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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의 서재입니다.

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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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작품등록일 :
2022.10.26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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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3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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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9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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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동향과의 재회

DUMMY

85화 <동향과의 재회>



농성 1일 차.

아침 운동을 다녀온 자일리는 정원 앞에 서 있었다.

그가 선뜻 저택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만 연 채 서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일 층 로비에서 펼쳐지는 낯선 광경.

왠지 짙은 피로감이 느껴져서 얼굴을 쓸어내렸다.


“엄마 배고파요! 아기 맘마 주세요!”

“그, 그럴까요? 무얼 먹고 싶나요? 우리 아기.”


오늘도 찾아온 베르길드의 작은 손님들.

아이들 안에서 소꿉놀이하는 두 사람을 목격했다.

소꿉놀이에서 맏이 역할을 맡은 아이가 당돌하게 외쳤다.


“글쎄요. 뭐가 먹고 싶지? 나는 모르겠어. 우리 막내는 무얼 먹고 싶어?”

“코끼리 눈알 수프를 먹고 싶어! 아주아주 건더기가 많은 거로!”

“아니야! 너는 내 둘째 동생이라는 설정이잖아. 지금 질문에는 아기가 답해야지! 자, 내 동생. 너도 말해봐. 너도 오빠처럼 코끼리 눈알 수프를 먹고 싶어?”

“그런 역겨운 거 먹을까 쏘냐.”


놀랍게도 캣니스의 남편 역할은 가더가 아니었다.

소꿉놀이의 정황상 가더는 갓난아이의 역할을 맡은 모양이었다.


“치잇. 나 소꿉놀이 안 해! 얘는 내가 먹고 싶은 음식 전부 싫다고 하잖아!”


까칠한 갓난아이 덕분에 소꿉놀이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제 의견을 무시당한 아이가 성질을 냈다.

이대로라면 한 가정이 파탄 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를 안타깝게 지켜본 캣니스는 갓난아이 역할을 맡은 이에게 속삭였다.


“···문지기님. 조금만 더 아이들의 시선에서 어울려주면 안 될까요?”

“맞아. 이 언니는 소꿉놀이할 줄을 너무 몰라. 누구는 아기 언니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멍멍!”

“헥헥!”

“그르렁!”

“야옹!”


동물 역할을 맡은 아이들의 원성이 쏟아졌다.

평소와 다른 구성원에 대한 불만이 폭주했다.

그만큼 가더의 모습은 이질감이 굉장했다.

젖병을 물고 맏이의 다리에 누워 있는 모습이란···.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또한 이런 놀이를 원해서 하는 일은 아닌지. 상체를 일으켰다.


“젠장. 왜 내가 이런 거를 해야 해?”

“문지기님! 말! 아이들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세요!”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지만. 여사제 탓에 그만두지 못하고 있었다.

가더는 스스로 하얀 머리카락을 쥐어뜯다가, 이내 자포자기하고 다시 아이의 무릎에 머리를 벴다.


“너희 지금 뭐 하는 거야···?”


자일리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캣니스도 뒤늦게 그를 발견하였다.

안면에는 서로 민망한 기분이 가득했다.


“티미 님을 못 찾아서 함께 놀고 있었어요.”


가고일 티미.

아이들이 이곳을 찾는 목적 중 하나가 사라졌다.

이전에 티미를 죽일뻔한 일 이후로,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되어서 함께 찾아봤는데요. 결국 못 찾아서 이렇게 됐어요.”


아이들과 잊힌 존재를 찾기 위해 저택 안을 뒤지고 다녔다.

그러다가 애꿎은 가더의 방을 들어갔는데. 예쁜 외모 탓에 아이들의 관심이 그에게 쏠렸다.


“어. 음. 그래? 용케 재를 끌어들였구나···?”


애꿎은 가더는 소꿉놀이에 강제로 어울리게 되었다.

