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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줄 알았지?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최고길동
작품등록일 :
2023.06.10 19:32
최근연재일 :
2024.05.22 00:53
연재수 :
20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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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61
추천수 :
499
글자수 :
865,661

작성
23.10.06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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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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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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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정진 (6)

DUMMY

92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난 하지운이 휘장을 걷고 침상에서 걸어 나왔다.

양팔을 쫙 뻗어 기지개를 켜고는, 팔다리를 풀어 주며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였다.

잠시 후 침구 세트를 수납장에 집어넣은 후, 마력을 끌어올려 물의 원소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고는 본격적인 육신의 세척에 들어갔다.

옷을 그대로 입은 상태로 세척을 진행했는데, 사실 입고 있는 옷이 래쉬 가드 형태의 수영복 한 벌뿐이었다.


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 숲 한가운데서, 수줍음은 개나 줘 버린 하지운이 옷을 입고 샤워를 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옷을 따로 세탁하기 귀찮아서, 몸뚱어리랑 같이 씻어 버리고 있는 것이다.

옷 자체에 자동 세척 기능이 있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 손으로 한번은 헹궈야 할 것 같아서 이러고 있는 것이다.


평상시에도 아침마다 이 난리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더 박박 닦고 있다.

지난밤 꿈속에 승아가 다녀갔기 때문이다.

평상시에도 매일 밤 꿈속에 등장하지만, 그건 그냥 하지운의 무의식이 찍어 낸 짝퉁일 뿐이다.


짝퉁이 등장한 날과 진퉁이 다녀간 날의 옷 속 상태가 같을 수가 없다.

극도로 건강한 하지운은 잠옷을 아예 몸에 딱 붙는 수영복으로 교체했다.

생각 같아서는 성인용 팬티 기저귀를 입고 싶었지만, 왠지 승아가 몰래 내려다보고 있을 것 같아 생각을 접었다.

승아의 고질병을 생각했을 때, 반드시 내려다보고선, 배를 잡고 바닥을 구르게 될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건강함의 개념을 아득히 뛰어넘은, 초고성능의 육체를 사용 중인, 남성이 감내해 내야 할 세금 같은 고충이었다.


물 마법으로 한참을 씻어 낸 후, 바람 마법을 일으켜 전신의 물기를 털어 냈다.

그러고는 불 마법을 약하게 시전해 남은 물기를 말린 후, 정화 마법으로 마무리했다.


한 시간에 가까운 꼼꼼한 세척을 통해 상쾌한 상태에 돌입한 하지운이 식사용 탁자를 꺼내 아침 식사를 차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거위구이와 부드러운 밀빵에 꿀물을 곁들여서, 제법 격조 있는 아침 식사를 즐기는 하지운이었다.


정보 길드에서, 이틀 동안 영혼을 갈아 넣어, 준비해 올린 예물들 중 가장 정성이 들어간 것이 바로 이 음식들이었다.


예물로 받고 싶은 것이 있냐는 질문에, 하지운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백 일 치 식량과 튼튼한 간이 침상이었다.

남은 예물들은 차후에 받기로 합의를 본 후, 이틀하고 반나절 동안, 두 개 주의 길드 인력 대부분이 달라붙어 침상과 식사를 준비했다.


음식을 만드는 족족 수납장에 집어넣는 하지운을 보며, 표정 관리에 자신이 없던 길드 소속원들이 고개를 처박고 요리에만 전력을 다했다.


판타지 소설에서 정보 길드와 쌍벽을 이루는 필수템이 아공간이다.

대륙 공용어도 간간이 등장하지만, 아공간에 비할 수는 없다.


아공간의 대표적인 매력이라면 바로 보존 능력이라 할 수 있는데, 하지운이 사용 중인 수납장도 보존 능력에 있어서는 완벽 그 자체다.

승아가 말하길, 시간의 흐름을 완전히 끊어 놓은, 특수한 공간에 입구만 연결시켜 놓은 것이라고 했다.

문과 나온 하지운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어쨌든 이 수납장 덕에 이 모든 호사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는 오십 톤 무게까지 저장할 수 있게 되어, 닥치는 대로 쓸어 담고 다녀도 문제없다.


오지에서 호화스럽기 짝이 없는 아침 시간을 즐기고 있던 하지운이 갑자기 키득거리며 중이병 환자처럼 웃기 시작했다.

심지어 팔짱을 낀 상태에서 한 손만 들어 올려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러고서 처웃어 대는 것이 보기 역할 정도였다.


그런 하지운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몸뚱어리의 절반이 썩어 문드러진, 다람쥐 한 마리가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람쥐의 목에는 검은 천이 묶여 있었다.


허준도 못 고칠 중이병 증상들을 뿜어내며, 하지운은 우아한 몸짓으로 남은 음식을 마저 흡입했다.


평상시에도 마찬가지지만, 오늘은 뭔가 아침 댓바람부터 더 부산하고 호들갑스러웠다.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며칠 전부터 오매불망 기다려 오던 반가운 손님들이 드디어 찾아오셨다.

오늘쯤 오시겠거니 해서 아침부터 목욕재계했지만, 사실 안 오시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없던 건 아니었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밥상머리에서 처웃고 자빠졌던 것이다.

