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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의 서재입니다.

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지하이
작품등록일 :
2022.10.26 12:21
최근연재일 :
2024.06.12 22:45
연재수 :
20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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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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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57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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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4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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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외전 인연의 시작 終

DUMMY

외전 <인연의 시작 終>



용사들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지금 상황에서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선하게만 생각했던 캣니스의 다른 모습.

캣니스가 아이를 죽이려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지금 뭐라고 했어?”


가까스로 정신 차린 에이린이 말을 짜냈다.

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아이가 주는 고통을 무시했다.

목 끝까지 올라온 비명을 억누르며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캣니스···?”


언제나 착하고 친절한 캣니스였다.

누구보다 용사를 걱정하고 위로해주던 캣니스였다.

동물과 아이를 사랑하던 캣니스가 이런 말을 한다고 믿기 힘들었다.

제발 잘못 들었기를 바라며 되물었다.


“그 아이의 목숨을 거둬야 한다는 이야기요?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묻는 거예요?”


그러나 간절한 기대는 부서졌다.

제일 듣고 싶지 않던 대답을, 항상 듣고 싶어 하는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 괴리감이 얼마나 큰지 캣니스는 모르고 있었다.

용사 일행은 표정에서 충격을 숨기지 못했다.


“난··· 모르겠어···.”


이윽고 에이린은 아이를 붙들던 팔을 놓았다.

남자아이는 때를 놓치지 않고 동굴 안쪽으로 달려갔다.


“앗! 놓쳤어요!”


그 모습을 본 캣니스가 소리쳤다.


“제가 쫓을게요! 용사님들은 먼저 돌아가 계세요!”


도망치는 아이의 뒤를 쫓아서 움직였다.

절대로 놓치면 안 된다는 말을 곧장 행동으로 옮겼다.

오직 진심만이 담긴 캣니스의 태도에, 용사들의 기분은 더욱 엉망이 되었다.


“캣니스!”


에이린은 아이를 쫓으려던 손목을 붙잡았다.

큰소리에 뒤돌아본 캣니스를 향해 소리쳤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너!”


캣니스는 예상치 못한 큰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당황스러움이 담긴 눈동자는 아직도 큰소리 난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에이린 님? 대체 왜 그러세요···?”


에이린은 돌아온 답변에 처참한 기분을 느꼈다.

아랫입술에서 피 맛이 날 때까지 깨물었다.

믿기 힘들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에 표정이 어두웠다.

비척비척 걸어서 캣니스의 어깨를 잡았다.


“캣니스··· 내가 왜 이러냐고? 그걸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거야? 너···!”


분노와 슬픔 그리고 실망이 뒤섞인 감정이 목소리로 나왔다.

그제야 캣니스도 용사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다.


“저··· 혹시 이번에도 제가 뭘 잘못했나요···?”


캣니스가 손목을 강하게 움켜쥔 손을 바라보았다. 입으로는 혼란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이 순간, 순수한 궁금증은 오히려 역효과가 되었다.


“거짓말···.”


에이린은 입을 틀어막으며 뒷걸음질 쳤다.

서로 닿아있던 거리가 잠깐 사이에 벌어졌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이건···.”

“에이린 님 왜. 대체 왜 그러시는 거예요···?”


에이린은 끔찍한 광경이라도 본 것처럼 얼굴을 감싸고 흐느꼈다.

캣니스는 그녀의 태도가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본인을 두려워하는 건지 모르고 있었다. 이유 모를 혐오감만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캣니스. 다른 사람은 어디 있지?”

“게일 님···.”


무거운 분위기가 지속되는 와중에 게일이 입을 열었다.

게일 또한 에이린과 마찬가지다. 어떤 감정을 강하게 억누른 목소리 냈다.

그러나 그의 책망하는 물음도 이해 안 되는 건 마찬가지다.

그래도 그가 물으니 대답했다.


“모두. 속죄할 수 있게 도와줬어요.”


게일은 캣니스의 답변에 이를 가는 소리를 냈다.