어쩐지 아이의 무릎을 벤 뒷모습이 굉장히 서글펐다.


“우리 아기 잘도 자네?”


아이가 ‘아이 예쁘다.’ 말하며 긴 하얀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그의 다른 모습을 아는 자일리에게 있어서, 참으로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하였다.


“아무래도 아이니까요. 편의를 많이 봐주고 있어요.”


캣니스의 말대로 그러긴 했다.

이전에 제 몸에 손을 대거나 여자 취급하면 불같이 화를 낸 그였으니까.

그의 몸에 손대는 사람은 캣니스 이외에 아이들이 유일할 것이다.


“우리 맘마 먹을까? 아기도 코끼리 눈알 좋아하지?”


그러나 머리로 이해했다고 해서 가슴이 받아들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자일리는 이 이상 피곤한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눈을 돌리기로 했다.

왠지 동정심이 드는 거 같기도 하여. 잔인해서 못 봐줄 꼴이었다.


“아이 예쁘다~ 우리 아기는 자라면 왕국 최고의 미녀로 자랄 거랍니다~”

“그래서 자일리 님. 바깥 동태는 어떤가요?”


캣니스가 질문했다.

이에 자일리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질문의 목적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별일 없었어. 애초에 날이 바뀐 지 하루도 안 지났잖아. 그동안 무슨 일이 생기는 게 이상하지 않아?”

“잠자리는 어땠나요? 밤 중에 별일 없었어요?”

“없었어. 있는 일이라고는 알몸으로 복도를 횡단하는 대머리를 보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일밖에···.”


목소리 크기와 함께 시선이 내려갔다.

갑작스레 우울해진 분위기 속에 다 같이 침묵했다.


“아기도 합장해요~”

“다행이에요. 그나마 저택 안에서 암살할 생각은 없는 거 같아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방은 조금 더 바꾼 채로 지내기로 하고. 자일리 님은 이제 잠을 편히 자도 돼요.”

“암살까지 말해 놓고 편히 자도 된다고? 그건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는 거 같은데···. 고위 사제의 성격이 그따위면은 더 두고 봐야지.”


자일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캣니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암살까지 걱정했으면서 너무 성급하게 풀어지는 게 아닌지, 근심 걱정이 그치지 않았다.


“아. 그건 괜찮아요. 그분이 쳐들어올 거면 벌써 왔어야 하는 분이거든요.”


그런데도 캣니스는 확신이 가득 찬 말을 했다.

논리에 맞지 않은 말을 단언하니, 더욱 지켜보는 처지에서 기분이 혼란스러웠다.

결국 이 문제에 대해서도 눈을 돌리기로 정했다.


“난 너랑 네가 말하는 사람의 심리를 모르겠다···. 그냥 네가 잘 알고 있는 거 같으니 전부 맡길게.”

“네, 맡겨만 주세요. 그런데 지금 씻으러 가나요? 브레드 님에게 식사를 늦춰달라고 이야기할까요?”

“아니. 됐어. 그냥 물속에서 피로를 좀 풀고 싶은 기분이야. 대머리에게 내 밥은 준비하지 말라고 말해줘.”

“네, 알겠어요. 아, 맞다. 자일리 님이 즐겨 사용하는 향료는···”

“알아. 안다고! 어딨는지 알아! 아이 씨 진짜. 왜 그런 거까지 알고 있는 거야?!”


얼굴이 새빨개진 자일리가 소리쳤다.

쿵쿵, 계단을 뛰어 올라가서. 다시 일 층으로 내려와 위치가 바뀐 방으로 들어갔다.

그동안에 캣니스와 아이들은 양손으로 귀를 막은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소리에 놀라지 않은 아이가 말했다.


“허접.”

“그런 말은 사용하면 안 돼요.”

“언니는 숙맥이고.”


거침없는 비난에 말문이 막혔다.

캣니스는 아이들의 말을 교정해주기 위한 특강을 시작했다.

