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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팬텀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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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팬텀
작품등록일 :
2020.11.09 02:31
최근연재일 :
2021.01.1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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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180

작성
20.11.3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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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22화 악마의 탑

DUMMY

잠시 후, 개회식의 마지막 순서가 찾아왔습니다.


“지금도 <세계 복원>이라는 우리의 숙원을 위해 많은 분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세계는 변화하고 있으며, 이 변화의 물결은 더욱 가속할 것입니다.”


무대에는 관계자들이 모두 올라와 있습니다.

그리고 무대의 중심, 단상에는 퇴위 국왕이 서 있습니다.

퇴위 국왕이 남기는 메시지를 끝으로 개회식은 마무리될 것입니다.


“누군가는 마음을 나눈 친구가 있을 것입니다. 제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제 마음속에 후회라는 감정으로 남아있습니다.”


붉은 잔영에 의해 차기 국왕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단상에 서 있는 퇴위 국왕 역시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퇴위 국왕의 생명은 점점 꺼져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퇴위 국왕의 메시지는 생략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당히 단상에 올라와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퇴위 국왕 본인이 바란 일입니다.

<환영제>라는 이 기쁜 날, 비극을 전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축제>는 생명의 순환이 일어나는 숭고한 시간입니다. 이 순간만이라도 자신을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어떤 것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행동해보는 건 어떨까요.”


하지만 스텔리카의 귀에는 퇴위 국왕의 메시지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아직도 붉은 잔영... 클레어와 다투고 있던 순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용사의 ‘사명'에 필요한 단검은 회수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클레어의 진의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스텔리카는 객석을 바라보았습니다.

익숙한 모습... 얼마 전 만났던 선생이 객석에 있었습니다.


‘...어쩌면 저도 당신이랑 별반 다를 게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캐서린은 끝내 선생을 외면했습니다.

클레어는 스텔리카에게 속마음을 이야기해주지 않았습니다.

이 둘은 같은 것일까요?


그런 생각을 하던 사이,

박수 소리가 들렸습니다.

퇴위 국왕의 메시지가 끝난 모양입니다.

스텔리카도 손뼉을 쳤습니다.


이렇듯 개회식은 ‘표면적으로는’ 무사히 마무리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차기 국왕과 그 경호 병력은 붉은 잔영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또한, 퇴위 국왕 역시 위독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대외적으로 알려지는 건 <축제>가 마무리된 이후가 될 것입니다.

지금은 <축제>를 무사히 마무리하는 것을 우선하기로 합니다.



◇◇◇◇



스텔리카와 캐서린은 또 다른 의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개회식 때 입었던 장식성이 강한 의상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활동성에 주안점을 둔 전투복입니다.


“언니 괜찮아?”

“괜찮아. 언니가 캐서린을 격려해야 하는 데 반대가 되었네.”


개회식 도중 스텔리카는 붉은 잔영과 싸웠습니다.

캐서린이 스텔리카를 걱정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잠시 떨어져 있어야 해.”


캐서린은 ‘악마의 탑’으로 향해야 합니다.

그리고 스텔리카는 사원에 남아 앞으로 태어날 생명을 지켜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 캐서린이라면 분명 잘 해낼 거야.”


캐서린은 승려가 가져온 단검을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진품입니다.

또한, 캐서린은 승려의 안내를 받아 운송차에 올라탔습니다.


”그럼 캐서린, ‘사명’을 마치고 우리 웃으면서 다시 만나자.”


캐서린을 태운 운송차는 다수의 병사와 승려의 호위를 받으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스텔리카는 운송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배웅하였습니다.



◇◇◇◇



스텔리카와 고승은 사원의 승려들, <루미너스>의 병사들과 함께 지하로 내려갑니다.

지하로 내려가는 길은 승강기를 이용합니다.

<루미너스>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스텔리카에게 승강기는 낯선 장치는 아닙니다.

하지만 <루미너스>의 승강기와 달리,

사원의 승강기는 바닥만 있을 뿐 주변을 둘러싼 벽이나 천장도 없고, 연결된 선도 보이지 않습니다.

거기다 면적도 넓으며, 한 번에 탈 수 있는 인원도 이쪽이 훨씬 많습니다.

