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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坤之亭(건곤지정)

소년 검귀는 엘프 노예를 구매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환등
작품등록일 :
2023.10.24 10:30
최근연재일 :
2023.11.07 19:20
연재수 :
1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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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글자수 :
63,898

작성
23.10.27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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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3화

DUMMY

3화


낙타를 탄 마적 떼가 흉흉한 분위기를 내뿜으며 소년과 엘프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전쟁이 마구잡이로 벌어지는 시대에 마적 무리가 날뛰는 건 흔한 일이지만, 그 수가 100명에 달하니 엘프는 겁에 질렸다.


삶에 밀려 도적이 되는 건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는 것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다른 의미였다.

지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은 타인을 향한 공감과 동정심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과 같았다.

그것을 저버린다는 것은 짐승의 영역으로 떨어진다는 것.

엘프는 그 의미를 알았다.

자신을 포함한 엘프 동족이 그런 짐승의 영역에 떨어진 자들에게 유린당했으니까.


트라우마에서 오는 거부감과 본능적 두려움에 몸서리칠 그때, 소년이 엘프의 어깨를 붙잡았다.


"걱정하지 마라."


엘프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소년의 눈은 침착했다.

두려움이 없는 지옥을 익히 견뎌온 눈.

그 서글픈 눈동자에서 엘프는 위안을 얻었다.


"나는 강하다."

"..."

"이런 건, 수도 없이 거쳐온 길이야."


엘프는 되묻고 싶었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이냐고.


소년은 엘프는 등진 채 검을 움켜쥐었다.

마치 흥분에 겨워하는 몸과 같이 검이 떨렸다.

소년은 검을 가로로 들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나를 적을 베는 검으로 벼르시고···. 피와 강철로서 담금질하소서. 내 생명은 죽음을 부르기 위한 공양이니. 나 마모되어 잘려 나가기 전까지 멈추지 않으리라."


검신에 검붉은 기운이 휘감기며 마적 무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지독한 기운이 소년의 주위를 덮었다.

엘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소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두려웠던 것과 함께 소년이 뱉은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옛 주문···? 저걸 인간이 읊는다고? 어떻게?'


있을 수 없는 일.

소년의 분위기와 말과 행동 전부 의문투성이였지만, 소년이 옛 주문을 읊는다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엘프 중 소수만이 옛 주문을 기억했다.

인간종들이 엘프나 드워프 등으로 분열되기 이전의 상고시대에 내려오던 주문을 어떻게 인간이 기억할 수 있을까?


엘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것은 잘못되었다.

옛 주문이란 차라리 잊히는 게 나은 것이었다.


상고시대엔 말이 신비를 간직하였다.

그렇기에 소수의 샤먼은 말을 이용하여, 천둥을 부리고, 땅을 흔들리게 만들며, 죽은 이를 살려내었다.


물론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말은 아니었다.

크고 강한 말에는 큰 대가가 따르는 법이었으니까.

천둥을 노예로 부리고 희롱한 자는 벼락에 맞아 죽었다.

땅을 뒤집은 자는 가뭄으로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그 중의 가장 끔찍한 옛 주문은 존재와 생명을 담보한 주문이었다.


존재는 가장 근원적인 힘이고, 생명은 순환의 원천.

그것을 대가로 지불하는 힘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하고 깊었다.

그럴 가치가 있는 힘인가에 대해서는 엘프는 회의적이었지만.


엘프가 생각을 이어 나가는 동안 마적 떼는 소년의 앞까지 다가왔다.

소년은 검을 양손으로 고쳐 쥐고 한 걸음씩 앞으로 다가갔다.


"꼬마는 죽이고, 엘프를 데려가라!"

"위대한 신이시여!"


수십 개의 화살이 소년을 향해 쏘아졌다.


"흠."


소년은 몸을 둥글게 회전하면서 검을 몸에 가까이 붙였다.

소년의 검은 수십 발의 화살을 가볍게 부러트렸다.

낙타를 탄 마적은 소년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당장이라도 부딪쳐서 소년이 짓밟히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소년은 검을 쥔 팔을 부드럽게 뻗었다.

낙타와 함께 마적의 목이 잘려 나갔다.


소년은 그 뒤의 마적을 노리며 뛰쳐나갔다.

모래가 사방으로 방사되고 허공에 퍼졌다.

모래 알갱이가 바닥에 떨어지기 전, 소년의 검은 또다시 마적의 목을 베었다.

소년은 피가 묻는 것을 불쾌해하지 않았다.

기뻐하지도, 노여워하지도 않고, 마치 추수꾼이 수확하는 것처럼 피로와 노곤함만이 표정에 비쳤다.


"이히에에."

"위대하신 신이 우릴 돌봐주신다!"


소년은 잘린 시체의 머리를 붙잡아 가장 화려한 옷을 입은 마적에게 던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

가장 화려한 옷을 입은 마적은 반격할 새도 없이 잘린 머리를 정통으로 맞았다.


"이런 빌어 먹···."


마적에겐 말할 시간이 없었다.

