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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가 내리는 녹슨 서고

리라이트 마이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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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테리즘
작품등록일 :
2020.05.11 14:16
최근연재일 :
2020.07.08 19:18
연재수 :
20 회
조회수 :
710
추천수 :
71
글자수 :
88,501

작성
20.06.22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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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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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8쪽

1-4. 그믐달 결사 (5)

DUMMY

신문부의 동아리방을 겸하는 제2미술실은 본관의 가장 위쪽인 4층에서도 제일 구석진 곳에 위치해있었다.


나연을 따라 당도한 미술실로 이어지는 복도엔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그린 갖가지 작품들이 줄지어 붙어있었다.


무질서한 총천연색의 향연 사이로 유독 선명한 빨간색을 사용한 몇몇 작품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그쪽을 잠시 응시한 것만으로도 속이 불편해진 세빈은 과연 자신이 앞으로 계속될 이런 상황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불안해졌다.



넓은 공간 속에 수많은 화판과 그림들이 가득 놓인 제1미술실과 달리 비교적 좁지만 잘 정리된 제2미술실에는 기다란 디귿자 모양의 탁상과 화이트보드가 배치되어있었다.


작은 창문을 비집고 들어온 오후의 비스듬한 햇살이 높은 책장 위에 쌓인 먼지투성이의 종이더미를 살포시 감쌌다.


책장 옆에는 이 방에서 유일하게 새것으로 보이는 복합형 인쇄기가 대조적으로 번쩍번쩍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가장 먼저 들어온 나연이 반대편으로 가서 앉자 자연스레 입구 쪽에 착석하게 된 세빈은 책장 옆의 벽면을 가득 메운 각양각색의 그림들을 슥 훑어봤다.


복도에 붙은 그림들과는 달리 예술에 문외한인 세빈이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화려한 기교가 듬뿍 덧칠된 아름다운 작품들이 대다수였다.


아직 어둡지 않아 형광등을 키지 않은 터라 작품의 태반이 옅은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게 상당히 아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자. 신문부 동아리방에 온 걸 환영해. 조금 비좁긴 하지만 분위기는 괜찮지? 그럼 기념비적인 첫 번째 회의를 주최하기에 앞서 먼저 몇 가지를 정해두도록 할까?”



마치 고향 땅을 밟은 듯 어깨에 힘이 들어간 나연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전에 궁금한 게 생긴 세빈은 나연이 화이트보드 앞에 당도하기 전에 먼저 손을 들어 그녀의 발을 묶었다.



“어? 뭐 물어볼 거 있어?”


“정말 우리 셋이서만 하는 거야? 다른 부원은 없어?”


“아, 그거 말이구나. 응. 없어. 오로지 우리 셋뿐이야.”


“어째서? 애초에 나한테까지 와서 매달려야 할 정도로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하면 너희 동아리 부원들을 부르면 되잖아.”



세빈이 제기한 회심의 항변에도 나연은 눈썹 하나 까딱 하지 않은 채 청산유수처럼 되받아쳤다.



“너야 정말로 필요했으니까 그랬던 거고. 세빈이 넌 잘 모르겠지만 우리 부원들은 방학 때도 순 바쁜 사람들뿐이라서 말이야. 같은 동아리에 소속되어있는 동료이지만 그와 동시에 신문의 지면을 두고 경쟁하는 라이벌이기도 하거든. 그런 사이니 따로 뒷돈이라도 찔러주는 게 아니라면 굳이 나한테 협력해줄 이유가 없는 거지. 그냥 바쁘다는 핑계 하나면 충분하잖아? 거기다 다들 자기 기사 챙기느라 여념이 없을 테니까 실제로도 도와줄 여유 같은 건 없을 거고.”



이번엔 달리 트집을 잡을 구석을 찾지 못한 세빈은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연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얘기를 재개했다.



“그리고 사실 이번엔 나도 동아리 선후배들과 동기들의 조력을 받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힘만으로 프로젝트를 완수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말이야. 마침 잘됐다고 생각해.”


