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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팬텀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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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팬텀
작품등록일 :
2020.11.09 02:31
최근연재일 :
2021.01.12 13:00
연재수 :
3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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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29,180

작성
20.12.0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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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26화 추억의 상자 (Update 21.01.05)

DUMMY

캐서린이 다시 깨어났을 때, 그녀는 바닥에 누워있었습니다.

물론 침대가 따로 있었지만, 어젯밤에는 그대로 방바닥에서 잠을 청한 모양입니다.


거울에는 부스스한 캐서린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잠옷으로 갈아입지 않았기에 옷도 그대로입니다.

어제와 다른 것은 눈이 붉게 부어있었다는 것입니다.


펑펑 울다 잠든 흔적입니다.


“스텔리카 언니처럼 눈이 빨개졌어.”


하지만 그 와중에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는 캐서린입니다.


캐서린은 몸을 일으키고 기지개를 켭니다.

그리고 커튼을 양옆으로 밀고, 창문을 열었습니다.

아직은 새벽.

차가운 새벽공기가 방안으로 들어옵니다.

연말이라 기온이 내려간 탓입니다.


조금 있으면 해가 뜰 시간입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익숙한 엔진소리가 들렸습니다.


캐서린이 창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자 오토바이가 지나고 있었습니다.

오토바이에 타고 있는 사람은 캐서린이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 캐서린!”


오토바이에 탄 그녀는 집 앞에 멈추고는 손을 흔들었습니다.

창문에 고개를 내민 캐서린을 발견한 것입니다.

캐서린도 그에 화답하였습니다.


“페어리스 안녕?”


티엘 페어리스.

티엘이 성이고 페어리스가 이름입니다.


캐서린은 <루미너스>에 온 후, 또 다른 학교에 다녔습니다.

페어리스는 그 학교에서 알게 된 친구였습니다.

그녀는 사교성이 좋은 아이로, 캐서린에게도 살갑게 대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 한동안 교류가 끊겼지만,

이런 식으로 다시 교류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네? 아, 혹시 내가 깨운 거야?”

“아니, 그게 어제 일찍 잤거든.”

“그렇구나.”


그녀는 매일 새벽, 사람들에게 신문과 편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페어리스는 편지함에 신문과 편지를 넣었고,

그 근처에 있던 음료를 하나 꺼내 흔들어 보입니다.


“그럼 오늘도 잘 마실게.”


오늘은 마침 일찍 깨어나 얼굴을 보게 되었지만,

평소에는 아직 꿈나라에 있기에 얼굴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편지함 옆에 음료 상자를 둔 것은 페어리스에 대한 캐서린의 인사 겸 감사의 표시입니다.


페어리스는 다시 오토바이에 올라타 떠났고, 캐서린은 손을 흔들어 배웅합니다.



◇◇◇◇



몸단장을 마친 캐서린은 1층에 내려왔습니다.

테이블에는 신문과 여러 통의 편지가 올려져있습니다.

페어리스가 새벽에 배달해준 것입니다.


현 세계 인류도 나름 발전된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통신 분야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발전 및 보급이 더딘 편입니다.

그렇기에 아직까진 종이에 적힌 메시지를 직접 전달하는 방식을 이용합니다.


먼저 확인한 것은 편지입니다.

여기로 배달되는 편지는 크게 2가지입니다.

관공서나 기업에서 보낸 편지,

그리고 스텔리카 앞으로 보내진 편지입니다.


오늘 온 편지 중 스텔리카 앞으로 온 편지는 3통입니다.


스텔리카는 2년 전 실종되었지만, 대외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스텔리카는 역대 용사 중에서도 꽤 유명한 편입니다.

당시 어떤 사정으로 인해 스텔리카를 대대적으로 홍보한 탓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섣불리 실종 소식을 알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캐서린의 의견이 아닌, 여러 기관의 판단으로 결정된 것이며,

캐서린도 일단은 여기에 따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누군가 물어볼 때는, 중요한 임무를 위해 다른 곳에 있다고 둘러대는 중입니다.


