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각성
분명 시작은 평범한 하루였다.
조금 잠이 부족했을 뿐.
그냥 평소처럼 출근하는 날이었는데 갑자기 균열은 뭐고, 침공은 또 뭔가.
지금까지 내 인생의 리플을 복기하자면 초반 전략이 개망한 상태에서 그걸 복구하려고 진짜 치열하게 싸우고 빌드를 쌓아왔다.
그렇게 10년 넘게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참고 버텼는데 그 결과가 이렇게 뜬금없이 외계 벌레의 한 끼 식사 엔딩으로 끝나는 건가?
그럴 수는 없다.
그건 안 되지.
사실 여기 골목에 들어올 때 이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했다.
원래 전략을 짤 때는 순조롭게 진행될 때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을 때도 미리 예상해서 플랜 B를 세우는 게 기본이니까.
그러니 플랜 B도 있다.
다만 시간에 쫓기고 메뚜기에 쫓기며 급하게 세운 계획이라 통할지 안 통할지 장담할 수 없어서 그렇지.
사실 뭐 별 거 없다.
지상이 막혔다?
그럼 어떻게 해?
위로 가는 거지.
벽을 타고 올라가기.
메뚜기들이 메뚜기 같이 생겼지만 날개는 없고, 원거리 공격도 못 하는 거 같으니 위쪽으로 올라가면 날 잡을 방법이 없을 거란 계산이었다.
물론 그건 상상속의 시뮬레이션일 뿐이지만.
메뚜기들이 갑자기 숨겨놨던 날개를 펼칠 수도 있고, 갑자기 침 같은 걸 발사해서 날 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게 아니라도 벽을 탈 수 있어 따라 올라올 수도 있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어떻게 벽을 타고 올라가는 거냐다.
일단 생각은 벽에 붙은 구조물을 타고 올라가려고 루트를 대충 봐놓긴 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그건 모르겠지만.
갑자기 그 말이 떠오르네.
모르나요?
모르면 맞아야죠.
메뚜기들은 이번에도 나를 인식하자마자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나는 더 생각할 여유 없이 봐둔 루트를 따라 급하게 몸을 날렸다.
쓰레기통을 밟고 뛰어올라 그 옆의 방범창 쇠창살을 붙잡고 매달리기.
내 팔이, 쇠창살이 버틸 수 있을까?
오! 됐다!
일단 첫 러쉬는 회피했다.
양쪽에서 달려들던 놈들은 내가 위로 올라가자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박치기를 했다.
잠깐의 여유.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된다.
메뚜기에 날개가 있건 없건 뛰는 높이 자체는 사람의 몇 배다.
여기보다 더 올라가야 한다.
나는 붙잡고 있던 방범창을 밟고, 그 위의 창틀을 짚고, 또 그 너머에 있는 전선인지 케이블 선인지를 붙잡고 당겼다.
그 사이 자기들끼리 박치기를 했던 메뚜기들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나를 향해 풀쩍 뛰었다.
“읏!”
아슬아슬했다.
딱-, 따닥- 하는 메뚜기들의 턱 부딪치는 소리가 내 허리 바로 발바닥 아래에서 들려왔으니.
나는 그 소리에 끌려 나도 모르게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는데
“왁! 씨!”
보지 말걸 그랬다.
수십 마리의 메뚜기 떼가 나를 물어뜯으려고 동시에 풀쩍풀쩍 뛰어 입을 벌렸다가 닫는 모습은 공포, 그 잡채였으니까.
그래도 긍정적인 면을 찾자면 메뚜기들이 계속 뛰기만 하는 것이 벽을 타거나 원거리 공격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란 것이다.
휴..
하지만 안심하긴 이르다.
어쩔 수 없이 이쪽 경로를 타긴 했지만 난 원래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손가락이 부들부들하고 피가 안 통하는 것이 정신력으로 어떻게든 버티고는 있는데 이게 오래는 못 갈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힘이 남아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위로, 더 안전한 곳으로..
그 순간
우두둑-.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
그와 동시에
휘청!
“윽!”
내 몸이 케이블 선과 함께 뚝 떨어졌다.
케이블 선을 벽에 고정시켜놓고 있던 낡은 피스가 내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 것이다.
순간 메뚜기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졌고 놈들은 더욱 발광하며 뛰어올랐다.
젠장!
나는 다리와 허리를 접어 놈들에게 물리지 않게 하며 최대한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케이블 선을 잡아당겨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뚝-.
뚜둑 뚝-.
연이어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
나는 계속 당기는데 내 몸은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이건 안 된다.
옮겨가야 한다.
뭐가 있나?
급하게 주변을 둘러봤지만..
없다.
진짜?
어?