“참나. 그럼 여기 앉아있는 나랑 지안이는 뭔데?”


“에이, 친구들의 도움을 받는 건 내 인맥의 힘이잖아. 그 정도쯤은 눈감아달라구. 정 원한다면 도움을 주신 분들을 기재하는 란에 따로 네 이름을 큼지막하게 박아줄 수도 있는데?”


“아니, 전혀 필요 없어. 아예 그냥 내 이름은 올리지 마. 난 그냥 이대로 주목받지 않고 평범하게 지내다가 졸업하고 싶으니까.”



나연은 세빈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거란 건 이미 예상했지만 그 이유가 예측을 아득히 뛰어넘자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우와. 아무리 봐도 평범함과는 담을 쌓은 것 같은 애가 그런 얘길 하니 정말 낯설게 들린다. 애초에 일반적인 여자애라면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얘기하진 않을 것 같은데?”


“왜, 뭐 어때서. 꼭 남들과 완전히 똑같이 말하고 행동해야만 평범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잖아. 난 그저 적당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남들 눈에 안 띄게 묻어가고 싶을 뿐이야. 그게 뭐가 나쁜데?”


“아냐. 나쁠 리가 있겠어? 난 네 가치관을 존중해. 단지 네가 평범함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게 좀 신기해서 말이야. 만약 정말로 그 신조를 지키고 싶었다면 무슨 얘길 듣더라도 이 프로젝트엔 참가하지 말았어야 하는 거 아냐? 이 모임에 들어온 이상 평범하게 방학을 보내긴 이미 글렀다고 생각하는데.”


“무슨 낯으로 그런 얘길 하냐. 지가 끌어들인 주제에. 그래, 매몰차게 거절 못한 내가 문제다. 에휴, 어쩌다가 이런 허황된 부탁을 받아들여서 스스로 안온한 여름방학이라는 모처럼의 행복을 걷어 차버린 건지.”



나연은 세빈이 한껏 비아냥거리며 잔뜩 삐진 표정을 짓자 이대로 흘러가면 모임의 운명이 위태로워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기껏 애써 붙잡은 인재를 허망하게 잃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세빈을 열심히 달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미안해. 그렇지. 내가 하면 안 될 말이었지. 좋아. 금요일까지 정말 열심히 준비해서 결코 네 입에서 프로젝트에 괜히 참가했다는 얘기가 안 나오도록 최대한 노력해볼게. 그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자. 모이는 날짜 말인데, 어차피 일주일에 두 번씩 보충수업 때문에 학교에 나와야 하니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로 하자. 이건 이의 없지?”



세빈과 지안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연은 씩 웃으면서 화이트보드에 확정된 요일을 기록했다.



“오케이. 화요일과 금요일... 자, 다음은 이 프로젝트의 팀장을 정할 차례인데. 이건 그냥 내가 할게. 둘 다 팀장은 내키지 않을 거 아냐.”


“응. 난 팀장 같은 거 할 재목은 아닌 것 같아. 추리에 자신도 없고.”


“솔직히 누가 하든 상관없지만 내가 하긴 싫으니 찬성.”



나연은 살짝 자신 없는 흐릿한 미소를 머금은 지안과 누가 봐도 심드렁해 보이는 표정으로 일관하는 세빈을 번갈아봤다.


두 소녀 사이에서 극명한 온도차를 느낀 나연은 어쩐지 굉장히 재미있는 모임이 될 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팀장은 최나연... 이번엔 이 모임의 이름을 정할 건데, 어떤 게 좋다고 생각해?”


“그런 것까지 정하려고? 그냥 신문부 여름방학 모임 같은 걸로 하면 안 되는 거야?”


“그건 너무 멋이 없어 보이잖아. 그래도 나름 희대의 연쇄살인범의 꼬리를 잡기 위해 이렇게 모인 건데 후대에 길이길이 남을 멋들어진 명칭 하나 정돈 붙여줘야 하지 않겠어?”



