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보호시스템 해제, 균열 개방
“아.. 피곤해.”
나는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온 것 같은 기분으로 털레털레 버스환승센터로 향했다.
우리 집은 안양이고, 회사는 파주 구석이라 버스를 몇 번은 갈아타야 했다.
젠장.
안 그래도 피곤한데 쓰레기 같은 게임에 밤까지 세는 바람에 피로가 올 멀티 자원 급으로 쌓인다.
이럴 때마다 자취가 땡기긴 한데 아무리 그쪽이 집값이 서울보다 싸다곤 해도 알량하고도 비루한 월급과 비교하면 호러, 그 자체라 차올랐던 욕구가 슬그머니 고개를 내린다.
주변에는 나처럼 얼굴에 피로가 가득한, 불쌍한 K-직장인들이 길 한가득 좀비처럼 걷고 있었다.
아이 씨.
그 메시지를 무시했어야 하는데..
하지만 하나뿐인 내 소중이를 떨어져라, 떨어져라 저주를 거는데 그냥 무시하는 것은 남자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소중이와 자존심을 지켰지만 피로는 지키지 못했다.
뭐.
사실 자고 일어났다고 해서 안 피곤한 건 아니었을 테니 그거라도 지킨 게 다행인가?
평범한, 평소보다 조금은 더 피곤할 뿐인 아침 출근길이었다.
그러나 그런 평화가 깨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에이 참! 또 뭐야? 진짜 피곤하긴 한가 보네.”
나는 시야에 갑자기 뭔가 반투명한 빨간 네모가 보이자 눈을 비볐다.
하지만 눈을 감고 비벼 봐도 빨간 네모가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응? 진짜 뭐야?”
나는 짜증스레 눈을 계속 비볐는데 주변에 보이는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뭔가 이상하다는 듯 눈을 비비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진짜 뭐지?
“이거 뭐야? 무서워!”
“왜 안 없어져?”
“그쪽도 그래요?”
웅성웅성.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어? 어? 안에 점! 점이 생겼어요.”
“나도요! 나도욧!”
“저도!”
사람들의 외침처럼 빨간 네모 안에는 점이 길게 줄을 지어 두두둑 찍혀 나왔다.
이건 또 뭘까?
조금씩 커지는 점.
그러다
“어? 글자? 글자다!”
글씨로 바뀌었다.
[안녕하십니까, 지구인 여러분?]
그것도 한글.
“안녕하십니까?”
“지구인 여러분?”
다른 사람들에게도 같은 문장이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지구인 여러분이라니?
한국인도 아니고 지구인.
그렇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있는 사람 모두에게 다 같은 메시지가 뜬다는 건가?
나는 일단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침착하게 메시지를 읽어나갔다.
[은하계 문명관리 위원회에서 알려드립니다.]
은하계 문명관리 위원회는 또 뭘까?
아예 처음 들어보는 거다.
[저희가 이렇게 지구인 여러분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현재 지구의 문명 지수가 100cp를 넘어가게 되어 최빈문명에서 개발도상문명으로 진입하게 되었음을 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동안 지구 문명을 발전시켜온 여러분의 노력에 헌사를 보냅니다.]
최빈문명? 개발도상문명?
아무래도 최빈국과 개발도상국에서 나온 말인 모양이다.
뭐.
최빈에서 개발도상으로 올라간 거면 좋은 건가?
그런데 느낌이 뭔가 불길하다.
[참고로 cp란 문명발전지수로 그 행성의 지적생명체의 인구수와 경제, 과학기술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수치화한 점수입니다. 자세한 수식과 계산 내역은 별도로 첨부된 파일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뭐.
이건 별로 안 중요한 거 같고.
[지구가 개발도상문명으로 인정받게 됨에 따라 현시간부로 다른 개발도상문명에 대한 침공이 가능하고,]
침공이 가능하다고?
뭔가 느낌이 싸한데?
[기존에 있던 신규문명 보호시스템이 해제됨을 알려드립니다.]
보호시스템이 해제됐다고?
대체 보호시스템은 또 뭘까?
보호시스템에 대한 내용도 따로 파일에 있어 나는 그것을 읽어봤다.
신규문명 보호시스템은 이름 그대로였다.
마치 영토전쟁을 하는 종류의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게임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초보자들이 공격을 받지 않게 해주는 보호막처럼 아직 문명이 무르익지 않은 행성을 보호하기 위한 시스템이었다.
