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미리내가 내리는 녹슨 서고

리라이트 마이 스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공포·미스테리

아스테리즘
작품등록일 :
2020.05.11 14:16
최근연재일 :
2020.07.08 19:18
연재수 :
20 회
조회수 :
694
추천수 :
71
글자수 :
88,501

작성
20.06.06 23:02
조회
30
추천
6
글자
8쪽

1-4. 그믐달 결사 (1)

DUMMY

“에... 고구려의 중앙교육기관은 태학이라고 하며 4세기 말 소수림왕 때 건립됐다. 태학은 기록상 우리나라 최초의 교육기관으로 귀족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했고 유학과 무예 등을 가르쳤지. 율령 반포와 함께 왕권 강화를 위한 초석을 다졌다는 의미를 지니며...”



그토록 찾아오지 않길 바랐던 보충수업의 첫날이 결국 다가왔지만 생각보다는 버틸 만했다.


한 학년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해도 낙제점을 받은 사람이라곤 기껏해야 과목당 열댓 명 정도에 불과해 교실은 방학 이전과 달리 텅텅 비어있었다.


게다가 여러 반의 학생들이 모인 만큼 서로 모르는 사이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자연스레 보충수업 동안은 하품 나오게 만드는 선생님의 강의 외엔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세빈은 이 잔잔한 분위기가 여간 마음에 드는 게 아니었다.


어딜 가든 사람 몇 명만 모이면 예의 살인사건과 말뚝들에 대한 얘기만 지겹도록 들려오는 게 어느덧 당연한 일이 된 상황이었기에 더더욱 이러한 안식과도 같은 시간이 귀중하게 느껴졌다.


비록 재미없기 짝이 없는 한국사 수업을 억지로 귀담아들어야하는 건 상당히 고통스러웠지만 이제 1시간만 더 버티면 지안과 즐거운 점심식사를 가질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손에 든 볼펜을 이리저리 돌리며 중요한 사항 몇 가지를 그대로 받아 적길 반복하다보니 기다리던 해방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빈은 한껏 기지개를 켜며 찌뿌드드한 몸을 이리저리 비튼 뒤 지안과 만나기로 약속한 식당으로 향했다.


방학 이전과 달리 한산한 식당에 들어서니 듬성듬성 앉아있는 학생들 사이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보충수업 받느라 고생 많았어.”


“응.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지루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네.”



세빈은 지안의 옆에 앉은 뒤 들고 온 도시락의 뚜껑을 열었다.


지안과 나눠먹기로 약속한 만큼 평소처럼 샌드위치 하나만 싸올 순 없었기에 모처럼 이른 아침부터 분발해서 제대로 된 도시락을 만든 세빈은 내심 열렬한 반응을 기대하며 옆쪽으로 도시락 통을 슬쩍 밀었다.


그러면서 슬쩍 옆으로 눈동자를 굴린 그녀는 지안의 도시락 역시 자신이 만든 것 못지않게 굉장한 진수성찬이라는 걸 발견한 뒤에야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으음... 양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이거 우리 둘이서 다 먹을 수 있을까?”


“아마 힘들지 않을까? 이거 어떡하지... 참, 아까 전에 보니까 나연이는 도시락 안 싸왔던데. 어때? 걔라도 불러서 같이 먹을래?”



세빈의 표정이 한순간 살짝 어두워졌지만 이윽고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네. 한여름이니 집에 다시 싸갈 수도 없고... 이 많은 걸 아깝게 버리는 것보단 그게 낫겠지.”


“응. 그럼 바로 오라고 할게. 아직 매점에 뭐 사러 가기 전일 테니 금방 올 거야.”



지안의 말마따나 몇 분 지나지 않아 식당에 들어선 나연이 이쪽을 보고 생글생글 웃으며 곧바로 합류했다.


그녀는 세빈이 우려했던 대로 자리에 앉자마자 요란법석을 떨기 시작했다.



“와, 진짜 맛있어 보인다. 오늘 무슨 특별한 날이야? 둘 다 도시락 엄청 화려하게 싸왔네. 아아, 급식 안 나오니까 나도 원래는 도시락 싸오려 했는데 그만 늦잠을 자버렸지 뭐야. 솔직히 학교 매점에 돈 쓰긴 조금 아까웠는데 이렇게 진수성찬을 얻어먹게 되다니. 오늘은 운이 꽤 좋은 것 같네. 정말 고마워.”



세빈은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나연의 가공할 입담에 마음속으로 경의를 표했다.


자신이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결코 저런 식으로 떠들 순 없을 거라고 여긴 세빈은 말없이 멸치볶음을 집어 입안에 넣었다.


그러고 보니 용케 지치지도 않고 수다를 떨고 있는 나연은 보충수업이 끝난 직후라 그런지 처음 만났을 때 봤던 헌팅캡을 쓰지 않은 상태였다.


모자 하나만 안 썼을 뿐인데 저렇게 인상이 달라 보일 수도 있구나 하고 느낀 세빈은 젓가락을 깨작이면서 지안과 나연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몇 주 전만 해도 마냥 장난기만 가득해보였던 나연은 찬찬히 뜯어다보니 의외로 제법 귀엽고 예쁘장한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살짝 옆으로 틀어 묶은 포니테일이 마주보는 이들의 시선을 강탈하고 있었으나 막상 그녀의 뚜렷한 이목구비를 비롯한 수려한 외모를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진 않았다.


