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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가 내리는 녹슨 서고

리라이트 마이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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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테리즘
작품등록일 :
2020.05.11 14:16
최근연재일 :
2020.07.08 19:18
연재수 :
20 회
조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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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글자수 :
88,501

작성
20.05.31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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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1-3. 사자의 심장 (3)

DUMMY

갈림길에서 지안과 헤어진 세빈은 대출한 책들을 반납하고 또 다른 책을 빌리기 위해 도서관으로 향했다.


선일시립도서관은 중심가 사거리에서 도시 외곽 쪽으로 300미터가량 걸어가면 나타나는 육교 건너편에 위치해있었다.


하루빨리 다리 근처에 횡단보도가 새로 생겼으면 좋겠다고 여긴 세빈은 푹푹 찌는 날씨를 피해 서둘러 육교 계단을 뛰어 내려가 도서관의 정문을 힘껏 밀어젖혔다.



들어서자마자 에어컨의 산뜻한 바람이 팔뚝을 타고 올라가 온몸을 휘감았다.


기분이 한결 상쾌해진 세빈은 곧장 로비를 지나쳐 빽빽이 놓인 책꽂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종교와 경제 코너를 곧장 지나친 세빈은 모퉁이를 몇 번 돌아 마침내 목표했던 고전문학 서가에 당도했다.


그녀가 이 시립도서관을 찾는 유일한 이유가 바로 이곳에 잠들어있었다.



우주과학에 대한 전문지식이 담긴 책들은 천문대에도 많았으나 세빈이 관심을 가진 또 다른 분야인 별에 대한 신화나 전승이 담긴 서적의 경우 천문대는 물론이고 학교 도서관에서도 여간 구하기 힘든 게 아니었다.


그러나 장서의 수만 놓고 보면 선일시에서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 시립도서관은 비교적 접하기 쉬운 그리스 로마 신화는 물론이고 별에 관련된 여러 문화권의 전승을 집대성한 책들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실로 오랜만인 플라네타륨 재개장을 대비해 이미 읽은 적 있는 계절별 별자리와 황도 12궁에 대해 서술된 책들을 몇 권 집어든 세빈은 무의식적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카운터로 향했다.


그곳엔 언제나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어린 소녀가 있었다.



바깥은 바야흐로 한여름임에도 추위를 타는지 무릎담요를 덮은 소녀는 꼿꼿한 자세로 고고하게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커다란 책을 지탱하고 있는 그녀의 여린 두 팔은 마치 투명한 진주 속이 들여다보이듯 푸른 혈관들을 고스란히 밖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소녀의 주변에는 여러 무더기의 책들이 야트막한 둔덕처럼 쌓여있었다.


서적들로 둘러싸인 아늑한 요람 안에 파묻힌 그녀의 자태는 가히 연꽃 속에 피어난 가련한 공주를 보는 것 같았다.



소녀는 세빈이 코앞까지 다가섰음에도 독서에만 몰두하느라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세빈은 책에만 집중하고 있는 그녀의 주의를 끌기 위해선 그냥 앞에 서서 기다리는 것만으론 매우 힘들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나직이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반응을 보인 소녀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마주본 사람을 서서히 끌어들이는 기묘한 매력을 지닌 녹안 한 쌍이 세빈을 지그시 응시했다.



“안녕하세요, 세빈 선배.”


“안녕, 수정아. 책 읽느라 바쁠 텐데 방해해서 미안해.”


“아뇨. 이게 제 일이니까요.”


“응. 이쪽이 반납이고 저긴 대출이야.”



세빈의 요청에 고개를 살짝 끄덕인 수정은 마치 영혼이 들어있지 않은 구체관절인형처럼 기계적으로 팔을 움직여 바코드를 찍길 반복했다.


일체의 흐트러짐 없이 모든 작업을 완수한 그녀는 가지런히 쌓인 책들을 앞쪽으로 밀며 조그마한 입을 살짝 벌렸다.



“여기요. 2주 후까지 반납해주세요.”


“항상 고마워.”



서적더미를 떠안은 세빈은 수정이 반납된 책을 이동식서가에 쌓아둔 뒤 다시 읽던 책을 집어 들자 이대로 떠나긴 아쉽다는 생각에 반사적으로 의례적인 얘기를 꺼냈다.



“아, 수정아. 요즘 어떻게 지내?”


“늘 같아요.”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단답형에 가까운 짧은 문장뿐.


수정에게 무언가 물어보거나 말을 건 사람들은 어느 누구라도 그 이상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한때 수정의 중학교 선배이자 같은 동아리 부원이었던 세빈이라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차이라면 오직 하나, 선배라는 호칭이 붙는 것뿐이었다.


