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미리내가 내리는 녹슨 서고

리라이트 마이 스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공포·미스테리

아스테리즘
작품등록일 :
2020.05.11 14:16
최근연재일 :
2020.07.08 19:18
연재수 :
20 회
조회수 :
707
추천수 :
71
글자수 :
88,501

작성
20.05.24 17:39
조회
28
추천
2
글자
11쪽

1-2. 흑과 은 (3)

DUMMY

모처럼의 꿀맛 같던 주말은 그야말로 쏜살같이 지나가버렸다.


오랜만에 관측소를 개방해 목표로 삼은 전갈자리의 안타레스를 무사히 관측할 수 있었던 세빈은 그 한순간의 강렬한 잔상을 위안으로 삼아 다시금 맞이하는 지루한 학교생활을 버텨내기로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번 주가 지나면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여름방학이 찾아온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는지 교실은 지난 주 이상으로 떠들썩하고 활기가 넘쳤다.



아직까지 속 시원히 해결되지 않은 살인사건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여전히 화두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었다.


저번 주와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지난 주말에 도시 외곽에서 발견된 붉은 말뚝에 대한 이야기가 틈새시장을 효과적으로 파고들었다는 점을 들 수 있었다.


웬만한 성인 남성의 키에 비견될 만큼 거대하다는 얘기까지 돌고 있는 그 말뚝은 그 존재만으로도 아이들의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큰 말뚝을 누가 꽂아놨대?”


“그게 말이야, 아무도 모른대. 진짜 이상하지 않아? 산속이나 시골도 아니고 교외 한복판에 사람만한 말뚝이 세워졌는데 그 광경을 아무도 못 봤다는 게 말이 돼?”


“분명 근처에 뒤져보면 목격하고도 모른 척하고 있는 사람들 줄줄이 나오겠지.”


“근데 더 이상한 게 뭔지 알아? 지금까지 수십 명 이상이 그 말뚝을 빼내려고 달려들었는데 아무도 못 뽑았대. 심지어 힘센 사람 몇 명이 한꺼번에 붙었는데 흔들지도 못했다는 얘기까지 들리더라.”


“에이, 말도 안 돼. 밑에다가 무슨 천년 묵은 뱀파이어라도 봉인시켜놨나.”


“너 시험 끝났다고 만화 너무 많이 본 거 아니냐? 주말 벌써 다 갔으니 슬슬 현실세계로 돌아와라.”



교실 뒤쪽에서 신나게 떠드는 저 애들은 똑같은 주제를 가지고 이틀 연속 쑥덕거려도 전혀 안 지겨운 모양이었다.


어딘지도 모를 곳에 꽂힌 말뚝 같은 것에 대해 전혀 알고 싶지 않았던 세빈은 차라리 예전처럼 연예인에 대한 자질구레하고 시답잖은 가십거리가 오가는 게 더 나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런 소식들은 하등 쓸데없을지언정 최소한 음침한 분위기를 조성하진 않았으니까.



그렇게 수 시간 동안 살인사건과 말뚝에 대해 시시콜콜한 자투리 정보들까지 모조리 훑고 난 뒤에야 다소 소란이 잦아들었다.


이윽고 하교시간이 다가왔으나 대부분의 아이들과는 달리 세빈은 학교 담장을 벗어날 수 없었다.


여름방학기간 동안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학교에 와서 수강해야 할 보충수업의 오리엔테이션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모든 과목을 낙제점 없이 통과해 보충 대상자에 해당하지 않는 지안을 먼저 보낸 세빈은 오리엔테이션 내내 우울한 기분을 견디기 힘들었다.


아무리 중간, 기말 모두 시험을 망쳐서 내몰리게 된 자업자득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라지만 가뜩이나 지루하기 짝이 없는 한국사 수업을 방학 내내 들을 생각을 하니 그저 끔찍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세빈은 이럴 줄 알았으면 기말고사 때만이라도 한국사 공부를 더 열심히 할 걸 그랬다는 후회를 뒤늦게 하면서 교과서 구석에 조그맣게 낙서를 했다 지우길 반복했다.



보충 대상자라면 필수적으로 거쳐야하는 담임선생님과의 개인면담까지 모두 마치고나니 어느덧 어스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세빈은 홀로 새빨간 노을의 단말마 속에서 기나긴 그림자를 흩뿌린 채 좌우를 연신 두리번거리며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학교를 나섬과 동시에 해가 지고 땅거미가 내려앉자 좀 전까지의 무더위는 온데간데없이 으슬으슬한 한기가 감돌았다.