그러나 길어지는 설교에 아이들은 하나둘 내일 다시 만나기를 기약했다.

아이들이 모두 떠나거나 말거나. 가더는 여전히 쓸쓸한 뒷모습을 유지했다.

하루가 지나갔다.



*****



“높이- 높-이-!”


왔다.

큰 게 왔다.

정말로 큰 사람이 일 층 로비에 있었다.


“진짜로 왔네···.”

“제가 그렇다고 말했잖아요.”


아이들은 평소에 꿈도 못 꿀 높이로 날아올랐다.

아직 그 놀이를 하지 못한 아이들은 자신도 태워달라면서 한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아이들이 한껏 욕심부리는 대상은 브레드의 몸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거대한 덩치였다.

전날에 자일리가 캣니스의 말을 믿지 못했던 일.

‘설마 이틀 만에 찾아오겠어?’라는 우려가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선생님··· 이건 조금 치사하지 않나요···?”


캣니스가 그를 불렀다.

그녀의 부름에 알렉산드로스가 뒤돌아봤다.


“하하하. 정말로 치사한 게 누군지 알고 말하는 거냐 캣니스?”


앱솔루트 소속 셀레브리디 교단의 열 한 명의 팔라딘 중 하나. 처형자, 네 번째 칼 알렉산드로스.

그는 대답하는 동안에도 아이들의 몸을 잡고 높이 높이 하늘로 날렸다.


“그래도 체면이 있지. 어떻게 치사하게 아이들 속에서 숨어서 오나요.”

“정문은 열려있었다 캣니스야.”


캣니스의 지적에 딱히 변명하는 기색은 없다. 그렇다고 반성하는 모습도 아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높이 들던 팔을 내리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래서 어떻게 할 테냐. 지금이라도 나를 내쫓을 테냐?”


당당히 정문으로 들어왔고. 이 문제가 싫으면 지금이라도 나가겠다는 언질.

아무리 농성을 결정한 캣니스라도 이 질문에 대해서는 선뜻 답하지 못하였다.


“그 결정은 선생님의 태도에 따라 달라질 거예요···.”

“걱정하지 마라. 네가 아낀다는 그 서큐버스 때문에 온 게 아니니까.”

“서큐버스 아닌데···.”


캣니스는 틀린 정보를 바꾸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지금 그 사실을 알려봤자 좋을 게 없었다.

한참 동안 미간을 찡그릴 정도로 끝에, 과감히 결론을 내렸다.


“알겠어요. 지금 내쫓지는 않을게요. 하지만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건지는 이야기를 들어야겠어요.”


내쫓지는 않겠다는 전언.

하지만 언제든지 이 말을 철회할 수 있다는 경고도 함께 했다.


“좋다. 그러도록 하자꾸나. 저 거리에서 라벨라 잎으로 만든 풀빵을 사 왔는데 차와 함께 먹겠느냐?”

“···차는 대접해드릴게요. 하지만 라벨라 알레르기가 있어서 빵을 함께 먹기는 어려울 거 같아요.”

“모르는 사이에 많은 변화가 생긴 모양이구나. 좋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거라. 이전에 못다 한 이야기를 마저 하자꾸나.”


알렉산드로스의 처우를 정한 캣니스가 눈빛을 보냈다.

눈빛을 받은 금등급 모험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해요. 부탁드릴게요. 브레드 님.”

“알겠네. 먼저 가서 앉아있겠나.”



*****



그들은 아이들을 자일리에게 맡기고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한가운데에 들어서고. 어색한 분위기로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브레드가 차 세트를 들고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동안 서로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자, 마시게.”


기나긴 기다림 끝에 브레드가 티 세트를 가져왔다.

두 사람은 그가 건넨 찻잔에 입술을 댔다.

향긋하면서도 신맛이 나는 차향에 미소를 지었다.

처음으로 그들 사이에 말문이 트였다.


