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붙잡혔다]
전략(前略), 결국 여친에게 붙잡혔다.
"······거참 꼼꼼하게도 묶었네."
현재 나는 의자와 융합하고 있었다.
의자 등받이와 나의 허리가 셋트가 되어 밧줄로 꽁꽁 묶이고, 의자 다리와 나의 발이 셋트가 되어 역시 꽁꽁 묶이고, 양팔 역시 등받이 뒤에서 묶여있었다.
내가 의자이며, 의자가 나다.
"기억이 애매한데. 어떻게 된 거지······."
지난 기억을 다시 떠올려본다.
그러니까 분명···나는 마을에서 평범하게 일을 하고 있었고, 그러다가 어떤 높으신 분에게 불려갔고······여자친구와 다시 재회했다.
······틀렸어. 기억이 뒤죽박죽이야. 머리를 얻어맞아서 그런지 정신이 얼얼하고 기억이 혼란스럽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거야. 여기는 또 어디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시험삼아 몸을 움직여보았지만 역시나 제대로 움직이는 곳은 없었다. 제대로 움직이는 건 나의 눈, 코, 입뿐. 미안해 미안해 하지마, 내가 초라해지잖아~♬ (feat.태양)
팔로 밧줄을 풀 수도 없고, 다리로 도망칠 수도 없다. 하는 수 없이 눈, 코, 입을 활용한다.
눈으로 주위를 본다.
코로 냄새를 맡는다.
입으로 헛소리를 한다.
아, 기억났다.
"·····여기, 온 적이 있어."
어둠이 어슴푸레하게 깔려있지만 이곳이 어디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예전에 살던 원룸보다 넓이가 4배는 넓고, 높이도 2배는 높은 방. 대학교 강의실과 맞먹을 정도로 넓은 방이었지만 용도는 아무리 봐도 침실이었다.
방의 중앙에는 아무리봐도 2인용 사이즈인 침대가 있다. 호화로운 레이스 장식이 잔뜩 달려있고, 이불도 푹신푹신해보이고, 천장에는 커튼까지 달려있다. 척 봐도 고급품이라는 걸 잘 알 수 있는 침대.
마찬가지로 비싸보이는 화장대, 작은 테이블, 책장 등의 가구도 있었다. 마치 귀족의 침실에 온 것 같다.
"그래, 맞아. 나는 이곳에서 태어났었지. 그럼 이곳은 내 고향인 셈인가."
하지만 반가움도 정겨움도 없다. 기억나는 건 끔찍한 기억들 뿐.
그도 그럴게 여기는 던전 한 가운데에 있는 저택 안이기 때문이다.
마녀들의 왕이라고 불리는 '위치 퀸'의 저택.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정확하게는 다시 태어났다고 말하는 게 옳을까.
"어라. 오빠, 일어나셨어요?"
울려퍼지는 목소리.
정면을 바라보자 소리없이 열린 문 틈 사이로 얼굴을 빼꼼 드러내는 소녀가 있었다.
그 얼굴은, 내가 알던 것과는 다른 얼굴.
하지만 목소리는,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목소리.
"······채연아."
"아? 아아~. 맞아, 맞아. '전생'에서의 제 이름이었죠. 순간 오빠가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르는 건가 했어요."
전생의 여친은 활짝 웃으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모습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그 미소는 내가 전생에서부터 익히 알던 것이다.
"후후후···. 드디어. 드디어 이 순간이 왔어요. 이렇게 되기까지 200년을 기다렸어요."
"···인내심 한 번 대단하구나."
"인내심? 그런 건 없어요. 이 200년동안 오빠를 향한 마음을 참았던 적은 한 번도 없는걸요? 오직 변치 않는 사랑과 사랑을 이루기 위한 노력만이 있을 뿐이죠. 후후···."
"······."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200년. 나는 그 중 대부분의 시간동안 잠들어있었기에 그 시간의 무게가 별로 와닿지 않지만, 채연이는 그렇지 않겠지.
채연이는 200년의 시간을 온전히 보내면서, 그동안 나를 계속 쫓았다는 이야기다.
나 한 사람만을 향한 그 애정에 가슴을 두근거려야할까.
···이 두근거림이 사랑의 두근거림이 맞긴 할런지.
"······아무튼 오랜만에 보니까 반가워. 반가운데···. 묻고 싶은 게 많구나."
"저도 오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아요."
"그러니···. ······그럼 먼저 하나 물어보자. 왜 나를 묶었니?"
확실치는 않지만 나를 묶은 건 채연이가 맞겠지. 나는 확신에 가까운 추측을 하고 있었다.