동굴을 흔들 정도로 폭력적인 신력이 뿜어져 나왔다.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감정이 지독하게 흘러나왔다.


“캣니스. 너···”


게일이 성큼성큼 다가갔다. 어린 몸의 멱살 잡았다. 얼굴 가까이에서 소리쳤다.


“제대로 말해! 빙빙 돌리지 말고!”


동굴을 울릴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

그제야 캣니스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담겼다.

처음 보는 게일의 모습에 놀라서 몸을 밀쳐냈다. 멱살 잡은 손에서 벗어나 뒷걸음질 쳤다.


“왜. 대체 왜 화를 내시는 거예요···?”


캣니스는 처음 보는 동료의 모습에 겁먹었다.

울고 있는 에이린의 얼굴을 살폈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모몬도 바라봤다.

가슴 깊이 분노하고 있는 게일의 얼굴도 바라봤다.


“말씀해 주시면 고칠게요. 제가 뭘 잘못했는지 말씀해 주시면···”


빠드득-


게일의 입술 틈에서 과격한 소리가 나왔다.

분노한 들숨과 날숨을 들이 내쉬기를 반복한다.

이내 두 눈에 험악한 감정을 담았다.


“왜 화를 내는지 모른다고?”

“으윽!”


게일은 캣니스의 팔을 낚아챘다.

중심을 잃은 캣니스를 강제로 일으켜세웠다. 다그치듯이 거칠게 팔을 잡아끌었다.


“어디야? 사람들은 어디에 있어!”

“아, 아파요. 게일 님···!”

“사람들이 어디 있냐고 물었어! 네 기분 같은 거 물은 적 없어!”


어느새 캣니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폭력적인 게일의 모습에서 놀라서 딸꾹질했다.

분노한 얼굴을 뒤따라가며 어깨 떨었다.

게일은 목에 핏대를 세운 채 동굴 입구 쪽으로 걸음 옮겼다.


“윽! 으윽···!”


당연히 캣니스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 걸었다.

평소 보폭이 좁은 캣니스를 배려하던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아파··· 아파요···.”


캣니스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돌부리에 걸리고 신발이 벗겨져 맨발이 드러났다.

맨발이 날카로운 돌을 밟을 때마다 피가 나고 상처가 남았다.

그래도 속도를 줄일 기색은 없었다.

더욱 손목을 잡아끌며 속도를 높였다.

게일은 한참 우는 소리와 함께 걸음을 빨리했다.

두 사람이 지나간 장소에 붉은 흔적이 가득 남았다.


“···여기였어?”


드디어 발걸음이 멈췄다.

한 장소에 도착한 그들은 시야를 넓게 보았다.

이 장소를 기점으로 사람들의 흔적이 완전히 끊겼다.

핏자국과 넝마 덩이가 된 옷들이 가득했다.


“캣니스. 화내지 않을 테니 말해봐. 사람들이 왜 어디에도 없는 거야?”


게일은 미소 지으며 뒤 돌았다.

캣니스가 고통으로 식은땀을 흘리든 말든, 답변을 듣고 싶어 했다.


“이 사람들은··· 전부 정화했어요···. 살릴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어서···”

“아, 그렇구나. 살릴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었구나?”


게일이 캣니스의 말을 끊고 시선을 돌렸다.

동굴에는 생존한 사람은커녕 시체조차 남지 않았다.

이 상황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정보가 있었다.

신전의 최고 형벌에는 신성력으로 시체를 소멸시킨다. 세상에 흔적을 남겨서도 안 될 지독한 범죄자에게 내리는 벌이었다.

그런데 지금. 용사들이 구한 사람들이 그런 형벌에 처했다.

무사히 구한 사람들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되었다.


“게일. 화가 난 건 이해하지만 일단 돌아가서···”


퍽-


여지없는 폭력의 소리가 이어졌다.


“윽!”


게일과 캣니스 사이의 거리가 멀어졌다.

게일이 휘두른 주먹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캣니스의 작은 몸이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푸른 눈동자는 당황과 의문을 품었다.