만약 저 끊임없이 나불거리는 입술을 목격하기 전이었다면 세빈도 필시 나연을 안경 쓴 귀여운 미소녀 정도로 인식했을 게 틀림없었다.



“세빈아? 저기요, 윤세빈 씨? 듣고 있는 거야?”



상념에 잠겨있던 세빈은 문득 나연이 자신을 부르며 코앞에서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 무안함에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응? 아, 미안해. 안 듣고 있었어.”


“너무하네. 식사할 땐 주변 사람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게 상식 아니었어?”


“난 그런 얘기 처음 들어보는데...”


“아, 됐네요! 난 널 밥 먹을 때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친구 정돈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만 그랬던 거야? 우리 사이는 겨우 이 정도뿐이었어?”



세빈은 심통을 부리면서도 다정하게 자신의 손을 맞잡는 나연을 보며 당장이라도 손을 뿌리치고 싶은 걸 꾹 참고 퉁명스럽게 자신이 느낀 점을 고스란히 얘기했다.



“이제 두 번 봤을 뿐인 이름 정돈 아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뭐어? 지안아, 얘 원래 이렇게 쌀쌀맞은 애니? 방금 굉장히 마음에 상처가 되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내 착각은 아니지?”



울상을 짓는 나연을 본 지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하아... 내가 그래서 아까 메신저로 세빈이한테 필요 이상으로 들러붙지 말라고 했었잖아. 도시락 얻어먹는 자리에서까지 폐를 끼치면 되겠어?”


“그래도! 이런 자리를 계기로 사이가 더 돈독해질 수도 있는 거잖아? 난 세빈이랑 친해지고 싶다구.”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제발 자중 좀 해. 제일 친한 친구 두 명이 서로 소원해지는 광경만큼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지안의 의중과는 달리 나연은 그녀의 말에 감동받았는지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며 환희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얘기해주는 건 역시 지안이 너밖에 없어! 지안이가 공인한 베프 사이라! 지금까지 너랑 오래도록 소꿉친구로 살아온 보람이 느껴지네.”


“그래. 알겠으니까 세빈이한테는 제발 이런 식으로 대하지 마. 사랑하는 소꿉친구야.”



지안은 한낮임에도 찐득하게 달라붙는 나연이를 애써 밀어낸 뒤 구겨진 치마를 정리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세빈은 좀 전에 살짝 불쾌함을 느꼈던 게 무색하게도 느닷없이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얼핏 보기엔 사뭇 다른 모습을 지닌 두 사람이었지만 지안과 나연의 사이에선 성격과 기품의 커다란 차이로도 결코 가릴 수 없는 깊은 우정이 엿보였다.



애써 웃음을 참던 세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두 사람의 사이를 부러워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혼란에 빠졌다.


친구를 사귀는 데에 저항감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내심으론 저런 관계를 맺는 걸 은근히 원했던 걸까?


작가의말

Tip) 지안과 나연은 여섯 살 때부터 알고 지낸 오랜 소꿉친구 사이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리라이트 마이 스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처가 결정됐습니다 21.07.05 6 0 -
공지 앞으로 문피아에서는 일절 연재하지 않겠습니다 20.08.20 19 0 -
20 1-5. 심령사진 (2) +4 20.07.08 22 2 9쪽
19 1-5. 심령사진 (1) +4 20.07.02 21 2 11쪽
18 1-4. 그믐달 결사 (6) +4 20.06.29 17 2 21쪽
17 1-4. 그믐달 결사 (5) +4 20.06.22 20 2 8쪽
16 1-4. 그믐달 결사 (4) +8 20.06.14 27 4 8쪽
15 1-4. 그믐달 결사 (3) +10 20.06.12 29 4 13쪽
14 1-4. 그믐달 결사 (2) +16 20.06.08 33 8 7쪽
» 1-4. 그믐달 결사 (1) +14 20.06.06 31 6 8쪽
12 1-3. 사자의 심장 (5) +14 20.06.04 33 7 16쪽
11 1-3. 사자의 심장 (4) +6 20.06.02 26 3 11쪽
10 1-3. 사자의 심장 (3) +4 20.05.31 26 2 9쪽
9 1-3. 사자의 심장 (2) +2 20.05.29 19 1 8쪽
8 1-3. 사자의 심장 (1) +4 20.05.27 27 3 8쪽
7 1-2. 흑과 은 (3) +8 20.05.24 28 2 11쪽
6 1-2. 흑과 은 (2) +6 20.05.22 29 2 9쪽
5 1-2. 흑과 은 (1) 20.05.19 31 1 9쪽
4 1-1. 녹슨 화원 (3) +2 20.05.16 35 2 10쪽
3 1-1. 녹슨 화원 (2) 20.05.14 51 1 8쪽
2 1-1. 녹슨 화원 (1) +16 20.05.12 63 4 10쪽
1 Prelude. 세빈 +10 20.05.11 126 13 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