어?
이러면 안 되는데?
침착하게 생각하자.
연습생시절부터 침착함과 냉정한 판단력이 내 진짜 장점이었잖아.
아..
아..
아~무 생각도 안 난다.
뭘 해야 하지?
뭘 할 수 있지?
없다.
진짜 없다.
냉정하게 생각하고 침착하게 판단해도 이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개망했..
그 순간
띠링-.
갑자기 울리는 종소리.
그리고 내 눈에 또 시스템 창이 떴다.
그런데 이번엔 파란색.
파란색 반투명 사각 창이다.
아이 씨.
이번엔 또 뭘까?
긍정적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스템 창이 뜰 때마다 계속 안 좋은 상황이 추가됐으니까.
지금 당장 아래에서 날 잡아먹으려고 날뛰고 있는 메뚜기도 어떻게 못 하고 있는데 여기서 또 뭐가 추가되려고?
하긴.
뭐가 더 추가되든 안 되든 여기서 나는 죽겠구나.
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자마자 나도 모르게 내 손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의지가 무너지고, 마음이 꺾였다.
머리로는 더 버티고 더 해보자고 해도 한 번 꺾인 마음이 돌아오진 않았고, 무너진 의지는 정신력으로 억지로 붙여놓고 있던 힘을 끊어버렸다.
손 사이로 케이블 선이 슬금슬금 미끄러져 나갔고 내 몸도 아래로 천천히 떨어져 갔다.
그런데
“응? 잠깐! 뭐라고?”
나는 이번에도 나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이 생겨 케이블 선을 꽉 감아쥐었다.
파란색 시스템 창에 떠오르는 글씨가 다시금 내 정신이 번쩍 들게 한 것이다.
그 내용은 바로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각성자로 선정되었습니다.
각성한 능력을 발휘하여 문명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각성자가 되었다는 것.
각성자라고?
내가?
..
그런데 그게 뭐지?
뭐.
대강은 알 것 같다.
내가 초능력 같은 게 생겼다는 거잖아.
그런데 무슨 능력이 생긴 거지?
뭔가 능력이 생겼으면 뭔가 달라졌다는 느낌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 느낌도 없고 전혀 모르겠다.
그 사이
뚜둑-.
피스가 몇 개 더 떨어져 이제 메뚜기들이 뛰면 엉덩이 바로 밑, 1cm 거리까지 붙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젠 더 시간이 없다.
“각성했다며? 근데 뭐냐고? 뭐든 해보라고!”
희망고문만 당하고 죽는 건가 싶었는데 그 순간 다시 떠오르는 메시지.
[각성능력설정이 완료되었습니다.]
아!
선정만 되고 설정은 안 된 거였구나.
그래서.
이제 뭘 할 수 있는데?
[설정된 능력은 각성자의 특기와 성향, 장기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개화된 것으로..]
쌉소리 집어치우고 빨리!
[김지훈 각성자님의 각성 능력은 <커맨드센터 소환>입니다.]
드디어 본론이군.
그런데 커맨드센터 소환이라고?
내가 아는 그 커맨드센터?
그 스타의 그?
[네, 맞습니다. 지금 커맨드센터를 소환하시겠습니까? 참고로 커맨드센터 소환은 최초 1회만 할 수 있습니다. 이후는 건설로봇을 이용하여..]
“소환해! 당장!”
나는 당장 커맨드센터를 소환해서 뭘 할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들긴 했지만 뭘 할 수 있든 뭐라도 해야 한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자
쿠궁-.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
내 머리 바로 위, 균열보다 더 높은 높이에 거대한 원반 같은 것이 생겨난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내가 소환한 커맨드센터라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휴먼 종족의 건물은 커맨드센터를 비롯하여 배럭, 군수공장 등등 몇 개를 제외하고는 다 띄워서 날릴 수 있으니까.
자, 이제 소환은 했다.
근데 이제 어떡하지?
저걸로 뭘 할 수 있는데?
[김지훈 각성자님께서 커맨드센터를 사용하여 할 수 있는 작업에 대한 리스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와 동시에 파란색 창이 주르륵 열리기 시작했다.
자원채집, 건설로봇 생산, 건물 건설과 병력생산까지.
엄청 많다.
이름만 봐도 대충 뭔지는 알겠다.
이것들이 지금 당장 내게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 역시 알 수 있다.
내가 모르는, 새로운 게 더 있을 수 있지만 한시가 급한데 언제 이 많은 것들을 다 찾아서 내가 모르는 걸 찾고 있냐?
“아니! 이런 거 말고! 지금 여기서 나갈 수 있는 거! 지금 나 살려줄 수 있는 거! 그런 거 없어?”
