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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가 내리는 녹슨 서고

리라이트 마이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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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테리즘
작품등록일 :
2020.05.11 14:16
최근연재일 :
2020.07.08 19:18
연재수 :
20 회
조회수 :
709
추천수 :
71
글자수 :
88,501

작성
20.05.16 17:22
조회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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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0쪽

1-1. 녹슨 화원 (3)

DUMMY

선일미리내천문대.


한때 그렇게 불렸던 그곳은 오랫동안 방치된 탓에 낡고 앙상한 외양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미 수년 전에 이용자수 격감과 세금낭비 등 갖가지 이유로 인해 폐쇄되었던 천문대는 서서히 저무는 노을 속에서 대부분이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진 채 무수한 담쟁이넝쿨에 휘감겨있었다.


오로지 최상부에 위치한 둥그런 돔처럼 생긴 부분만이 홀로 세월의 풍파를 겪지 않은 듯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천문대 부지로 들어선 세빈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한쪽 방향을 바라본 채 질서 있게 도열해있는 커다란 태양광 패널들이었다.


과거 비상상황이 발생했을 때 천문대에 전력을 공급하는 예비전지 역할을 톡톡히 했을 검은 판들은 그러나 본관과는 달리 지금도 쌓인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세빈은 따스한 봄날 같은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패널들의 사이를 지나 천문대의 입구에 도달했다.


시뻘건 녹이 곳곳에 슨 커다란 문이 굳게 입을 다문 채 앞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문 옆에 위치한 작은 쪽문을 살짝 밀자 오래된 건물이면 으레 나기 마련인 귀에 거슬리는 시끄러운 소음 하나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세빈은 빛이 들지 않아 한밤중처럼 깜깜한 복도를 지나 오른쪽으로 돌자마자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있는 스위치를 누르자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 달린 전등 속에서 창백한 광채가 터져 나왔다.


잠시 눈이 부셔 본능적으로 감았다 뜬 그녀의 시야에 온갖 책이 잔뜩 꽂힌 책꽂이와 정갈하게 정돈된 책상, 그리고 이 낡은 건물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몇 가지 첨단 장비들이 들어왔다.


이곳이 바로 세빈이 시험기간 동안 그토록 그리던 나머지 꿈속에서도 몇 차례나 등장할 정도로 찾아오길 학수고대해왔던 그녀만의 특별한 비밀연구실이었다.



재회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고 싶었던 세빈은 두 팔을 벌린 채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밀폐된 실내 공간 특유의 다소 퀴퀴하면서도 청량한 공기가 폐 속 가득 번졌다.


익숙한 냄새에 마음이 편안해진 세빈은 책상 위에 가방을 내려놓은 뒤 그 옆에 걸어둔 하얀 가운을 집어 들었다.


그 기다랗고 다소 후줄근한 백의는 그녀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의 계기는 지금으로부터 4년 전쯤 천문대의 지하 강당에서 신원불명의 변사체가 발견된 날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미스터리한 사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인근의 날고 긴다는 강력계 형사들이 대거 투입되었지만 몇 달에 걸친 수사기간 동안 변사자의 신원이나 사망 원인, 여타 사건과의 연관성에 관련된 그 어떤 정보도 얻어낼 수 없었다.



결국 미궁에 빠진 채 반 년 만에 흐지부지된 이 사건은 그러나 가뜩이나 매년 찾는 손님이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들던 어려운 형편의 천문대의 명줄을 끊는 치명타로 작용했다.


건립될 때부터 지리를 고려하지 않은 입지조건과 지지부진한 부지 매입, 혈세의 낭비 등으로 늘 논란의 중심에 서 있던 선일미리내천문대는 변사사건 이후 완전히 시의회의 눈 밖에 나게 된 바람에 결국 얼마 있지 않아 폐쇄되고 말았다.



폐쇄가 결정된 날까지도 얼마 되지 않는 천문대의 방문객 수를 지속적으로 늘려주던 당시의 세빈은 천문대가 문을 닫던 날 그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던 기억을 지니고 있었다.


