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녹슨 화원 (1)
기말고사라는 흉포한 태풍이 청춘들의 여린 마음을 사정없이 짓이기고 지나갔음에도 교실은 그 어느 때보다 소란스러웠다.
교사들은 매 시간마다 학생들을 조용히 시키려는 시늉을 했지만 금세 두 손을 들길 반복했다.
마침내 시험이 끝났다는 안도감을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한 뉴스가 이미 모든 아이들의 화두를 장악해버린 탓이었다.
“너 그거 들었어?”
“아, 그거 말하는 거지? 그저께 터진 그 사건.”
세빈은 주변을 가득 메운 번잡한 장터와도 같은 들뜬 분위기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란이라는 개념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시험이 끝났으니 교실 전체가 시끄러워지리라는 건 이미 등교하기 전부터 각오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난장판은 상식적 예측이라는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은 혼돈 그 자체였다.
뜩이나 어젯밤에 꾼 악몽 때문에 영 기분이 좋지 않았던 세빈은 머릿속을 온통 뒤흔들어놓는 시끌벅적한 수라장에 당장이라도 두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문득 앞쪽을 쳐다보니 한국사 선생님은 아예 체념해버린 듯 칠판 쪽으로 등을 돌린 채 무언가를 적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네 자리의 숫자가 반복적으로 나열되고 있는 걸 보니 과거 어떤 나라, 아마 조선시대 언저리의 연표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사실 여부는 세빈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한국사, 아니 역사라는 건 정말이지 지루하기 짝이 없는 학문이었다.
외울 건 왜 이리 쓸데없이 많고, 시대는 뭐 저리 하품 나올 정도로 긴지.
전혀 흥미를 가지지 않은 분야의 오랜 기록을 받아 적는 건 그녀에게 있어 무시하더라도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세빈은 지금이 한국사 시간이라 정말 다행이라 여기며 창가 쪽을 바라봤다.
어느덧 초여름도 지나 녹음이 군데군데 무르익고 있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지평선 저편으로 끝없이 펼쳐져있었다.
싱그러운 초록빛 풍경을 차분히 내려다보고 있자니 종일 무거웠던 마음도 어느덧 화창하게 개었다.
그저 한여름의 매미들조차 저리가라 할 정도로 귓가를 가득 메운 왁자지껄한 목소리들만 없었으면 참 행복할 것 같았지만 세상일이라는 건 그렇게 자기 좋을 대로만 움직여주진 않는 법이었다.
“진짜로 살인사건이래? 그냥 자살한 거 아냐?”
“그게 말이지, 자살은 절대 아니라나봐. 옆 반 애가 그랬는데 처음 발견됐을 때부터 도저히 자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한 상황이었대.”
“근데 어디 찔린 흔적도 없고 목이 졸린 것도 아니었다며? 독살이라도 당한 거야?”
“글쎄, 아마 오늘이나 내일 중에 경찰이 발표하지 않을까?”
“넌 경찰을 믿니? 내가 장담하지만 쉬쉬하면서 대충 변사사건 정도로 처리해버릴 거라구.”
“하긴, 여기가 대도시도 아니고. 살인사건이 흔히 벌어지는 동네는 절대 아니긴 하지.”
삼삼오오 모인 반 아이들은 얼핏 봐서는 서로 다른 얘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전부 그저께 저녁에 있었던 살인사건에 대해 열띤 토론, 혹은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지방에 위치한 비교적 한적한 도시인 선일시에선 늘 지역소식지에나 올라갈 법한 자질구레한 사건들이 전부였기에 더더욱 한번 잡은 빅뉴스에 대한 관심은 활활 타오르며 여기저기로 옮겨 붙고 있었다.
“누가 그러는데 시체의 두 발이 없어졌대.”
“뭐? 에이, 말도 안 돼. 상식적으로 굳이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할 이유가 있어?”
“내가 아니. 범인이 알지 않겠어?”
“발 맞아? 내가 듣기론 손이 없어졌다고 들었는데.”
“사실 알고 보니 토막살인이었던 거 아냐? 어우, 내가 얘기한 건데도 소름끼치네.”
“나도 그래. 나 여기 닭살 돋은 거 봐.”
세빈은 여자애들이 누가 먼저랄 새도 없이 일제히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 올리며 서로에게 팔뚝을 보여주는 모습을 보고 괜히 손목 위가 간지러워졌다.
누군가가 죽은 걸 가지고 어떻게 태연히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는 건지 그저 궁금할 따름이었다.
나 같으면 기분 나빠서 입에 올리기도 싫을 것 같은데.
애꿎은 팔만 긁적거리던 세빈은 반대편에서 남자애들이 한데 모여 은밀히 쑥덕거리며 킬킬대는 모습을 보고 속이 메슥거리는 걸 참기 위해 애썼다.
“야, 누가 죽인 것 같냐?”
“지나가는 깡패가 심심해서 죽였다에 만 원 건다.”
“참나, 깡패 아니면 누가 그런 짓을 하겠냐? 그럼 난 이만 원.”
“아냐. 경찰이 열 받아서 몰래 죽이고 미제로 묻으려고 하는 걸지도 몰라.”
“그럼 넌 경찰에 오만 원 걸던가.”
“오만 원은 너무 갔다. 삼만 원 콜?”
세빈은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기 위해 한쪽 팔을 베고 넙죽 엎드렸다.
