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자기 진화
“씨발.”
박부장은 내 앞에 꿇어앉은 채로 나를 올려다보며 바로 욕설을 내뱉었다.
나는 놈을 보며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급해 그럴 여유는 없었다.
“왕충재 지금 어디 있어? 대체 뭘 하길래 너 같은 놈한테 자기 병력을 컨트롤 하게 하고 혼자 도망친 거야?”
그러자 놈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흐흐. 충재가 누군지 알지? 너 같은 연습생 따리랑은 달라. 우승자 출신이라고. 너 같은 건 상대도 안 돼.”
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너는 왕충재를 어떻게 아는 거야? 게이머들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랐잖아. 장겸이 형처럼 같은 학교도 아니었을 텐데 말이야. 애초에 고향도 다르잖아.”
내가 알기로 왕충재는 고향이 이 근방이다.
박부장과 전혀 접점이 있을 수가 없었다.
“아, 그거? 그건 네놈 덕분이지.”
놈은 의기양양해져서 말했다.
“뭐? 내가 왜?”
“원래는 몰랐는데 네놈이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니까 충재가 북쪽에서 넘어온 사람이 있는지 찾더라고. 네놈이 누군지 알아내려고 말이야. 근데 나만큼 네놈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또 어디 있냐? 내가 바로 손들고 나갔지. 내가 도와줄 수 있다고, 네놈을 잘 안다고 하니까 바로 나를 인정하고 중용하더라고. 크크크.”
“한심하군. 넌 남한테 기생하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게이머들 무시하던 놈이 매번 게이머들 밑으로만 들어가고 앉아있고 말이야. 네가 생각하기에도 꼴이 우습지 않아? 그러고 보니 왕충재도 고등학교 중퇴인데. 거기에 승부조작범이기도 하고. 그건 몰랐나? 그 대단하신 박용태씨께서 하다하다 중졸 범죄자 밑으로 먼저 기어들어가서 앞잡이 노릇을 할 줄은 몰랐어. 그런 놈한테 인정받고 중용되니 아주 뿌듯하시겠어.”
내가 비웃으며 말하자 박부장은 대꾸할 말이 없어 으득 이를 깨물었다.
하지만 내게 지기는 싫어 억지로 코웃음을 치며 말을 돌렸다.
“참! 그거 알아? 충재가 각성자로 벌레를 만들게 된 것도 너 때문이란 걸. 네가 아주 큰 도움이 됐어.”
“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충재도 그게 가능하다고는 생각을 못했어. 그래서 벌레들로만 합성을 해서 새로운 벌레들을 만들었는데 네놈이 네 각성능력으로 다른 각성자들을 부하로 만든 것을 보고 영감이 떠오른 거지. 자기도 각성자들을 자기 부하로 만들 수 있다고 말이야.”
“난 또 뭐라고. 그래서 뭐?”
“그래서 뭐라니? 너 때문이라고. 너 때문에 그 사람들이 죽은 거야.”
“헛소리 하고 있군. 그렇게 말하면 내가 책임감이라도 느낄 거 같아? 내 멘탈을 흔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웃기지도 않군.”
정작 사람들을 끌고 와서 죽인 것은 자기면서.
박부장은 회사에서도 이런 식으로 자기가 잘못 한 일도 말도 안 되는 핑계, 별 시답지 않은 꼬투리를 잡아 나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하지만 그건 회사였고, 사장의 처조카인지 뭔지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게 여기서도 통할 거라 생각했다니.
어이가 없었다.
“괜히 말 돌리지나 말고 왕충재가 어디에 있는 지나 말해. 아무 이유도 없이 너처럼 전술개념도 없는 놈한테 벌레들을 지휘하라고 맡겨놓고 사라졌을 리가 없잖아! 뭐야? 어서 말해!”
“흥. 내가 너 같은 놈한테 굴복할 것 같아? 나 박용태야! 박용태! 너 같은 중졸따리한테는 절대 안 져!”
놈은 왕충재에 대해 묻자 다시 의기양양해져서 큰소리를 쳤다.
이 단순한 놈이 이런 자신만만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분명 왕충재가 확실한 무언가를 준비했고, 그걸 놈이 알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지난번처럼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때는 일부러 놔준 거야. 아직도 모르고 있었어?”
박부장은 그 말에 또 입을 다물었다.