어렸을 때 겪었던 충격적인 사고 이후 오랫동안 마음의 문을 닫은 채 주변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살아왔던 세빈에게 있어 천문대는 단순한 놀이터 수준의 존재가 아니었다.


매일같이 천문대를 찾아 별을 관찰하며 자연스레 천문학도의 꿈을 키워왔던 그녀에게 그곳이 폐쇄된다는 것은 곧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과 동의어였다.



평소에 세빈을 자신의 딸처럼 아끼던 천문대 휘하 연구소의 소장은 그날 중학생밖에 안 된 어린 소녀가 주저앉은 채 펑펑 우는 모습을 보고 안쓰러움을 느껴 그녀에게 은밀히 다가가 하나의 제안을 건넸다.


그가 짚어낸 맹점은 시의회가 의결한 것이 천문대의 폐쇄이지 철거는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어차피 최소 몇 년 간은 철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버려질 건물이라면 그곳에 새로운 주인이 들어서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 소장은 세빈에게 몰래 천문대의 마스터키를 맡기고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찾아와도 괜찮다고 속삭였다.



그 이후로 약 3년 동안 겉으로 보기엔 문을 닫은 버려진 천문대는 세빈의 비밀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그녀는 소장과의 약속 아닌 약속을 지키기 위해 별다른 일이 없는 날엔 항상 천문대를 찾아 연구원들이 남기고 간 서적과 연구기록 등을 어떤 제약이나 대가도 없이 자유롭게 열람하며 천문학자로의 꿈을 계속 키워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방치된 태양광 패널들 중 일부를 이용해 몇몇 시설을 가동시키는 데에도 성공했고 주기적으로 주요 시설 몇 군데를 깨끗이 청소해 언제 누가 찾아와도 천문대가 내방객을 위해 최소한의 역할은 할 수 있도록 꾸며뒀다.


비록 여러 가지 한계로 인해 시설에 전력을 공급하는 것도 매우 제한적이었고 대부분의 공간은 청소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그대로 버려둔 상태였지만 조금씩이나마 천문대에 생기가 돌아오는 걸 쭉 곁에서 지켜본 세빈은 크나큰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명실 공히 천문대의 주인이 된 세빈에게 있어 백의는 항상 몸에 걸치고 있어야 할 정장과도 같은 존재였다.


한 젊은 연구원이 남기고 간 이 하얀 가운을 처음 입었던 날부터 세빈은 주인의식과 책임감을 가지고 연구원들의 유지를 받드는 걸 최우선적 목표로 삼아왔었다.


그런 그녀였기에 백의는 어느새 입으면 편안해지는 최고의 보물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곧바로 가방에서 도서관에서 빌린 별에 관한 책들을 꺼내려다 문득 오랜만에 천문대에 찾아왔다는 걸 인지한 세빈은 시설 점검을 위해 주변을 한 바퀴 돌기로 결심했다.


벽에 걸려있는 손전등을 집어든 세빈은 불을 킨 뒤 복도로 나섰다. 어둡고 고요한 복도는 바람 한 점 없이 스산한 한기를 머금고 있었다.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커다란 문으로 들어간 그녀는 옆에 달린 스위치들을 한꺼번에 눌렀다.



별안간 주변이 환해지며 거대한 광장 같은 반구형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방 한가운데에 위치한 슬라이드 기기를 중심으로 사방팔방에 수많은 의자가 펼쳐진 이 장소는 한때 잠시나마 어린이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수많은 별들의 산실 플라네타륨이었다.


전력소비가 굉장히 큰 편이라 평소에는 거의 기동하지 않았지만 세빈은 가끔 옛 추억이 생각날 때면 홀로 아무 의자에나 앉아 안내원 언니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특징과 유래를 쉽게 풀어주던 사계절의 별자리들을 가만히 올려다보곤 했다.



플라네타륨의 가장 큰 장점은 아직 해가 지지 않은 환한 시간대에도, 그리고 비가 오는 우중충한 날에조차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아름다운 은하수를 관찰할 수 있는 점이었다.


지안이 딱 한 번 세빈을 따라 천문대를 찾았을 때도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궂은 날씨였다.


그런 악천후 속에서도 그때까지 별이라는 생경한 주제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지안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를 정도로 감탄했던 곳이 바로 이 플라네타륨이었다.