내가 정신을 잃었던 것도 채연이 때문. 그리고 이렇게 꽁꽁 묶였는데도 채연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미소만 짓고있다. 나를 묶은 게 다른 사람이었다면, 채연이는 내 모습을 보자마자 밧줄을 풀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채연이는 나를 감금한 사실을 인정했다.
"그야~. 오빠를 묶지 않으면 오빠가 도망치기 때문이잖아요."
"도망 안 쳐···."
"그렇게 말해도, 오빠는 벌써 제 앞에서 두 번이나 도망쳤는걸요. 전생에 한 번. 이번 생에도 한 번."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껴있구만···.
"전생의 일은···사과하겠지만, 이번 생의 일은 어쩔 수 없었다고. 나는 그 때 아무 것도 몰랐으니까."
"알아요. 전 모두 알아요. 오빠의 여자친구니까 오빠에 대해서라면 뭐든 아는 걸요? 오빠에 대해선 모두 이해하고 있으니까 굳이 해명하지 않으셔도 되요~."
"이해력이 빨라서 좋아. ······그럼 도망치지 않을테니 풀어줄래?"
"음. 그렇네요. 오빠도 계속 묶여있으면 답답하시겠죠. 그럼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채연이는 그렇게 말하며 다가왔다.
하지만 그 행동에 반가움을 느낄 수 없었다.
반가움을 느끼기에는, 불길한 물건이 하나.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이 채연이의 손에 들려있었다.
"채연아···. 뭐야, 그건?"
"이거요? 칼인데요?"
여친은 손에 들린 칼을 보여주었다.
식칼이다.
그것도 보통 식칼이 아니다. 푸줏간에서나 쓸 법한 사각형 모양의 그 칼이다.
식칼들 중에서도 고기를 써는 데 가장 적합한 칼.
여친은 그 칼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무척 크고 아름다운 칼이로구나."
"후후. 그렇죠?"
"그 칼로 자르는 거구나."
"네."
"밧줄을?"
"아니요."
"그럼 뭘?"
"오빠의 다리요."
칼을 쓰다듬으면서 말하는 채연이.
그 얼굴은 여전히 활짝 웃고 있다.
"······내 다리를 자른다고?"
"네."
"···미안하지만 나는 건축업자가 아닌데. 다리를 건설한 적은 딱히 없는 걸?"
"브릿지(bridge)가 아니라 오빠의 레그(leg)인 게 당연하잖아요. 애초에 브릿지를 이런 식칼로 자를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못 보던 사이에 조금 바보 같아졌네요, 오빠. 상식 공부를 하시는 게 어떨까요."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 채연아. 사람의 다리를 자르는 너야말로 상식이 모자라다고!"
"후후후···."
화냈지만 채연이는 웃었다. 기쁜 듯이.
"오빠. 이 세계는 우리가 알던 세계가 아니에요. 소설에서나 등장하는 판타지 세계에요. 몬스터들이 돌아다니고 있고, 한국의 치안과 비교하면 형편없는─위험한 세계란 말이에요."
"···전생과 비교하면 그렇긴 하지."
"밖은 위험해요, 오빠. 그러니까 오빠가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다리를 자를 거에요."
"배트맨이냐."
악당을 죽이는 건 좀 그러니까 다시는 나쁜 짓하지 못하도록 식물인간으로 만들어놓자! ···이거랑 뭐가 달라.
"채연아. 사람의 다리를 자르는 건 나쁜 짓이란다. 그러니까 그런 나쁜 짓은 그만두렴, 채연아."
"하지만 어른들은 나쁜 짓을 많이 하잖아요. 그리고 저는 어른이죠. 그럼 나쁜 짓을 마음껏 해도 되지 않을까요?"
"···그럴 리가 있겠니. 채연이가 다리를 잘라내면, 내가 엄청 아프겠지? 채연이는 오빠를 아프게 할 생각이야?"
"그래서 준비했답니다! 짜잔! 마~취~제~."
"······."
"이거만 있으면 아프지 않아요, 오빠. 안심하세요. 오빠는 저에게 몸만 맡기면, 제가 전부 다 알아서 해드릴 테니까요. 후후후···."
"···그거 참 믿음직스럽구나(반어법)."
"후후후···. 오빠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걸요."
"그러니···. 뭐든지 할 수 있다면 그 칼부터 내려놓는 게 어떨까?"
희망을 갖고 물었지만, 채연이는 혀를 내밀며 말했다.
"싫~어~요~."
······나도 다리 잘리는 건 싫은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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