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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가 내리는 녹슨 서고

리라이트 마이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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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테리즘
작품등록일 :
2020.05.11 14:16
최근연재일 :
2020.07.08 19:18
연재수 :
2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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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글자수 :
88,501

작성
20.07.02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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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1-5. 심령사진 (1)

DUMMY

엄마가 하늘나라로 떠난 뒤 소녀는 늘 혼자였다.


아빠는 소녀와 함께 놀아주기는커녕 얼굴조차 보기 힘들 정도로 바빴다.


소녀는 한동안 홀로 집에서 책을 읽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아이의 머리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난해한 책들만 남게 됐다.


심심함을 견디지 못한 소녀는 바깥으로 나가 가까운 공터에서 혼자 흙을 뒤집고 꽃을 구경했다.


어느 누구도 소녀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아직 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녀는 엄마가 정확히 어디로 갔고 언제 돌아올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혼자 놀고 있다 보면 언젠가 엄마가 먼발치에서 따뜻한 목소리로 마중을 나올 거라 굳게 믿은 소녀는 얌전히 흙을 뒤집고 꽃을 구경했다.


세월이 흘러 공터의 흙을 전부 갈아엎고 모든 꽃의 이름을 외워 더 이상 할 게 없어진 소녀에게 누군가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처음 보는 또래의 소년이었다.



소녀는 남자애들이란 자기들끼리 시끄럽게 공을 차고 뛰어다니다가 어디선가 벌레가 나타나면 그것에 정신이 팔려 이리저리 가지고 노는 존재라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소년은 매우 이질적인 아이였다.


소년은 공을 가지고 뛰어놀지 않았다.


늘 무언가를 관찰하고 그걸 사진으로 남기는 데에 열중했다.


처음 보는 유형의 인간에 흥미를 가지게 된 소녀는 이윽고 그와 친구가 되었다.



소녀와 소년은 작은 공터를 벗어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신기한 걸 전부 사진기에 담았다.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 볼 때마다 모습이 바뀌는 구름, 어른보다도 훨씬 큰 나무.


소년의 사진기엔 그들이 함께 보낸 많은 순간이 그대로 기록됐다.


소년이 부러웠던 소녀는 아빠에게 떼를 써서 작은 사진기를 하나 받았다.


점점 더 많은 곳을 둘러볼수록 소녀의 사진기에도 행복한 시간이 한 장, 한 장 차곡차곡 쌓여갔다.



소녀는 어느 날 절벽 위에 서 있었다.


왜 그곳으로 갔는지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내키는 대로 두 발을 놀리다보니 도착한 장소가 절벽이었을지도 모른다.


소녀는 렌즈가 없는 안경을 끼고 망토를 두른 소년을 바라봤다.


그 순간 소녀는 무언가를 따라하고 있었다.


소년은 소녀에게 맞춰주기 위해 익살스러운 행동을 했다.


웃음꽃이 피고 소년은 떨어졌다.


소녀는 추락하는 그를 하릴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소녀는 뒤늦게 손을 뻗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소년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절벽 밑에 선홍빛 꽃이 피었다.


사방으로 처음 보는 것들이 튀어나갔다.


소녀는 사람의 몸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그때서야 비로소 알게 됐다.


그럼에도 소녀는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는 곧 돌아오실 거야.


검은 옷을 입은 아빠의 목소리가 귓가를 오래도록 맴돌았다.



죽음이란 게 그런 거라면, 엄마처럼 언젠가 돌아오는 게 가능하다면 소년도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될 수 있을까?


소녀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기다리면 전부 해결될 거야.


엄마도, 소년도 분명 나의 곁으로 돌아와 함께 방긋 웃어줄 거야.


그렇게 소녀는 다시 혼자가 됐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낮이 되면 학교에 가서 흙을 뒤집고 꽃을 구경했다.


밤이 찾아오면 창문 밖으로 보이는 별들을 하나하나 셌다.



소녀는 저 수많은 별들 중 어딘가에서 엄마와 소년이 살고 있을 거라 믿었다.


깜깜한 밤하늘을 반짝반짝 빛내는 별들을 올려다보면 어디선가 엄마와 소년의 따뜻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별을 보고 또 봤지만 엄마와 소년은 돌아오지 않았다.


소녀는 이제 엄마와 소년이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는 걸 알게 됐지만 그럼에도 별을 바라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별을 올려다보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그 순간이 다시 떠오를까봐.



“그렇게 끝나면 참 좋을 거라 생각했겠지. 그치?”



안타깝게도 꿈이란 건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깨어나고 싶어 필사적으로 몸부림쳐도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가시덤불과도 같았다.