사람이 죽은 게 단순히 웃고 넘길 만한 예삿일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녀는 마치 경마라도 즐기는 것 같은 남자애들의 행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눈을 질끈 감자 잠시 잊고 있었던 악몽의 흔적이 스멀스멀 다가와 모든 걸 온통 핏빛으로 물들였다.
살덩이가 산산이 터지는 끔찍한 소리가 아직도 선명하게 귓가를 적시고 있었다.
세빈은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아 최대한 몸을 움츠린 채 책상을 거세게 움켜잡았다.
누군가가 이 넘실거리는 광기를 막아줬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움틀 무렵, 허용치를 넘어선 소음을 보다 못한 선생님이 마침내 등을 돌렸다.
“그만. 시험 끝나서 기분 좋은 건 알겠는데 제발 쉬는 시간에 떠들어라.”
“네.”
아주 잠깐의 정적이 찾아왔다.
그도 잠시 선생님이 다시 칠판과 마주보자 군데군데서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점점 커져가는 그들의 말소리는 조금 전에 서로 얘기했었던 그 사건을 고스란히 교실의 중심으로 되돌려놓았다.
세빈은 엎드려 자는 것처럼 위장한 채 어떻게든 반 아이들의 시답잖은 대화를 무시하려 애썼다.
조금만 더 버티면 학교가 끝나고 그토록 기다려온 그 시간이 다가올 터.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마음에 모든 근심이 이른 아침의 아지랑이처럼 하늘거리며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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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고사 때에 비해 한결 가벼워진 책가방을 둘러멘 세빈은 종례가 끝나자마자 옆 반으로 향했다.
경주를 하듯 재빠르게 교실 밖으로 뛰쳐나가는 아이들 사이로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홀로 창가를 내다보는 긴 머리의 소녀가 눈에 띄었다.
세빈은 헤드셋을 낀 채 손가락을 창틀에 까딱거리며 박자를 맞추던 소녀의 등을 툭 건드렸다.
“오늘도 클래식?”
그러자 고개를 돌린 소녀는 헤드셋을 반쯤 벗은 채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응. 오늘은 슈베르트.”
“이름 얘기해봤자 잘 몰라. 정말 유명한 사람 몇 명 정돈 알긴 하지만. 예를 들면 모차르트라던가...”
세빈이 자신 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꼬리를 흐리자 소녀는 다소 짓궂은 안색을 띠며 은근하게 되물었다.
“아니면 베토벤?”
“에이, 그 정도는 알지. 혹시나 해서 얘기하는 건데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다 알고 있는 네가 별난 거거든?”
“알아. 난 아무 말도 안 했는걸.”
“얘는...”
세빈은 쿡쿡 웃는 소녀를 보며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잠시, 금세 웃음보가 터져버린 그녀는 결국 포기하고 소녀와 함께 연신 어깨를 들썩거렸다.
아무것도 아닌 시답잖은 대화일 뿐이었지만 한창 지쳐있던 세빈에겐 그 분위기가 마치 포근한 고향과도 같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한지안이란, 세빈에게 있어 그런 존재였다.
불과 1년 반 전에 만났을 뿐이고 겨우 1년 동안 같은 반이었다는 연결고리가 두 사람 사이의 전부나 다름없었으나 그녀들이 친해지는 데엔 그 이상의 요소는 필요 없었다.
누구에게나 상냥하면서도 스스럼없이 다가갈 수 있는 친화력을 지닌 다정다감한 소녀 지안은 세빈이 지금껏 수월하지만은 않았던 고등학교 생활을 버텨오는 데에 커다란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2학년으로 올라오면서 다른 반으로 갈려버렸는지라 자주 얼굴을 맞댈 수는 없어도 방과 후만 되면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착 달라붙는 게 두 사람의 일상이자 즐거움이었다.
“오늘은 남아서 다른 반 친구 도와준다고 했었지?”
“응. 지금 기다리는 중이야. 세빈이 넌 늘 가던 거기?”
“물론이지. 어제도 그저께도 가지 못했는걸. 요 며칠 동안 오늘만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몰라.”
금방이라도 따스한 오후 햇살 너머로 날아갈 것 같은 세빈의 황홀한 표정을 보며 역시나라고 생각한 지안은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좋아하는구나. 그렇게 자주 가도 질리지 않을 만큼.”
“질리긴. 마음 같아선 그곳에 눌러 살고 싶은데 참는 거라고.”
“그 얘기, 너희 아버지께서 듣는다면 꽤나 섭섭해 하실걸?”
“노, 농담이지! 거기서 진짜로 사는 건 보통 큰일이 아니잖아.”
“아하하하, 그러고 보니 그럴 것 같네.”
서로를 향해 씩 웃으며 마주보던 두 소녀는 이윽고 기다란 그림자가 교실 구석에 드리우자 아쉬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어제 아이스크림 맛있었어. 다음에 또 가자.”
“응, 내일 봐.”
세빈은 어제 시험이 끝난 기념으로 모처럼 지안과 함께 아이스크림 맛집 탐방을 위해 시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던 게 떠올라 입맛을 다시며 빙글 돌아섰다.
그러자 바로 눈앞에서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를 무언가가 갑자기 홱 하고 튀어나왔다.
- 작가의말
Tip) 세빈은 아이스크림을 매우 좋아합니다.
p.s. 앞부분을 다시 좀 더 간결하게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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