캐서린 입장에선 스텔리카 앞으로 온 편지를 함부로 읽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편지일 수도 있기에,

그때마다 양해를 구하는 편지를 작성해 보내고 있습니다.


스텔리카는 부재중이라는 내용.

혹시 중요한 편지가 맞는다면 대신 읽어도 될지 동의를 구하는 내용.


앞서 이야기했듯 이번에 온 편지는 3통입니다.

그러니 캐서린은 그 자리에서 해당 내용을 담은 3통의 편지를 작성했습니다.


다음은 신문입니다.

하루 동안의 소식이 여러 장의 종이에 빼곡히 적혀있습니다.

캐서린은 일단 각 기사의 제목을 훑어보듯 읽었습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쉽니다.


“...오늘도 없구나.”


캐서린은 스텔리카와 관련된 소식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자 신문에도 캐서린이 원하는 기사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캐서린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일단 신문을 덮은 후 아침 식사를 준비합니다.

그녀가 신문을 다시 읽는 것은 아침 식사를 마친 후의 일입니다.

이번에는 하나하나 빠짐없이 읽습니다.


여기까지가 최근 1년 동안 캐서린이 지속해온 아침 풍경입니다.



◇◇◇◇



시간은 흘러 정오를 조금 지난 시간.

캐서린이 있는 ‘엘피니스 범죄 연구소’를 방문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말끔한 정장이 잘 어울리는 빈틈 없는 인상의 여성이었습니다.


“모노리안 레이라 씨죠? 반갑습니다. 시간 맞춰오셨네요.”


캐서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습니다.

그녀는 사전에 방문 약속을 잡은 의뢰자였습니다.


그러면서 잠깐 눈빛 교환의 시간.


캐서린은 레이라가 어른스러운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물론 실제로 레이라는 스텔리카와 같은 나이로, 캐서린보다 연상이지만,

그 이야기는 아니고, 그녀가 정장이 잘 어울리는 성숙한 여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캐서린은 주로 캐주얼한 복장인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상의는 후드가 달린 옷-예전처럼 후드 모자를 머리에 쓰는 일은 줄었지만-을 주로 입습니다.

물론 정장도 가지고 있지만 잘 어울리지 않고, 오히려 갑갑한 마음도 들어 거의 입지 않습니다.

그래서 레이라 같은 사람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들곤 했습니다.


한편 레이라도 캐서린을 유심히 살폈습니다.

그리고 입을 열었습니다.


“확실히 14대 용사 캐서린이 맞는군요. 간판만 봐선 수상한 장소로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죠.”

“네, 뭐.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일단, 여기 앉으시겠어요?”


레이라가 말한 간판은 이 건물 외부에 걸린 ‘엘피니스 범죄 연구소’라 적힌 간판을 의미했습니다.

캐서린은 레이라가 한 말에 동의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수상하다 여기면서도 당당하게 들어온 레이라 씨도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캐서린이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당신, 혹시 실례되는 생각을 한 건 아니죠?”

“아,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물론 시선을 마주치진 못했습니다.


레이라는 캐서린이 안내한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캐서린은 바 카운터로 자리를 이동했습니다.


“서비스로 음료를 드리고 있어요. 위쪽 메뉴판에 있는 것 중에 하나를 고르시면 됩니다.”

“흠. 인테리어는 폼이 아니었다는 거군요.”

“네. 저도 들은 거지만, 처음부터 이 건물 1층은 카페 용도였다고 해요.”

“흐음.”


레이라는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구식이긴 하지만 카페로서 나름 잘 꾸며진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뿐이었습니다.

금방 흥미를 잃은 듯 캐서린에게 말했습니다.


“음, 그럼 따뜻한 커피로.”

“네. 잠시 기다려주세요.”


캐서린은 익숙한 동작으로 커피를 내렸고, 레이라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이는, 지난 9년 동안 몇 번이고 했던 일입니다.


레이라는 잠시 커피를 노려보더니,

테이블에 마련된 각설탕을 여섯 개 넣어 저은 후 마셨습니다.


달게 드시네요.


“나쁘진 않군요.”