“브레드 머슬릿이라고 했습니까? 차 끓이는 재주가 아주 훌륭하군요.”

“브레드 님은 차뿐만 아니라 요리도 잘해요. 베르길드의 식사를 책임질 정도의 실력자예요.”

“그렇더냐? 그렇다면 훨씬 더 중요한 사람인가 봅니다.”


브레드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제 역할을 끝낸 찻주전자를 정리한 뒤, 두 사람이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식당 문을 닫고 나갔다.

캣니스와 알렉산드로스는 한 번 더 찻잔을 기울였다.

한 사람이 나갔을 뿐인데. 대화 하나 없이 잔잔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내일이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알렉산드로스였다.

찻잔을 내려놓고 손깍지 끼며 이야기했다.


“우리는 내일 떠날 거다. 너도 함께해라 캣니스 센츄어리.”


제안이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

캣니스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미 예상했던 말이었기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미리 생각해두었던 말로 답변했다.


“저는 지금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이미 여신께서 새로운 열한 번째 날개를 지정했는데 굳이 지금 그 자리로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요?”


지금은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녀로서 드물게 강경하게 의사 표현했다.


“캣니스야. 교단은 지금 열한 번째의 자리가 필요하단다.”


그런데 알렉산드로스는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책임감을 부추기며 돌아오라고 설득했다.

끈질 긴건 캣니스 캣니스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설득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모순이세요. 여기 오기 전까지는 제가 살아있었는 줄도 몰랐잖아요.”

“그건 내가 그리한 거지 여신께서 원하신 바는 아니란다. 여신께서 결국 나를 네게 인도하였으니 그 목적을 이룬 거나 다름없다고 봐야겠지.”

“그 말 또한 어폐가 있어요. 신탁이 내려온다면 모를까 지금 돌아갈 생각은 없어요.”

“캣니스야. 아무리 그래도 너는 돌아와야 한단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지?”

“물론이에요. 그런데 지금 선생님은 제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요? 정말로 저와 이야기를 나눌 생각으로 찾아온 건가요?”


캣니스는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방을 쏘아봤다.

그러나 아무리 눈총을 보내도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저 찻잔을 들고 차를 마시며, 여유롭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몇 번이고 말했지만. 저는 정말로 지금은 돌아갈 생각이···”


캣니스가 단호하게 말하던 때였다.


“아무래도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시간이었나 보구나.”


벌컥.

갑작스레 식당 문이 열리고 아이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뒤늦게 달려온 자일리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식당 내부를 어지럽게 몰아치는 아이들을 바라봤다.


“놀아줘!”

“놀아줘요!”


캣니스는 얼굴을 굳히며 알렉산드로스를 돌아봤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미 나갈 준비를 끝마쳤다.


“이만 가도록 하마. 아니면 배웅해주겠느냐?”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외출을 제안한 사람이 그였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캣니스는 겨울용 망토를 뒤집어쓰고 그의 뒤를 따랐다.

거리에는 아직 녹지 않은 흰 눈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엄마! 아빠~”


눈사람을 만드는 사람들이 집 앞마다 붐볐다.

삽을 들고 길을 치우는 사람들도 많았다.

캣니스가 저택에 은거했으면 못 볼 뻔한 풍경이었다.

조용히 거리를 거닐며 눈에 담았다.


“옛날 일이 떠오르는구나. 너도 언젠가 눈사람을 만들고 싶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었지.”


돌연 알렉산드로스가 옛이야기를 꺼냈다.

아직 캣니스가 팔라딘이 아니었을 시절의 이야기였다.

당시에 나이가 여덟 살.

알렉산드로스의 말을 부모처럼 따랐으며 그가 하는 모든 명령에 순종하던 시절이었다.


“설마 너와 그렇게 헤어질 줄은 몰랐다.”

“그건 저도 그랬어요.”


그가 느낀 바는 캣니스도 마찬가지로 느꼈다.

