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패배 중
[쭈삼조아 : ㅋㅋㅋ 횽 몰래멀티 딱 걸렸쥬? 나한테 털리고 있쥬? 아무고토 못하쥬?]
모니터 너머의 모르는 상대에게서 조롱 섞인 채팅이 날아온다.
뭐.
조롱이라기엔 그냥 심리전을 거는 것 같기도 하지만.
지금은 게임 중.
‘스타드래프트’
줄여서 스타.
1998년 처음 나온 이후 우리나라에 PC방 붐을 일으킬 정도로 유행한 게임이다.
지금은 전통놀이라고 불릴 정도로 오랜 기간 많은 사람들이 즐겼고, 고인물을 넘어 석유로까지 숙성된 고수들이 많아 공방에서 ‘1대1 초보만’이라고 적힌 방에 들어가도 서로 프로 뺨치는 실력을 뽐내기 일쑤다.
하지만 나와는 다른 이야기다.
나는 프로 뺨치는 실력의 아마추어가 아니라 진짜 프로출신이었으니까.
뭐.
정확히 말하자면 프로는 아니고 프로지망 연습생.
팀에 소속돼 합숙훈련까지 했다.
데뷔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그건 내 실력에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나는 리그 마지막 우승자의 전속 스파링 파트너였다.
그 형이 준결승과 결승무대에서 연속으로 상대 휴먼(human)족과 붙었는데 내가 대휴먼전 전담 파트너였으니 내 지분이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다.
내가 데뷔를 못한 것은 실력이 아니라 데뷔하기 전에 리그 자체가 없어져버렸기 때문이다.
유행한지 제법 오래된 시점, 후속작까지 나오면서 게임의 인기가 식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아무래도 승부조작범들의 존재였을 거다.
리그를 대표하던 스타급 선수들마저 조작에 연루되었으니 리그의 인기가 짜게 식고 스폰서가 빠지면서 내가 꿈을 채 펼쳐 보이기도 전에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다.
내가 나이라도 됐으면 데뷔라도 해보고 판이 끝났을 텐데 처음 연습생으로 팀에 합류한 게 중2때.
물론 그때는 지금과 달리 프로 데뷔에 나이제한은 없었지만 감독님의 판단에 너무 어린 나이에 섣불리 데뷔한다고 방송무대에 덤벼들었다가 실패하면 멘탈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1년 정도만 더 다듬어서 나가자고 했고 그 말을 따랐다.
결국 결말은 리그 종료 데뷔 못함 엔딩이지만.
뭐.
데뷔를 했어도 그쪽 방향으로 더 미래는 없었으려나?
[쭈삼조아 : 아 횽 여기도 몰멀 깔았어? 징하다 징해 커맨드가 몇 개야?]
아!
이런!
딴 생각하다가 반응이 늦었다.
아무튼.
상대가 제법 괜찮은 실력이긴 하지만 사실 내 상대는 아니다.
사실 원래라면 이렇게까지 끌릴 게임도 아니었다.
다만 내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았다.
변명이 아니라 진짜.
막 회사 회식을 끝내고 왔거든.
리그가 끝나면서 내 꿈도 꺾인 지 10년을 넘긴 시점.
어떻게든 먹고는 살아야 하니 회사에 입사해 일을 했고, 직장인과 회식은 땔래야 땔 수 없으니까.
그런데..
회식을 생각하니 또 열받네.
내가 다니는 회사.
말 그래도 좋소 좋소 좋소기업이다.
주력분야가 뭔지 사장도 모르는 그런..
돈이 된다면 이것저것 다 하는 그런 작은 기업.
이런 회사는 회식비용도 갹출이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회식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돈은 똑같이 내는데 나만 술을 못 마신다.
내가 술을 못 마시는 게 아니고 박부장 놈이 집에 갈 때 그놈 차를 대리운전 해줘야 해서다.
술 마시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술을 안 마시면 돈이라도 덜 내게 해주던가.
그럴 때는 공평해야 된다고 비용을 월급에서 똑같이 깐다.
그것만 나갈까?
대리운전비는 기대도 안 한다.
그래도 집까지 오는 택시비까지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건 너무 하지 않나?
안 그래도 쥐꼬리만 한 월급인데 회식 한 번에 얼마를 손해 보는 건지.
[쭈삼조아 : 횽 모해? 집중 안 해?]
이런..
아무튼.
박부장 놈을 생각하니 또 열 받는다.
박부장은 사장의 처조카인데 좋소가 다 그렇듯 직급 올라가는 건 말 그대로 엿장수 마음대로다.
월급은 따박따박 다 받아가는 주제에 할 줄 아는 일은 없고, 나이도 나랑 몇 살 차이 안 난다.
일은 내가 다 하는데 내 월급은 그 반의반도 안 된다.
그러면서 내 연습생 경력을 가지고 무시하는 게 옛날 아침광장이란 공중파 방송에서 최고 인기 프로게이머를 불러놓고 조리돌림한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앉아서 딸깍딸깍 마우스질만 하는 게 무슨 스포츠냐.