“모몬, 에이린. 우리가 잘못 생각했어. 역시 신전은 우리를 망하게 하고 싶었던 거야.”


게일은 이를 사리물었다.

바닥에 쓰러진 금발을 붙잡았다.

얼굴에 새긴 폭력의 흔적을 가까이서 마주했다.

당혹스러움이 담긴 푸른 눈동자를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아파? 이게 아프다고? 네가 한 짓은 생각 못 하고 그런 소리를 뱉어!”

“컥···!”


한 번 더 작은 몸이 쓰러졌다.

주먹으로 복부를 맞은 몸이 애처롭게 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금발을 다시 붙잡았다.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멋대로 사람들의 목숨을 결정해!”


폭력은 계속되었다.

지켜보던 에이린은 양쪽 귀를 막았다.

얼굴은 창백했다.

차마 다투는 동료를 말리지 못하고 현실에서 눈 돌렸다.


“분명히 내가 말했지. 너는 어떻게든 사람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라고!”


무자비한 구타가 이어졌다.

누구도 정의로운 용사를 떠올리지 못할 광경이었다.

구타만으로 붉은 웅덩이가 고였다.

웅덩이의 주체는 더 처참한 몰골이었다.

캣니스의 얼굴이 퉁퉁 붓고 입과 코에서 피를 내보낸다.

이쯤 되면 목숨의 위협을 느낄 만도 한데, 살려달라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네가 이럴 수가 있어!”


게일은 캣니스의 멱살 잡은 몸을 내던졌다.

내동댕이쳐진 작은 몸이 바닥을 굴렀다.


“뭐라도! 무슨 말이라도 해봐! 캣니스!”


게일은 캣니스 머리 옆의 땅을 내리쳤다.

그의 주먹도 살갗이 벗겨져 새빨갰다.

노란 눈에서 알게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목젖이 크게 요동쳤다.


“제발··· 내가 너를 미워하지 않게 해줘···.”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여사제였지만 이제는 용사 스스로 손에 피를 묻혔다.

분노와 배신감에 주먹을 휘두르지만, 그 끝이 좋은 기분일 수가 없었다.

지난 행적과 모순된 행동으로 처참한 기분이 이어졌다.


“잘못했어요···.”


처음으로 캣니스가 말했다.

잘못했다는 말과 함께 가쁜 숨을 시근덕거렸다.

이에 게일은 온갖 감정으로 일그러진 시선을 돌렸다.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용서의 말을 들어도 못난 감정이 솟는다.

하지만 인내하였다.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흥분한 가슴이 부풀어 올렸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호흡이 진정되고 난 뒤 입을 열었다.


“캣니스.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았어?”

“용사님의 말을 무시한 점···”


퍽-


게일이 얼굴을 험악하게 굳혔다.

발에 차인 작은 몸은 저 멀리서 고통에 웅크리고 있었다.

한 번 더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목젖이 요동쳤다.

이내 가라앉은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다.


“그래. 너를 관리하지 못한 내 잘못이야. 앞으로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게일은 용사 파티의 리더로서 명령했다.

이 말이 엉망이 된 캣니스에게 건넨 마지막 말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화해도 용서도 없다.

그저 만신창이인 캣니스를 지나쳐서 출구로 걸었다.

모몬과 에이린이 뒤를 따라갔다.

홀로 남은 캣니스도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오셨군요, 용사님들. 이번 일은 어떻게···”

“닥쳐. 지금 떠들어댈 기분 아니니까.”


함께 도시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마중 나온 기사만 험한 말을 들었다.

이 불편한 침묵은 다음 날이 될 때까지도 지속되었다.

마차를 타고 도시로 되돌아오는 동안에도 앙금이 해소되는 일은 없었다.



*****



“잘 부탁드릴게요.”


캣니스는 건물 밖으로 나왔다.

망토의 모자를 뒤집어쓴 채 거리를 거닐었다.

그녀가 얼굴을 가리는 이유는, 남기사에게 맞아서가 아니었다.

그저 게일을 비롯한 모두가 그녀의 얼굴을 보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이거 주세요.”