“감사합니다.”


은근슬쩍 각설탕을 하나 더 넣은 레이라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 후,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것은 레이라가 캐서린에게 부탁할 의뢰 이야기였습니다.



◇◇◇◇



“그럼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17년 전을 기준으로 그려진 25번 구역 지도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로 이해했습니다만, 맞습니까?”

“네. 정확합니다.”


의뢰 내용 자체는 간단명료한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캐서린은 레이나에게 되물어 다시 내용을 확인하였습니다.

절차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지인의 추천을 받고 여기 온 거예요. 당신이라면 이 일에 적임일 거라고 들었거든요.”

“아, 혹시 그 지인이라는 사람이...”


캐서린은 어떤 이름을 말했고, 레이라는 그 말에 긍정하였습니다.


“역시.”


캐서린은 잠시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다가 의뢰인을 불안하게 만드는 표정을 지어선 안 된다는 걸 떠올리고 다시 표정을 고쳤습니다.


“어려울까요?”

“왠지 그분은 저를 과대평가하시는 경향이 있으세요. 하지만, 그거랑은 별개로 노력해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혹시 이 의뢰의 목적도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그것도 이야기해야 하나요?”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거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위법적인 목적인지 여부만이라도 확인해야 하거든요.”

“이해했습니다. 이 의뢰를 요청한 이유는 그 지도를 이용해 찾고 싶은 물건이 있어서예요. 어린 시절에 묻어둔 타임캡슐이 있는데 그걸 찾으려는 거죠.”

“아, 네. 그 정도라면... 알겠습니다. 그럼 이 의뢰는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해주셨으니 저도 당신을 믿어보도록 하죠.”


레이라는 머그잔에 남은 커피를 마저 마셨습니다.

그리고는 머그잔 바닥에 남은 설탕을 확인하고는 스푼으로 긁어먹으려 했지만,

캐서린의 시선을 느끼고 관두기로 했습니다.


정말 단 걸 좋아하시네요.



◇◇◇◇



레이라의 의뢰를 받은 캐서린은 방침을 정했습니다.


우선, 지금에 와서 17년 전 지도를 구하는 것 자체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전제를 깔았습니다.


캐서린이 이전에 했던 몇 가지 의뢰를 통해 깨달은 것은,

<루미너스>는 기록 최신화에 치중한 나머지 과거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지도라면 더더욱 남이 있지 않을 것입니다.

행정구역이나 도서관 등을 찾아가도 헛수고일 테지요.

아마, 레이라도 그게 불가능했기에 캐서린에게 의뢰한 것일 것입니다.


<루미너스>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곳입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기술이 복원되고,

이를 반영하여 <루미너스>는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합니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 나가는 것이 <루미너스>입니다.

옛 모습을 되돌아볼 여유도,

사장된 시행착오들이 어떤 의미를 있는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이 모든 건 세계의 복원이라는 미명아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과거가 희생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캐서린은 의뢰를 완수하고자, 무모하지만 확실한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17년간의 기록 중 25번 구역과 관련된 정보를 최대한 찾아 열람하고,

그렇게 얻은 파편화된 정보를 지도에 역으로 반영하여, 17년 전의 모습으로 재현해 나가는 것.


즉, 이번 의뢰는 지도를 구하는 게 아니라 지도를 만드는 일인 셈입니다.


그건 너무나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거기다 경우에 따라선-캐서린이 좋아하지 않는- 많은 사람과 탐문도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결론을 낸 캐서린은 즉시 외출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스텔리카 언니. 그럼 오늘도 일하러 다녀올게.”


캐서린은 목에 걸린 목걸이 장식을 오른손으로 쥐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캐서린이 주문 제작했던 두 개의 반지였습니다.



◇◇◇◇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레이라는 사전에 약속한 중간 확인 날짜에 맞춰 재차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걸 정말 혼자 다 하신 건가요?”

“네.”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 위에는 지도와 두꺼운 노트가 놓여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타임캡슐을 묻었다는 이야기에 착안해서, 그걸 묻을 만한 장소를 우선순위로 정해 고쳐본 거예요. 주로 거주지역과 그 일대를 중점으로 했죠. 그래서 아직 고치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설마 지도를 직접 고치실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옆에 있는 노트는...”