세빈은 자신을 선배라고 부르지 말라던 어떤 남자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뒤로 밀어둔 채 수정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너도 방학 이번 주에 시작이지?”


“네. 오늘부터에요.”



그 얘기를 마지막으로 문답은 완전히 끊겨버렸다.


수정의 시선은 다시 책으로 돌아갔고 더는 위쪽을 향하지 않았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갈 마땅한 화제를 찾지 못한 세빈은 별 수 없이 터덜터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이만 갈게. 다음에 보자. 요즘 이래저래 흉흉하니까 밖에 다닐 때 조심하고.”


“안녕히 가세요, 선배.”



책 속에 두 눈을 고정시킨 수정이 가볍게 목례하는 걸 본 세빈은 그녀에게 손을 흔든 뒤 도서관을 나섰다.


생각해보면 처음 만난 순간부터 한결같았다.


2년 전 중학교에 갓 입학해 세빈이 소속된 독서부에 들어온 수정은 지금과 별반 다를 바 없이 과묵했다.


세빈은 설마 자신보다 붙임성이 없고 사람들에게 쉬이 다가가지 않으려 하는 여자애가 이 세상에 존재할 거라곤 생각해본 적도 없었던지라 지금까지도 그녀의 첫인상을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세빈이 중학교를 졸업한 뒤엔 딱히 접점이 없던 탓에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두 소녀는 작년부터 수정이 그녀의 어머니가 근무하는 시립도서관에서 봉사활동의 일환으로 사서 보조를 맡게 되면서부터 다시 인연이 닿게 됐다.


물론 그렇다곤 해도 마주치면 좀 전처럼 안부를 묻고 몇 마디 환담을 나누는 것, 그마저도 항상 세빈이 먼저 말을 걸고 수정은 그에 대답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게 사실상 대화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재차 육교를 건넌 세빈은 천문대로 향하면서 다음에 들를 땐 수정이 좋아하는 카페라테라도 한 잔 사서 들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한낮의 무더위 속에서 좋아하는 음료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절로 집에 사둔 아이스크림이 떠올랐다.


세빈은 혀끝에 감도는 아이스크림의 차가운 추억을 떠올리며 스멀거리는 아지랑이 속을 지나쳤다.


벌써부터 우는 매미들의 합창이 무척 시끄러웠다.



#



모처럼 맞이한 일요일 아침이었지만 졸린 눈을 비비는 세빈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간밤의 열대야 때문에 선풍기를 동원하고도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한 세빈은 오늘만큼은 하루 종일 시원하게 지내고 싶다고 생각하며 옷장 안에 개어둔 짧은 반바지에 손을 뻗었다.


잠결에 비틀거리며 바지 사이에 한쪽 다리를 끼워 넣다가 불현듯 오늘이 유현과 약속했던 날이란 걸 떠올린 그녀는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처음 유현을 만났을 때는 마침 천문대를 청소하는 날이었던지라 체육복을 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오늘은 주말인데다 방학이기도 한지라 당연하게도 교복이나 체육복을 입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물론 날씨가 덥지 않은 기간엔 움직이기 편한 체육복 차림으로 천문대에 드나든 적도 많았으나 오늘 같은 폭염 속에서 비교적 두꺼운 편인 체육복 같은 옷을 입었다간 삽시간에 땀범벅이 될 게 뻔했다.



그럼 그냥 반팔과 반바지면 충분하지 않겠냐고 스스로 되물은 세빈은 곧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혼자 있을 거면 모를까 타인, 그것도 이성 앞에서 입고 있기엔 허벅지가 다 드러나는 이 반바지는 너무 노출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다 만 반바지를 벗고 거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며 무슨 옷을 입는 게 좋을지 고민하던 세빈은 문득 자신이 왜 이런 걸로 골머리를 썩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스스로를 타일렀다.


정신 차려, 윤세빈!


오늘 네가 하려는 건 데이트가 아냐!


단순히 그냥 만나는 것뿐인데 뭘 그렇게 의식하고 있는 거야?



마음을 다잡은 세빈은 자신의 방을 무단으로 점거한 숨 막히는 더위를 느끼고 다시 한 번 벗어둔 반바지에 눈길을 보냈지만 끝내 그걸 고르진 않았다.


대신 절충안으로 굉장히 얇지만 허벅지를 드러내진 않는 소매 있는 원피스를 선택한 세빈은 샤워와 아침식사, 그리고 간단한 기초화장을 마치고 챙이 큰 밀짚모자를 살짝 눌러쓴 채 집을 나섰다.



의외로 유현은 약속했던 시각보다 먼저 천문대에 도착해 그늘 밑에서 세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주와 달리 말쑥하게 차려입은 그는 도시락이 든 바구니를 든 채 천천히 걸어오는 세빈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일주일하고도 하루 만이네.”