용사와 불화가 있은 지 얼마 안 되었어도 여행 준비는 착실하게 했다.

이번 일로 용사들의 감정이 상했든 어쨌든. 그들이 함께하는 동료라는 건 변함 없었다.


“이것도 주세요.”


오늘은 그날이 있은 지 사흘째 되는 날이다.

그동안 이번 의뢰의 보수를 두둑이 받았다.

비록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지만, 도시를 위협할 뻔한 악마를 무찌른 값은 후하게 받았다.

수도에 있다는 백작가에서도 아들의 생사를 포기하게 해줘서 감사하다는 서신을 보냈다.

이 모든 임무의 보상으로 앱솔루트 왕국 귀족들은 용사들의 지원을 약속했다.


“아. 이건 게일 님이 좋아하는 과일이네요.”


마른 과일을 구매하려다가 생과일 하나에 눈독을 들였다.

비록 용사와의 관계가 크게 틀어졌지만, 분명 나아질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분명 기뻐하실 거야.’


여행물자를 모두 구매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백작가에서 지원해준 덕분에, 평소라면 엄두도 못 냈을 고급 숙소를 통째로 빌렸다.


“게일 님 다녀왔···”


푸드덕.

숙소의 문을 열자마자 난데없는 생물의 날갯짓이 있었다.

캣니스는 잠시 얼굴을 가렸다가 천천히 팔을 내렸다.


“어서 와 캣니스.”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온몸을 긴장하며 숙소 내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용사 세 명이 로비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두운 얼굴로. 한 사람은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캣니스 내가 했던 말 기억해?”


게일이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캣니스의 입술은 도저히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또 나를 배신하는구나.”


숙소에는 하얀 비둘기가 날아다녔다.

짐승의 깃털이 사방에 흩날렸다.

웃고 있는 게일의 손에는 하얀 종이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조금 전에 캣니스가 한 건물에 맡기고 온 물건. 신전의 사람에게 전해줄 편지였다.


“저를 미행하셨군요.”

“그건 중요치 않아. 그보다는 캣니스. 네가 도대체 왜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이냐는 거지.”


짜악 짝. 종이 찢는 소리가 여지없이 들렸다.

노골적으로 종이를 찢고 공중에 흩뿌렸다.

줄곧 탁자 위에 올려두었던 게일의 다리가 내려갔다.

그의 시선이 조각난 편지에서 캣니스로 향했다.

불편한 침묵이 며칠 전과 같이 그들 사이에 내리 앉았다.

비둘기는 숙소 내부를 어지러이 날아다니더니 캣니스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구구 구구.”


비둘기가 캣니스의 목을 쪼았다.

마치 모든 게 그녀의 탓이라는 듯이 사정없이 쪼았다.


“캣니스. 내가 두 번 묻게 하지 마.”


게일의 갈색 머리카락 아래로 그늘이 졌다.

어두운 그늘 속에서 노란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살기가, 방금 막 숙소로 돌아온 동료를 옥죄었다.

살기 안에서 캣니스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사람들은 악마 숭배자였어요.”


몇 번이고 이야기했던 그날의 진실.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어요.”


몇 번이고 호소했고 제 진심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때마다 게일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캣니스 세상에 죽어 마땅한 사람은 없어.”


똑같은 표정과 똑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신전에 가면 치료할 수 있었을 텐데, 대체 네가 뭔데 죽이기로 정하는 거야?”


더 이상 그들 사이에 인정은 없었다.

일방적인 미움과 부서진 신뢰만이 남았다.


“캣니스. 한 가지만 물을게. 일흔 명의 사람을 모두 죽였으면서, 죄책감은 느끼고 있니?”


게일의 물음과 함께 에이린도 고개를 들었다.

에이린의 호박빛 눈동자에서 마력술식이 빛났다.

새삼 다정한 질문의 형태였지만 이는 심문이었다.

조금의 거짓도 허용하지 않는 마법을 동원한 심문

캣니스는 전에 없던 압박감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죄책감 말인가요···.”

“그래. 죄책감.”

“느끼지 않고 있어요.”


