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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가 내리는 녹슨 서고

리라이트 마이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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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테리즘
작품등록일 :
2020.05.11 14:16
최근연재일 :
2020.07.08 19:18
연재수 :
2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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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88,501

작성
20.05.22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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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1-2. 흑과 은 (2)

DUMMY

“선일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인가보네요.”


“어? 어떻게 아셨어요?”



세빈은 지금 교복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닌데 청년이 어떻게 자신이 다니는 학교를 맞췄는지 영문을 몰라 휘둥그레 눈을 떴다.



“그야 저도 거기 다녔었으니까요. 체육복만 봐도 알죠. 지금은 이미 졸업해서 대학생 신분이지만요.”


“아... 선배님이셨군요.”



청년은 세빈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안절부절 못하는 기색을 보이며 우물쭈물해하자 손사래를 쳤다.



“아, 스톱. 선배님이라고 부르진 마세요. 낯간지러우니까.”


“그, 그래도 어떻게 선배님께...”


“어허. 그만두래도요. 고작 몇 년 일찍 같은 학교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앉아서 절 받고 싶진 않아요. 차라리 아저씨라고 불리는 게 마음 편하지.”



난감해하던 세빈은 청년의 단호한 표정을 보고 군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높게 잡아도 20대 초반을 넘지 않을 것 같은 청년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건 너무 무례하다고 느낀 그녀는 재차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처음 뵌 분께 아저씨라고 부를 수는...”


“음... 하긴 그건 그러네요. 아, 내 정신 좀 봐. 아직 자기소개도 안 했다는 걸 깜박했네.”



자신의 정수리를 가볍게 내리친 청년은 다시 미소를 띠며 세빈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제 이름은 신유현이에요. 여기 출신이긴 하지만 요즘 먼 데서 대학교를 다니느라 방학을 맞아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참이에요. 반가워요.”


“아, 잘 부탁드립니다. 전 선일고 2학년 윤세빈이라고 해요. 말씀 편하게 하셔도 괜찮아요.”


“그래도 될까? 배려해줘서 고마워. 너도 격식 차리지 말고 편하게 대해줘.”


“네?”



세빈은 갑작스레 친근하게 다가오는 청년, 유현이 낯설게 느껴져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유현은 그런 그녀가 마치 맹수에게 겁을 먹은 귀여운 다람쥐처럼 느껴져 푸근하게 웃었다.



“빈말이 아니라 진짜 아저씨라고 불러도 좋아. 어떻게 부르든 그건 네 의지에 맡길게. 근데 선배님은 너무 경직된 표현처럼 느껴지잖아. 그런 건 별로 마음에 안 들거든.”


“아, 네... 그럼 유현 씨라고 불러도 괜찮을까요?”


“음... 뭐 선배님보단 낫긴 한데 그것도 좀 딱딱하긴 하네. 그래도 어쩔 수 없나. 이제 막 처음 만난 사이니. 좋아. 네가 그리 부르는 게 편하면 그러도록 해. 나중에 좀 더 사이가 진전되면 그때 가서 다른 호칭이 입에 붙게 될지도 모르지.”


“지, 진전이요?”



세빈은 좀 전과 달리 거침없이 둘 사이의 거리를 좁혀오는 유현에게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몰라 머릿속이 하얘졌다.


가뜩이나 아빠 외의 남자와는 대화해본 경험 자체가 거의 없었던 그녀였기에 유현이 어떤 의도로 그런 얘기를 꺼내는 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냐. 그냥 해본 소리였어. 미안해. 그나저나 진짜 대단하긴 하다. 3년이나 혼자 여길 지켜왔단 거잖아. 그것도 중학생 때부터. 이 넓은 데 청소하는 거 보통 힘든 일이 아닐 텐데.”


“그, 그렇진 않아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고... 아무런 대가 없이 시설들을 맘대로 쓸 수 있는 것만 해도 충분한 보상인걸요.”



유현의 칭찬에 다시금 기분이 좋아진 세빈은 아까부터 시시각각으로 이리저리 바뀌는 싱숭생숭한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애쓰며 화끈거리는 뺨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평정을 어느 정도 되찾자 아직 물어보지 않은 질문이 있다는 걸 떠올린 그녀는 어느새 플라네타륨 곳곳을 구경하고 있는 유현을 불러 세웠다.



“좀 전에 천문대가 폐쇄된 건 알고 있었다고 얘기하셨잖아요.”


“응, 그렇지. 그때까진 여기 살고 있었으니까.”


“그럼 오늘은 어쩐 일로 오시게 된 거예요?”



그 말을 듣자 세빈을 돌아본 유현은 웬일인지 살짝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그것도 아직 말 안했구나. 얘기하자면 좀 긴데... 실은 내가 가을에 군대를 가게 됐거든. 영장도 나왔고 더 미루긴 애매해서 말이야.”



그제야 유현의 낯빛이 어두워진 이유를 알게 된 세빈은 아차 싶어 급히 머리를 숙였다.



“앗, 죄송해요. 제가 괜한 얘기를 꺼내서...”


“아냐. 왜 사과해. 딱히 네 잘못도 아니잖아.”


“그래도...”