[분석 중입니다. .. .. .. 분석 결과 김지훈 각성자님을 현 위치에서 커맨드센터로 전송하는 것이 유일한 탈출방법으로 보입니다.]
“전송? 순간이동 말이야? 그게 돼? 그럼 얼른 해줘!”
[전송으로 커맨드센터에 탑승하는 것은 최초 1회만 가능합니다. 신중하게 결정하십시오. 전송으로 탑승..]
“당연하지! 얼른 하라고! 지금 아니면 언제 하는데?”
지금 당장 죽을 판에 신중이고 나발이고.
당장!
라잇 나우!
날 빼내라고!
그 순간
후두두둑-.
마지막 피스까지 완전히 뜯겨 나가며 나는 그대로 메뚜기 떼 사이로 추락했다.
“으아악!”
그와 동시에 뜨는 메시지.
[네, 전송을 시작하겠습니다.]
진작했어야지!
바닥에서 나를 향해 머리를 세우고 있던 메뚜기들은 내가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뛰어올라 톱날 같은 입을 쩍 벌렸다가 콱 여물었다.
내 살점을 뜯고 내 고기를 씹으려고.
하지만 놈들의 턱이 딱- 하고 닫히는 순간 나는 뿅- 하고 사라졌다.
헛입질을 한 놈들.
어리둥절해 하며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
놈들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새로운 먹이를 찾아 흩어졌다.
* * *
“허억... 허억.. 허억..”
나는 대짜로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슬아슬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입고 있던 재킷 등 쪽이 메뚜기 입에 걸려 너덜너덜하게 찢겨 나가있었다.
1초?
아니, 0.5초만 늦었어도 재킷이 아니라 내 척추까지 뜯겨 나갔을 거다.
다행히 전송된다는 메시지와 동시에 눈앞의 풍경이 반전되었다.
바로 커맨드센터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여기는 커맨드센터 맨 위층에 있는 지휘실.
게임을 하면서는 볼 수 없는 내부다.
이곳은 마치 SF영화에 나오는 우주전함 지휘실 같은 모습이었다.
정면 위쪽에 대형스크린이 있고 그 아래에 조종석이 여러 개가 있었다.
대형 스크린은 방금 전 내가 있었던 환승센터와 골목의 장면을 비추고 있었는데 게임플레이 화면을 실사화한 것처럼 보였다.
왼쪽 아래에는 미니맵까지 있고 말이다.
평소에, 아무 일도 없었을 때 여기에 오게 됐다면 놀라고 신기해서 여기저기 구경을 했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마음이 1도 없었다.
힘이 빠져 일어날 힘도 없었고.
“아.. 씁.. 쓰라리네.”
케이블 선을 잡았던 손바닥이 화상을 입고 손등과 손가락에 자잘한 상처들이 생겨 피가 줄줄 흘렀다.
아까까진 몰랐는데 긴장이 풀리니 아파왔다.
젠장.
죽다 살아난 것에 비하면 고작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옛날, 연습생시절 같았으면 이 중에 하나만 생겼어도 난리가 났을 것이다.
게이머에게 손가락은 목숨 같은 것이니 말이다.
그게 습관이 돼서 아직까지도 손과 손가락 관리에 엄청나게 신경을 썼는데..
“내가 손가락이 이렇게 되도록 하다니.. 세상이 망하긴 망한 모양이네.”
우습게도 고작 이런 상처가 이게 현실이란 사실을 더욱 와닿게 만들었다.
그래도 살았다.
살아남았다.
세상이 멸망하고 나는 지옥 문턱 너머 한 발까지 들어간 상황이었는데 겨우 빠져나왔다.
지금 내겐 신기함보다는 살아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물론 아직 밑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나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당장 내가 어떻게 해.. 줄..
“어! 엄마!”
이런! 가족들!!
엄마, 아버지, 동생 지안이까지!
나는 뒤늦게 안양 집에 있을 가족들이 떠올라 벌떡 일어났다.
내가 죽을 판이라 바로 떠올리지 못했는데 지금 가족들도 위험하다.
지금 여기가 이 꼴이 됐는데 우리 동네는 멀쩡할 리가 없다.
서울만 이렇고 안양은 괜찮기를 바라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니까.
서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
아니.
전 세계가 다 이런 상황이라고 보는 게 맞을 거다.
나는 일단 전화를 꺼냈다.
집에 전화를 해서 내가 지금 바로 갈 테니까 집에 문 걸어 잠그고 절대 나오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폰에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균열이 열린지 이제 고작 30분도 안 됐는데 벌써 통신이 먹통이 됐다고?
어쩌면 균열이라는 존재 자체가 통신을 막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직접 가야 한다.
그리고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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