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최고길동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줄 알았지?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최고길동
작품등록일 :
2023.06.10 19:32
최근연재일 :
2024.06.26 23:47
연재수 :
221 회
조회수 :
22,979
추천수 :
529
글자수 :
942,693

작성
24.02.20 12:02
조회
24
추천
1
글자
9쪽

청소하는 날 (13)

DUMMY

157화


콘체스터 성에서의 약소한 혼례가 치러지기 열흘 전, 즉 일월의 마지막 날에, 하지운은 버클랜드주의 롬니라는 곳을 당일치기로 다녀온 적이 있다.

버클랜드주는 브리갠트 왕국 남동단에 위치한 지역으로, 그 주의 주도인 롬니는 콘체스터에서 직선거리로 오백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은 손꼽히는 대도시이다.


신체 능력이 영장류의 굴레를 아득히 벗어나 버린 하지운은, 출발한 지 세 시간도 채 안 돼, 목적지에 무탈하게 도착해 버리고 말았다.

타인의 시선을 피해서 야간에 안전 운행을 했음에도, 도착 예정 시간보다 한참 이른 시간에 당도해 버린 것이었다.

그때까지도 사위가 어둑어둑한 것을 보아 하니, 새벽 다섯 시도 채 안 되었을 것 같아 보였다.


지나치게 서둘렀던 자신을 책망하며, 하지운은 제집 안방 드나들듯 성벽 위로 뛰어올랐다.

이 시간에 당초 계획했던 대로, 시원하게 문짝을 걷어차면서, 진입할 정도로 하지운이 예의범절에 무지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싸가지가 없는 것이지, 상식이 없는 것은 아니었던 한 개념 있는 폭력배가 정숙한 발걸음으로 아성에 숨어들어 갔다.


근래에 스트레스가 많았던 롬니 성의 성주는 그날도 어김없이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평상시에도 살벌한 내용으로 점철됐던 꿈이 그날따라, 화사한 총천연색으로, 한층 더 현실감 있게 다가와 성주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끄아아악!”


몸서리를 치며 이불을 박차고 상체를 일으킨 노인이, 자신의 목 부위를 미친 듯이 더듬다가, 겨우 진정을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어났어? 키가 크려고 그러는가 봐. 원래 성장기 때 이상한 꿈 많이 꾸잖아. 높은 데서 떨어지는 꿈 같은 거 말이야.”

“웨, 웬 놈이야? 감히! 여기가 어디... 어억! 네놈은...”

“노인네들이 아침잠이 없어서 새벽같이 일어난다더니 꼭 그렇지도 않나 봐. 아주 잠꾸러기야, 우리 새 나라의 늙은이는. 아주 무럭무럭 자라겠어. 그런데 어쩌지... 안타깝다... 성장기의 늙은이를 내 손으로 죽여야 하다니...”

“로, 로저 드레이시...”

“안녕, 늙은 왕자야. 반쪽짜리라도, 아비가 왕이었으니 왕자라고 불러 줄게. 좋지? 이 꿈 많은 왕자야.”

“자, 잘 왔다! 꼭 만나 보고 싶었다, 로저 드레이시! 네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난 결코 너에게 해를 입힌 적도 없고 너에게 맞설 생각도 없다! 우린 적이 아니다!”

“알아. 그래서 나도 참 힘들어. 내 목적 때문에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 물론 내 마음이 아파서가 아니라, 저승에서 날 안 좋게 볼까 봐 불안해서 힘든 것이지만...”

“뭐, 뭐라!”

“처음에는 참 쉬웠어. 그냥 놀러 온 기분이랄까. 별 생각 없이 대충대충 죽였거든. 내 손에 죽은 놈들 중에 제일 편하게 죽은 놈들이 초반에 죽은 놈들이야. 탤머스주에서 내 손에 뒈졌던 근위대 놈들 같은 종자들 말이야. 그런데... 나처럼 부활한 놈들을 심문하다가, ‘어, 이거 뭔가 잘못 생각한 거 같은데.’라는 우려가 생기기 시작하더라니까. 거기다가 알고 봤더니 그분이 주신 목록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죄인들이 지은 잘못까지 상세하게 다 뜨더라고.”

“무, 무슨 말을 하는...”