기술적으로나 시각적으로나 이쪽이 훨씬 고위 기술이 적용되었음은 자명합니다.

스텔리카는 ‘사원은 현 세계 인류의 기술로는 재현할 수 없다’는 말이 다시 한번 와닿았습니다.


“스텔리카는 와본 적이 있지요?”

“네, 아마 이 아래에는 ‘곧 태어날 아이들’이 있는 거죠?”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스텔리카가 보게 될 광경은 처음 보는 걸 테지요.”


대승은 그 말에 미소로 대답하였습니다.

마치 도착했을 때의 즐거움으로 두려는 듯했습니다.


승강기가 멈췄습니다.

그 앞에는 긴 복도가 이어져 있고, 그 끝에 넓은 공간이 있습니다.

‘아이집’이라 불리는 공간입니다.

새 생명이 담겨있는 알이 생성되는 장소입니다.


“이미 시작되고 있군요. 현 세계 인류는 모두 이렇게 태어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이곳을 지켜야 하지요.”


이제 스텔리카를 포함한 승려, 병사들은,

몇 개의 팀으로 나뉘어 정해진 시간 단위로 교대하며 이 장소를 지키게 될 것입니다.


알이 만들어지는 동안은 사원이 무방비 상태가 됩니다.

그렇기에 만일을 대비해 병력을 배치하는 것입니다.



◇◇◇◇



한편, 캐서린을 태운 운송차는 목적지인 ‘악마의 탑’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루나세븐> 섬 북쪽에 있는 다리를 지나면 산맥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산맥을 따라 만들어진 길을 지나면 그 너머에 악마의 탑이 있습니다.

캐서린에게 있어선 사실상 처음으로 섬 밖에 나가게 되는 셈입니다.


악마의 탑은 본래 다른 이름이 있지만,

현 세계 인류에겐 전해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현 세계 인류에게 전해진 전승은,

악마의 탑에서 10년에 한 번씩 악마의 알이 나타난다는 것이며,

이 악마의 알에서 깨어난 존재가 결국 현 세계를 뒤엎으리라는 것입니다.


현 세계 인류는 이를 막기 위해 악마가 태어나기 전, 악마의 알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부여받은 자를 ‘용사’라 부르고 있습니다.


10년 전에는 13대 용사인 스텔리카가 ‘사명’을 이루었습니다.

20년 전에는 12대 용사인 클레어가 ‘사명’을 이루었습니다.

30년 전에는 11대 용사인 미네티어가 ‘사명’을 이루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당연히 그 이전 세대의 용사가 ‘사명’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올해,

14대 용사인 캐서린은 선대 용사가 그러했듯이,

세계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악마의 알을 파괴하는 ‘사명’을 달성해야 합니다.


캐서린은 중요한 ‘사명’을 앞두고 긴장하고 있습니다.

운송차를 호위하는 승려와 병사 역시 아무 말이 없습니다.

운송차를 끄는 조류동굴 ‘필리스페’의 울음소리만이 적막을 깨트릴 뿐입니다.


길을 따라 산맥을 크게 한 바퀴 돌면 악마의 탑이 보입니다.


‘탑이라기보단 왠지 거대한 창 같아.”


생각보다 높은 규모에 압도당한 캐서린은 악마의 탑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현 세계 인류에게 있어 ‘악마의 탑’은 그 자체가 수수께끼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악마의 탑’ 주변에는 결계가 있어 내부에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들어갈 수 있는 기준이 존재할 테지만, 현 세계 인류는 그 기준을 알지 못합니다.

그저 현시점에서 14대 용사인 캐서린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현 세계 인류는 아직 10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세계의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캐서린을 태운 운송차는 어느새 ‘악마의 탑’ 앞에 도착하였습니다.

승려의 인도를 받아 운송차에서 내린 캐서린은 다시 한번 단검이 잘 있는지 확인합니다.


병사들이 주변을 경계하는 사이, 승려들은 캐서린에게 주술을 걸어줍니다.

일전에 스텔리카가 이야기했던 그 주술입니다.

이 주술은 캐서린이 악마의 탑 안에 들어가면 자동으로 발동될 것입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캐서린은 결계에 손을 댑니다.