“이건 지도를 수정하는데 참고한 근거자료, 지난 17년간의 기록에서 찾은 정보를 스크랩하고, 사람들의 증언을 기록한 거예요.”

“이건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네요.”

“그런가요? 실은 전 17년 전에는 <요람>에 있었기 때문에, 맞게 수정한 것인지도 알 수 없어서 불안했었는데, 다행이네요.”


레이라는 말없이 지도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곳을 손으로 가리켰습니다.


“여기가 제가 다녔던 학교. 그리고 이 길을 따라 그 아이와 등하교를 했었죠. 그리고...”


레이라는 지금 이 지도를 통해 과거로 거슬러 가고 있습니다.

그녀의 표정은 빈틈없던 훌륭한 사회인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어린 시절 행복 속에 살아가는 어린아이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이 표정이야말로, <루미너스>에서 살아가기위해 억지로 써야 했던 가면이 아닌... 그녀의 진짜 모습이겠지요.


“여기야! 분명해요. 타임캡슐은 여기에 있을 거예요.”



◇◇◇◇



'엘피니스 범죄 연구소' 앞에는 한 대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습니다.

레이라의 자가용이었습니다.


“정말 제가 같이 가도 괜찮나요?”

“네. 같이 가서 확인해주셨으면 해요.”


레이라의 목적은 타임캡슐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과거 지도가 필요했던 건 그 때문입니다.

만일 타임캡슐을 찾게 된다면 이 의뢰는 사실상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기에,

함께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건 표면적인 구실이고, 캐서린과 같이 가자고 한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한편, 캐서린은 다른 의미에서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거절을 잘 못 하는 그녀의 성격상 결국 조수석에 탈 수밖에 없었습니다.



◇◇◇◇



레이라의 자동차는 큰 도로를 질주하고 있습니다.

21번 구역에서 25번 구역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입니다.


25번 구역의 경계면 자체는 변하지 않았기에,

과거 지도에서 찾은 위치 좌표를 현재 지도에 반영하여 가야 할 목적지를 확인했습니다.

레이라의 자동차가 향하는 곳은 거기였습니다.


그런데,


“진작 얘기하시지 그랬어요?”

“아니에요. 레이라 씨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에요. 그리고 그 상황에선 자동차로 가는 게 합리적이니까요.”


레이라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캐서린의 상태를 확인했습니다.

사실 캐서린은 자동차 안 공기에 불쾌함을 느끼는 타입이었습니다.

물론 자동차 안이 더럽다거나, 공기가 오염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자가용에 비하면 상당히 청결한 편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고 얘기는 들었지만, 정말 일 줄은 몰랐네요.”

“저도 신기해요.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 거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캐서린은 창밖의 다른 자동차들을 보았습니다.


“자동차만 그런 건가요?”

“네, 적어도 운송차나 자전거, 전철은 괜찮았어요. 자동차만 유독 그래요. 아, 배는 안 타봐서 모르겠고요.”


그래서 캐서린은 개인 자동차는 물론, 자동차 면허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른 구역으로 이동할 때도 자전거나 전철을 이용해왔습니다.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창문 열어도 괜찮아요.”

“네, 고마워요.”


캐서린은 창문을 열었습니다.

차 안으로 들어온 바람에 머리가 나풀거리자, 후드 모자를 썼습니다.

하지만 후드 모자도 바람에 뒤로 젖혀지자, 결국 주머니에 넣어둔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었습니다.


“그나저나 예정이 하나 틀어졌네요. 실은 당신한테 제 얘기를 해주려고 했는데 말이죠. 이번 의뢰를 한 진짜 이유와 더불어서요.”

“듣는 정도는 괜찮아요. 하지만 그거 얘기하기 곤란한 거 아니었나요?”

“그때는 초면이었고, 사실 즐거운 이야기도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마음이 바뀌었어요. 누군가에게 얘기해주고 싶어졌어요. 그리고 그게 당신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럼 부탁할게요.”