어린 시절에 그런 거나 했으니 일머리도 없고, 사교성도 없고, 뭐 다 없다고.
자기도 출근하면 하는 일이라는 게 숙취 때문에 뻗어 있다가 휴대폰 게임이나 하는 게 다면서.
일도 안 하는 놈이 뭔 평가질인가 싶다.
[쭈삼조아 : 횽? 뭐하나구~ 포기했냐구~]
..
얘는 왜 이렇게 말이 많아?
말투 킹받네.
아무튼.
성질 같아서는 때려치워도 몇 번을 더 때려치웠어야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중졸에 경력이라고는 연습생이었던 것 말고는 없으니 그만둬봤자 결국 이런 좋소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뭐.
검정고시를 쳐서 고졸이 된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다.
아니.
오히려 군대에 가야해서 더 꼬였겠지.
여기서 꾹 참고 경력을 쌓는 수밖에 없다.
사실 리그가 망하고 다른 게임의 연습생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후속작인 스타2부터 최근 대세인 레전더리 리그까지.
하지만 게임이라고 다 똑같은 게임이 아니고 어떤 게임을 프로급으로 잘 한다고 해서 다른 게임도 그만큼의 재능을 뽐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때의 나는 나이로 따지면 고1.
그 짧은 인생에서 몇 년을 바친 꿈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대로 박살났으니 마음이 꺾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니 제대로 될 리가 있나.
게임도 결국 멘탈 스포츠인데 말이다.
요즘 스타가 다시 붐이 일어 게임방송으로 돈을 버는 사람도 많이 늘긴 했다.
하지만 그건 실력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데뷔라도 했으면 따라올 팬이 있었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고.
그게 아니면 말솜씨가 뛰어나거나 겁나 잘생기거나 뭐든 게임 외적으로 팬들을 당겨올 게 있어야 하는데 그쪽은 또 내가 장점이 없었으니.
그쪽 빌드는 내가 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월급으로만 따지면 이런 좋소는 편의점 선에서 컷이다.
하지만 그쪽으로 테크트리를 타면 초반 전진건물 전략처럼 뒤가 없다.
몸이라도 튼튼했으면 노가다 기술이라도 배웠겠지만 어린 시절에 밤낮이 뒤바뀐 불규칙적인 생활을 오래 했으니 그쪽 테크로 탈 수도 없었다.
결국 이런 좋소가 나에겐 최적화된 인생 빌드였으니 여기서 깎고 또 깎는 수밖에.
[쭈삼조아 : ㅋㅋㅋ 횽 손만 빠르지 개 못해]
에이 참.
져버렸네.
겨우 이런 녀석도 못 이기다니.
딱 봐도 나보다 여섯 수는 아래 급으로 보였는데 말이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나정도 되면 상대의 심시티, 일꾼 움직임만 봐도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감이 온다.
분명 나보다 한참 못한데 은근슬쩍 오래 끌리다가 은근슬쩍 져버렸다.
스트레스 풀려고 한 게임인데 오히려 더 쌓인다.
퇴근하고 피곤해도 매일 한두 판씩은 하는 것이 그래도 나도 잘하는 게 있었다는 걸, 내 인생을 걸만큼 몰두했던 것이 있었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였는데..
뭐.
어쩔 수 없지.
벌써 새벽 1시가 훌쩍 넘은 시간.
내일 또 출근하려면 이제는 자야 한다.
사실 아까 전부터 눈꺼풀은 계속 내려가고 있었다.
피로와 분노 중에 분노가 조금 더 커서 버텼을 뿐.
난 이미 맛 간지 오래다.
“자야지~. 자야지~. 이제 그만 자야지~.”
혼잣말하다가 노래를 부르는 지경까지 되면 아재가 된 거라는데 뭐.
이제 나이 29.
곧 30이니 아재 맞지, 뭐.
나는 컴퓨터를 막 끄려는데
띠링-.
갑자기 날아오는 귓말.
누구지?
지인 중에 이 아이디를 아는 사람은 없을 텐데?
그렇다면..
역시나 방금 전에 같이 게임을 했던 상대, 쭈삼조아다.
그런데..
[아! 횽! 고추 없어?]
이게 뭐지?
원래 게임이 끝나고 상대방에게 ‘게임 생식기 같이 하네.’라고 하는 것은 ‘당신의 실력은 너무나 뛰어나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를 돌려서 말하는 것으로 나도 이건 자주 들어본 것이다.
거기에 부모님의 안부까지 묻는다면 극찬 중에 극찬.
그런데 이긴 상대가 갑자기 내 생식기의 안부를 묻는 것은 처음 있는 일로 신박한 조합이긴 하다.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것인지 궁금하긴 하지만 지금까지 늘 그랬듯 나는 나를 찬양하는 녀석에게 신비주의 전략을 고수하기로 했다.
다시 종료버튼을 누르려고 하는데
[아! 횽! 고추 없어?]
[아! 횽! 고추 없어?]