그러자 빨려 들어가듯, 캐서린은 악마의 탑으로 들어갔습니다.



◇◇◇◇



정신을 차리자 처음 보는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여기가 악마의 탑 내부?’


캐서린은 마치 사원 내부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이 장소는 사원보다 이전에 만들어졌습니다.

즉, 여기도 현 세계 인류가 재현할 수 없는 장소입니다.


내부에는 캐서린뿐입니다.

그렇게 보였습니다.

눈앞에는 긴 복도가 길게 이어져 있습니다.

끝이 알 수 없을 정도로 긴 복도입니다.


그때 승려들이 건 주술이 발동되었습니다.

순간 눈앞이 흐려지고 머릿속이 어지러워집니다.

스텔리카가 말했던 대로입니다.

그리고...


‘언니 말대로 사념체가 보여. 아까는 없었는데’


캐서린 눈앞에 사념체라 불리는 존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형태가 불분명한 덩어리처럼 보입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그대로 주저앉았습니다.

그리고 기운이 빠집니다.

하지만...


‘일어나야 해.’


캐서린은 다시 일어납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기로 합니다.

왠지 마음속 불안함이 사라졌습니다.


캐서린은 단검을 꺼내 가장 가까운 사념체에게 겨눕니다.


‘다행히 이쪽으론 오지 않는 것 같아.’


캐서린은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사념체를 상대하는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캐서린은 스텔리카에게 사념체를 상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야외활동 중 스텔리카가 산에서 내려온 맹수와 싸운 모습도 지켜봤습니다.


‘괜찮아. 몇 번이고 연습했으니까.’


캐서린은 사념체에게 달려들어 단검을 휘두릅니다.

그러자 사념체는 연기가 되어 사라졌습니다.


‘해냈어.’


하지만 사념체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자신감이 생긴 캐서린은 다시 한번 신중히 단검을 겨누고 사념체에게 달려듭니다.

대각선으로 살짝 비켜 치자 이번에도 사념체는 연기가 되어 사라졌습니다.


캐서린은 이대로 복도 안으로 들어가기로 합니다.


‘그러고 보니 아까보다 복도가 더 길어진 것 같은데.’


다행히 길은 일직선이었습니다.

캐서린은 자신을 막아서는 사념체를 쓰러트리며 계속 앞으로 나아갑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분명한 형체를 가진 사념체들이 나타났습니다.

덩어리에 다리가 있는 존재,

덩어리에 팔이 달린 존재,

그렇게 점점 사람과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존재들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이대로 계속 가면 어떤 사념체가 나오는 걸까?’


캐서린은 스텔리카와 달리 감이 뛰어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안쪽으로 갈수록 사념체의 모습은 점점 인간에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윽고 캐서린이 기억하는 모습으로 등장하기에 이릅니다.


“메이티...!”

“...머리색...불꽃...어느쪽이...예쁠까....”


캐서린을 주도적으로 괴롭혔던 3인 중 하나.

장난을 좋아하는 가학적인 아이로 캐서린에게 신체적 고통을 많이 준 아이입니다.

캐서린은 순간적으로 자기 목 뒤로 손을 뻗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머리를 가리는 후드 모자는 없었습니다.

지금은 늘 입던 후드티를 입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메이티가 아니야. 저건 사념체야. 사념체야. 진짜가 아니야.”


캐서린 말대로 메이티 본인은 아닐 것입니다.

모습이 안정되지 않았으며,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불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던 그녀는,

캐서린의 소지품을, 옷을, 그리고 머리카락을 거의 태워버린 적이 있습니다.

이는 캐서린이 후드 모자를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때의 흔적은 아직 남았습니다.

캐서린의 머리카락 끝부분은 아직도 손상되었습니다.


참고로 그 일에 대해 메이티 본인은 일단 실수라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앞으로 나가야 해!”


캐서린은 메이티의 모습을 한 사념체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사념체를 관통하고 그 자리에서 넘어집니다.

다시 돌아봅니다.

진짜라면 시체가 있을 것이고, 사념체라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


메이티의 사념체는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같은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노리아?”


잘못된 선동과 모함으로 캐서린을 궁지에 몰아넣은 아이입니다.


“캐서린... 메이티... 죽였구나... 우린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아니야. 난.”