지금까지 지구가 침공 받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 보호시스템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보호시스템이 사라졌다.
그리고 지구가 다른 개발도상문명에 대한 침공이 가능하다는 말은 반대로 다른 문명 역시 지구를 침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싸하다.
촉이 좋지 않다.
그 순간 붉은색 시스템 창 또 하나가 띠링- 하고 새롭게 떠올랐다.
[타 은하계 행성, 엘버그 문명이 지구 문명에 대한 침공을 결정하였습니다. 잠시 후 1차 균열이 개방됩니다.]
역시나 침공이다.
그런데 균열이라니.
균열은 또 뭘까?
또 첨부된 파일을 열어 내용을 확인하려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게 됐다.
“어어어?”
“왜? 뭔데?”
“하늘! 하늘에 구멍이 생겼잖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사람들의 말처럼 하늘에 구멍이 생겼다.
까만색의 원.
한두 개가 아니었다.
마치 검은색 바둑돌이 하늘에 놓여있는 듯 오와 열을 맞춰 반듯하게 생겨났다.
저 구멍들이 바로 균열인 모양이었다.
저 균열이 무슨 의미일까?
그것도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후두두두둑-.
바로 머리 위에 있는 균열을 통해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무언가.
마치 하수구에서 오물을 쏟아내듯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꺄악! 저게 뭐야?”
“벌레? 벌레다!”
“징그러워!!”
하지만 그것들은 벌레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컸다.
머리 위를 뒤덮는 회갈색의 그림자들.
하나하나가 대충 대형견 정도의 크기는 되는 것 같았다.
본능적인 두려움과 혐오가 느껴졌다.
“도망쳐!”
사람들은 바로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어디로 뛰어도 머리 위엔 균열이 다 열려 있었고, 거기에선 어김없이 벌레들이 떨어지고 있었으니 피할 곳을 찾기가 힘들다.
“꺄악! 살려줘!”
“으악! 문다! 물어!”
기어이 땅으로 착지한 그것들은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었고 사방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나는 일단 사람들을 따라 도망치는 동시에 게이머 생활을 하며 단련된 동체시각으로 벌레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다른 행성, 문명에서 온 외계의 벌레들.
그것의 정체는
“메뚜기?”
덩치가 대형견 정도 되는 메뚜기였다.
실제 메뚜기와는 달리 날개는 없었지만 몸은 가벼운 지 빨랐고, 또 높이 뛰었다.
톱날모양으로 지그재그 갈라진 턱은 단단하고 날카로워 메뚜기들이 사람의 몸통에 입을 박아 넣자 살점을 뜯겨져 나왔다.
그것을 우적우적 씹어서 삼키는 놈들.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었다.
평화로운 출근길은 금세 학살의 현장이 되었다.
깔끔하고 반듯했던 보도블록 위로 사람의 살점이 떨어져 사방으로 흩어지고 터져 나온 피는 도로를 적셨다.
차에 타고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
쾅-.
메뚜기들은 혼잡스러워진 도로 위, 멈춰버린 차에 사람들이 타고 있는 것을 발견하자 승용차, 버스, 화물차 할 것 없이 유리창에 머리를 들이받았고 이내 구멍을 뚫고 그 안으로 길쭉한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 뒤의 상황은 굳이 말할 필요 없으리라.
유리창에 뚫린 구멍 너머로 끔찍한 비명이 새어나오고 차문 아래 틈으로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무섭다.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지?
진짜 레알 현실인가?
말도 안 된다.
출근하다가 진짜 이게 무슨 일이냐고!
하지만 불평한다고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침착하게.
냉정하게.
하지만 빠르게 판단해야 한다.
숨을 곳이나 도망칠 곳이 필요하다.
아무래도 메뚜기들이 사람보다 훨씬 더 빠르고 수도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이렇게 무작정 달린다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이 나 뿐은 아닌 모양이다.
상가 문으로 몰려든 사람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윽!”
“빨리빨리!”
“빨리 들어가요! 제발요!”
출근시간, 사람이 많이 몰린 버스환승센터.
그 사람들이 좁은 입구에 다 같이 모여 들어가려고 하니 그게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먹기 좋게 한꺼번에 몰린 인파에 메뚜기들이 덮쳤다.
“으아아악!!”
저긴 아니다.
그때 마침 내 눈에 들어오는 건물 사이 좁은 골목.
두 사람이 들어가면 어깨가 닿을 것 같을 정도로 좁았고 출구도 하나뿐이라 양쪽에서 메뚜기가 다가오면 도망치지도 못하고 그대로 잡힐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서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고 메뚜기들도 관심이 없었다.