”네. 대신 이 얘기는 비밀로 해주세요.”



◇◇◇◇



<요람>에 살던 레이라는 상냥한 부모에게 분양되었고,

비교적 어린 시절에 <루미너스>에 오게 되었습니다.


25번 구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에겐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녀와 동갑인 알리온 페리스.

다행히 짝사랑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끼리의 연애가 그러하듯,

두 사람의 관계는 친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조금 더 진전된 수준이었지만,

의외로 어른이 되면 결혼하자는 약속도 했었습니다.

물론 법적 효력은 없었지만 그만큼 두 사람은 서로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당시 25번 구역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

그리고 그걸로 촉발된 대대적인 개발을 이유로,

25번 구역에 살던 많은 사람이 다른 구역으로 옮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레이라와 페리스는 헤어지고 맙니다.

두 가정은 각각 다른 구역으로 옮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타임캡슐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이 타임캡슐이 언젠가 두 사람을 다시 연결해줄 매개체가 되리라 믿으며.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레이라는 훌륭한 사회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여러 노력을 했고, 나름 높은 지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습니다.

물론 그 대가로 똑 부러지고 빈틈없는 무서운 인상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그녀의 마음 한구석엔 여전히 어린 시절 페리스와의 추억을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직장 동료 중 하나인 로아가 결혼 소식을 알렸습니다.

당연히 레이라를 포함한 직장 동료들은 그녀를 축하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사진으로 보여준 로아의 결혼 상대가 어딘지 낯이 익었기 때문입니다.

레이라는 로아에게 결혼 상대 이름을 물었고,

그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알리온 페리스’라고.



◇◇◇◇



“저, 레이라 씨. 그럼 혹시 타임캡슐을 찾으려는 이유가.”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할 생각이에요.”


캐서린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 거예요? 왜 포기하시는 거예요?”

“사진 속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였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와 둘 사이의 관계를 깨트릴 수 없잖아요.”

“하지만, 레이라 씨도 그 사람 좋아하는 거잖아요.”

“흠, 당신도 저와 비슷한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요?”

“네?”

“그 목걸이에 걸린 두 개의 반지. 그중 하나는 아마 당신의 소중한 사람에게 주고 싶었던 물건이었겠지요?”


캐서린은 목걸이에 걸린 두 개의 반지를 손으로 잡았습니다.

의표를 찔렸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페리스가 행복하다면 저는 만족합니다. 그러니 타임캡슐은 제가 회수한 후 없애버릴 생각입니다.”



◇◇◇◇



목적지에 도착한 레이라의 차는 멈췄습니다.

차에서 내린 레이라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여기가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장소. 하지만 이젠 비슷한 곳이라곤 한 군데도 찾을 수 없군요.”


그렇게 말하고는 뒤이어 내린 캐서린을 바라보았습니다.


“당신, 속은 괜찮으세요?”

“금방 회복될 거예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레이라 씨."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여러 집들이 모여있던 주거지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이제 고가도로로 변해버렸습니다.


타임캡슐은 이 아래 어딘가에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닥이 모두 포장되었네요. 레이라 씨 이제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글쎄요. 어떻게 보면 페리스도 찾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대로 내버려 두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 저건.”


레이라는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걸어갔습니다.

레이라가 다시 멈춰선 바닥에는 작은 사각형 모양으로 갈라진 틈이 있었습니다.


“왜 여기만... 설마...?”


레이라는 바닥에 난 틈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보았지만, 뜻대로 잘 안 됩니다.


“저, 레이라 씨. 제가 해볼게요.”


캐서린은 레이라를 일으킨 후 허리 뒤쪽에 수납했던 도끼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도끼날을 갈라진 틈에 끼워 힘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잠시 후 작은 사각형 모양의 포장도로가 들어 올려졌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흙으로 된 바닥이 보였습니다.


“......!”


레이라는 바닥에 주저앉아 맨손으로 흙을 파냈습니다.

캐서린은 레이라가 걱정되었지만, 같이 흙을 파내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오래지 않아 딱딱한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찾았어요.”