“완전 개깜놀했지! 난 여기가 일종의... 훈련소 같은 거라고만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그냥 훈련소가 아닌 거 같아! 어쩌면 사법 연수원? 뭐 어쨌든! 널 죽이기는 하겠지만, 그냥 막 죽이지는 않을 거야. 경건한 마음으로 예의 있게 죽일 거야. 넌 로저의 원수가 아니니까.”

“미친놈이... 도대체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건지... 어찌 되었든 날 기어코 죽이겠다는 말이 아니냐! 건방진 놈! 감히 내 본거지에서 날 죽이겠다고? 그게 네놈 뜻대로 쉽게 될 성싶으냐? 어림도 없다!”


벌떡 일어선 노인이 벽으로 달려가 장식대 위에 올려져 있던 가보를 들어올렸다.

보석이 박힌 이 장검은 본래 왕궁 지하에 보관돼 있던 것인데, 제프리 왕이 몰래 들고나와선 총애하는 혼외 자식에게 안겨 주었던 물건이다.


왕실의 보검을 바라보는 하지운의 눈빛이 그토록 따사로울 수가 없었다.

따뜻한 봄바람이라도 불러일으킬 듯한 자애로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물욕이 없는, 하지운은 공연히 입맛만 쩍쩍 다셔 댔다.


“조심해서 들어라, 이 노인네야. 그러다 칼날에 흠집 생길라.”

“내 칼이다, 이 미친놈아!”

“누가 몰라? 잠시 후에 내가 뺏어 갈 거니까 하는 말이지. 뭐 약간 미안하기는 하니까... 네 칼과 작별 인사하는데 일 분... 아니, 십 분을 주마! 그사이에 혀로 핥든 똥구멍에 쑤셔 넣든 네 맘대로 해라. 물로 씻은 후 정화하면 되니까, 네놈이 해 보고 싶던 거 다 해라! 내가 이렇게 자비롭다!”


미친놈의 헛소리를 들으며 어지럼증을 느끼던 노인네가 방문 쪽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밖에 누구 없느냐? 침입자다! 당장 전사들을 불러 와라!”

“......”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프흡...”

“너, 너 설마...”

“야, 이 노인네야. 네가 처자고 있는 동안, 내가 네 자는 얼굴을 보면서 헤실헤실 웃고만 있었겠냐?”


미친 살인귀의 솔직한 고백에 기겁을 한 노인이 침실 문을 박차고 돌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평소 같았으면, 아침을 준비하느라 부산스러운 아랫것들 때문에, 시끌벅적하곤 했던 홀이 그날따라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아성 안에 있던 그 많은 사람들이 모조리 다 사라져 버린 것인지, 텅 비어 버린 건물 안에서는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검 한 자루만 손에 쥔 속옷 차림의 노인이, 그제야 조금 실감이 난 듯, 눈물을 글썽이며 비명을 질러 댔다.

그러다 빼꼼히 열린 아성의 문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처절한 기합 소리에, 화들짝 놀란 노인이 다급하게 문을 열어젖히고 안마당으로 몸을 던졌다.


멋들어지게 날아오르던 노인은, 착지하면서 발을 헛디뎠는지, 흙바닥에 그대로 얼굴을 처박아 버리고 말았다.

노인네 나름의 기백 있는 모습을 보여 주다 말고 김빠지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아직 일흔여섯 번째 생일이 지나지 않아 칠십오 세에 머물러 있는 이 노인은, 소 피를 먹고 검술 수련도 제대로 받은, 왕국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엘리트 검객이다.

아무리 나이를 먹었다고 해도, 고작 칠팔 미터 높이에서, 뛰어내렸다고 바닥을 뒹굴고 있을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문을 박차고 바람을 가르던, 노인은 허공에 뜬 채로 보면 안 될 꼴을 봐 버린 것이었다.

평온했던 아성 내부와는 달리 내성 안마당에는 이미 지옥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바닥을 구르다 겨우 몸을 일으킨 노인의 시야에 들어온 건 팔다리가 반대 방향으로 접힌 채 기절해 있는 백여 명의 전사들이었다.

팔짱을 끼고 구경 중이던 두 복제 인간 중 하나가, 몸을 살짝 돌리며, 넋이 나가 버린 노인에게 간단한 상황 설명을 해 주었다.