소년은 앞을 향해 뛰어갔고, 그의 검은 사방팔방 마적들의 사이를 누볐다.

춤을 추는 듯한 소년의 가벼운 몸동작에는 검술의 묘리가 응축되어 있었다.


소년은 자신을 향하는 칼날을 검신으로 가볍게 흩트리며 그대로 마적의 심장을 찔렀다.

몸째로 베어내고 다음 마적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행동엔 어떤 손실도 낭비도 없이 정확히 수행되었다.

극에 통달한 이에게는 단 하나의 정답만이 있을 뿐이라고 하는데 소년의 움직임이 그러했다.


엘프는 백 마디 질문보다 이 순간 소년에 대해서 더욱 이해할 수 있었다.


'재능있는 사람이 전쟁터를 전전하면서 목숨을 건 전투를 수천 번 이어가며 배운 검술···. 검귀⋯.'


존재와 생명을 담보하는 옛 주문은 그래도 가능한 일이었다.

잊히기 위해 묻어두었을 뿐, 자신도 그런 식의 옛 주문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저 검술은 그런 주문보다 끔찍했다.

삶 동안 무엇을 대가로 지불해야만 저런 검술을 터득한 것인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괴로웠겠지.'


엘프는 소년의 삶을 상상하고 연민을 표했다.


소년은 가장 화려한 옷을 입은 마적의 목전에 도달했다.


"흡."


마적은 반사적으로 곡도를 휘둘렀다.

전쟁터에서 마적으로 굴러먹던 것이 하루 이틀은 아니었던 것인지 예리한 공격이었다.

소년은 곡도에 검을 맞대었다.

뱀이 먹이를 감싸듯 부드럽게 검이 꺾이며 마적의 목을 노렸다.

피가 소년의 눈에 튀었지만, 소년은 눈을 감지 않았다.


"끄···."


공기가 새어 나오는 얕은 소리가 모든 마적의 귓가로 퍼졌다.

소년이 마적의 목을 베어내는 건 순식간이었다.

소년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뒤 말했다.


"다음."


겁에 질린 마적들은 마구잡이로 저주를 내뱉었다.


"악마다! 악마!"

"위···위대한 신이 저···저주를 내리리다! 파멸하라!"

"괴물 새끼! 지옥에나 떨어져!"


'저주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닌데.'


엘프는 저주를 내리기 위해선 강한 증오와 원한을 담보로 정확히 내뱉어야 함을 생각했다.

저건 그저 공포에 질린 아우성에 지나지 않았다.


"흠···."


소년은 검을 꼬나쥔 다음 마적을 향해 걸어갔다.

느릿느릿 움직였지만, 공포에 사로잡힌 마적들을 몰아내기엔 충분했다.


"엄마아!"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살려만···. 살려만 주세요!"


마적들은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리며 도망갔다.

그 꼴 꽤 우스꽝스러워서 엘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마적들에 의해 당한 수모를 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지 상상해 보면 통쾌한 장면이긴 했으니까.


"갔군."


소년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검붉은 기운이 잦아들었다.

검은 만족했다는 듯 진동하는 것을 멈추고 소년의 칼집으로 들어갔다.


엘프는 복잡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어째서 옛 주문을 알고 있는지, 소년이 무엇을 하며 산 것인지 알고 싶었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이 엘프의 심장을 조여왔다.

연민, 동정심, 안타까움.

그의 검의 궤적에는 소년이 살아온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어린 소년이 담을 만한 검의 궤적이 아니었으니까.


소년은 엘프를 향해 다가왔다.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감정한 어투였다.


"시간이 지체됐군."

"시간이 뭐요?"

"내 집까지 가지 위해선 한참 더 걸어야 한다. 이런 사소한 일로 시간을 낭비하다니···."

"사소하다고요?"


바닥에 죽은 시체가 약 20구 정도 되었고, 그중 대다수가 목이 잘려 죽어있었다.

이 끔찍한 참살의 현장을 사소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엘프는 자신의 관념이 이상해진 것인지 고민했다.

25년 동안 노예로 갇혀있는 동안 인간 세계가 바뀌기라도 한 것일까?

전쟁이 계속되다 보니 단명종들이 죄다 미쳐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질적인 것은 이 소년이었다.


"도대체 그 옛 주문은 어디서 배운 거예요? 그리고 도대체 어떤···. 아니···. 질문을 하지 말라고 했죠? 안 할래요. 알고 싶지 않아요."


소년은 피 칠갑을 한 채로 웃었다.

어린 소년이 짓는 그런 순수한 미소를 하는 게 엘프의 속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넌 이상한 노예야. 혼자 말하고 혼자 답하고. 원래 엘프는 이렇게 시끄러운가?"

"진짜 이상한 건···. 으아. 말하지 않을래요. 당신에 대해 모욕하게 될 것 같아요."

"당신?"

"주인님."


엘프는 한숨을 내쉬며 소년에게 다가갔다.

자신보다 키가 작은 어린 소년, 분명 자신보다 어릴 소년.