“이게 타임캡슐인가요?”

“네. 제가 잊을 리 없죠.”


레이라는 상자를 꺼냈습니다.

상자에는 다이얼 식 자물쇠가 걸려있었습니다.


“번호도 기억하고 있어요. 두 사람의 이니셜을 숫자로 치환한 번호에요.”


레이라는 잊을 수 없는 그 번호를 맞추었습니다.

이제 상자는 열릴 것입니다.

열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자물쇠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어, 어째서...”

“번호를 잘못 맞추신 건 아니죠?”

“그럴 리 없습니다. 이 번호가 맞는데, 설마.”


레이라는 어떤 불길한 예감을 떠올렸고, 다시 한번 번호를 맞추었습니다.

레이라는 이게 아니길 바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레이라의 바람과는 달리 자물쇠는 열렸습니다.


“...열렸네요.”

“.......”

“레이라 씨?”

“왜 뒷자리 번호가 제 이니셜이 아닌 거죠? 왜 로아의 이니셜 번호를 넣으니까 열리는 거죠?”


레이라의 표정에 두려움이 느껴졌습니다.

마치 어떤 최악의 상황을 떠올린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레이라는 상자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아니,

그런데....


레이라의 표정이 놀라움, 슬픔 그리고 상실감으로 변해갔습니다.


상자 안에는 여러 추억의 물건이 들어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레이라와 관련된 물건은 없었습니다.


양손에 힘이 빠진 레이라는 상자를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눈물이 났습니다.



◇◇◇◇



타임캡슐은 다시 땅에 묻혔습니다.

레이라가 다시 파내기 전 상태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맨 처음 상태로 되돌아갔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내용물은 '진작에' 바뀌어 있었습니다.

상자에 남은 건 페리스와 로아의 추억.

본래 있어야 했던 레이라에 대한 추억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거나 변경되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 바뀌었는지,

누구에 의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이건 페리스가 한 일일까요?

아니면 로아가 한 일일까요?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타임캡슐이 묻혔던 장소가 전혀 다른 풍경이 된 것처럼,

타임캡슐 내용물도 처음과는 달라진 것입니다.


기록은 변질하였습니다.

그리고 추억은 거짓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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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8화 강철 골렘 21.01.07 11 0 17쪽
27 27화 역행 증후군 (Update 21.01.06) 20.12.05 11 0 15쪽
» 26화 추억의 상자 (Update 21.01.05) 20.12.04 15 0 22쪽
25 25화 돌아가는 길 (Update 21.01.04) 20.12.03 11 0 16쪽
24 24화 하나 20.12.02 11 0 20쪽
23 23화 작별하는 시간 20.12.01 10 0 19쪽
22 22화 악마의 탑 20.11.30 10 0 20쪽
21 21화 붉은 잔영 20.11.29 10 0 18쪽
20 20화 개회식 20.11.28 11 0 17쪽
19 19화 요람에 어서오세요 20.11.27 12 0 17쪽
18 18화 꼭두각시 20.11.26 13 0 17쪽
17 17화 캐서린의 세계 20.11.25 10 0 21쪽
16 16화 두번째 편지 20.11.24 11 0 15쪽
15 15화 저 멀리 20.11.23 11 0 15쪽
14 14화 시선 20.11.22 12 0 15쪽
13 13화 미소 20.11.21 16 0 15쪽
12 12화 불안 20.11.20 39 0 14쪽
11 11화 마음이 향하는 곳 20.11.19 30 0 16쪽
10 10화 별이 내린 바다에서 20.11.18 15 0 16쪽
9 9화 특별한 아침 20.11.17 48 0 15쪽
8 8화 자기소개 20.11.16 29 0 15쪽
7 7화 어둠의 동굴 속 20.11.15 33 0 16쪽
6 6화 비와 마법 20.11.14 38 0 16쪽
5 5화 따라가다 20.11.13 54 0 12쪽
4 4화 태동의 사원 아트리아 20.11.12 50 0 15쪽
3 3화 캐서린 20.11.11 23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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