그럼 저기다.
나는 다 함께 달리는 사람들의 흐름에서 몰래 살짝 벗어나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허억! 허억!”
나는 일단 멈추고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리가 자동으로 기역자로 꺾이는 것을 억지로 버텼다.
힘들다고 힘들어 하고 있다가는 그대로 죽는 거다.
살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다행히 이쪽으로는 사람도, 메뚜기도 쫓아오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이제 어떡하지?
나는 여기서 쓸 만한 게 있나 찾았다.
“쓰레기봉투. 쓰레기봉투. 음식물 쓰레기.. 이런 쓰봉.. 이런 거 밖에 없냐? 아! 저기!”
나는 골목 끝쪽, 옆의 상가에서 쓰고 난 뒤 말리려고 뒤집어놓은 마대자루를 발견했다.
고작 가느다란 나무막대기 하나로 뭘 할 수 있나 싶지만 그래도 뭐라도 쥐고 휘두를 수 있으면 도움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꺄아악!”
골목 반대쪽 대로에 도망치는 사람들과 그 뒤를 메뚜기들이 쫓는 것이 보였다.
나는 황급히 쓰레기봉투들 속으로 뛰어들어 몸을 숨겼다.
냄새가 지독하긴 하지만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지나가던 메뚜기들 중 몇몇은 슬쩍 이쪽을 본 것 같긴 한데 먹잇감이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그냥 지나갔다.
휴우..
아슬아슬했다.
그때 때마침 뒷문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별로 문 같지 않게 생긴 이유도 있었지만 정신이 더 없어서 바로 못 알아봤다.
안으로 들어가자.
실내에는 균열이 안 생겼으니 안전할 것이다.
나는 그런 생각으로 딸깍-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꺄아악!”
“살려줘!”
안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
사방에서 날뛰고 있는 메뚜기들.
여기저기서 솟구치는 핏줄기.
그리고 그 너머로 유리문이 깨져서 몰려들어오는 메뚜기들이 보였다.
젠장!
하필이면 열어도 이미 뚫린 건물의 문을 연 것이다.
나는 그대로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메뚜기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젠장.
저 넓은 원판 같은 게 눈이 맞겠지?
나는 놈을 자극하지 않게 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뒷걸음을 쳤다.
하지만 놈은 조심, 경계, 신중.
이런 단어는 사전에 없는 모양이다.
나를 인식하자마자 바로 달려드는 놈.
“에이 썅!”
나는 황급히 뒤로 몸을 날리고 문을 닫았다.
하지만 콰직-.
워낙 빠른 놈이라 막 닫히려는 문 사이로 놈이 몸을 비집고 넣었다.
몸 중간에 문이 끼인 상태에서도 턱을 딱딱 거리며 나를 향해 입맛을 다시는 놈.
힘으로 문을 밀며 밖으로 빠져나오려고 했다.
이대로 놈이 나오게 허락해서는 안 된다.
“이이잇!”
나는 힘을 주어 문을 밀었다.
머리를 때려 뒤로 집어넣으려고 했는데 머리가 엄청 단단한 게 내 손만 아팠다.
턱도 날카로운 게 물릴까 무섭고.
그런데 반면에 의외로 문에 끼인 몸의 껍질이 생각보다 약해 보였다.
힘도 빠른 속도에 비해선 약해보였고.
그렇다면
쾅-.
쾅-.
나는 있는 힘껏 어깨로 박아 문을 때렸다.
그러자 조금씩 조금씩 메뚜기의 껍질 안으로 철문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바닥에 검푸른 체액이 후두둑 떨어진다 싶더니 그렇게 열 몇 번 넘게 더 처박자 뚝- 하고 몸통이 두 동강 났다.
“케엑!!”
몸이 잘린 놈은 남은 절반으로 버둥댔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이내 움직임을 멈추는 놈.
이놈들도 죽기는 하는 구나.
생각보다 몸도 약하고.
하지만 생각보다 그렇다는 거지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후~.”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을 꼭 닫고 뒤로 돌았는데
“젠장!”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너무 소란스럽게 싸운 건가?
골목 끝에서 대로를 지나던 메뚜기들이 몸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반대쪽으로 나가..
이런.,
반대쪽에서도 또 한 무리가 보고 있다.
이런..
앞뒤가 다 막혀서 쌈 싸 먹히게 생겼다.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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