이렇게 늦게 하교하게 될 거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해 겉옷을 따로 챙겨오지 않았던 세빈은 급격히 차가워진 대기에 맨살이 직접 맞닿아 오들오들 떨리는 팔뚝과 종아리를 당장이라도 모포로 감싸고 싶었다.


평상시에는 그다지 의식할 일이 없었던 집까지의 거리가 유독 오늘따라 무척 멀게 느껴졌다.



물에 흠뻑 젖은 생쥐처럼 오들오들 떨며 사거리에 들어선 세빈은 어느새 희뿌연 짙은 안개가 사방팔방을 빈틈없이 뒤덮었다는 걸 발견했다.


본디 바다가 그리 멀지 않은 도시인지라 옅은 안개가 끼는 일 정도는 간혹 있었지만 한 치 앞이 들여다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한 안개는 난생 처음 겪는 현상이었다.


당황한 세빈은 양팔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축축한 안개를 헤치고 간간히 눈에 띄는 가게의 휘황찬란한 간판들을 표지삼아 경로를 헤아렸다.



가까스로 길을 찾아 주택가에 접어들자 안개가 점차 조금씩 잦아드는 기색이 느껴졌다.


세빈은 내심 안도하며 전방에 살짝 드러난 노란 보도블록을 따라 아무도 없는 인도 위를 천천히 나아갔다.


그렇게 한참 동안 걸어가던 세빈은 문득 이상한 낌새를 느껴 귀를 쫑긋 곤두세웠다.


지면과 맞닿을 때마다 귓가까지 울리는 그녀의 규칙적인 구둣발소리 위로 어딘가 이질적인 메아리가 옅게 덧입혀지고 있었다.



가뜩이나 시야의 제약 때문에 방향감각이 평소보다 저하된 악천후 속인지라 무슨 소리인지는커녕 어디서 그 소리가 들려오는지조차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조심스레 한 발을 내딛을 때마다 무언가가 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것만은 자못 분명해보였다.


서서히 엄습해오며 어깨를 짓누르는 공포감에 된통 겁을 집어먹은 세빈은 저도 모르게 차츰 걸음걸이의 속도를 올렸다.



세빈이 잰걸음으로 길을 재촉하자 뒤따르는 소리 역시 그에 발맞춰 점차 빨라지고 동시에 또렷해졌다.


세빈은 비로소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혼신의 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이번에야말로 잡히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쉬지 않고 전력으로 질주하다보니 금세 호흡이 목젖까지 차올랐지만 가쁜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가했다.



구두를 신고 힘껏 달리다보니 발바닥에 시큰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필 체육수업이 없는 날이라 운동화를 가져오지 않은 게 설마 화근이 될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세빈은 속절없이 지쳐갈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누가 자신을 따라오는지 궁금해져 살짝 뒤를 곁눈질한 그녀는 겹겹이 에워싼 안개에 가린 거대한 형체의 허리춤에 매달려 창백한 예기를 머금은 채 반짝이는 물체를 발견했다.


비교적 작고 예리한 흉기, 예를 들면 접이식 커터칼 같은 날붙이가 틀림없어보였다.



아찔해진 세빈은 더 이상은 무리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죽기 살기로 달렸으나 뒤쫓는 추격자를 따돌리진 못했다.


도리어 한껏 예민해진 목덜미에 낯선 숨소리와 함께 뜨거운 입김이 느껴지자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며 뉴스에서 봤던 모자이크 처리된 살인사건 피해자의 시신이 뇌리를 스쳤다.


자신도 곧 그렇게 되리란 끔찍한 상상이 머릿속을 잠식해버리자 맥이 탁 풀린 세빈은 눈앞이 흐려지는 걸 느끼며 비틀거렸다.



금방이라도 등 뒤에서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허공을 가르고 튀어나올 것만 같은 순간, 힘 빠진 다리에서 경련이 일어나 앞쪽으로 푹 고꾸라지는 세빈을 무언가가 옆에서 홱 잡아끌었다.


세빈은 너무나 갑작스레 일어난 일에 깜짝 놀라 그만 헛숨을 삼킨 탓에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곧이어 누군가의 손이 자신의 입을 거세게 틀어막은 걸 깨달은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쉿!”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목소리에 그만 기절할 뻔했던 세빈은 가까스로 의식의 끈을 붙든 채 시키는 대로 숨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좀 전까지 그녀가 있었던 지점으로 맹렬하게 달려오던 키가 매우 큰 남자가 도중에 갑자기 멈춰 섰다.


머리에 벙거지를 깊게 눌러써 얼굴의 윗부분이 아예 드러나지 않은 그 수상한 남자는 한참 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이윽고 짧게 혀를 찬 후 안개 너머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가 완전히 그곳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참았던 숨을 내뱉는 게 허락된 세빈은 연신 마른기침을 하며 호흡을 골랐다.