거짓말을 한다는 거부감에서 답한 걸까. 아니면 에이린의 마법을 간파하고 포기한 대답인 걸까.

무엇이 됐든 게일의 표정이 굳은 건 변함이 없었다.


“저는 그들을 동정해요.”


거짓 간파마법을 끝낸 에이린은 스스로 얼굴을 감쌌다.

심문이 끝나자, 게일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걸음을 옮겨서 캣니스 앞에 섰다.


“그래. 동정. 너는 끝까지 잘못을 모르고 있구나.”


우악스러운 힘이 손목을 잡아끌었다.

여행을 위해 사 온 물건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게일은 그때와 똑같이 걸음을 옮겼다.

동굴에서와 같이 캣니스는 무기력하게 끌려갔다.

탁-

방문이 닫혔다.

로비에는 모몬과 에이린 그리고 물품과 과일들이 망가진 모습만이 남아있었다.


“그만. 제발 그만···.”


에이린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온몸을 벌벌 떨며 눈에서 눈물을 쏟아냈다.

아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방 안에서 그녀만이 무슨 소리를 들었다.

뛰어난 마나 감응력을 지녔기에 방음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

구타와 비명이 귓속에 들린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에이린 본인의 숨이 조이는 듯하였다.


“왜··· 대체 우리가 왜 이렇게 된 거야···.”


용사 사이에서 어린 여사제를 다치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은 깨진 지 오래였다.

방 안에서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이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마음을 죽였다.

말리지 못한다면 차라리 마음을 독하게 먹으면 되는 일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에이린 님.”


다음 날이 되자 캣니스는 언제나처럼 인사했다.

인식 저해의 망토를 뒤집어쓴 채 평소와 같이 행동했다.


“캣니스. 준비는 끝났지?”

“네. 끝났어요, 용사님···.”


하지만 알았다.

이건 깨지 못한 악몽이었다.

악몽은 그날 이후로도 몇 번이고 본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마다 에이린은 귀를 막고 웅크렸다.


“캣니스. 너의 그 능력은 너를 위해 준비된 게 아닌 거 알고 있지?”


못된 사제가 사리사욕을 채운다고 치유의 능력까지 봉한 나날들.

다 같이 모여서 식사한 그날에는. 먹은 것을 전부 게워 낼 정도로 구역질하였다.


“아, 좋은 아침이에요 에이린 님···.”


게일의 교육은 잔인하지만 효과적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캣니스의 목소리에서 활기가 사라졌다.

제 의지를 잃고 게일의 목소리에만 반응한다.

하지만 에이린은 그런 동료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캣니스 힘들면 말해. 아무리 저번 일은 네 잘못이 크지만, 이건 잘못됐어.”


게일 몰래 캣니스의 침실로 들어가 속마음을 털어놓으라고 간청했다.

자신도 힘을 보태겠다고,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편들었다.

하지만 그때의 캣니스는 웃으면서 말했다.


“무슨 소리세요? 에이린 님. 용사님이 잘못할 리가 없잖아요.”


그 순간 에이린은 깨달았다.

캣니스의 광적인 믿음은 여신에게만 향한 게 아니었다.

용사에게도 똑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어딘가 비틀어진 관계였다.


“하하··· 그래···? 내가 이상하다고 말하는 거야···? 그렇구나··· 그런 거였어··· 너는 우리를 보고 있던 게 아니었던 거야···.”


실낱처럼 남아있던 선의가 여사제에 대한 공포로 물들었다.

그날 이후로 함께 있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렸다.

그래서 에이린도 캣니스를 배척했다.

처음 폭력을 저지를 때 동정심이 들었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동굴에서 살려달라 외치던 아이의 울부짖음과 도움을 거절한 일이 죄책감을 덜어주었다.

동정심을 버리니 희열만이 남았다.


“이번 일을 겪으면 그 아이도 교단의 품으로 돌아가겠죠.”

“하지만 그러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 유능한 부하 카마인이 함께 할 테니까요. 사제의 빈자리는 바솔루트에서 충당하도록 할 테니까요.”