그동안 억눌러왔던 명예욕이 솟구쳐 올라 한껏 상기된 나연과는 달리 그런 하잘 것 없는 짓에 머리를 쓰고 싶지 않았던 세빈은 노골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아... 진짜 귀찮은 성격이네. 네 말마따나 그렇게 범인 잡아서 법정에 세우고 싶으면 그 방법을 강구하는 일에나 몰두할 것이지, 겨우 모임 이름 짓는 게 그렇게 중요해?”


“겨우라니! 모임의 이름을 정하는 것도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라구. 구성원들의 사기와 직결되니까.”


“사기는 무슨... 난 어떤 이름이든 전혀 신경 안 쓰이니까 그냥 네가 정해.”



나연은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화이트보드에다 몇 개의 이름을 술술 적어 내려갔다.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반쯤 감긴 눈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세빈은 나연이 마커펜의 뚜껑을 닫는 즉시 손을 들었다.



“셜록 홈즈의 후예들은 각하.”


“왜? 셜록 홈즈 멋있잖아? 거기다 탐정 하면 보통 홈즈를 연상하기도 하고.”


“너무 길잖아. 다른 이유가 필요해?”


“으으... 분하지만 반론할 수가 없네. 확실히 매번 저 이름으로 부르긴 힘들겠다.”



나연은 아쉬운 듯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마지못해 후보군 중 하나를 지우개로 지웠다.


남은 후보들을 둘러보던 세빈은 그 중 무슨 의미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명칭을 발견하고 그쪽을 가리켰다.


작가의말

Tip) 세빈은 빨간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좋아하는 색은 검은색과 흰색입니다.


p.s. 무려 8일이나 잠수를 타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래 쉬었으면서 겨우 이거밖에 못 올려서 더욱 죄송합니다. 원래는 그믐달 결사의 나머지 부분을 한번에 올리려 했지만 끝까지 쓰려면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지라 부득이하게 두 편으로 나누기로 결정했습니다. 오늘부로 다시 글쓰기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니 앞으론 더 빠르게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p.s.2 공지사항에도 올려놨지만 모든 편을 훨씬 읽기 쉽게 수정했으며 이번 편부터 연재되는 분량 역시 같은 형식으로 올라올 것입니다. 그래도 아직 불편하신 점이 있다면 댓글로 의견을 남겨주세요.


p.s.3 네이버 지상최대공모전에서도 연재중입니다. 그쪽에도 들러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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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4. 그믐달 결사 (6) +4 20.06.29 17 2 21쪽
» 1-4. 그믐달 결사 (5) +4 20.06.22 21 2 8쪽
16 1-4. 그믐달 결사 (4) +8 20.06.14 27 4 8쪽
15 1-4. 그믐달 결사 (3) +10 20.06.12 29 4 13쪽
14 1-4. 그믐달 결사 (2) +16 20.06.08 35 8 7쪽
13 1-4. 그믐달 결사 (1) +14 20.06.06 32 6 8쪽
12 1-3. 사자의 심장 (5) +14 20.06.04 34 7 16쪽
11 1-3. 사자의 심장 (4) +6 20.06.02 26 3 11쪽
10 1-3. 사자의 심장 (3) +4 20.05.31 28 2 9쪽
9 1-3. 사자의 심장 (2) +2 20.05.29 20 1 8쪽
8 1-3. 사자의 심장 (1) +4 20.05.27 27 3 8쪽
7 1-2. 흑과 은 (3) +8 20.05.24 29 2 11쪽
6 1-2. 흑과 은 (2) +6 20.05.22 31 2 9쪽
5 1-2. 흑과 은 (1) 20.05.19 31 1 9쪽
4 1-1. 녹슨 화원 (3) +2 20.05.16 36 2 10쪽
3 1-1. 녹슨 화원 (2) 20.05.14 52 1 8쪽
2 1-1. 녹슨 화원 (1) +16 20.05.12 64 4 10쪽
1 Prelude. 세빈 +10 20.05.11 127 13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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