“안녕하세요. 혹시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냐, 나도 방금 전에 왔는걸. 자, 어서 들어가자. 계속 밖에 서있기엔 날씨가 너무 덥다.”



좀 전까지 손으로 계속 부채를 부치던 유현은 짐짓 괜찮은 척 너스레를 떨며 천문대의 문을 가리켰다.


세빈은 방금 전에 도착했다는 유현의 얘기가 실은 거짓이리라 직감했지만 나름대로 자신을 배려해주는 거라 여기며 군말 없이 쪽문을 밀어젖혔다.


작가의말

Tip) 수정의 초록색 눈동자는 컬러렌즈 같은 게 아니라 매우 희귀하게 나타나는 진짜 녹안입니다.


p.s. 이번 편부터 문단과 문단 사이를 띄기로 했습니다. 이전 편들도 전부 수정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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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99 정원교
    작성일
    20.05.31 17:23
    No. 1

    추천, 오늘도 잘 읽었어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1 아스테리즘
    작성일
    20.05.31 17:24
    No. 2

    감상 및 추천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7 동네선수
    작성일
    20.05.31 18:26
    No. 3

    300미터 걸어가면 육교건너편에 있었다.

    '도대체 도로관리과는 머하는지.'

    하루빨리 ...

    갈림길에서 도서관 가는데 8줄이 소비가 되었습니다.
    주요 내용은 불편하다 세빈이 힘들다 입니다.

    주인공이 갈림길에서 도서관까지 힘든 길을 갔다는게 주요 내용이라고 봅니다.

    문단의 내용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글은 좋아보이지 않아요

    중간에 감정 또는 주인공의 표정 등을 넣는 것도 좋아요

    내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간다는 과정을 전부 글로 설명을 한다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문단을 구성을 할때 많은 작가들은 4줄 안으로 모든 것을 설명을 하고 대화문이든지
    표정 아니면 혼잣말 등 여러가지 등을 넣어서 문단이 장문이 되는 것을 피합니다.

    이것이 가독성을 위한 독자의 배려이구요

    카카오페이지의 로맨스 등 감성이 있는 글을 보시면 절대 4줄 이상의 문단의 글은 없어요
    출판사에서 퇴고시 대부분 수정됩니다.

    그리고 문단에서 . 이 나오면 무조건 엔터를 치세요

    그리고 한칸은 내려서 다음을 이어도 상관이 없어요

    ---------------------------------------------------

    이번을 마지막으로 쓰겠습니다. 다음부터 님의 글에 대해 조언 등은 사실 저도 부담스러운 부분입니다.
    동료 작가의 글에 대해 이렇게 설명 까지 한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니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 해주시기 바랍니다.

    건필하세요 ~~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1 아스테리즘
    작성일
    20.05.31 18:36
    No. 4

    꼼꼼하게 보시고 지적해주신 부분은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단순히 문단의 길이가 짧다고 가독성이 올라간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저도 자랑은 아니지만 나름 출판 전단계까지 가봤던 사람이고 문학 모임에서 여러 사람의 비평을 들어본 과정을 거쳤던 경험이 있습니다. 물론 많은 작가분들이 간결한 문장을 선호한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지만 그게 꼭 정답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리고 저의 경우 문장이 만연체이고 수식어가 많이 들어가긴 하나 가독성이 부족하다고 얘기하시는 분은 별로 없었습니다. 가독성은 문장의 길이가 아니라 얼마나 읽기 편한지를 나타내는 지표이지요.
    그래도 어제 말씀하셨던 것처럼 좀 더 간결하게 쓰려고 생각하고 있으며 앞부분 역시 차후에 2차로 퇴고를 거칠 예정입니다. 글에 보내주신 애정 감사드리며 비평 또한 쓰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동네선수님도 건필하시길!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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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3. 사자의 심장 (4) +6 20.06.02 26 3 11쪽
» 1-3. 사자의 심장 (3) +4 20.05.31 27 2 9쪽
9 1-3. 사자의 심장 (2) +2 20.05.29 19 1 8쪽
8 1-3. 사자의 심장 (1) +4 20.05.27 27 3 8쪽
7 1-2. 흑과 은 (3) +8 20.05.24 28 2 11쪽
6 1-2. 흑과 은 (2) +6 20.05.22 29 2 9쪽
5 1-2. 흑과 은 (1) 20.05.19 31 1 9쪽
4 1-1. 녹슨 화원 (3) +2 20.05.16 35 2 10쪽
3 1-1. 녹슨 화원 (2) 20.05.14 51 1 8쪽
2 1-1. 녹슨 화원 (1) +16 20.05.12 63 4 10쪽
1 Prelude. 세빈 +10 20.05.11 126 13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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