안다고 해도, 모른다고 해도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었으니.
나는 슬슬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더 봐줄 시간이 없어. 어서 말하지 않으면 극단적인 방법까지 쓸 수밖에 없어.”
그 말에 뒤에 있던 잘군과 윤범이 기다렸다는 목을 뚜둑 꺾으며 다가왔다.
“뭐? 뭐? 고문이라도 하게? 그런다고 내가 불 거 같아? 죽어도 니네 같은 놈들한테는 굴복하지 않을 거다!”
“이 새끼는 지가 무슨 독립운동가인줄 알아. 기껏해야 벌레 앞잡이의 앞잡이 주제에.”
“사령관님, 걱정 마십쇼. 이런 놈은 딱 10초면 전생에 있었던 일까지 다 술술 불게 할 수 있습니다.”
잘군과 윤범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오며 위협적으로 몸을 풀었다.
박부장은 하얗게 질려서 날 보며 소리쳤다.
“니.. 니들이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알아? 우리 충재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엇! 적이다! 저기에 벌레가 나타났어요!”
한리나가 무언가를 발견했고
쾅!
공성탱크가 포격으로 놈을 터뜨렸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슈우욱!
슉!
반대편에서 팔뚝만한 길이의 날카로운 가시 두 개가 날아왔다.
“뭐야?”
“공격이다!”
“사령관님! 사령관님을 지켜!”
잘군과 윤범은 서둘러 자신의 몸으로 내 몸을 덮어 가렸다.
하지만
“커.. 헉..”
그 공격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두 개의 가시는 박부장의 목과 가슴을 꿰뚫었다.
“어디에요?”
“저쪽 방향입니다!”
한리나의 과학탐사선이 가시가 날아온 방향으로 날아가 시야를 밝혔다.
가시를 쏜 놈의 정체는 전갈거미인데 진화장을 거치며 땅굴을 팔 수 있게 개조된 것이었다.
두 놈이 동시에 땅굴을 파고 다가와서 한 놈이 먼저 나와 포격에 맞는 사이 나머지 한 놈이 기습을 가한 것이었다.
쾅!
시야가 확보되자 공성탱크가 포격을 가해 놈을 한 방에 터뜨렸다.
전갈거미는 땅속으로 이동할 수 있게 개조하면서 체력은 물론 공격력도 너프가 됐다.
하지만 약화된 공격력도 박부장 같은 일반인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뚫린 가슴과 목의 구멍에서 피가 꿀렁거리며 흘러나왔다.
“왜.. 왜 날.. 난 끝까지.. 버틸 수 있.. 었..”
박부장은 죽어가는 와중에도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말하고는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난 괜찮아요! 지안아!”
나는 잘군과 윤범을 떼어놓고는 황급히 지안이를 불렀다.
박부장은 아군 유닛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 상황에서는 의료병이 치료를 할 수 없었지만 치료능력 각성자인 지안이만 치료할 수 있었다.
하지만
“늦었어.”
지안이는 자신의 능력이 박부장에게 들어가지 않는 것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억세게 좋았던 박부장의 운도 여기까지였다.
지안이의 능력으로도 이미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었다.
“젠장.”
박부장은 용서받을 수 없는 나쁜 짓을 한 놈이고, 나와도 악연이긴 했지만 그래도 몇 년동안 알고 있던 사람이 바로 내 눈앞에서 죽는 것을 보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것도 더 나쁜 놈에게 입막음을 위해 살해된 것이니 더더욱 찝찝할 수밖에.
“죄송해요, 오빠. 그쪽으로도 들어올 거라고 생각을 못 하고 있었어요.”
한리나는 내게 미안해하며 말했다.
“아니요. 나도 생각을 못 했는걸요.”
성동격서.
여기를 치는 척하면서 다른 곳을 치는 것은 게임 중에도 흔하게 펼치는 전술인데 너무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펼쳐져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왕충재는 도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걸까?
놈은 벌레들의 지휘권을 박부장에게 넘겨줬다가 다시 가져갔다.
일부러 병력을 꼴아박게 만들었을 리도 없고, 그걸 그냥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을 리도 없으니 분명 그 동안은 벌레들을 지휘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가 지금 막 다시 지휘할 수 있게 된 것일 것이다.
대체 그럴만한 일이 뭐가 있지?
“설마.”