캐서린이 쓰러트린 메이티는 사념체입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노리아 역시 사념체입니다.


“못된 아이... 벌을 받아야 해.”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캐서린은 다시 일어나서 노리아를 공격했습니다.

노리아의 사념체는 사라졌습니다.


거칠게 심호흡을 하는 캐서린.

하지만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립니다.


“나도 죽일 생각이야?”


놀란 캐서린은 반대쪽 벽까지 물러나 주저앉습니다.


트윈 테일 머리를 한 소녀가 거만한 자세로 캐서린을 내려봅니다.

안젤라입니다.

안젤라가 캐서린에게 다가옵니다.

캐서린이 입을 열었습니다.


“왜. 날 괴롭히는 거야?”

“딱히 이유는 없는데?”


안젤라는 캐서린의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물론 캐서린 앞에 있는 것은 사념체입니다.

그 대답이 안젤라 본인의 의사와 일치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너무해.”

“너무한 건 너지. 이제 그 단검으로 날 없앨 거잖아.”

“하지만 넌 사념체잖아.”

“사념체면 죽여도 돼? 현실에선 못하니까 망상에서 꿈을 이루겠다? 본인한테는 못하니까 나한테 그러겠다는 거잖아.”

“사념체는... 악마는... 나쁜 거라고 했어. 그리고 난 용사로서 ‘사명’을 이루어야 해.”

“아니 넌 망설이고 있어. 이 모습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 ‘사명’의 의문을 품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

“그냥 돌아가. 돌아가서 네가 좋아하는 그 여자 품 안에서 어리광이나 부리라고. 너 같은 애는 그게 어울려.”

“싫어. 언니랑 약속했어.”

“그 여자라면 네가 ‘사명’에 실패했어도 뭐라고 안 할 거야.”

“난 언니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사명’을 이룰 거야.”


캐서린은 단검을 쥐고 안젤라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안젤라는 사라졌습니다.


“그럼 이 모습은 어때?”


그리고 이번에 나타난 사념체는 캐서린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스텔리카 언니!?”

“언니가 부탁해도 안 될까? 언니는 캐서린이 이대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언니가 아닌 거 알아요.”

“언니는 캐서린이 그런 위험한 물건 들고 있는 건 싫어? 자 그 단검 내려놓고 언니한테 와. 안아줄게. 아니면 뽀뽀해줄까?”

“언니는 그런 말 안 해요.”

“...그럼 이 언니를 그 단검으로 찔러야 하는데? 네가 할 수 있겠어?”

“그건...”

“지금이라면 캐서린의 마음속 욕망을 표출할 수도 있어. 언니가 여기에 있어. 캐서린 네가 원한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


캐서린은 이 이상 들었다간 정말 홀려버릴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차마 스텔리카의 모습을 한 사념체까지 베어버릴 순 없었습니다.

단검을 꼭 쥔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 안쪽까지 달려갔습니다.


사념체는 스텔리카의 목소리로 캐서린에게 속삭였지만 더는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반 아이들과 선생 등 캐서린을 괴롭게 만든 존재들이, 사념체로서 계속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캐서린은 그저 앞만 보고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기나긴 복도 끝에 미닫이문이 보입니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습니다.

캐서린은 문 안으로 들어온 후 복도를 다시 돌아봤습니다.

복도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캐서린은 이번에는 방안을 돌아보았습니다.

방 한가운데에 놓인 의자에 누군가가 앉아있는 게 보입니다.

하지만 검은 오오라에 휩싸여 있어서 무엇인지 확인되진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본 사념체와는 다른 모습입니다.


‘설마 악마의 알이 깨어난 거야? 내가 지체하는 바람에 악마가 나와버린 거야?’


검은 오오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캐서린에게 다가옵니다.

캐서린은 자신이 실패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했습니다.


‘망설여선 안 돼. 언니가 실망할 거야. 그런 건 싫어. 그러니 용사로서 ‘사명’을 다해야 해.’


캐서린은 단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검은 오오라에게 달려들어 단검으로 찔렀습니다.


그것은 확실히 사념체와는 달랐습니다.

허공을 가를 뿐이던 사념체 때와 달리,

이번에는 제대로 촉감이 느껴졌습니다.