많은 일이 있던 후에 바솔루트 교황이 한 말은 솔깃했다.

용사들은 사제를 바꾸자는 제안 받아들였다.


“차라리 잘 됐어. 애초에 마왕을 무찌르는 여정에 애가 끼는 게 말이 안 됐으니까.”


사랑받는 교단으로 돌아가는 게 캣니스에게도 좋을 거라 여겼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이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가 바랐던 일과 다르게. 성기사단장이 당당하게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이로써 그들이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들의 일그러진 관계는 마왕 토벌까지 이어졌다.



*****



“우리는 그 아이에게 많은 상처를 입혔어.”


빛 하나 들지 않은 깜깜한 내부.

바람이 불 때마다 들리는 쇠사슬 소리.

잔뜩 목이 잠긴 여인은 쇠사슬을 온몸에 매단 채 이야기했다.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고? 이 외에는 별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닌데.”


붉은 머리카락이 생기를 잃고 늘어졌다.

한때 보석 호박처럼 빛나던 눈동자가 빛을 잃고 공허했다.


“사천왕 페넥스와도 싸워보고 사천왕 릴리트와도 싸워봤지. 모든 게 그 아이의 공로가 컸지만. 우리는 킬리언과 만나기 전까지 그 아이를 박해했어.”


달그락.


여인 앞에 놓인 밥그릇이 움직였다.

쇠사슬에 묶인 여인은 입꼬리를 올렸다.


“킬리언이 누구냐고? 베인지역 근처 마을에서 만난 용병이야. 실력이 출중하고 행동도 빨라. 말버릇은 좋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캣니스를 대하던 모습을 보면 우리보다는 인성이 괜찮은 남자였지.”


스르륵.


눈앞에 아른거리던 머리카락들이 넘어갔다.

비쩍 마른 여자아이의 모습이 눈동자에 비친 다음,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래 벌써 시간이 됐구나.”


방 안의 마력이 움직였다.

치렁치렁 몸에 매달리던 쇠사슬이 사라졌다.


“죄인. 마탑주 에이린 프런티어는 눈을 떠라.”


쇠 목줄이 이음새 풀리는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주위의 공간은 조금 전까지 어두컴컴했던 방이 아니었다.

사방에 푸른 불꽃이 넘실거리며, 그보다 높은 벽에는 관람석 비슷하게 움푹 들어간 공간이 있었다.

한 남성이 지팡이를 짚으며 목소리를 키웠다.


“마탑의 법을 어기고 금단의 지식을 사용한 죄. 이에 대해 변명할 말이 있는가!”


마물 사육장. 혹은 귀족의 실내 공연장을 연상케 하는 장소.

이곳이 마탑의 재판장이다.

마탑의 법규로 죄인을 보살피는 장소이다.


“다들. 잘 잤어?”


에이린은 고개 들었다.

여러 생김새로 오만한 눈빛을 한 마탑의 원로들에게 인사했다.


“지금 제 주제 파악 못 하는 건가? 끝까지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군.”


마탑 원로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더럽다. 이럴 줄 알았다. 근본이 없다. 뒤통수나 치고 다니는 용병의 핏줄답다 등.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앞에서 하지 못할 소리를 지껄였다.

이에 에이린은 그런 그들의 변화가 원망스러울 만도 한데. 그저 입꼬리 올리며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 웃음소리에, 하얀 백발의 노인이 새빨갛게 얼굴 붉혔다.


“감히! 하찮은 신분으로 분에 넘치게 마탑주의 지식을 물려받은 자면서! 큰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에 뉘우침도 없는가!”


에이린은 지난 시간 동안 쇠사슬과 쇠 목줄을 찬 채 수감 되어 있었다.

몸과 정신이 쇠약한 상태인데도 마탑의 원로들을 상대로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히 고개 들었다. 그녀 쪽에서 그들을 비웃었다.


“여전히 내 발톱 하나 얻지 못하는 너희 중에서 누가 나를 비난할 수 있을까?”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이 현 마탑주의 존재에 대한 항의임을 모를 리 없었다.