“직계를 제외한 애새끼들과 신체 능력이 허접한 것들은 암수 구분 없이 모두 살려 보냈어. 물론 우리가 살려 보냈다고, 그것들이 꼭 무사하리라는 법은 없겠지만. 생각해 봐. 정보 길드 애들이 가만히 있겠냐? 당연히 보복한다고 죄다 잡아 죽이겠지. 뭐 어찌 되었건 우리는 살려 줬다.”


복제 인간 십칠 호의 설명이 끝날 때쯤, 어느새 뒤따라 나온 하지운이 넋이 덜 돌아온 노인에게 질문을 건넸다.


“어이, 모리스 영감. 그런데 저 기특한 놈은 대체 누구야? 영감네 졸개야? 대단하네! 어떻게 저런 놈을 키워 냈어? 영감이 애들 키우는 재주가 있었구나!”

“본체야, 저 새끼 시가지 성곽 쪽에 배치돼 있었던 놈이야. 이 영감탱이가 직접 키운 놈은 아닌 거 같아. 제가 아끼는 놈이면 지근거리에 뒀겠지. 복장 봐서는 성문 책임자도 아닌 거 같은데, 저 정도 실력자를 거기다 박아 뒀겠어?”

“그래? 야, 모리스 피츠로이. 너 저 새끼 이름은 아냐? 어... 이 늙은이 봐라! 정말 모르는 눈치네!”

“헐... 대박! 본체야, 너 저 새끼 주워다 써라. 지금까지 본 놈 중에 유스터스 빼고는 제일 괜찮잖아. 유스터스 같은 놈이 네 졸개를 할 리는 없고, 저놈이 딱이다. 어차피 이 늙은이의 총애를 받던 놈도 아니잖아.”

“흐음...”


하지운과 분신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는 눈매가 날카로운 청년 하나가 철퇴 두 자루를 휘두르며 창을 든 좀비 두 마리와 한창 혈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양손에 철퇴라니... 무기부터 존나 맘에 드네.”


작가의말


 새벽 두 시가 넘어서 겨우 마무리 하고 올리려니...

 서버 점검 중이더군요.ㅠㅠ

 잠은 잠대로 설치고 이제야 겨우 올립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ㅠㅠ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죽은 줄 알았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63 웬도버의 봄 (1) 24.02.29 26 1 10쪽
162 청소하는 날 (17) 24.02.27 24 1 10쪽
161 청소하는 날 (16) 24.02.25 25 1 9쪽
160 청소하는 날 (15) 24.02.24 26 2 10쪽
159 청소하는 날 (14) 24.02.22 33 1 10쪽
» 청소하는 날 (13) 24.02.20 25 1 9쪽
157 청소하는 날 (12) 24.02.18 26 1 10쪽
156 청소하는 날 (11) 24.02.16 27 1 9쪽
155 청소하는 날 (10) 24.02.13 29 1 10쪽
154 청소하는 날 (9) 24.02.12 31 1 9쪽
153 청소하는 날 (8) 24.02.09 31 1 9쪽
152 청소하는 날 (7) 24.02.07 30 1 9쪽
151 청소하는 날 (6) 24.02.05 27 1 10쪽
150 청소하는 날 (5) 24.02.04 28 1 10쪽
149 청소하는 날 (4) 24.02.02 28 1 10쪽
148 청소하는 날 (3) 24.01.30 27 1 11쪽
147 청소하는 날 (2) 24.01.28 26 1 9쪽
146 청소하는 날 (1) 24.01.26 29 1 9쪽
145 겨울 여행 (12) 24.01.24 26 1 10쪽
144 겨울 여행 (11) 24.01.22 28 1 10쪽
143 겨울 여행 (10) 24.01.20 25 1 9쪽
142 겨울 여행 (9) 24.01.19 25 1 9쪽
141 겨울 여행 (8) 24.01.17 28 1 10쪽
140 겨울 여행 (7) 24.01.15 26 1 10쪽
139 겨울 여행 (6) 24.01.12 31 1 10쪽
138 겨울 여행 (5) 24.01.11 30 1 9쪽
137 겨울 여행 (4) 24.01.09 31 1 9쪽
136 겨울 여행 (3) 24.01.07 32 1 9쪽
135 겨울 여행 (2) 24.01.04 31 1 9쪽
134 겨울 여행 (1) 24.01.02 34 1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