[아! 횽! 고추 없어?]
..
..
[아! 횽! 고추 없어?]
아이 씨, 뭐야?
안 그래도 짜증나는데 별 희한한 방법으로 어그로를 다 끈다.
[qwer_marin_23 : ?]
나는 물음표 하나로 녀석에게 대꾸했다.
그냥 무시하기엔 전부터 짜증이 쌓인 상태고, 크게 반응 해주기엔 자존심 상하니까.
그러자
[쭈삼조아 : 아! 횽! 모야? 간줄 알았잖아!! 그냥 갈 건 아니지? 설욕전 해야지!]
참나!
뭔가 했다.
하긴 녀석도 게이머라면 내 실력이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텐데 그런 상대를 이겼으니 우쭐한 것이다.
그래.
지금을 마음껏 즐겨라.
[qwer_marin_23 : 아니]
[잘 거야]
[내일 출근해야 돼]
나는 그렇게 답장을 보내고 다시 컴퓨터를 끄려고 했다.
원래 상대에게 반말은 안 하는데 나도 살짝 부아가 치밀어서인지 반말로 대꾸했다.
그런데 이 녀석 포기를 안 한다.
[쭈삼조아 : 안 돼! 횽! 그러다 고추 떨어져!]
[기지배임? 남자가 겜 개 못하네 소리 듣고 잠이 와?]
[자고 일어나면 팬티 안부터 먼저 확인해봐 똑 떨어져 있을 걸? 어또케? 그거 그렇게 떨어지면 병원에 들고 가도 안 붙여줄 건데]
[와! 이렇게까지 했는데 그냥 잔다고 하면 진짜 횽은 고추 없어진다]
이 자식 점점 선을 넘는데?
아직까지 제한적인 용도로밖에 사용하지 못한 기관인데 그걸 또 떨어질 거라고 저주를 하다니.
참을 수가 없다.
[콜!]
복수전이다.
하지만 나도 살짝 흥분해서 잊고 있었다.
게임은 멘탈 스포츠고, 성질이 실력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
나는 녀석이 숨도 못 쉬게 만들어 줄 생각으로 조금은 성급하게 녀석의 앞마당을 조이고 들어갔다.
더 늦기 전에 빨리 끝내고 자고 싶기도 했고.
병력이 살짝 부족한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어차피 컨트롤은 내가 몇 수는 위니까 충분히 통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내 컨디션이 정상은 아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바이오리듬은 점점 더 가파르게 떨어져 내렸다.
종족 상성이 원래 내가 밀리는 쪽이기도 했고, 종족 특성이 병력이 쌓이면 쌓일수록 강해지는 것이라 이렇게 소수병력으로 진출해서 조이기를 할 생각이었다면 조금 더 섬세하게 플레이를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꼼꼼하게도 내 조이기를 대비하여 미리 약간의 병력을 따로 빼두고 있었다.
동시에 양방향에서 상대 병력이 치고 들어오니 진출병력이 그대로 다 쌈 싸 먹히며 궤멸됐다.
그 다음은..
[쭈삼조아 : 횽! 팬티 안에 봐봐! 아직 고추 잘 붙어 있어?]
이 자식이 또 그걸..
좋아.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해야겠다.
[쭈삼조아 : 아! 횽! 이 맵에서 무슨 센터전략이야?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젠장.
또 졌다.
이건 일찍 걸리면 바로 막히는 전술이라 어쩔 수 없다.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정상적으로 빡세게 운영해주지.
나는 진짜 이를 악물고 눈꺼풀이 감기는 것을 버티며 확장을 늘리고 병력을 쌓아 차근차근 전진했다.
그리고 한 방 병력으로 빡!
이것이 내 진짜 실력이다.
그런데
[qwer_marin_23 : 아 쫌! 그냥 포기해! 끝까지 뭐하는 짓이야? 나 지금 올 멀티야]
[쭈삼조아 : 횽 한 번만 봐주면 안 돼?]
[qwer_marin_23 : 되겠냐? 안 돼! 안 바꿔줘! 돌아가!]
[쭈삼조아 : 그래 그러면 같이 밤새!!]
쭈삼조아는 끝까지 밥집만 짓고 도망 다니면서 안 나가고 버텼다.
젠장.
피곤하네.
어느새 게임 시작하고 본진을 밀기까지 시간보다 본진을 밀고 나서 도망 다니는 것을 쫓아가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수정체.
일명 밥집은 크기도 작아서 몰래 짓고 숨기기도 좋았다.
하지만 그래 봤자다.
[쭈삼조아 : 아! 횽! 봐조 봐조 봐보 봐조]
[qwer_marin_23 : 자! 이제 누구 고추가 없지?]
[승리하셨습니다.]
마지막 수정체가 파괴되며 뜨는 메시지.
이 메시지 하나를 보기 위해 이 시간까지 버텼다.
..
..
에이 씨.
지금은 벌써 새벽 5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잠자기는 틀렸다.
젠장.
원래 이럴 계획이 아니었는데..
현타가 진하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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