극심한 긴장감이 한순간에 해소되어버린 게 지칠 대로 지친 몸의 상태와 결부되어 몇 번이고 헛구역질이 밀려나왔다.


근처 전봇대에 기댄 채 천천히 심호흡을 하여 간신히 길거리에서 토하는 최악의 사태만큼은 면한 세빈은 그제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준 은인이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녀는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그 자세 그대로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희미한 초저녁의 달빛 아래로 끝이 보이지 않는 은빛 실타래가 가지런히 물결치며 광채를 고스란히 머금고 있었다.


형형색색으로 반짝여 얼핏 보면 은색으로 착각할 법한 묘한 매력을 지닌 백발을 포니테일로 길게 묶은 까무잡잡한 피부의 여자가 그 자리에 홀로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한 폭의 수채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고 느낀 세빈은 입에서 경외감 섞인 탄성이 새어나오는 걸 막지 못했다.


그녀가 자신을 쳐다본 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여자는 내심 답답함을 느껴 먼저 침묵을 깼다.



“밤길은 위급, 아니 위험하다. 조심하는 게 좋아.”



외국인인지 다소 어눌한 말투로 세빈에게 경고의 뜻을 전한 여자는 그대로 어디론가 향했다.


귓가를 간지럽힌 나지막한 목소리에 비로소 화들짝 정신이 든 세빈은 다급히 여자를 불러 세웠다.



“잠시만요!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 꼭 기억할게요. 따로 제가 보답해드릴 건...”



물끄러미 뒤를 돌아본 여자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필수, 아니 필요 없다. 보답 바라고 한 일 아니야.”


“그, 그럼! 혹시 성함만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세빈은 얘기를 꺼내고 난 뒤 아차 싶어 머뭇거렸다.


다짜고짜 이름을 알려달라는 건 실례가 될 지도 모르는데 너무 주제넘은 행동을 해버렸나 하고 반성하던 찰나에 여자는 의외로 순순히 입을 열었다.



“넬리.”



마치 타인의 이름을 입에 담듯 무덤덤하게 자신을 소개한 여자는 다시 등을 돌려 발소리도 없이 조용히 걸어갔다.



“성은 없어. 소아, 아니 고아라서 말이지.”



넬리는 그 말만을 남긴 채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안개 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다시 혼자가 된 세빈은 오래도록 그녀가 자취를 감춘 골목 쪽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Ch 1-2. [흑과 은] - 完


작가의말

Tip) 선일시 외곽에서 발견된 말뚝의 길이는 드러난 부분만 1m 70cm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8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리라이트 마이 스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처가 결정됐습니다 21.07.05 9 0 -
공지 앞으로 문피아에서는 일절 연재하지 않겠습니다 20.08.20 19 0 -
20 1-5. 심령사진 (2) +4 20.07.08 22 2 9쪽
19 1-5. 심령사진 (1) +4 20.07.02 22 2 11쪽
18 1-4. 그믐달 결사 (6) +4 20.06.29 17 2 21쪽
17 1-4. 그믐달 결사 (5) +4 20.06.22 20 2 8쪽
16 1-4. 그믐달 결사 (4) +8 20.06.14 27 4 8쪽
15 1-4. 그믐달 결사 (3) +10 20.06.12 29 4 13쪽
14 1-4. 그믐달 결사 (2) +16 20.06.08 35 8 7쪽
13 1-4. 그믐달 결사 (1) +14 20.06.06 32 6 8쪽
12 1-3. 사자의 심장 (5) +14 20.06.04 33 7 16쪽
11 1-3. 사자의 심장 (4) +6 20.06.02 26 3 11쪽
10 1-3. 사자의 심장 (3) +4 20.05.31 28 2 9쪽
9 1-3. 사자의 심장 (2) +2 20.05.29 20 1 8쪽
8 1-3. 사자의 심장 (1) +4 20.05.27 27 3 8쪽
» 1-2. 흑과 은 (3) +8 20.05.24 29 2 11쪽
6 1-2. 흑과 은 (2) +6 20.05.22 31 2 9쪽
5 1-2. 흑과 은 (1) 20.05.19 31 1 9쪽
4 1-1. 녹슨 화원 (3) +2 20.05.16 35 2 10쪽
3 1-1. 녹슨 화원 (2) 20.05.14 52 1 8쪽
2 1-1. 녹슨 화원 (1) +16 20.05.12 64 4 10쪽
1 Prelude. 세빈 +10 20.05.11 127 13 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