나는 어떤 생각 하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럴 리가..”
너무 황당해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의심이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근처에 있는 진화장을 찾아 모조리 스캔을 뿌렸다.
그러자
“뭐야, 저건?”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 * *
조금 전.
대구 근방의 진화장.
쩌억!
쩍!
8톤 트럭만한 크기의 거대한 고치가 깨지며 그만한 크기의 벌레가 빠져나왔다.
“크어어억!”
길게 기지개를 펴며 포효하는 놈.
돔 형태의 몸통 위에는 가시가 뾰족하게 돋아나 있었고, 옆에는 크고 굵은 다리가 6쌍이 붙어 있었다.
정면에는 촉수 같은 것이 여러 개 돋아나 있었는데 그 한 가운데에는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것의 정체는 인간의 상체.
벌레 특유의 회백색 껍질이 감싸고 있었지만 분명 눈, 코, 입부터 팔과 손, 손가락까지 다 붙어 있는 사람의 형태였다.
“흐흐흐. 성공했군.”
놈은 만족스러운 듯 두꺼운 껍질로 덮힌 입을 열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벌레가 변했는데 만족하다니.
그것은 스스로가 벌레가 되기로 결정하고 고치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는 것은 딱 한 놈 뿐.
놈은 바로 왕충재였다.
사실 왕충재가 벌레가 되기로 한 것은 이번에 갑자기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 전부터 멸망할 게 분명한 인간 문명에서 벗어나 벌레가 되어야 살아남을 거라 생각하고 준비를 해놓은 상태였다.
그동안 각성자와 벌레들을 합성하며 조합 레시피를 완성시켰고, 자신의 각성능력까지 합쳐져서 분명 성공하리란 것은 확신했다.
하지만 두려운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물론 지금까지 살아온 인간의 몸을 벗어나 다른 존재가 된다는 것은 겁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계속 미루다가 결국 위기가 닥치자 미뤘던 결심을 실행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이제 지구 문명이 끝장 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놈의 결정을 재촉했다.
고치 안에서 온몸이 녹아내리는 고통과 두려움을 버티고 나온 지금.
왕충재는 새로워진 자신의 신체와 존재에 만족했다.
온몸에 힘이 끓어 넘쳤고, 폭력성과 야수성이 정신을 휘감았다.
인간의 틀을 벗어나 한 단계 더 진화한 것이다.
지금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왕충재는 우선 은신처에 있던 벌레들의 시야를 공유하여 그쪽 상황을 확인했다.
하지만 거기에 있던 벌레들은 이미 다 죽어 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쯧. 병신 같은 게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어.”
그런 놈을 믿고 지금까지 일을 맡겼다니.
벌레들의 편에 선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겠다는 놈은 박부장이 유일해서 받아들이긴 했지만 없는 게 차라리 나은 수준이었다.
뭐.
큰 상관은 없다.
어차피 기대하지도 않았으니.
왕충재는 이럴 줄 알고 벌레 저격수를 몰래 숨겨뒀었다.
그것들의 시야로 박부장이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놈은 미련 없이 박부장을 제거했다.
박부장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사실대로 불까봐 오해해서 죽인 것이라고 생각해서 억울해하며 죽어갔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왕충재가 벌레로 변하며 폭력성이 증가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애초에 왕충재는 일이 끝나면 놈을 죽일 생각으로 벌레 저격수들을 놓은 것이었다.
사실 굳이 죽일 필요도 없었다.
왕충재는 어차피 박부장이 뭐라고 하든 지금의 자신을 막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렇지만 살려둘 필요도 없었다.
그동안 놈이 망친 일이 몇 개인데.
사냥도 못하는 사냥개를 살려줄 이유는 없었다.
놈의 가치는 딱 그 정도였고, 왕충재는 가치가 없는 놈에게는 가차 없었다.
“크크크. 이제 슬슬 마무리를 하러 가보실까?”
왕충재는 여섯 쌍의 길고 두꺼운 다리를 뻗어 낯설어진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때
띠링!
머리 위로 뿌려지는 빛.
“허허.. 벌써 여기까지 알아낸 건가? 좋아. 아주 재미있군. 하하하!”
왕충재는 광기로 가득 찬 웃음을 크게 웃으며 긴 다리를 뻗어 성큼성큼 은신처를 향해 달려갔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