단검에 무언가가 찔렸습니다.

그리고 끈적하고 뜨거운 액체가 캐서린에게 뿌려졌습니다.

피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습니다.

캐서린은 무엇인지 떠올렸습니다.

스텔리카에게 안겼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서운 경험을 하게 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이제 괜찮을 거예요.”


캐서린의 귓가에 그런 말이 들렸습니다.

그것은 현 세계에서 악마라 불리는 존재의 목소리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 따뜻한 목소리였습니다.

캐서린은 뜻 모를 눈물을 흘리며, 그대로 의식을 잃고 기절했습니다.


정말로 그건 악마의 목소리였을까요?

정말로 그건 현 세계를 뒤엎어버린다는 존재였을까요?



◇◇◇



그 무렵, <루나세븐> 섬 어딘가.

붉은 잔영은 목숨을 건졌습니다.

호수에 빠진 후, 무아지경 상태로 발버둥 친 끝에 어느 동굴 안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크게 다치고 체력마저 소진한 채로,

기절한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요.

그녀는 고동을 느끼고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마치 텔레파시처럼 그녀에게 어떤 말이 전해집니다.

그것은 매우 담담한 어조의 메시지였습니다.


>> 당신은 현 시간부로 <이슈타르>의 새로운 관리자가 되었습니다. <<


붉은 잔영, 아니 클레어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습니다.


“결국 실패 했어.”


분한 마음에 주먹을 바닥에 내리칩니다.


“판단을 잘못했어. 사사로운 감정에 일을 그르쳤어. 그 아이를 살리지 말았어야 했어. 그 아이 때문이야. 그 아이만 없었으면. 너 같은 건 당장 사라져버려!”


이성을 잃은 클레어는 몸의 아픔도 잊은 채 절망했습니다.

자신을 자책하고, 누군가를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몇 시간 전.

클레어가 붉은 잔영으로서 잠입하여,

차기 국왕을 해치우고,

퇴위 국왕마저 생명의 위협을 안겼던 순간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퇴위 국왕이 물었습니다.


“은둔자여, 당신이 원하는 건 저의 죽음입니까?”

“그건 그쪽 대답에 달렸겠지.”

“제 수명은 이제 머지않았습니다. 제 죽음이 목적이라면 당신은 이 이상 모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천수를 누리게 할 수는 없지 않겠어?”


퇴위 국왕은 어떤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깨달았다는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누군지 알 것 같군요. 당신의 분노는 합당합니다. 이해합니다.”

“이제 와서 빌어봐야 소용없어.”


하지만 퇴위 국왕은 목숨을 구걸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붉은 잔영에게 필요한 말을 해주고자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정 조화를 의도한 자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대상이 잘못되었습니다.”

“뭐?”

”분명 제가 이 자리에서 죽는다면 예정은 틀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계획은 고쳐지겠지요. 그리고 그 계획은 더욱 견고해질 것이고, 그걸 넘어서기 위해선 더 큰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아쉽게 되었군요. 하지만 훌륭한 진전이라고 칭찬해드리겠습니다.”


붉은 잔영은 그 말에 흥분했습니다.

처음으로 그녀가 추적하던 음모에 근접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말해 봐. 이 모든 계획을 세운 자는 누구지? 흑막이 누구야! 지금 당장 아는 거 다 불어.”


하지만 퇴위 국왕의 대답은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미안합니다. 그게 누군진 저도 알지 못합니다.”


그 직후 스텔리카와 병사들이 문을 파괴하여 대기실 방안으로 들어왔고,

스텔리카와 싸웠으며,

누군가의 공격을 피해 여기까지 도망쳤습니다.


진실에 다가간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의문만이 더욱 증폭되었을 뿐입니다.


퇴위 국왕의 말대로라면 오히려 후퇴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붉은 잔영... 클레어는 과연 누구와 싸우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퇴위 국왕이 한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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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21화 붉은 잔영 20.11.29 10 0 18쪽
20 20화 개회식 20.11.28 11 0 17쪽
19 19화 요람에 어서오세요 20.11.27 12 0 17쪽
18 18화 꼭두각시 20.11.26 13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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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화 캐서린 20.11.11 23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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