만난 지 이제 하루 좀 지났지만, 이 소년은 단단히 미친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아니면 이런 사람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내가 미친 거겠지,'


엘프는 소년의 얼굴에 묻은 피를 자기 손으로 닦아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소년은 자신을 구해주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사람이었다.

고맙지 않다고 하면 엘프의 도리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우선 씻어야 할 것 같아요."

"피는 마른다. 어서 출발해야 한다."


엘프는 빽빽 소리 질렀다.


"안 돼요!"


소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엘프를 바라봤다.


"안 그래도 피는 더러운데, 그걸 마를 때까지 기다리면 더 더러워지겠죠. 그러다가 병나요. 그리고 엘프의 감각이 얼마나 예민한지 알아요? 수백 미터 앞 꽃향기도 맡을 수 있는 게 엘프 후각이라고요. 주인님 몸에 나는 피 냄새를 계속 맡으면 저 기절할 거예요. 기절 못 해도 제가 어떻게든 기절할 거예요."

"그건 안된다. 이런 걸로 내가 병난 적은 없지만, 네가 기절하면 안 돼. 네가 기억할 사람이···."

"그러면 씻어야죠! 근데 사막에서 어떻게 씻지? 물은? 물은 충분한가요?"


엘프는 머리를 양손으로 싸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소년은 그런 엘프의 행동이 재밌는 듯 가만히 지켜보았다.


"씻을 만한 장소라···."


소년은 잠시 턱을 괴며 고민하고는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가면 오아시스가 하나 나올 거다. 지하수가 뿜어져 나오는 장소라 깨끗한 물이 나오지."

"그러면 그쪽으로 가요. 저는 못 참겠어요."

"넌 참 이상한 엘프 군. 내가 듣기로 엘프는 씻지 않아도 몸에서 향기가 나고···."

"도대체 누가 그딴 말을! 아! 그 바드! 아악!"


엘프는 자신의 얌전하고 침착한 평소의 모습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 오아시스로 가요. 그때까지 어떻게든 기절하지 않고 참아볼 테니까."

"짐을 정리해야겠군. 금방 정리할 테니, 넌 가만히 있도록."


엘프는 소년에게 힘들 테니 자신이 하겠다고 말했지만, 소년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네 역할은 그게 아니다."


그렇게 무감정한 어투로 툭 내뱉을 뿐이었다.


- - - -


소년이 말한 오아시스는 꽤 먼 거리에 있었다.

소년은 사막의 모래를 사뿐사뿐 건네며 가볍게 걸어갔고, 엘프는 이를 악물고 소년의 뒤를 쫓아갔다.


'엘프의 자존심이 있지.'


소년에게 좀만 느리게 가자고는 엘프는 죽어도 말하기 싫었다.

엘프는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냐는 소년의 말(바드가 멋대로 지껄인 거짓 정보) 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겨우겨우 엘프는 소년을 쫓아갔고, 소년도 엘프가 요구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속도대로 사막을 가로질렀다.


정수리 위까지 올라갔던 태양을 오아시스로 가는 길 도중, 사구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고 푸르스름한 달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엘프는 추위 따위 느끼지 않았다.

소년을 따라가는 동안 온몸에 열기가 돌았으니까.

그렇게 달이 정수리 위까지 올라갔을 무렵 엘프는 소년이 말한 오아시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엘프는 더 빨리 걸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듣기론···."

"제발 닥쳐주세요. 부탁입니다. 제발!"

"그래. 그러지."


엘프는 숨을 헐떡이며 오아시스의 앞으로 기어갔다.

거의 뛰다시피 움직이는 소년의 속도에 맞추다 보니 온몸에 쑤시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


'물이 깨끗하긴 하네.'


소년은 엘프의 상태가 안 좋다는 걸 이해한 것인지, 오아시스의 근처에 텐트를 깔기 시작했다.


엘프는 오아시스의 안쪽에 발을 담갔다.

시린 달빛을 머금은 오아시스의 기운이 엘프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기분 좋은 서늘함에 엘프는 얕은 한숨을 내뱉으며 몸을 떨었다.


엘프는 뒤를 돌아보았다.

소년은 여전히 텐트를 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아마 텐트를 치는 데 시간이 걸릴 거야.'


엘프는 하나둘 옷을 벗었다.

도자기와 같은 은은한 달빛이 엘프의 어깨선을 타고 반사되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수하였다.

파문이 길고 느리게 오아시스의 끝자락을 향해 퍼져나갔다.


'탈출해야 할까. 아니면···.'


엘프는 자기 손목을 달빛에 비추었다.

엘프의 투명한 피부의 안쪽으로 황금빛의 가느다란 선이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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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 작성자
    Lv.26 ka****
    작성일
    23.11.04 21:16
    No. 1

    상고 시대의 옛 주문을 기억하고 있는 엘프. 그래서 엘프에게 뭔가 변화가 일어나고 결국 소년과 엘프가 평범한 관계로 지내지는 못할 것 같군요. 물론 소년의 기억과 엘프의 변화..... 그 두 개의 축이 이 작품의 기둥 역할을 하겠죠.
    소년과 엘프가 사막을 건너는 이야기.....
    재밌게 읽고 갑니다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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