 다가갔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망설이다가 어깨를 조심히 감쌌다.


“그래 놓고 또 제멋대로 떠난다고 하고···!”


퍽.

에이린의 몸을 밀쳐냈다.

눈물을 흘리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독한 감정을 드러냈다.


“환자면서! 사제의 말은 듣지도 않고! 그럴 거면 아픈 일을 만들지 말던가요! 왜 계속 제 손이 가게 만드는 거예요!”

“아, 아니야! 마탑 일도 마족화 한 일도. 그게 그러니까 이렇게 될 줄은 몰라서···.”

“전 용사 맞아요? 그 잘난 마탑주의 지식은 어디다 써먹은 거예요? 겨우 그런 악인 하나 못 잡아서 절절매기나 하고! 사천왕과 일대일로 붙겠다고 잘난척한 그때 그 사람은 어디 갔어요?!”

“쿨럭. 캣니스. 아까부터 말이 자꾸 아픈······”

“에이린 님. 당신은 항상 그래요! 생각은 짧고! 행동은 더욱 섣부르죠! 킬리언 님이 하신 말씀을 벌써 다 까먹었어요? 당신은 백 퍼센트 자신이 없으면 제발 좀 앞으로 나서지 말라고요!”


가만히 말을 듣던 에이린도 감정이 터졌다.


“아니, 이게 그렇게 잘못한 일이야? 그리고 그때의 나랑 지금의 내가 같아?!”

“달라져야죠! 달라졌어야죠! 옛날과 다르게 지금은 멋있게 성기사를 제압하던가. 아니면 위기에 빠진 가람왕국을 직접 구해냈어야죠! 그런데 결국 방심했다가 중상을 입고 헤롱헤롱. 그런 몸 상태로 쓸데없이 자비나 베풀려고 하고! 메테오 한방이면 쓸어버릴 마물을 모험가들에게 사흘 밤낮 동안 싸우게 만들기나 하고! 제가 그때 무리했던 이유가 다 누구를 믿었기 때문인데···!”

“뭐? 그렇다 치면 너야말로 경솔하게!”


한겨울의 추위를 녹일 정도의 열기가 타올랐다.

그동안 쌓아왔던 감정을 모두 토해냈다.

캣니스와 에이린은 서로 가쁜 숨을 헐떡이며 땀을 닦아냈다.

더 이상 쏟아부을 감정도 기력도 없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말라는 거예요! 저는 이미 에이린 님을 용서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요!”


에이린을 용서하겠다는 한 마디.

그 한마디에 에이린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째서···”

“말했잖아요. 당신은 예나 지금이나 돌진밖에 모르는 바보라고요.”

“···그 말. 마법사에게 굉장히 실례라는 거 알고 있지?”

“제 말이 틀렸나요? 제 몸 상태가 가능성이 없는 상태임을 아는데도 달려드는 무식함이란. 모몬 님도 이렇게나 함부로 몸을 던지지는 않았다고요.”

“그, 그 정도라고?!”


용서의 말과 비난의 말이 공존했다.

충격적인 발언을 연달아 듣자, 에이린의 정신이 반쯤 출가했다.


“모몬··· 내가 그 정도라고···?”


캣니스의 독설이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다.

에이린은 믿기지 않는 말을 되뇌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다가 갑작스레 배를 끌어안고 웃음을 터트렸다.


“푸흣. 푸하하하!”

“···뭐가 그렇게 웃긴 건가요?”

“아니. 그냥 좋아서. 너무 좋아서 웃음이 나오네.”


웃음이 나온다는 말과 다르게 눈물이 뺨을 적셨다.

이는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니었다.

캣니스는 에이린의 애매한 태도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괜히 민망해진 기분에 고개를 돌렸다.


“뭐. 이번만큼은 잘한 이야기가 되었지만요.”


상대방은 웃으면서 눈물을 닦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켜보다 못해 한숨을 쉰 캣니스는 손을 내밀었다.

이에 에이린이 또 한 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캣니스가 내밀어준 손을 맞잡은 순간, 반 뼘 정도 작은 품에 끌려가 안겼다.


“목에 새긴 각인은 안 지울 거예요?”

“응. 싫은 건 알겠지만 남겨두고 싶어···.”

“하아, 알겠어요. 이번만큼은 제가 양보할게요.”


캣니스는 꼭 껴안은 채로 에이린의 목덜미를 만졌다.

곧바로 마법사에게 낯선 힘이 각인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화들짝 놀란 에이린이 몸을 떼어냈다.

두 손으로 캣니스의 어깨를 붙잡은 채로. 두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너. 지금 무슨···.”

“이제 에이린 님은 제 노예라는 거죠.”


황금빛으로 빛나는 캣니스의 눈동자.

잠시 기이한 느낌을 주던 눈동자가 본래의 푸른색을 되찾았다.


“일종의 막을 쳤어요. 에이린 님에게는 아쉽게도 그 각인으로 아플 일은 없게 됐네요. 심지어 거기에 무언가를 더 하려고 해도 제 허락 없이는 못하게 됐어요. 앞으로는 스스로 해주가 불가능. 마탑에서 방법을 찾으면 아예 없는 건 아니겠지만. 굳이 해주 하겠다면야 말리지는 않을게요. 하지만 다른 일을 한다면··· 그때는 절연까지 생각해야 할 거예요.”


에이린은 노예 각인이 있는 뒷덜미를 만졌다.

묘하게 남은 온기를 더듬거리며 피식, 실소하였다.


“캣니스. 끝까지 너에게 도움만 받아.”

“이런 때는 방해를 받은 거겠죠.”

“영영 각인에서 못 벗어나니까?”

“싫으면 지금이라도 없애든가요.”


에이린은 각인을 지우는 건 또 싫은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 캣니스. 끝까지 걱정 끼쳐서.”

“에이린 님. 제가 지금까지 뭐라고 했죠?”

“푸흣. 미안. 정말로 고마워 캣니스 센츄어리.”


에이린은 새삼 시원한 얼굴로 웃었다.

재회한 이후로 처음으로 보는 시원한 웃음이었다,

과거의 모습을 되찾았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예전보다 훨씬 사람답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아~ 이제 정말로 가야겠어.”


말을 하기 무섭게 푸른 마나가 허공에 구멍을 뚫었다.

푸른 구름의 바다처럼 생긴 입구는, 마탑의 마법사가 통로 반대쪽에서 이은 게이트였다.


“안녕 캣니스. 정말로 반가웠어.”

“안녕히 가세요 에이린 님. 언젠가 베르길드의 모험가로 뵐 날이 오기를 바랄게요.”


에이린은 마지막 인사를 하고 구름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몸이 구름 안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통로가 닫혔다.

한순간 파랬던 세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눈 내리는 무채색의 밤으로 돌아왔다.

항상 떠났으면 했지만, 마지막에는 떠나지 않았으면 했던 사람.

옛 동료 에이린 프런티어가 푸른 안개와 함께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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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이로써 가람왕국에 엮인 에이린 프런티어의 등장이 끝이 났습니다. 차후에 다시 등장할 지 모르지만. 적어도 현 시점에서 가람왕국에 재등장할 일은 없을 거 같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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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86화 동향과의 재회 23.07.20 23 0 14쪽
97 85화 동향과의 재회 23.07.19 19 0 17쪽
96 84화 동향과의 재회 23.07.18 22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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