마탑주를 향한 불경한 태도를 보이는데도, 현 마탑주인 에이린 프런티어는 눈감아주었다.


“우리는 그대의 태도를 용납할 수 없다. 죄를 저지르고도 어찌 그리 뻔뻔할 수 있단 말이냐!”

“내가 알기로 어떤 마탑주가 죄를 지어도 원로들은 침묵하지 않았나?”

“이번만큼은 예외로 두기로 했소. 에이린 그대는 마탑의 주인 될 자격을 입증하지 못하였기에.”


에이린은 숨죽이며 웃었다.

붉은 머리카락 밑으로 즐거워하는 눈웃음이 그려졌다.

싸늘하기까지 한 분위기 속에서 여유롭게 말하였다.


“그래, 그게 너희들의 뜻이라면야. 나는 너그러우니까 너희 원하는 대로 어디 한 번 마음껏 해봐.”


원로들은 지팡이 아래로 바닥을 내리쳤다.

줄곧 이 답변을 기다린 모양이다.

허공에 술식이 그려지고 다들 미리 짜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죄인 에이린 프런티어는 들어라. 그대는 금지된 마법을 사용하여 마탑의 질서를 어지른바. 마탑을 이루는 근원이자 힘인 마법진, 인피니티의 마력 공급형을 삼백 년 동안 처하겠다.”


마력을 공급하는 한 무한한 힘을 가진 마법진.

마탑을 유지하는 힘인 인피니티는, 마탑의 모든 마법사가 미력 공급을 나누어서 부담한다.

인피니티는 마나 소모량이 상당하기에. 범법자의 마력을 착취하여서 마탑 구성원이 가지는 부담을 줄이곤 한다.


“삼백 년 동안 살아있는 마력석 취급이라. 얻은 것에 비하면 달콤한 손실이네.”


에이린은 마탑의 최고 형벌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죄인의 방에서 쇠사슬과 목줄을 차게 하며, 마법사에게 생명이나 다름없는 마력을 착취하는 형벌을 주겠다는데도 반발하지 않았다.


“마탑주. 그대의 신분을 생각하여 딱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겠소. 지금이라도 죄를 뉘우치고 마탑을 위해 헌신하겠다면···”

“됐어. 마탑을 위한 무한한 마력 공급이나, 마탑에 대한 헌신이나 그게 그건데 뭐.”


원로가 준 자비로운 기회를 걷어찼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후회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언젠가 딱 한 번 밖으로 내보내 줘. 또 한 번 그 아이에게 도움이 되고 싶거든.”


현 마탑주의 마지막 부탁과 함께 마법이 발동됐다.

줄곧 불길 너머 위에 서 있던 원로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다들 좋은 꿈 꾸도록 해. 지금부터 내가 꿀 꿈은 아주아주 긴 꿈이 될 테니.”


처음 있었던 방으로 돌아왔다.

뱀 같은 쇠사슬이 팔과 다리를 결박하여 무릎 꿇렸다.

쇠 목줄이 바닥과 연결되어 고개 숙였다.

온몸에서 마력이 빠져나가는 감각을 체감하며, 지금부터 빠져들 오랜 잠을 위해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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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외전. 인연의 시작(에이린의 과거 회상)이 끝났습니다. 다음 화는 캣니스와 가더 두 사람과 관련된 에피소드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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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92화 서큐버스 여왕 23.08.21 21 0 13쪽
113 91화 서큐버스 여왕 23.08.18 19 0 14쪽
112 90화 서큐버스 여왕 23.08.16 23 0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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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85화 동향과의 재회 23.07.19 21 0 17쪽
96 84화 동향과의 재회 23.07.18 24 0 16쪽
95 83화 동향과의 재회 23.07.17 25 0 22쪽
94 82화 동향과의 재회 23.07.12 31 0 14쪽
93 81화 동향과의 재회 23.07.10 37 0 13쪽
92 외전 마계의 끝자락에서 23.07.05 43 0 29쪽
91 80화 그의 비밀 23.07.03 41 0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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