“괜찮아. 그야 좀 싫기도 하고 겁도 나지만 어차피 가야되는 곳인걸. 마음 쓰지 않아도 돼. 그래도 그때까지 멍하니 기다리기만 하다 입대하긴 시간이 아깝잖아? 그래서 모처럼 고향에 돌아온 김에 군대에 가기 전까지 내가 오랫동안 살아왔던 이 도시를 다시 한 번 쭉 돌아보기로 한 거야. 시간을 들여서 자세히 보니까 어렸을 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일면들도 생각보다 제법 눈에 띄고 나름 기분전환도 되거든.”



유현은 줄곧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의 손가락만 내려다보며 만지작거리고 있는 세빈을 보고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두 팔을 쭉 벌렸다.



“이 천문대도 오래 전의 추억이 남아있는 곳 중 하나야. 진짜 밤하늘은 아니었지만 그토록 아름다운 은하수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거든. 아직도 기억나. 바로 여기 이 의자에 앉아서 올려다봤었지. 수많은 별자리들과 그에 얽힌 각양각색의 이야기. 마치 어렸을 때 읽었던 신화책의 세계에 풍덩 빠져 들어간 것 같은 진귀한 경험이었어.”



유현은 풀이 죽어있던 세빈이 서서히 눈치를 보며 자신의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하는 걸 놓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날 이후로 여길 다시 찾은 적은 없었지만 천문대가 문을 닫았다는 얘길 듣고 아쉬워했던 기억이 나. 언젠가 수험이 끝나고 대학생이 되면 다시 보러 오고 싶었거든. 마침 오늘 이 근처를 지나갈 일이 있어서 잠시 들르게 된 거야. 비록 폐쇄됐다곤 하지만 그 흔적만이라도 추억 속에 오래도록 새겨놓고 싶어서 말이야. 근데 설마 대문이 활짝 열려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니까. 그래서 얼떨결에 들어왔고 거기서 세빈이 널 만나게 된 거지. 자, 이야기 끝! 이 정도면 대답이 됐지?”



세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유현을 올려다봤다.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과 비슷한 소망을 품고 있는 사람과 만나게 되다니, 그것도 심지어 바로 그 오랜 꿈이 탄생한 요람 속에서 마주하게 된 거라니 정말 모든 게 거짓말 같았다.


전례 없이 극도로 고무된 그녀는 평소엔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쪼그라든 용기를 쥐어짜 자신도 모르게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저, 저기... 유현 씨. 아까 플라네타륨을 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플라네타륨? 아, 여기 얘기하는 거야? 응, 그야 다시 볼 수 있다면 꼭 한 번 보고 싶지.”


“그럼 청소를 마친 뒤라도 괜찮으면 관람하고 가실래요? 이쪽만 다 닦으면 끝이라 조금만 기다리시면 될 것 같은데.”



세빈은 입술을 닫음과 동시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러버린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 전에 처음 만난 사람한테 왜 이런 얘기를 꺼낸 건지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다.


사람을 대하는 게 도통 익숙지 않고 어렵게 느껴진다 생각해왔어도 한편으론 타인과 어울리는 것에 그토록 목말라있었던 걸까?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현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해. 정말 감사한 제안이긴 한데 오늘은 이미 선약이 잡혀있어서 말이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곧 가야하거든. 혹시 괜찮다면 다음 주 일요일에 보여주지 않을래?”


“그래요. 그럼 그날...”


“고마워! 그 광경을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네. 이거 꿈 아니지? 제발 현실이라고 해줘.”



세빈은 마치 어린아이마냥 방방 뛰며 기뻐하는 유현의 모습을 보고 도중에 말이 끊겨 생겨난 약간의 불쾌함조차 바람에 흩날린 먼지처럼 홀연히 사라져버린 걸 느꼈다.



“아, 네. 물론 현실이죠.”


“응. 발바닥이 얼얼한 걸 보니 깨어있는 게 확실하네. 세빈아, 오늘 여러모로 정말 감사했어. 여기서 널 만난 것 자체가 매우 큰 행운이었던 것 같아. 그럼 다음 주에 보자!”



유현은 세빈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의자 사이로 달려가 문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다시 홀로 남겨진 세빈은 자신이야말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되어 한쪽 볼을 꼬집었다.


따끔한 통증이 조금 전까지 곁을 지켰던 별난 남자에 대한 기억과 함께 신경 전체에 아로새겨졌다.


작가의말

Tip) 유현은 서울 소재의 한 대학교 사학과에 재학중입니다. 대학교 이름은 비밀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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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4. 그믐달 결사 (3) +10 20.06.12 29 4 13쪽
14 1-4. 그믐달 결사 (2) +16 20.06.08 33 8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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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3. 사자의 심장 (5) +14 20.06.04 33 7 16쪽
11 1-3. 사자의 심장 (4) +6 20.06.02 26 3 11쪽
10 1-3. 사자의 심장 (3) +4 20.05.31 27 2 9쪽
9 1-3. 사자의 심장 (2) +2 20.05.29 19 1 8쪽
8 1-3. 사자의 심장 (1) +4 20.05.27 27 3 8쪽
7 1-2. 흑과 은 (3) +8 20.05.24 28 2 11쪽
» 1-2. 흑과 은 (2) +6 20.05.22 30 2 9쪽
5 1-2. 흑과 은 (1) 20.05.19 31 1 9쪽
4 1-1. 녹슨 화원 (3) +2 20.05.16 35 2 10쪽
3 1-1. 녹슨 화원 (2) 20.05.14 51 1 8쪽
2 1-1. 녹슨 화원 (1) +16 20.05.12 63 4 10쪽
1 Prelude. 세빈 +10 20.05.11 126 13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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