거세게 저항할수록 심장에 가시가 파고들어 생채기가 늘어갔다.


이미 동틀 녘이 다가온 거무스름한 하늘엔 더 이상 별이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금방이라도 귀를 막고 싶었으나 그 목소리는 밖에서 들리는 게 아니었다.


가슴 속에 자리 잡은 시커멓고도 시뻘건 무언가가 계속 말을 걸어왔다.



“내게서 눈을 돌리는 것도 모자라 이젠 날 버리려는 거야?”



소녀는 크게 울부짖었다.


눈물이 한 방울도 흘러내리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울고 싶었다.


울어야만 이 모든 것을 가슴 속에 묻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땅을 치며 울어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 얼굴은 더욱 선명해져갔다.


그와 함께 갈 곳을 잃은 비탄과 후회가 크게 용솟음쳤다.


또다시 생채기가 벌어져 그토록 보고 싶지 않았던 피가 다시 흘렀다.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미 늦었어. 넌 나를 결코 잊을 수 없을 거야.”



소년의 목소리는 얼음장과 같이 차가웠지만 그의 얼굴은 늘 고통스럽고 처연해보였다.


소년은 곧 언젠가 마주쳤던 거대한 괴물로 변모했다.


피부가 모두 벗겨진 그 괴물은 다시 소녀를 향해 펄쩍펄쩍 뛰며 양팔을 한껏 펼쳤다.


사방으로 피분수가 솟구쳤다.


소녀는 달리고 또 달렸다.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 같은 다리를 부여잡으며 절규했다.


그건 내 잘못이 아냐.


난 그때 너무 어렸어.


다시 돌아간다 해도 널 구할 순 없을 거야.



“구해줘, 세빈아. 너무 아파, 세빈아. 가지 마, 세빈아. 날 버리지 마, 세빈아.”



괴물의 중심에서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년이 끊임없이 애원했다.


소녀는 그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발을 멈추고 싶었으나 이상하게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곧 익숙한 절벽이 나타났고 괴물은 그 밑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산산이 부서지며 짧은 생을 마감했다.


사방에 수많은 살점과 핏덩이가 튀었다.


소녀는 수없이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자신은 너무나도 무력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



화장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굉장히 참혹했다.


지난주에 겪었던 무시무시한 사건 이후로 하루가 멀다 하고 악몽에 시달리는 데다 잦은 열대야까지 겹쳐 지속적으로 잠을 설친 결과였다.


세빈은 마치 멍이 든 것처럼 시커멓게 물든 눈 밑을 양손으로 쓰다듬듯 어루만지며 화장을 얼마나 진하게 해야 남의 눈에 안 띌 정도로 가려질 수 있을지 가늠해봤다.


그렇게라도 머리를 굴리지 않으면 조금 전까지 붙들려있었던 끔찍한 악몽이 다시 눈동자에 아로새겨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연의 제안을 받아들인 게 계기가 된 건지 늘 흐릿하기만 했던 그 소년의 얼굴이 그 날 밤부터 갈수록 더 또렷해져갔다.


그와 함께 무의식 너머로 묻어뒀던 옛 기억들이 나날이 방울방울 되살아나자 그만큼 가슴 한편이 답답하게 응어리지고 급기야는 울적해졌다.


처음에는 그믐달 결사에 가담한 게 어쩌면 핏빛으로 얼룩진 과거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터무니없는 오산에 불과했다.


인터넷을 통해 사건에 대한 자료들을 간단하게 검색할 수 있었음에도 막상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솟지 않았던 세빈은 결국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



아직 햇살이 산 너머로 고개를 빠끔 내밀기 시작한 이른 아침임에도 사방에서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더웠다.


어찌나 후텁지근한지 머리카락들이 땀으로 범벅이 된 목덜미에 찰싹 달라붙은 채 잔뜩 헝클어져있었다.


세빈은 불쾌지수가 이 이상 높아지는 건 아마 힘들지 않을까 생각하며 잠옷을 내팽개치고 곧장 샤워부스로 달려갔다.


가만히 서서 찬물을 뒤집어쓰고 있자니 문득 꿈에 나왔던 연분홍색 사진기가 떠올랐다.



소년과 자주 만나 어울렸던 시절 사진을 찍는 걸 취미로 삼았던 세빈은 그가 죽은 뒤 더 이상 사진기를 손에 들지 않았다.