까치 대신 죽은 다람쥐 새끼가 물어온 소식이긴 하지만, 기꺼운 마음이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느긋하게 식사를 마치고, 양치질까지 꼼꼼하게 한 하지운은 소화도 시킬 겸 산책을 나섰다.

미세 먼지 따윈 일체 섞이지 않은 신선한 공기와 각종 짐승들이 제공하는 ASMR을 즐기며, 한 삼십 분 정도 삼림욕에 푹 빠져 있던 하지운이 갑자기 눈깔을 희번덕거렸다.


또다시 중이병 환자 특유의 표정과 몸짓을 구사하며, 잔상만 남기고 거대한 몸뚱어리를 허공에 날렸다.


“이, 이백이면 아무리 놈이라도 당해 내지 못하겠지?”

“다, 당연하지! 놈이 무슨 마왕이야? 별명이 마왕인 거지, 진짜 마족은 아니잖아!”

“야, 이 병신들아! 소리 좀 낮춰! 놈에게 기습하러 가는 중이라고 친절하게 알려 줄 셈이야?”

“그, 그런데 숲속에서 놈을 상대하는 게 잘하는 짓일까? 숲 밖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는 게 옳지 않을까? 놈은 숲속의 마왕이라고!”

“하아... 놈이 언제 어디로 나올 줄 알고? 이런 멍청한 놈아! 어디에 진을 칠 생각인데?”

“그러게 말이다.”


열아홉의 전사들이 기겁을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이백 명의 전사들이 스무 명씩 열 개 조를 이루어 숲으로 진입했다.

몰이사냥을 하듯 포위망을 좁혀 가면서, 하지운을 정신없이 쫓기도록 만들어, 결국엔 제풀에 지쳐서 죽게 만들겠다는 작전이었다.

작금의 하지운이 어떤 경지에 이르렀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만 나올 수 있는 아이디어였다.


‘봐라, 이 멍청한 염탐꾼들아. 험프리는 아니라니까. 이게 정보 길드를 수하에 둔 놈이 할 짓이냐. 어쨌든 개좋다, 씨발.’


뒤를 돌아본 전사들의 눈앞에, 지난밤 꿈속에서 본 광경보다 몇 배는 더 끔찍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한 놈도 빠짐없이 악몽에 시달렸던지라, 지금 보는 장면이 어쩌면 친숙할 법도 하였다.

그런데도 열아홉이나 되는 당당한 전사들이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하고, 그저 덜덜 떨기만 하였다.


신장이 삼 미터 삼십을 넘는 흑발의 거구가, 요사스럽기 짝이 없는 비소를 질질 흘리며, 왼팔만 반쯤 성의 없게 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 거대한 요괴 놈의 왼손 검지가 향한 곳에는 한 명의 용맹한 전사가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팔다리를 힘없이 축 늘어트린 용사가 공포에 매몰된 표정을 한 채 눈물, 콧물, 침을 쉴 새 없이 배출하고 있었다.

용사님의 가랑이는 이미 흥건하게 젖어 있었고, 심지어 사타구니 부위의 천이 점점 부풀면서 시커멓게 변해 가고 있었다.


“날 잡아 죽이겠다고, 용감하게 자원한 너희들의 결기에 감탄했다. 꼬라지를 보아하니 험프리 놈의 친위대도 아닌 모양인데, 나를 죽이고 명성을 떨쳐 보겠다고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겠지? 너희들의 용맹함에, 이 외로운 역도의 심장이 쪼그라드는 심경이다. 너무도 두려워서 똥오줌을 지릴 것 같았는데, 네놈들이 똥오줌마저 대신 싸 주는구나. 용맹하면서도 친절한 용사님들, 만나서 반갑소. 이 몸은 로저 드레이시라 하오.”


열아홉의 탁월한 전사들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별명만 마왕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종족도 인간이 아니라, 마족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검술이 뛰어나고 용력이 대단하여, 왕국 제일의 전사라고 불렸던 로저 드레이시다.

그것만으로도 뭇 용사들이 두려워하며, 감히 맞설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그래도 그때는 인간의 범주에서 두려움을 논했던 것이다.

이 열아홉의 전사들이 난데없이 이런 숭악한 꼴을 보게 될 줄 알았다면, 절대로 같잖은 만용 따위는 부리지 않았을 것이 확실하다.


겨우 두려움을 떨쳐 낸 용사들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로, 로저 공이 맞으시오? 이, 이렇게 생기지 않으셨잖소? 도대체 귀공은 누구시오?”

“마, 맞아! 난 대관식 날 로저 공을 만나 뵈었다고! 이렇게 생기지 않으셨어! 당신은 로저 공이 아니시오!”

“그, 그렇소! 로저 공이 아니신 분이 어찌 폐하의 토벌대를 공격하신단 말이오? 이러지 마시오! 귀공 같은 고귀하신 분이 역도와 한 무리로 몰릴까 두렵소! 우린 아무 것도 못 본 것으로 하겠으니, 어서 가시던 길 마저 가시오!”


점점 전사들의 목소리에 힘이 빠지고 울음이 섞여 들었다.

상황이 어지간해야, 용기를 내든지 지랄을 하든지 할 것이다.

지금은 그저 현실을 외면하고, 되지도 않는 헛소리에 소중한 목숨들을 거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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