여덟 살 때부터 그의 밑에서 교육받고 자랐다.

그러던 날에 돌연, 열한 살에 열한 번째 창으로 임명됐다.

당연히 어린 나이에 당황스러웠다.


“그때부터 서로 떨어져 지냈죠.”


그때부터 알렉산드로스와 떨어졌다.

서로의 임무가 비슷하면서도 다르기에 따로 행동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안 된 다음 해에는. 용사의 도움이 되기 위해 신전을 떠났다.


“이렇게 이야기하니 시간이 참 많이 지났구나. 그토록 작았던 아이가 이렇게나 컸으니.”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요. 선생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는 거 같지만요.”

“오, 그럴 리 있을까 캣니스야. 이래 봬도 예전과 다르게 많이 변했단다.”


앞을 보는 알렉산드로스의 얼굴에서 인자한 미소가 떠올랐다.

누가 보나 신실한 사제의 미소였다.


“세월의 흐름은 풍경뿐 아니라 사람의 많은 부분을 바꾸어 놓는단다. 한때 만개를 기다리던 민들레가 하얀 홀씨가 되어 바람에 흩날리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이 풍화되는 건 당연한 이치이지.”

“그런 말치고는 하나도 안 변한 거 같은데요. 제가 보기에는 옛날 모습 그대로예요.”

“그리 보인다니 고맙구나. 하지만 말이다. 너와 떨어져 있던 시간 동안 정말 많이 변했단다.


알렉산드로스는 길을 꺾어서 골목으로 들어섰다.

크나큰 길이 점점 좁아졌다.

골목 안으로 그가 걸어갔다.

빛이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정도로만 옅게 깔렸다.


“캣니스야. 적어도 옛날의 나였다면. 지금같이 정에 휩쓸리는 고민 따윈 하지 않았을 거란다.”


우뚝.

캣니스는 골목에 들어서는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점점 멀어지는 알렉산드로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얌전히 서 있었다.

그녀가 멈췄음에도 알렉산드로스의 걸음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그녀를 두고 빛의 경계선을 넘어갔다.


“마지막으로 묻겠다만 캣니스 센츄어리.”


그의 목소리가 막다른 길에서 울려 퍼졌다.

수많은 사제가 지붕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네 번째 칼이 자랑하는 별동대와 일찍이 안면을 텄던 벨라까지.

단 한 명도 다른 곳으로 시선 돌리지 않은 채, 알렉산드로스가 보고 있는 장소를 똑같이 주시하였다.


“아직 배교자가 아닌 자, 캣니스 센츄어리여. 그대는 책임을 버리고 도망치는 자인가.”


빛을 등진 모습으로, 마지막 기회라는 듯이 손을 뻗었다.

교단의 네 번째 칼이자 무자비한 이단심문관.

또 다른 이명인 처형자, 알렉산드로스 신부.

그가 자비를 베풀 듯이 말했다.

마지막 자비라고 말하는 그의 안경이 하얗게 빛을 반사하였다.


“만약 그러지 않다면 어서 이 손을 잡거라. 우리는 언제나 네 사랑을 믿을 터이니.”


믿는다는 말과 다르게 무기를 꺼냈다.

사형대에서 볼법한 거대한 기요틴과 성정이라 부르는 칠십 센티미터 높이의 은빛 말뚝이었다.

두 가지 모두 처형자를 상징하는 무기였다.

그는 땅에 성정을 박으며 거대한 기요틴을 등에 짊어졌다.


“오너라. 아직 너의 신앙이 여신의 곁에 있음을 증명하라.”


그러지 않다면 여신을 등지는 무리로 간주하겠다.

조금의 과장도 없는 진심에, 캣니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면 추천과 좋아요 잊지마세요-!


작가의말

급발진 대마왕(?) 알렉산드로스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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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77화 이안류 23.06.20 32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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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75화 재침공 23.06.13 33 0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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