사진기를 눈에 담을 때마다 활짝 웃는 그의 얼굴이 떠올라 일부러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치워뒀던 세빈은 몇 년 뒤 방을 청소하다가 사진기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 이후로도 사진기의 행방을 찾지 못한 그녀는 더 이상 소년에 대해 떠올리지 말라는 하늘의 계시라고 여기며 애써 잊고 살았다.


그렇게 소년은 세빈에게 온전한 추억이 아닌 조각난 그 시절의 파편으로 남아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는.



이제 소년의 얼굴을 똑똑히 떠올릴 수 있게 된 세빈은 입술을 달싹이며 그의 이름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그 소년의 얼굴을 또다시 흐르는 물에 흘려보낸 세빈은 식사를 마친 뒤 늘 그렇듯 아무도 없는 집을 나섰다.


지루하기 그지없는 보충수업이라도 모든 걸 잊어버린 채 전념할 수 있다면 그렇게 나쁘진 않을 거라 여긴 그녀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임에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거리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출근을 위해 한시바삐 오가는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세빈처럼 교복을 입은 학생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자신보다 키가 큰 사람들에 둘러싸여 정면조차 시야가 완전히 차단된 채 이리저리 휩쓸리던 세빈은 찰나의 순간 좁은 틈 사이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그곳에 있어서는 안 될 그 얼굴이 근처를 스쳐지나가자 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발걸음은 제멋대로 빨라졌다.



어느새 잰걸음으로 달음박질치기 시작한 세빈은 빽빽한 인파의 숲을 헤집고 꿋꿋이 두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의아함이 가득 담긴 사람들의 시선들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모여들었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쩌면 조금 닮은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장기간 켜켜이 쌓인 피로 때문에 아예 헛것을 본 것일지도 몰랐으나 그런 건 이제 와서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이 하얘지거나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때까지 쉼 없이 달리고 싶었다.


그래야만 사방팔방으로 요동치는 심장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어떤 장애물도 제대로 제동을 걸지 못한 세빈의 질주를 멈춰 세운 건 다름 아닌 신호등이었다.


정면에 보이는 선명한 빨간색 불빛에 시선을 빼앗긴 그녀는 줄곧 힘껏 달려온 기세가 무색하게도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붉은 점이 점점 커져 온 세상을 집어삼켰다.


세빈의 뇌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라며 수차례에 걸쳐 명령을 내리고 있었지만 정작 그녀의 몸은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폐가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아무리 애타게 산소를 갈구해도 호흡을 따라갈 수 없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다 못해 폭발할 것 같이 부풀었다.


모든 것이 빨갛고 끈적거리고 비릿하게 엉겨 붙은 채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영겁과도 같은 그 순간이 갑작스레 끝을 고한 건 누군가가 세빈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친 뒤였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어느새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뀐 걸 알아채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쉽사리 분간할 수 없는 차가운 음성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살인마 주제에 감히 살인마를 쫓겠다고 나서다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작가의말

Tip) 꿈은 100퍼센트 진실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기억은 언제나 시간이 흐르면 왜곡되기 마련이죠.


p.s. 분량을 채워 일반연재로 승격됐습니다. 와! 자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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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4. 그믐달 결사 (6) +4 20.06.29 17 2 21쪽
17 1-4. 그믐달 결사 (5) +4 20.06.22 20 2 8쪽
16 1-4. 그믐달 결사 (4) +8 20.06.14 27 4 8쪽
15 1-4. 그믐달 결사 (3) +10 20.06.12 29 4 13쪽
14 1-4. 그믐달 결사 (2) +16 20.06.08 33 8 7쪽
13 1-4. 그믐달 결사 (1) +14 20.06.06 31 6 8쪽
12 1-3. 사자의 심장 (5) +14 20.06.04 33 7 16쪽
11 1-3. 사자의 심장 (4) +6 20.06.02 26 3 11쪽
10 1-3. 사자의 심장 (3) +4 20.05.31 26 2 9쪽
9 1-3. 사자의 심장 (2) +2 20.05.29 19 1 8쪽
8 1-3. 사자의 심장 (1) +4 20.05.27 27 3 8쪽
7 1-2. 흑과 은 (3) +8 20.05.24 28 2 11쪽
6 1-2. 흑과 은 (2) +6 20.05.22 29 2 9쪽
5 1-2. 흑과 은 (1) 20.05.19 31 1 9쪽
4 1-1. 녹슨 화원 (3) +2 20.05.16 35 2 10쪽
3 1-1. 녹슨 화원 (2) 20.05.14 51 1 8쪽
2 1-1. 녹슨 화원 (1) +16 20.05.12 63 4 10쪽
1 Prelude. 세빈 +10 20.05.11 126 13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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