한참 동안 앞에 놓여있는 의자의 등받이 부분을 만지작거리던 세빈은 플라네타륨 관람은 다음으로 미루며 입맛을 다시는 것으로 애써 아쉬움을 달랬다.


오늘은 평소보다 늦게 하교한 터라 시간도 그다지 많지 않았고 그 동안 아낀 전력을 헤프게 쓰고 싶지 않은 게 그 이유였다.


미처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움직인 세빈은 플라네타륨의 불을 끄고 다시 복도로 나가 아까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복도의 끄트머리에는 위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이 위치해있었다.


점점 너비가 좁아지는 층계를 따라 뱅글뱅글 올라가면 끄트머리에 2층이자 꼭대기에 해당하는 또 다른 반구형의 작업실이 나타났다.


플라네타륨과 유사해 보이는 구조의 중심에는 위쪽을 향해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제법 커다란 망원경이 위치해있었다.


현재는 닫혀있지만 버튼 하나로 개방할 수 있는 천장 너머로 지금쯤이면 별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낼 시간이었다.



천문대의 존재이유라고도 할 수 있는 관측소는 세빈이 다른 곳들 이상으로 특별히 신경을 써서 관리하는 장소였다.


그녀가 별을 관찰하는 사람이라는 막연한 꿈을 처음으로 키워나가기 시작한 곳이 바로 이 방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주변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예민한 장비들이 여럿 자리해있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관리를 하기엔 아직 어린지라 미숙한 세빈이었지만 지금도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 전 소장이 간접적으로나마 원조를 아끼지 않은 덕에 지금까지 큰 트러블 없이 꾸려나갈 수 있었다.



점검을 모두 마친 세빈은 손전등의 불빛을 앞세워 다시 연구실로 돌아갔다.


그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 분명 안심이 되는 소식이었으나 왠지 모를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힘들었다.


자신만의 비밀장소가 존재한다는 것은 심리적 안정감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관리하는 데에 다소 수고롭긴 해도 그 메리트 또한 확실했다.


하지만 한때 한 공간에서 같은 것을 향유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주변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 불러일으키는 외로움과 향수를 마냥 무시하긴 힘들었다.


세빈은 누구라도 좋으니 한 명이라도 그녀 홀로 지키는 천문대를 찾아줬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품은 채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Ch 1-1. [녹슨 화원] - 完


작가의말

Tip) 세빈이 다니는 고등학교의 이름은 선일고등학교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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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23 송강(松江)
    작성일
    20.05.19 23:30
    No. 1

    문장이 길어지는 문단에서 보이는 특이점.
    한 문장에 주어가 두개 겹치는 현상이 종종 보입니다.
    짚어보자면 평소에~ 로 시작하는 일곱번째 단락에서 소장은, 소녀가 두개의 주어가 등장하지요.
    이런 경우는 두개의 문장이 맞습니다. 길고 짥고의 이분법보다 그부분만 신경쓰셔도 훨씬 글이 매끄러워질듯요.
    풍부한 어휘의 강점이 있으시니까요.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1 아스테리즘
    작성일
    20.05.19 23:42
    No. 2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문제인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네요. 확실히 문장을 너무 길지 않게만 쓰려고 생각해서 그 부분은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좋은 조언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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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3. 사자의 심장 (3) +4 20.05.31 28 2 9쪽
9 1-3. 사자의 심장 (2) +2 20.05.29 20 1 8쪽
8 1-3. 사자의 심장 (1) +4 20.05.27 27 3 8쪽
7 1-2. 흑과 은 (3) +8 20.05.24 29 2 11쪽
6 1-2. 흑과 은 (2) +6 20.05.22 31 2 9쪽
5 1-2. 흑과 은 (1) 20.05.19 31 1 9쪽
» 1-1. 녹슨 화원 (3) +2 20.05.16 36 2 10쪽
3 1-1. 녹슨 화원 (2) 20.05.14 52 1 8쪽
2 1-1. 녹슨 화원 (1) +16 20.05.12 64 4 10쪽
1 Prelude. 세빈 +10 20.05.11 127 13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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